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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17) ‘백두혈통’ 신성한 군주 만들기…김일성, 그 이전에도 있었다

송화강 2020-04-15 (수) 21:40 5년전 11696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17) ‘백두혈통’ 신성한 군주 만들기…김일성, 그 이전에도 있었다

 

백두혈통과 백두산 신화

‘백두산06’(150×220㎝). 하늘에서 바라본 백두산은 신비한 등줄기와 골짜기가 웅건하게 드러나고 있다. 북한이 1987년 출판한 <백두산전설집>은 백두산을 “조종의 산일 뿐 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정기가 이는 성산”이라고 썼다. 안승일 작가 제공

‘백두산06’(150×220㎝). 하늘에서 바라본 백두산은 신비한 등줄기와 골짜기가 웅건하게 드러나고 있다. 북한이 1987년 출판한 <백두산전설집>은 백두산을 “조종의 산일 뿐 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정기가 이는 성산”이라고 썼다. 안승일 작가 제공

 

1996년 1월 어느 날, ‘백두산 밀영’을 보았다. 당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던 베이징외국어대학의 학과장이 나눠준 새해 북한 달력에 그 사진이 있었다. 정일봉 아래 통나무집, 북한의 2대 수령 김정일이 ‘탄생’했다는 성지(聖地), ‘성지순례’를 온 학생들이 예를 표하는 사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물음표가 일어났다. 수령은 왜 백두산에서 태어나야 했을까?

후에 옌볜대학교 도서관에서 북한에서 출판된 책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백두산전설집>(김우경 정리, 문예출판사, 1987)을 통해 북한 사회에서 백두산이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백두산전설집>을 열면 첫머리에 ‘백두산의 장군별’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까지 넘보던 일본 천황이 ‘장군별’을 보고 정신줄을 놓는다는 이야기다.

사건은 후지산에 별이 떴는데 사실은 백두산에 뜬 것이라는 궁내부대신의 보고로부터 시작된다. 백두산에 별이 뜬 것이 무슨 대수냐고 천황이 반문하자 대신은 이렇게 고한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백두산을 하늘의 령을 받은 성산으로, 조선의 생기가 일어번지는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땅의 지맥은 모두 백두산에 뿌리를 두고 조선의 산들은 모두 백두산을 우러러 솟아있습니다. (…) 이렇듯 백두산은 조종의 산일뿐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정기가 이는 성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성산에 보통별이 아니라 장군별이 떴은즉 그것은 장차 조선을 구원할 성인이 내렸다는 뜻인데 이는 실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앞길에 짙은 그늘을 던져주는것이옵니다.

보고에 이어 번개가 쳐 궁성의 기와가 날아가고 유리창이 깨지는 이변이 일자 놀란 천황은 장군별의 내막을 탐문하기 위해 천문학자를 보낸다. 지리산 자락에서 이야기판을 기웃거리던 천문학자는 ‘조국해방의 기치를 든 김일성장군별’이라는 민심을 듣고는 깜짝 놀라 돌아가 보고한다. 그러나 천황은 화를 내며 학자의 목을 자른 뒤 후지산의 중을 다시 보낸다. 중은 이번에는 태백산 아래서 같은 여론을 수집, 보고했다가 죽음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천황은 자신의 근위장교를 파견한다. 백두산까지 올라가 신비한 별을 확인한 근위대장이 “백두산의 장군별은 우리 일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아뢰자 천황은 ‘당장 목을 베라’고 소리 지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집에 이어 출간된 <날개돋친 흰말>(김우경 정리, 문예출판사, 1992)에도 ‘백두산 대장수’라는 비슷한 작품이 맨 첫머리에 실려 있다. 용마를 탄 큰 장수가 백두산에 내려왔다는 소문을 들은 박오득이라는 젊은이는 백두산 대장수를 찾아가 무술과 도술을 배운다. 강제로 땅을 빼앗은 ‘왜놈들’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알게 된 왜인들이 경찰과 군대를 총동원하여 백두산을 공격했지만 박오득과 대장수의 반격에 몰살당한다. “그리하여 왜놈들은 김일성 장군님의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면서 다시는 백두산으로 기여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백두산전설집>에 실려 있는 삽화, 용마를 탄 백두산 대장수의 모습.

<백두산전설집>에 실려 있는 삽화, 용마를 탄 백두산 대장수의 모습.

두 전설집은 신출귀몰한 백두산 대장수를 칭송하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백두산전설집>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 전설들은 <불멸의 력사> 총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4·15창작단이 수집한 자료 가운데 따로 묶은 것이라고 한다. “누가 의식적으로 조직화함이 없이 자연군중들 속에서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전설들이 수없이 창조”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채록된 전설들을 정리하면서 작가들이 다시 쓴 ‘창작 전설’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웅신화나 장수전설 등 구전되던 신화적 영웅담을 재료로 삼아 ‘백두산 대장수’, 곧 북한의 초대 수령을 반일무장투쟁의 신성한 영웅으로 미화한 창작품들인 것이다.

머리말에서 거론한 <불멸의 력사> 총서는 1972년에 첫 권이 나온 장편소설 연작이다. 모두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과, 해방 후의 ‘현지지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바로 2대 수령 김정일이다. 그렇다면 총서의 여적(餘滴)으로 정리되었다는 ‘백두산전설’들도 총서와 같은 취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령 승계를 준비하고 있던 김정일은 초대 수령의 신성화를 통해 혁명투쟁의 성지인 백두산 밀영에서 탄생한 자신의 정통성을 확인하고자 했을 것이다. 1994년 2대 수령의 등장 이후 쓰이기 시작한 ‘백두혈통’이라는 왕조적 개념은 이 스토리텔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대목은 ‘백두혈통 만들기’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163~1164년경에 고려의 김관의는 <편년통록(編年通錄)>이라는 문서를 제작한다. 목표는 고려 왕실의 신성화였다. 이를 위해 김관의가 기획한 것이 일종의 ‘백두혈통 만들기’였다. 그는 여러 귀족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문서를 모아 고려의 건국자 왕건의 조상신화를 편집하는데, 그 선두에 6대조 호경(虎景)이 있다.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를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불렀다.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호경 신화는 평나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동네사람들과 굴에 유숙했는데, 범의 선택에 의해 혼자만 살아남은 사건으로 이어진다. 관을 던지는 제비뽑기를 했는데, 범이 호경의 관을 물어 굴 밖으로 나갔더니 굴이 함몰되었다는 사건! 그리고 산신제 때 여산신(범)의 요청에 따라 부부가 되어 신정(神政)을 폈다는 다음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한데 호경 이야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호경이 구룡산대왕신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부소산으로 내려왔다는 진술이다. 성골장군이라면 신라 귀족이고, 그 정도 혈통이면 새로운 왕가의 조상이 될 만한데 왜 백두산까지 오른 것일까? 답은 백두산과 부소산의 관계에 있다. 부소산은 송악산(호경의 아들 강충이 풍수가의 말대로 고친 이름)의 별명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호경의 행보는 개경의 진산을 백두산과 연결시키려는 상징적 여정이다. 그리고 이 상징적 여정을 그려낸 붓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백두산은 한반도 풍수 용맥(龍脈)의 조산(祖山)이다. “삼국을 통일한 후 처음으로 고려도(高麗圖)가 생겼으나 누구의 손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산을 보면 백두(白頭)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돌기하여 풍악이 되었다. 겹겹이 겹쳐 태백산, 소백산, 죽령, 계립, 삼하령, 추양산이 되었다”는 <동문선(東文選)>의 기록에 따르면 지도상 한반도 모든 산맥들의 뿌리에 백두산이 놓여 있다. 혈통으로 따지면 시조 할아버지 자리에 백두산이 있는 셈이다. 고려의 수도를 감싸고 있는 송악산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려 왕실의 신성한 기원이 백두산에 있음을 말하기 위해 호경은 여정의 출발점을 백두산으로 잡았던 것이다. 백두혈통 만들기는 이미 고려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두산 장군별’의 “백두산은 조종의 산일뿐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정기가 이는 성산임에 틀림이 없”다는 진술은 이런 풍수지리설에 연원을 두고 있다.

백두혈통 만들기는 청나라 건국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주실록(滿洲實錄)>(1635)은 만주족의 원류에 대해 “만주는 원래 장백산 동북 포고리산 아래 포륵호리라고 하는 호수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장백산은 우리가 다 알듯이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고, 포고리산은 만주족이 부쿠리산이라고 부르는 산으로, 땅의 빛깔 때문에 홍토산(紅土山), 적봉(赤峰)으로도 불린다. 이 산자락의 호수에 천녀들이 목욕하러 왔다가 막내 부쿠룬이 신작(神鵲)이 물고 온 주과(朱果)를 먹고 잉태한 뒤 시조 부쿠리용숀을 낳는다. 만주족 청나라의 시조는 호수를 품고 있는 부쿠리산을 통해 장백산으로 연결된다. 호경이 부소산을 통해 백두산에 연결되는 형식과 같다.

그런데 구전되던 시조탄생신화에는 장백산이 없다. 후금이 점령했던 이 지역의 투항자 가운데 목희극이란 사람이 구술한 신화는 이렇다.

우리 조상은 대대로 부쿠리산 아래 부르후리 호숫가에 살았습니다. 기록은 없고 말로 전하길 세 천녀가 호수에서 목욕을 하다가 막내 부쿠룬이 신작이 보낸 주과를 입에 물고 있다가 삼킨 뒤 잉태하여 부쿠리용숀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동족이 만주국 사람들입니다.

지난 4월27일 오후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기념식수 행사에서 백두산 흙이 한라산 흙과 함께 뿌려졌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지난 4월27일 오후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기념식수 행사에서 백두산 흙이 한라산 흙과 함께 뿌려졌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목희극에 따르면 부르후리 호수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라는데 어디에도 장백산이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면 청나라 건국신화에 돌연 나타난 장백산은 <만주실록>을 필두로 한 역사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만주족과 청의 기원을 신성시하려는 기획의 산물로 보인다. 이런 기획에 부응하여 <만주실록>은 신화 앞에 장백산의 지리적 정보를 자세히 기술한다. 그뿐만 아니라 장백산에서 발원한 “세 강에서는 늘 주보(珠寶)가 나”오고 “여름날 산으로 돌아오는 짐승들은 모두 이 산속에서 쉰다”는 식의 신비화를 잊지 않는다. <동화록(東華錄)>(1765)에 이르면 “기운을 보는 자가 말하기를 이 땅이 장차 성인을 낳아 여러 나라를 통일할 것이라고 했다”는 풍수지리학적 언급도 덧붙는다. 장백산을 신비화하여 청 황실의 기원을 신성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흰 눈을 갓처럼 쓰고 있는 높은 산은 주변의 거민들에게 신성한 장소이고 종교적인 공간이다. 티베트인들에게는 초모랑마가 그렇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올림포스가 그렇다. 일본인들에게는 후지산이 그런 공간이고, 중국인들에게는 태산이 그런 장소다. 백두산은 한반도와 그 이북에 있는 주민들에게 그런 성소였다. 일찍이 단군신화가 태백산 신단수를 천상의 통로로 인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최남선은 백두산을 신성한 순례의 공간으로 인식했던(<백두산근참기>, 1927)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2월8일 백두산에 올랐다고 한다. 북한 중앙통신의 보도대로 아마도 “백두의 신념과 의지로 순간도 굴함 없이 국가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과시하려는 상징적 행보였을 것이다. 그가 “앞선 두 수령보다 유독 백두산을 강조”하는 것도 “백두산 칼바람 정신, 백두산 대국 등의 구호로 3대 세습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백기철, ‘백두산 밀영’, 한겨레신문, 2017년 12월12일) 때문일 것이다. 백두산 신화 만들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지난 4월27일 남북 정상의 기념식수 자리에서 한라산 흙과 하나가 된 백두산 흙에도 신화는 숨 쉬고 있었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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