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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 일본 속의 백제 왕국 - 나라편

송화강 2019-09-18 (수) 23:10 6년전 15230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 일본 속의 백제 왕국 - 나라편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일본 속의 백제 왕국 - 나라편

 

 

아스카 문화가 싹튼 고대 일본의 중심지 나라현 아스카 촌. 지난 1988년 아스카 근처에서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후지노키 고분이 발굴됐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이 나왔는데 특이하게도 물고기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런 물고기 장식이 나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독자적인 일본의 문화인지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들어온 것인지 큰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1996년 8월 전남 나주시 복암리.

 

백제시대 고분이 밀집한 이곳에선 복암리 3호분이 열리고 그 내부 모습이 드러났다. 이 고분의 부장품 중에는 금동신발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후지노키 고분의 금동신발과 똑같은 물고기 장식이 달려 있었다. 현재 이 금동신발은 고대문화가 전파되는 경로를 밝히는 자료로 연구 중에 있는데 지금까지는 시기적으로 보아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유전

 

“6세기 중반 정도로 편년이 되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의 후지노키 고분은 6세기 후반 내지 말로 일본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앞서지 않는가...”

 

이 물고기 장식은 백제인들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5세기 이후 아스카에 전해진 많은 문화 중 하나일 것이다. 고대 일본의 심장부 나라의 아스카. 그렇게 백제가 그곳에 남긴 자취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아스카에 핀 백제문화

 

일본 북(北)큐슈에 자리한 오이타 항. 이곳은 예부터 큐슈에서 혼슈지역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여기서 연락선을 타고 세토 내해를 지나면 혼슈의 중심지인 오사카와 나라현으로 나갈 수 있다. 이 항로는 고대 이래 1500년 가까이 이용되었는데 큐슈에서 혼슈의 중심으로 가는 최단거리 뱃길이었다. 오이타항을 출발한 연락선은 일본 열도 안의 바다 세토 내해로 접어들었다.

 

이도학

 

“저는 지금 오이타에서 고베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곳은 바로 세토 내해라고 하는 바다가 있는 지역이 되겠습니다. 세토 내해는 일본 열도 안에 자리잡고 있는 바다가 되겠는데 옛적에 백제인들이 북큐슈 지역에 진출해서 이곳에서 다시금 세토 내해를 이용해서 지금의 오사카 근방인 아스카와 나라 지역에 진출해서 화려하게 백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바로 그 통로를 이용해서 지금 제가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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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data/saved/2019/09/http___ko.wikipedia.org_wiki_%ED%8C%8C%EC%9D%BC_Seto_Inland-Lake.jpg.png

 

거친 풍랑을 막아주는 더없이 안전한 항로인 세토 내해. 큐슈에서 혼슈의 중심 위쪽으로 440km에 달하는 세토 내해는 큐슈를 개척한 백제인들이 더 넓고 기름진 동쪽의 땅으로 향하기 위해 지났던 바닷길이었다. 그들은 이 바닷길을 통해 고대 일본의 중심지 나라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오이타 항을 떠난 지 12시간 만에 도착한 고베 항. 세토 내해 동쪽 끝에 위치한 고베 항은 푸르스름한 새벽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백제인들은 그 옛날 미명 속에 잠들어 있던 일본 열도에 이런 신선한 기운으로 다가서지 않았을까? 그렇게 백제인들이 고대 일본에 새벽을 열며 정착했던 나라 지역. 나라 지역은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였고 또한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어 주었던 아스카 문화가 싹튼 고대 일본의 심장부였다.

 

나라라는 지명의 어원은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인 나라에서 나왔다는 학설이 있는 것처럼 나라 지역은 고대의 한반도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고대에서 나라 지역의 범위는 항상 일본 열도의 중앙부에 있는 나라 군주를 중심으로 지금의 오사카와 나라 현 일대를 말하고 있다. 예부터 물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많은 무역선들이 드나들었던 오사카는 고대 나라 지역에 전파된 한반도 문물이 처음 들어오는 문화의 창구였다. 이런 이유로 오사카는 지금까지도 일본 상공업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오사카에서는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전해 받은 역사를 되새기는 ‘왔소’ 축제가 매년 열린다. 여기서 ‘왔소’ 축제의 ‘왔소’는 바로 ‘우리가 왔소’이다라는 뜻이 담긴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 ‘왔소’ 축제 행렬에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백제인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일본의 고대문화를 전해준 오경박사 왕인을 비롯해 아직기 백제 학자들이다. 이렇듯 백제인들은 일본에서 추앙받고 있었다.

 

오사카는 백제에 대한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백제의 자취는 오사카 일대의 지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작은 하천인 히라노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는 백제교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계속 내려오는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이 백제교 부근에 도로 위에 설치된 육교의 이름 역시 백제가 표기된 ‘남백제 보도교’이고 오사카 도심에 위치한 화물역의 이름 또한 백제역이다. 이는 ‘왔소’ 축제의 주인공이 백제 인이듯 오사카에 정착한 백제 사람들의 흔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도학

 

“이곳이 바로 오사카시에 소재한 백제역입니다. 백제역이라고 하는 화물열차역 이름은 이 부근에 백제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이 오사카 일대의 백제 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그 뒤 남긴 문화의 영향력이라든지 감화력 이것이 지금까지도 일본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1963년부터 문을 연 백제역(百濟驛). 그 이름은 천년 넘게 백제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백제마을이 역 주변에 있었다는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오사카 시내 한복판에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국립사찰 사천왕사1)가 자리 잡고 있다. 6세기 말 전형적인 백제의 사찰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사천왕사의 창립 내막에는 당시 일본 조정을 장악했던 백제출신 귀족과 다른 호족들이 벌였던 세력다툼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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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cafe.daum.net/uscrc/Qbdd/146

 

이도학

 

“이곳은 오사카에 소재한 사천왕사입니다. 이 사찰은 일본 최초의 국립사찰이 되겠는데 6세기 말경에 왜 조정안에서는 불교 수용을 반대하는 세력과 불교 수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라는 세력으로 갈라져 가지고 커다란 내전이 발생했었습니다. 이때 친 백제 계통의 호족인 소가씨 세력은 쇼토쿠 태자와 같이 불교 수용에 적극 앞장을 섰고 결국 불교 수용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이 사찰을 창건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이 이 사천왕사는 ‘일탑 일금당 일강당’이 남북좌우 선상에 배치돼 있는 그러한 백제 특유의 가람배치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용명천황의 아들이며 593년부터 태자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던 쇼토쿠 태자는 불교 중흥을 위해 백제 출신 귀족인 소가씨 가문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불교를 배척했던 모노노베씨 일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승리를 기원하며 이 사천왕사를 세웠다. 때문에 이 절은 하나의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위치하는 ‘일탑 일금당 일강당’ 가람배치 배치로 지어졌는데 이것은 부여 정림사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백제 가람배치다. 이렇게 일본 최초의 국립사찰은 세운 것은 백제의 문화였다.

 

불교 유적뿐만 아니라 오사카 곳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제 인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오사카의 도심 남쪽에 자리한 작은 납골당에는 아주 오래된 묘가 하나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춘자희(春子姬) 일본식 이름으로 하루꼬라는 여인인데 그녀는 일본에 건너온 백제인의 후손으로 일본 환무천황의 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환무천황의 어머니 또한 백제여인이었고 어머니의 교육에 감동을 받으며 자란 환무는 그 자신도 후에 백제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모두 백제인인 셈이다. 춘자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겨지지 않고 왕비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무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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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의 중심지 나라에 한 부분이었던 오사카 지역에는 백제 사람들 스스로 세운 사찰이 많았다고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오사카부 히라카다시에 있는 백제사다. 8세기경 지어진 것으로 보는 백제사2)는 지금은 금당과 서탑, 동탑 같은 대형건물에 초석만 남아 있지만 그 유구를 볼 때 사천왕사에 버금가는 큰 규모로 추정된다. 이 절은 일본 조정에 요구로 백제왕 경복이 창건했는데 경복은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인 부여 융의 증손자였다. 백제사는 오사카 지역에 많은 절들을 거느린 일종의 중심사찰이었기 때문에 환무천황을 비롯해 백제 피가 흐르는 일본 왕족이 왕실의 안정을 기원했던 절로 알려져 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아 이탑(서탑과 동탑을 말함) 일금당 가람배치를 보이는 이곳에서는 발굴결과 한반도와 관계 깊은 유물이 나왔다. 이 백제사 터에서는 화동개진(和同開珍 - 이미지)이라는 동전 몇 닢이 발견됐다. 708년 일본 최초의 구리 광산이 발견되자 일본을 연호를 화동으로 바꾸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화폐인 화동개진을 만들었는데 그 구리광산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개발한 것이다.

 

백제의 유적에는 항상 또 다른 백제가 있는 것일까? 백제인이 세운 백제사 옆에는 백제왕신사3)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백제사가 창건된 후 당시 일본에서 활동했던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그들의 선조인 백제왕들을 모시는 제사처였다. 1952년 일본의 국교 사적지로 지정된 백제왕신사.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일본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우두천황이라는 일본천황가의 시조도 함께 제사 지내고 있다. 왜 백제왕들을 모시는 신사에 일본의 시조가 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도학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백제 왕족들이 대거 이 오사카 지역으로 몰려와서 거주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조상인 백제임금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서 백제왕신사라고 하는 신사를 창건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신사 앞에 서 있는데 이 현판에 보면 백제천황 우두천황이라고 하는 글자가 써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두’라고 하는 것은 소우 자에다 머리 두자가 되겠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일본의 건국 설화에 보면 ‘스사노오노미코도’라고 하는 천신이 한반도 지역에 와 가지고 바로 소시모리라고 하는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돼 있습니다. 소시모리라고 하는 곳이 바로 우두가 아니겠는가, 소의 머리, 바로 우두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백제국왕 우두천황’ 이것은 바로 백제왕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로 왜의 조정 일본 조정에 어떤 뿌리가 되는 나라가 백제라고 하는 그런 의지,랄까 의식이 담겨 있는 문자로 한번 생각을 해 봅니다.”

 

일본 천황가를 두고 그 계보가 백제 쪽이라는 이야기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그런데 5세기 이후 용명과 환무 등 많은 천황들의 어머니가 백제인이고 보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억측이 아닌 것 같다. 우두천황서라는 바로 이것은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닐는지.

 

오사카 도심과 교토의 중간지점인 히라카다시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공원이 있다. 왕인공원. 주민들의 휴식 공간인 이곳에 이름을 백제 오경 박사였던 왕인에 이름에서 따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왕인 공원 인근에 백제 왕인박사의 무덤으로 전해 내려오는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왕인박사 묘는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정비돼 가지고 일본사람들의 휴식의 공간이기보다는 어떤 교육의 도량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왕인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의 인물로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줬고 그리고 왜 왕의 왕세자를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왕인박사는 일본 고대문화를 전수해준 또 일본 고대문화에 어떤 시조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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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부터 일본어로 왕인을 뜻하는 마니마을로 불려왔다. 1938년에 사적으로 지정됐고 1984년부터는 매년 왕인박사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왕인박사는 고대 일본 문화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왕인박사의 출생지는 전남 영암에 월출산 자락으로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전설에 따라 월출산 아래에 왕인 사당을 지어 놓았다. 왕인박사는 근초고왕 대에서 아실왕자 사이인 4세기 후반 무렵에 학자로 일본 응신 천황에 초대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로 되어 있다. 전남영암에서는 사당에 왕인영정을 모셔놓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역사서에선 한줄도 찾아볼 수 없고 일본서기에만 보이고 있다.

 

왕인보다 먼저 일본에 갔던 백제 학자 아직기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와 태자의 스승이 됐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4) 이미 8살에 유학경전에 통달했고 18살에 이르러서는 백제 최고 학자인 오경박사에 등용됐다는 왕인. 그는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한권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신하들에게는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 이념을 전파해 국가의 틀을 갖추게 한 것이다.

 

 

나라현 텐리시에는 왕인박사의 위패를 모신 와니시모 신사가 남아 있을 정도로 일본에 왕인이 남긴 자취는 깊었다. 태자와 신하들에게 바른 통치의 덕목을 가르치고 새로운 문명을 전한 그를 일본인들이 문화의 시조로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백제 왕인박사. 그의 가르침은 척박한 땅의 단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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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70321100616777&p=segye

 

 

오사카부의 자그마한 도시인 히비키노시. 이곳은 일본 고대 문화의 발상지 나라현의 아스카 촌과 가깝다고 해서 하바치아스카로 불렸던 지역인데 이 히비키노시 외곽 작은 마을에는 그 가와치아스카를 통치했다는 한 백제왕의 자취가 서려있다. 아스카베 신사. 바로 백제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왕을 기리는 곳이다. 곤지는 백제 한성시대의 마지막 왕이었던 개로왕의 동생이었는데 중국으로부터 ‘정무장군 좌현왕’을 제수 받은 인물이다. 이것은 당시 백제 왕족으로는 최고의 위치였다. 그는 실제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461년 개로왕의 지시로 일본에 건너와 15년 동안 두 나라의 외교를 맡아 왔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왕슈를 제수 받고 가와치아스카 지역을 통치했는데 이 신사 안내문에도 그를 백제왕으로 밝히고 있다.

 

가와치아스카 땅을 개척하고 다스렸던 곤지왕(?~477). 그는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을 돕기 위해 백제로 돌아가 얼마 후 반란을 일으킨 해부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히비키노시. 즉 가와치아스카 땅은 곤지왕과 많은 백제 귀족들이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땅으로 전한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바로 아스카베신사 위쪽 야산에서 발굴된 간논즈카 고분이다. 남북 일직선상으로 석실이 만들어진 이 고분은 다름 아닌 전형적인 백제고분이기 때문이다. 무덤에 연두라는 통로를 내고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을 돌로 꾸미는 것은 이른바 횡혈식 석실분인데 이것은 백제중앙묘제였다. 당시 일본에 간논즈카처럼 거대한 석실분을 만들고 거기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와치아스카 땅에 모여 살았다는 백제 출신의 귀족들이 아니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사카를 뒤로 하고 고대 일본의 서울이자 아스카 문화의 발상지 나라현 아스카촌으로 향했다. 아스카는 규슈를 떠난 백제 사람들이 오사카를 거쳐 대거 정착했던 곳이다. 넓은 나라 땅에서도 유독 이 아스카에 백제 인들이 모여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우리나라 부여의 산세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부터 평안히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안숙(安宿), 찬란함을 뜻하는 비조(飛鳥), 명일향(明日香)으로 쓰여진 아스카. 그중에서 안숙이라는 표기는 큐슈를 떠나 세토 내해를 떠난 백제인들이 또 다시 아스카 천을 거슬러 오르는 고달픈 여정 끝에 도착해 평하게 잠을 잔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더없이 편안한 고향의 땅이었을 이 아스카에서 그들은 일본이 눈뜨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심어 주었고 이후 일본열도로 더 멀리 더 넓게 퍼져 나갔다. 그것이 바로 아스카 문화의 시작이었다.

 

“이 아스카 지역의 일본 고대 문화의 끼친 백제문화의 영향을 말씀해 주시고 또 관련 대표적인 유적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도학)

 

“5세기 후반부터 많은 백제 인들이 아스카지역에 들어왔습니다. 이민과 이주 형식으로 일본에 들어온 백제 인들은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시키고 많은 사찰을 지었습니다. 또 새로운 궁전과 고분을 조성하고 기와도 만들었는데 백제 인들이 새롭게 전파한 것입니다. 아스카시와 같은 유적을 통해 볼 때 아스카의 문화는 백제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노꾸마 가네가츠 / 교토 다치바나 여대 교수 전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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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아스카사(飛鳥寺). 609년 백제 승려와 목수들을 초청해 지은 이 사찰은 백제 출신 귀족이자 아스카 지역의 최고의 권력자인 소가노 우마코가 창건했다.

 

“아스카는 아스카 지역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고 6세기 중반 이후에 백제로부터 불교문화가 이 아스카 지역에 전래되어 가지고 화려하게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 진원지가 되는 도량이 이 아스카사입니다.” (이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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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kr.blog.yahoo.com/choe5702/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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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browncafe.tistory.com/799?srchid=BR1http%3A%2F%2Fbrowncafe.tistory.com%2F799

 

 

아스카사에는 608년 완성됐다는 석가여래동상인 아스카 대불이 남아 있다. 이 아스카 대불을 만든 사람 역시 백제인 도리. 사람들은 그를 불상을 잘 만든다고 하여 도리불사라 불렀다. 일본서기에도 아스카 사에 불상이며 불탑, 회랑을 모두 백제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아스카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백제사찰이었다. 쇼토쿠 태자와 손잡은 우마코는 불교를 배척했던 귀족들을 제거한 뒤 본격적으로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했다. 그런 그의 염원이 이곳에 아스카 사를 세웠고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가 아스카에 울려 퍼지게 된다. 아스카 사 한쪽 옆에 서 있는 조그마한 돌무덤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소가노 우마코의 후손인 소가노 이루카의 머리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백제 계통의 호족인 소마노 우마코의 의해서 창건된 아스카 사 옆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무덤은 바로 소가씨 가문의 마지막 권력자였던 소마노 이루카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가씨 세력은 백제 계통의 호족이었고 그리고 천황가의 외척으로 권세를 오랫동안 누렸던 그런 세력 가문이었습니다. 바로 다이카 개신에 의해서 소가노 이루카가 참살 당하게 되고 아울려서 소가노 가문이 몰락하게 됐습니다. 그러한 소가씨 가문의 권세가였던 소가노 이루카의 머리를 안치해 둔 무덤이라고 얘기 되고 있습니다. 바로 소마노 우마코가 아스카사를 창건했고 그 곁에 바로 소가씨 가문에 마지막 권력자의 무덤이 있다는 것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또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도학)

 

소가노 우마코가 창건한 아스카 사 옆에 초라하게 묻혀있는 소가씨 가문의 권력자. 그렇게 소가씨의 흥망성쇠가 모두 아스카 사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아스카 촌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스카 자료관. 이곳에 전시된 아스카 와당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백제 유물 전시관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아스카 사는 발굴결과 백제와 고구려의 가람배치가 혼합된 모습이었고 건물의 기초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흙을 다져서 쌓아 올리는 소위 백제 판축기법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발굴된 와당은 모두 백제계 일색일 수밖에 없다.

 

아스카 사에서 출토된 와당과 백제 고유의 연꽃무늬 와당을 비교해 보면 차이점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같은 모양이다. 바로 아스카 사가 백제인과 백제의 기술로 지어진 사실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왕궁이나 사찰같이 중요한 곳에서나 쓰였던 와당은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에서나 알려져 있다. 백제 인들은 이런 기와를 어디서 만들었을까? 우리는 수소문 끝에 아스카 촌과 인접한 시가현 요우카이치시를 찾았다. 이곳에 예부터 내려오던 큰 가마터가 있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시 외곽 야트막한 산 중턱에서 아담한 절 와옥사가 눈에 들어온다. 절에 이름으로는 드물게 기와 와자를 쓰는 와옥사. 이곳의 주지는 절에 대대로 내려온다는 기와 몇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백제계통의 연꽃무늬 와당도 있었다.

 

“가지고 나오신 이 오래된 기와는 어디서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이도학)

 

“이 기와는 이절의 아래쪽 밭에서 어떤 주민이 주은 것입니다. 1200~1300년 전 이곳에는 큰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이 와옥사(瓦屋寺)는 옛날 가마터가 있던 곳에 세워졌는데, 이곳에서 기와를 굽던 백제 인들이 자신의 선조를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합니다. 약 1300년부터 기와를 굽는 절로 불려 오다가 얼마 후 와옥사로 되어 산위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오카젠게이 / 와옥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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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cafe.daum.net/rckangma/NY6T/160

 

 

이제는 부서져 반절뿐인 이 연꽃무늬 와당에서 1300년 전 어느 백제인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감회일까? 누가 언제 썼는지 모르지만 성덕(聖德) 즉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다는 명문이 보인다. 고대에서 고급문화의 상징이었던 와당이 다른 곳으로 전해질 때는 단지 그 기술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이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300년 전 와옥사 주변에 있었다는 가마터에서는 많은 백제의 이주민들이 백제에서 굽던 그대로 기와를 굽고 기와들은 아스카로 전해져 아스카를 수놓았을 것이다. 그 가마터의 흔적은 이 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선조들을 위해 절을 짓고 기와를 구웠을 그들의 채취만 묻어날 뿐이었다.

 

지난 1970년, 일본 국회는 일본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정하고 아스카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했다. 이처럼 아스카는 일본 문화재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스카는 추고천황이 즉위한 서기 549년부터 710년까지 당시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에 특히 많은 왕릉과 고분이 모여 있는 곳이다. 아스카의 고분들 가운데 세인의 관심을 끄는 특이한 묘가 하나 있다. ‘이시부다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고분은 언뜻 거대한 돌무더기 같지만 사실 관을 안치했던 석실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견된 고분의 석실호는 가장 큰 규모인 이시부다이는 바로 아스카 사를 창건한 백제 출신의 권력자 소마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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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www.jjinews.com/ArticleView.asp?intNum=12731&ASection=001039

 

“제가 지금 손으로 만지고 있는 유적은 석무대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시부다이’ 고분입니다. 이 고분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고 여러분들이 느낄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고분은 누구의 고분이냐면 당시 왜 조정에서 권력을 지고 있었던 소마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마노 우마코는 626년에 세상을 떴는데 바로 그 이의 무덤이 되겠습니다. 바로 이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왜 조정안에서 소가씨 세력이 얼마나 강대했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위에 천정석이 두기가 있는데 이 편에는 천정석의 무게가 무려 77톤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주 거대한 고분이 되겠습니다. 이걸 통해서 왜 조정안에 있었던 백제계 호족 세력이 권세, 영화 이런 것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도학)

 

언제부터인지 이 고분의 봉분은 없어졌지만 석실의 크기로 보아 무덤의 길이는 50m로 추정돼 왕릉의 규모와 다를 바 없다. 당시 섭정을 했던 쇼토쿠 태자와 뜻을 같이한 소가노 우마코5)는 불교 수용을 반대했던 세력들을 제거한 뒤 일본 조정의 세력자로 급부상한다. 더욱이 쇼토쿠 태자가 죽은 후로 소마노 우마코의 위세는 천황 그 자체였다. 592년 그는 자신을 견제했던 숭준천황을 암살하고 추고천황을 즉위시킬 정도였다. 그는 백제 8대 귀족 성씨 중 하나인 목씨 가문의 후손인데 그가 백제 출신임을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6)

 

아스카 사의 기둥을 세우는 날, 소마노 우마코는 백제 옷을 입고 기뻐한 것이다. 아울러 일본에서 백제 문화가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많은 학자들은 아스카 문화를 주도했던 소가씨 가문의 시작을 목라만치라는 백제귀족으로 보고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목라만치가 내분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왔고 그의 후손들의 성씨를 소가씨로 바꿨다고 한다. 소가씨 권세의 시작은 소가노 이나메가 두 딸을 흠명천황으로 보내면서 시작돼 그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를 거쳐 소가노 이루카까지 이어졌다.7) 그러나 천황가의 외척으로 막강한 힘을 가졌던 소가씨 가문은 다이카 개신8) 때 소가노 이루카의 죽음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들의 영화는 잊혀져 돌무더기와 수총만이 남았지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일본에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던 소가씨, 그들은 분명 아스카의 백제 인들이었다.

 

아스카를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서 그 용도를 알기 힘든 기묘한 모양의 석조물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아스카촌 구릉에 나 뒹구는 거대한 돌에는 ‘귀신의 변소’라는 희한한 이름이 붙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부터 귀신의 변소가 있는 곳에는 귀신이 나타나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먹고 용변을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귀신의 도마’라는 평평한 돌이 누워 있는데 여기에 귀신이 사람을 올려놓고 요리해 먹었다는 것이다. 천년 넘게 내려오는 이 전설의 돌은 주변의 고분이 밝혀지면서 밖으로 나온 석실 뚜껑과 윗부분으로 밝혀졌다.

 

또 하나는 사카후네이시라는 돌인데 초를 실은 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부터 이 아스카에 살고 있는 어느 부자가 술을 빚기 위해 만든 돌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완전한 모양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술이나 기름을 짜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아스카 촌 동쪽의 논 한복판에서는 가메이시라는 거북이 돌이 눈에 띤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거북이는 고대이래로 장수와 풍요, 다산을 상징하는 명물로 여겨왔으니 아마도 그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깎아놓은 돌은 아닐까?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일곱 개 사출 중에 하나인 다치바나사. 이곳에서도 귀한 모양의 석조물을 볼 수 있다. 한 몸체에 다른 두 얼굴을 함께 조각한 이면석(二面石 = 니멘세키). 마치 인간이 가진 선악의 양면을 돌에 새긴 듯하다. 다치바나사 한편에는 특이한 모양의 탑 심초석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감귤을 닮았다고 해서 이 절의 이름이 귤사 즉 다치바나사로 불리게 됐다. 그런데 이 아스카의 석조물들이 백제와 어떤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있다. 흠명천황의 손녀인 길비희왕의 무덤 앞에는 사루이시 즉 원숭이 돌 네 개가 서있는데 이 사루이시는 원래 흠명천황 묘 주변에서 발견되었다가 300년 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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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비노히메 여왕묘 안에 있는 4개의 사루이시. 왼쪽부터 남, 녀, 스님, 산노곤겐을 나타낸다.

원본출처 : http://nj.darakwon.co.kr/200210/remain.asp

 

 

주로 왕의 무덤이나 사찰 같은 곳에서 발견된다는 원숭이 모양의 돌. 그렇다면 이곳 아스카 사루이시의 원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백제 무왕이 창건한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 이 미륵사 탑의 왼쪽 귀퉁이에서는 조그마한 석조물을 하나 볼 수 있는데 그 모양이 아스카의 사루이시와 너무도 흡사하다. 미륵사 원숭이 석상. 백제에서는 원숭이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으로 여겨 원숭이 석상을 사찰에 세워 구도의 길을 안내하게 했다. 이 원숭이 석상은 많은 백제 인들이 일본 아스카에 정착하면서 수준 높은 석공예술과 함께 전파돼 왕릉 앞에서는 왕의 사후 세계를 인도하고 절에서는 구도의 길을 안내했던 것이다. 아스카 시대의 상징인 아스카 사를 백제 인들이 지은 것처럼 이런 수수께끼의 석조물들은 대부분 백제 인들이 아스카에 대거 정착한 7세기 이후 만들어졌다. 이렇듯 백제는 아스카 시대의 밑거름이 되어 일본 역사를 바꾼 찬연한 아스카 문화를 일구어 냈다.

 

“일본역사에 있어 아스카시대를 말하자면 국제적인 성격을 띤 시기입니다. 즉 백제문화의 영향으로,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국제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진정한 일본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던 아스카 문화는 일본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노꾸마 가네가츠 / 교토 다치바나 여대 교수 전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아스카 촌 남쪽에는 히노쿠마라는 지명의 마을이 있다. 이곳은 백제인 ‘아지사주’9)를 모시는 오미아시 신사가 있는데 이 히노쿠마 땅은 409년 백제에서 건너온 아지사주라는 인물이 정착한 이래 수천 명의 백제 인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곳은 그 아스카의 히노쿠마 땅에 소재한 오미아시 신사입니다. 이 오미아시 신사의 제일 신은 5세기경에 백제 땅에서 건너와 가지고 이 일대를 개척했던 아지사주라고 하는 인물이 되겠습니다. 아지사주와 그를 따라왔던 백제 인들은 이 히노쿠마 땅에 정착해서 선진문물을 전수해 줬고 이 지역을 대거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 옆에 보면 센카 천황(선화천황)과 관련된 공터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센카 천황 밑에 보면 히노쿠마라고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센카 천황을 히노쿠마 천황이라고 부르고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이 일대하고 센카 천황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백제 사람들과 백제의 문물과 그 속에서 센카 천황이라고 하는 인물이 탄생했고 또 성장해 나간 것으로 해석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센카 천황 즉 선화 천황은 히노쿠마 왕이라고 불리는데 그가 히노쿠마 땅에서 성장했고 이곳에 왕궁을 지으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또 히노쿠마 땅에는 흠명과 천무, 문무 등 아스카 시대를 이끈 왕들의 무덤이 밀집해 있어 백제 인들의 거주지였던 히노쿠마가 흠명천황이래 왕실의 초심지임을 말해주는 것을 아닐는지. 히노쿠마는 물론 아스카 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무궁화. 한반도 인들이 일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본열도 어디에도 자생하지 않던 꽃이었다. 아스카를 개척한 백제 사람들도 그들이 가져온 무궁화를 보면서 떠나온 땅의 대한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새로운 동쪽의 땅 나라 아스카. 백제 인들은 그곳에서 잠든 일본을 깨우고 그들이 가져온 문화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아스카는 말한다. 그들이 가슴속에 그렸던 왕국 백제는 그렇게 아스카의 빛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아스카 문화였다.

 

 

* 글의 저작권은 대전 MBC 문화방송국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 주

1) 쇼토쿠태자와 백제계 호족인 “소가”씨 일가가 불교를 반대했던 “모노노베”씨 세력을 제거하고 불교중흥을 위해 593년 창건.

2) 백제의 의자왕의 셋째아들 “부여 융”의 증손인 “백제왕 경복”이 8세기경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

3) 8세기경 오사카와 나라지역에 살던, 백제왕족과 백제인들이 백제왕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신사.

4) “아직기의 추천으로 2월에 왕인박사가 왔다.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고, 태자가 여러 학문을 배웠다.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일본서기 응신 16년 조>

5) 백제출신의 중앙호족으로 아스카시대 최고의 권력자. 쇼토쿠 태자와 함께 불교를 진흥시키고, 숭준천황을 암살하는 등 당시 일본정치를 장악.

6) “소가노우마코가 기원한 바에 따라 아스카 땅에 아스카사를 창건했다. 찰주를 세우는 날, 소가노우마코와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백제옷을 입고 기뻐했다.” <扶桑略記(부상락기) 추고천황 원년조>

7) 소가노 이나메(두 딸이 흠명천황의 부인이 되어 용명, 추고, 숭준천황이 출생) → 소가노 우마코 → 소가노 이루카.

8) 645년 혁신적인 호족들이 “소가”씨 가문을 멸하고 시작한 고대일본의 정치개혁.

9) 409년 응신천황대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온 뒤 일본 사신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됨.

 

 

 

출처 : 책을 벗 삼아 | 글쓴이 : 문화재지기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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