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놀이에 관한 문헌기록들 (2)
윷놀이는 우리에게 단순한 놀이문화이기 이전에 대단히 중요한 민족 정체성의 상징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컬린의 저서 <한국의 놀이>에서 강조하는 "세계 놀이문화의 원형"으로서 윷놀이는 우리 역사에서 많은 문헌들이 언급해 온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윷가치 네 개중에 한 개가 뒤집어지면 도가 된다. 네개가 다 뒤집어지면 윷이 된다. 윷놀이에서 다섯 칸을 가는 모보다 적지만 그 이름이 윷이다. 이것은 윷이 엎어지는 중심이 아닌 뒤집어지는 것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란 사실은 그 가는 숫자는 크지만, 윷의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컨대 윷이 소인 반면에 모는 말이라는 것은 평화적인 농경사회 목축사회의 소가 흥해야 좋고 말이 흥하면 전쟁을 의미했으리라. 여기에 윷놀이의 이름을 윷을 내세운 것은 평화적 의미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윷"을 나타내는 "윷 사(柶)"자는 우리식 한자이다. 이는 중국 漢字로는 "숟가락 사(柶)"자라 한다. 그러기에 윷놀이를 가리키는 "柶戱(사희)"나 "擲柶(척사)"라는 말은 中國이나 日本에는 없는 우리만의 漢字語이다. 사(柶)는 그러니까 나무 가락 넷을 가지고 논다는 뜻이다. 젓가락이 두 개의 가락이라면 윷가치는 네개라는 면에서 음양과 사괘의 의미를 지니는 태극기의 의미는 젓가락과 윷으로 윷놀이마당의 상징을 느낄 수도 있다.
사괘에서 안끊어진 것은 양효로 윷의 엎어진 모양이라 한다면 중간에 끊어진 음효는 윷의 뒤집어진 모습이다. 태극기는 세 개의 효를 각각 네 귀퉁이에 가지고 있지만 본래 주역에서는 여섯개의 효가 한 묶음으로 풀이한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윷점에서는 세번 던진 윷가치(엎어진 윷가치의 연 갯수는 3x4=12 개의 효가 되는 결과를 세개로 표현되었다.)
윷에 대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여주는 좀더 구체적인 자료들을 검토해보자. 윷놀이는 중국의 '격양'이나 '저포'와 비슷하하다거나, 몽고의 '살한'이라는 놀이와 유사하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 그 내용상 주역의 내용을 가장 가깝게 따르고 있는 '놀이의 원형'이 윷놀이라는 것을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윷에 대한 기원으로 《조선상고사》 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상대(上代)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이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이병도의 학설에서도 본다. 도·개·걸·윷·모 등이 부여의 관직명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 加)·구가(狗加) 등의 가(加)와 유사함을 들어, 당시 부여의 관제(官制)를 본뜬 것이 윷판이라는 것이다.
이익 <성호사설>에서 윷놀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윷놀이를 고려의 유속으로 본다.”라고 하였다. <경도 잡지> 권2. 세시원일조에는 사희(柶戱)라는 놀이의 설명이 나온다. 윷놀이의 모, 윷, 도, 개, 걸을 설명하고, 말판과 놀이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윷놀이가 지나(支那=중국)의 저포(樗蒲)와 유사할 수 있지만, 저포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최남선은 <조선상식> 풍속편의 척사, 윷조에서 윷놀이의 그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윷은 대체로 조선 특유의 민속 놀이라 하여도 가(可)한데 그 유래와 진의에 관하여는 금후의 연구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윷은 조선에만 할 수 있는 노름으로 신라 시절부터 성행한 증거가 日本의 옛 책(冊)에 적혀 있습니다. 옛날 일은 알 수 없지만 근세에는 윷이 농가의 놀음으로써 세초(정초)에 편을 갈라 한편은 산농이 되고 한편은 수농이 되어 그 이기고 짐으로써 그해 年事가 고지에 잘 될지 저지에 잘 될지를 판단하는 점법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서기 8세기 후반에 나온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 삼복일향(三伏一向) 일복삼향(一伏三向)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 ‘윷’법에 의하여 희구(戱句)를 만든 것으로 인정된다는 기록이다. 그렇게 보면 《수서》 등의 기록에서 보는 바대로 윷놀이는 최소한 삼국시대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잇음을 의미한다.
최상수의 <한국의 세시풍속>에서도 윷놀이는 이미 삼국시대(신라 때)에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계림유사>에 ‘삼문왈결연’이라하여 돈 단위를 말할 때 ‘서희’(셋 3)를 ‘걸’이라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만엽집> 서기 8세기 후반에 찬성에 삼복일향을 (ツク: 즈쿠, 우리말의 도)라고 읽고, 일복삼향을 (コロ: 고로, 우리말의 걸)이라고 읽어 온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신라 때에 일본으로 건너간 윷의 이두법(吏讀法)으로 읽혔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민간 전승의 이야기로는 윷놀이가 신라시대 궁녀들이 새해 초에 즐기던 놀이라고도 하고 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진중의 병사들이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윷판은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 결전장이던 해하의 진형을 본뜬 것이라고도 하나 이들은 모두 윷놀이에 대한 여러 학설들 중의 하나이다.
이맥(李陌)이 편찬했다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는 천부경을 처음으로 기록하였다는 녹도문(鹿圖文)은 윷무늬와 비슷한 모양이다.
서울 북한산과 안동 등의 고지대 바위에서는 윷무늬와 말굽무늬가 발견된다. 깊게 파진 이것들은 실제로 윷판으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천문과 관련한 윷판과의 그 어떤 연계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역사민속학회,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참조)
조선일보(1975, 2, 11)의 이일영, <문헌조사에 의한 윷놀이 고찰>에 따르면 윷이 한국인들의 전통 대중적인 놀이라는 점과 그 용어들, 도,개,결,윷,모를 돼지, 개, 염소 또는 거루, 소, 말 등의 가축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윷놀이는 놀이에 관련된 용어 자체를 보아도 우리의 오랜 전통 놀이로 볼 수 있다. 윷에는 도개걸윷모 다섯가지 윷 이름에서 걸에 대하여는 이미 확실한 염소로 확인된 듯 하다. 걸은 일부에서 코끼리, 또는 신마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다 잘못이다. 양을 지금은 ‘양’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걸’이라 하였다. 자전(字典)에 수놈의 양을 '결'이라 하고, 큰 양은 '갈'이라 하고 있다.
1940년경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조선여행 윷놀이'라는 것이 서울 상가에서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일종의 개량 윷놀이로, 윷판에는 승람도와 같이 한국지도를 응용해 지명을 써넣었고, 윷 말판의 줄 대신에 발달된 교통로가, 말 대신에 기선·기차·자동차·비행기라는 네 개의 교통기관이 윷판에 있는 전국의 도시와 명산대찰들을 유람하면서 경주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 윷판의 지명·산명·사찰명 등은 한글·한자·로마자로 기입되었고, 설명문도 영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윷놀이가 여러 형태로 발달해온 것을 의미한다.
- 다음 장에 계속 -
(0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