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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한국사의 가장 빛나는 시기 - 광개토왕 때의 고구려

송화강 2019-09-28 (토) 21:08 6년전 13602  

광개토왕 때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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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구려 초기의 대외 팽창과 관련하여 미천왕(300-331)이 서안평까지 진출함으로써 한군현의 세력을 축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한군현이 축출될 무렵, 중국의 동북 지역에는 선비족이 등장하여 그 세력을 요동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한편 낙랑과 대방 등 한군현의 소멸은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고구려와 남쪽에서 북상하는 백제 세력을 만나게 했다. 따라서 미천왕을 이은 고국원왕(331-371) 때의 고구려는 서북 지역의 선비족과 남쪽의 백제로부터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시련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게 하였지만, 고구려는 이를 극복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비운의 역사를 맛보았던 임금은 고국원왕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 미천왕이 이룩해 놓은 군사적 정치적 업적을 효율적으로 지키지 못했다. 선비족은 342년 고구려를 침략하여 국토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퇴각할 때는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탈취해 갔고, 왕모 주씨와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는 그들이 안전하게 퇴각하기 위한 야만적 술책이었다.


미천왕의 시신은 그 이듬해 돌려받았으나 왕모 주 씨는 13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구려는 또 국가 체제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남쪽의 백제와 맞부딪치게 됐다.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 부자가 거느린 정병 3만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고구려는 국가적으로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고국원왕을 이은 소수림왕은 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력 증강책보다 문화 정책에 힘썼다. 그것은 국력 쇠퇴의 원인을 무력의 열세에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니라, 문화의 빈곤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선비족을 포함한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이미 불교와 유교를 흥륭하게 만들었고, 백제 또한 근초고왕 말기에 이미 유교와 도교를 받아들여 그런 문화적 기반 위에서 국력을 신장시켜 가고 있었다.


소수림왕은 즉위한 그 이듬해에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세웠으며,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다. 불교는 통일체적인 이념을 제공하여 왕권 강화와 고대 통일국가 수립에 기여하였고, 유교는 왕권에 효율적인 제도의 운용원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이러한 문화적 기반 위에서 무력을 포함한 국력의 전반적인 증강이 가능해졌다.


고국양왕을 거쳐 고구려 전성기의 제왕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바로 뒤이어 나타난 것은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소수림왕이 시행한 정책으로 그의 동생 고국양왕 때에는 이미 선비족과 백제와 대결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키워졌다. 즉, 고국양왕은 선비족이 지배하던 요동을 공격하였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수세기 동안 수세적인 입장에 있던 고구려가 비로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왕(391-413)은 그의 이름 그대로 `넓게 국토를 개척한' 임금이다. 그의 웅혼한 업적은 `삼국사기'란 책과 414년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제, 비려, 숙신, 선비, 왜, 동부여 등 여러 지역을 정복하여 고구려를 동북 아시아의 맹주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를 이은 장수왕이 그의 업적을 계승했다고는 하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남쪽의 국경선을 넓히고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안정시키는 정도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업적을 남쪽의 한반도에 대한 작전과, 만주와 중국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남쪽의 한반도와의 관계를 보자. 그는 우선 그의 선대인 고국원왕 때의 수치를 설욕하고자 즉위 후 곧 백제 정벌에 나섰다. 그의 백제 정벌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지는데, 처음에 10성과 관미성(강화도 근처)을 쳐 빼앗았고, 다시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이후로는 길이 고구려의 종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았으며 58성, 700촌을 취하였다.


그 뒤 고구려는 다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깨뜨렸는데 이 사실을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9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더불어 화통하더니, 왕이 평양을 순시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되, `왜인이 국경에 꽉 차서 성지를 훼파하니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10년에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하라 하거늘... (고구려의)관병이 바야흐로 도착하매 왜적이 물러났다. 관병이 임나가라에까지 추격하여 성을 뺏으니 성은 즉시 귀복하고 안라인이 성을 지키다...."


여기서 우리는 왜와 임나(대)가야가 연합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거기에 비해 광개토왕 2(392)년에 내물왕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고구려에 보내야 했던 신라는 이웃하고 있는 가야, 백제, 왜와의 국제적 대결에서 아직도 고구려의 보호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의 업적은 한반도 쪽보다는 중국 만주 쪽이 훨씬 빛난다. 그는 즉위 후 곧 거란(비려) 정벌에 나서서 3부락, 6-7백 당을 공파하고 수많은 소, 말떼를 노략하였다. 또 399년부터 407년경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선비족과 싸웠고, 어떤 때는 갑옷 1만령과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선비족과의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는 요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비문 중에서 선비족과의 투쟁과 왜와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이 깍여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고구려의 승리와 진출을 꺼려하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소행일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비문에 의하면 410년에 광개토왕은 동부여를 친히 정벌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광개토왕대에 고구려는 대정복 국가로서 동북아시아의 최강자로 등장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판도는 동으로는 책성,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한강 유역, 북으로는 옛 부여에 이르렀으며 남북 1천리에 동서 2천리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다가 그는 `영락'이라는 자주적 연호를 가져 그 위엄이 사해에 떨치는, "한국사의 가장 영광된 시기로서의 고구려"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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