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마테오 리치마테오 리치
동서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이마두(마테오 리치)는 천문성상(天文星象)과 산수역법(算數曆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다. 그 근본을 연구하고 증거를 밝혀 억지스러운 말이 없으니 천고에 기이한 재주다. 그는 자기의 학문을 중국에 전했다. 그가 죽은 후 그 나라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와서 동서남북 네 천주당에 살고 있는데, 서천주당이 가장 유명하다.’ 1765년 베이징을 다녀 온 조선의 홍대용의 기록 중에서
1중국 선교를 위한 준비와 정착, 마테오 리치에서 이마두(利瑪竇)로![]() 1552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중국 선교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광둥성 앞 바다 상촨도(上川島)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6일 이탈리아 중부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다. 리치는 1577년 로마를 떠나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 머물다가 이듬해 3월 루제리 등 13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여 9월 인도 서부 고아에 도착했다. 그러는 사이 루제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루제리가 번역한 십계명 중국어판 [조전천주십계](祖傳天主十戒)를 인쇄했으며, 광둥과 광시를 총괄하는 총독 왕반(王泮)의 요청에 응해 세계지도인 ‘여지산해전도’(與地山海全圖)를 제작했다. (‘산해여지전도’는 1600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1602). 가로 533센티미터, 세로 170 센티미터의 이 세계지도는 선조 36년(1603)에 조선에도 들어왔다. 2황제의 후대 속에 선교와 저술 활동을 펼쳐
1610년 중국인 예수회 수사 유문휘(游文輝 1557~1633)가 그린 마테오리치 초상화로,현재 로마 예수회 본부에 있다. 유문휘는 마카오에서 이탈리아 예수회원 조반니 니콜라오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난징에서 마테오 리치를 도왔다.
리치는 1595년, 마카오 도착 13년 만에 중국 내륙 북쪽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1598년 9월 8일 처음으로 베이징에 들어갔지만 거주 허가를 얻지 못했고, 1601년 1월 다시 베이징에 입성했다. 만력제가 자명종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 계기였다. 드디어 1601년 5월 거주 허가를 받고 거처와 식량과 생활비를 제공받게 되었다. 자명종을 비롯한 진상품이 만력제의 마음에 꼭 들었고 만력제와 고관들이 리치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인정하여 ‘서양에서 온 선비’로 여겼으며, 과학기술 전문가로서의 활용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리치는 1595년 우정에 관한 에세이이자 격언집인 [교우론]을 펴냈고,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하는 [서국기법](1596)도 펴냈다. 3마테오 리치가 교유(交遊)한 중국인들
17세기 독일 예수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편찬한 일종의 중국백과사전인 [중국도설](China Ilustrata. 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오른쪽). 리치가 처음으로 깊이 사귄 중국인은 1589년에 만난 구태소(瞿太素)였다. 구태소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적 호기심이 강한 명문가 자제였다. 리치는 예부시랑 섭향고(葉向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리치와 그의 후배 선교사들을 적극 도왔다. 리치는 기성 유교 질서에 반항한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와도 만났다. 이탁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치와 가장 친밀했던 인물은 세례교인이기도 한 관리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였다. 이지조는 선교사들의 구술을 필사하고 많은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다. 그는 특히 가톨릭 선교사들의 한문 저작을 모은 [천학초함]을 편찬했다. 4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마테오 리치에 매료된 이유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먼 외국에서 온 인물이 중국어와 한문과 중국 문화를 깊이 알고 무엇보다도 유교를 안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리치의 성품과 태도였다. “대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존경하여 그와 교제하였다.” ([명사](明史) 326권 중에서) “그는 행동거지에 늘 다정함과 온화함이 넘치며 누구에게도 늘 친절하다.” (예수회 동료의 말) 5마테오 리치의 선교 전략,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킨다”마테오 리치는 처음에 불교 승려 복장을 했으나 불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사회 지배층인 유교 지식인, 관료 계층에 접근하기 위해 유사(儒士)의 복장을 갖췄다.
그는 1594년 사서(四書) 라틴어 번역을 마치고 나서야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간행) 집필에 본격 착수했다. [천주실의]는 루제리가 1584년 자오칭에서 펴낸 [천주실록] 개정판에 가깝다. 리치가 루제리의 [천주실록] 집필 작업을 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리치는 하느님, 즉 천주를 유교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리치의 이런 방식은 풍응경(馮應京)이 쓴 [천주실의] 서문에 나오는 대로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키는’(以中化中) 방식, 즉 유교와 가톨릭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여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리치는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도 용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징의 마테오 리치 묘. 중국 공산당 베이지시위원화 당(黨校)구내에 있다. 그러나 리치의 사후, 리치의 방식을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이른바 전례(典禮)문제가 일어났다. 예수회보다 뒤늦게 중국 선교에 나선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를 비난했고, 오랜 논쟁과 갈등 끝에 청나라 건륭제 시대인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반포한 교서에 따라 예수회의 방식이 최종 금지되었다. 6베이징에 묻힌 마테오 리치, ‘성인!, 진정한 성인!’과로 탓에 극도로 병약해진 마테오 리치는 1610년 5월 11일 저녁 7시경 베이징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 예배당에 안치됐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곁에 있던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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