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자료]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학자들행촌 이암의 생애를 연구한 한영우 교수는 “현재의 <단군세기>가 후세에 가필된 부분은 있으나 행촌이 지은 母本을 토대로 한 것”(한영우 외 공저,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58쪽)이라고 하였다.
현 고등과학원(KIAS) 물리학부 교수 박창범과 故 나대일 교수가 공동 검증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단군세기> 기록보다 1년 전(BCE 1734)에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초승달과 함께 서쪽 하늘에 10도 이내로 모였음을 보여주었다. 3,700년 전 사건을 컴퓨터로 재현하는 상황에서 1년의 오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단군세기>의 천문 관측 기록은 당시 실지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록을 담고 있는 <단군세기>를 포함하는 <환단고기>는 결코 위서가 아닌 것이다.
‘고조선 29세 마휴단군 9년에 남해의 조수가 석 자나 물러났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실려 있다. 박창범은 이 조수현상도 증명하였다. 해와 달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200년간 계산한 결과, 마휴단군 9년보다 4년이 늦은 BCE931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실제로 발행하였음을 밝혔다.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박석재는 자신의 저서 <개천기>에서 “오행현상과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럿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3월 23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환단고기 심포지엄에서는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환단고기’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의의를 살피는 기조연설을 하였습니다. 환단고기가 위서이고 자신의 역사관에 반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기조연설을 하지는 않겠지요?
박병섭 박사(퀸즈대)는 '환단고기와 천왕-천제-상제 사관 사이의 논리적 관계' 라는 주제로 "한국사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천왕과 천제, 상제 등의 관련자료 분석을 통해 환단고기가 진서(眞書)이며 천왕-천제-상제 간의 논리적 관계 또한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씨는 “그들 비판의 상당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직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 라고 하면서,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우리역사의 수수께끼 1) 라고 하였다.
이덕일 소장 Q & A 답변 중에서
참고 : 2007년 1월 9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증산도 사상연구소 강연 중에서 "마찬가지입니다. ‘환단고기’도 그렇고 ‘규원사화’도 그렇고 이것을 읽고 많은 분들이 그 많은 분들은 사실로 믿고 또 많은 분들은 ‘이게 위서다.’ 라고 주장을 하는데.
저는 ‘이것이 사실이다 위서다.’ 라는 그 차원에서 ‘이제는 한 차원 좀 넘어가야 된다.’ 라고 계속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뭐냐면은 ‘환단고기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환단고기‘의 내용이 ‘맞다 틀리다.’ 라는 차원에서 ‘환단고기’를 한번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치우 관련된 부분을 이렇게 쭉 쓰면서, 만약 ‘환단고기’만을 가지고 썼다고 그러면은 호응받기가 곤란한. 또는 다시 말씀 드리면 아주 어느 학계 쪽에서는 상당히 강하게 공격해 왔을 가능성이 있겠죠.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쓸 때, 물론 ‘환단고기’도 인용을 했지만 주로는 ‘사마천의 사기’나 그 사기의 주석에 나오는 여러 구절들을 가지고 치우를 갖다가 그 상을 제시를 했기 때문에. 그 말하자면 보다 중립지대에 있는 분들이 치우에 대해 이렇게, 보다 과거에 비해서는 좀 가깝게 받아들인, ‘우리의 동이족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좀 덜 한 측면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출처: https://ktsky.tistory.com/entry/환단고기를-인정하는-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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