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조선총독부에 기증된 '오타니 컬렉션'조선총독부에 기증된 '오타니 컬렉션'2007.09.10 10:42 광산 따내려고 조선총독에게 준 선물 세 차례에 걸쳐 약탈된 ‘오타니 컬렉션’은 어떻게 용산까지 오게 됐을까… 오타니에게 유물 3분의 1 넘겨받은 일본 재벌 구하라가 조선총독부에 기증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오타니 고즈이 사진/ 서역미술
두 나라의 정치·군사적 갈등은 서구 사람들에게는 아직 미지의 땅이었던 중앙아시아 사막에 대한 대규모 탐사 붐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영국 런던에서 유학 중이던 일본 교토의 명찰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22대 문주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의 귀에 들어간 것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4~5년쯤 전인 1900년 안팎이다.
그러하되, 그 탐험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이었다. 훈련받은 직업 탐험가나 전문 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서구의 탐험과 달리 일본 탐험대를 이끈 것은 20대 초반의 학승(學僧)들이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불화들을 수집할 수는 있었지만, 서구 학자들이 남긴 것과 같은 상세한 고고학적 보고서를 남기지 못했다. 유물의 발견지와 출토지 기록도 믿기 힘든 게 많다. 오타니는 자신의 세 차례 탐험에 대한 기록을 1915년 출판한 <서역고고도보>에 남겼다.
오타니 탐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탐험이 오타니 개인의 재력과 열의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탐험은 오타니의 몰락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3차 탐험이 진행되는 중간에 니시혼간지의 재무책임자가 형사상의 죄인으로 몰리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오타니 고즈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14년 5월 주지직을 사임했다. 그는 별장이 있는 중국 뤼순으로 떠났다.
오타니의 몰락으로 그의 컬렉션들도 한국·중국·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고베에 있는 오타니 고즈이의 별장 니락소(二樂莊)에 보관돼 있었는데, 3분의 1쯤은 오타니가 외유를 떠난 뤼순에 보내졌고, 3분의 1쯤은 일본에 남았고, 나머지 3분의 1쯤은 니락소를 넘겨받은 재벌 구하라 후사노스케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래서 현재 오타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은 일본 도쿄의 도쿄국립박물관, 한국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뤼순의 관동청박물관 등 3곳이다. 민병훈 팀장은 “몇몇 유물들은 탐험단원들에 의해 사적으로 유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타니 고즈이는 영국 런던에 체류하던 시절 중앙아시아 지방의 탐사 소식을 접한다. 그의 탐험 목적은 군사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수집한 유물을 싣고 내몽골의 사막을 지나는 오타니의 3차 탐험대. 1914년 3월에 촬영됐다.(사진/서역미술)
오타니 컬렉션의 3분의 1이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1916년 여름께로 추정된다. 구하라는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 동향이었다. 구하라가 조선의 광산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오타니의 서역 유물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오타니 유물은 1916년 9월10일부터 경복궁 수정전에 일반 전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물이 기증될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중앙아세아 발굴 품목록’과 구하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이 유물들을 기증한다는 내용의 기부문서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30년 동안 평온하게 이어지던 오타니 컬렉션의 평화를 파괴한 것은 해방과 그 이후 몰아친 전쟁이었다. 독일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국립박물관 초대관장 김재원 박사는 이 서역 유물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은 서역 지방의 대표적인 유물 약탈국으로, 그에 걸맞게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미 군정은 목조 건물인 수정전에 전시돼 있던 유물들을 거둬 박물관 내의 유일한 석조건물인 진열본관 수장고로 옮겼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긴 대한민국은 박물관을 그대로 북한군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인천 상륙작전, 1·4 후퇴 등 전황 전개에 따라 서역 유물들의 주인은 수차례 바뀌게 된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유물들이 살아남아 지금껏 관람객을 맞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민병훈 팀장은 “다른 유물들은 서둘러 부산으로 옮겨졌지만 서역 유물은 무거워 단시간 내에 포장해 안전하게 운송하는 게 매우 어려웠다”고 말했다. 오타니 콜렉션이 부산으로 옮겨진 것은 연합군이 서울을 재수복한 1951년 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