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 개화의 조상은 한국인이다.
일본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198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문화(彌生文化) 후기에 한국유민에 의해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가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20여만 명이 일본율령국가(日本律令國家)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고 말했다. 옛날에 한국유민이 얼마나 일본국가와 문화 건설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이미 기술했다. 구한말 광무시대(光武時代)에 김기수(金綺秀)는 일본 통신사로 일본을 보고 와서 기록한 해사록(海槎錄)을 통해 “백제가 경전과 음악을 일본에 준 사실로 인해 오늘도 일본인이 백제를 말하더라”고 했다. 이것은 백제가 문화기술로서 일본을 가르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 백제는 태양과 같은 존재다. 일본어로 백제를 구다라<クタラ=くたら>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큰 나라’가 <クタラ=くたら>로 된 것이라 한다. 백제는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큰 나라이며 또한 완벽한 나라임을 의미한다. 일본어에서 구다라나이(クタラナイ)라는 말은 부족하고 모자란 것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말로 직역하면 ‘백제가 없다’라는 말이다. 즉, 완전하고 완벽하지 못하다고 할 때 ‘백제가 없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백제는 완전무결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인박사(王仁·화이길사·和邇易吉師), 아직기(阿直岐·阿知吉師) 및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보내 일본문화를 개척한 백제유민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한자를 간략한 가나(假名)문자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가나(假名)문자가 일본에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완성됐다. 이 문자는 백제, 신라의 토(吐)에서 유래했다. 특히 가나(片假名)의 다, 야(タ, ヤ)는 백제의 토(吐)와 동일하다. 일본은 그 아무리 우리 한민족을 부인해도 자기들의 누구의 자손이며 누가 오늘의 일본을 구축한 것인가에 대해 크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일본은 우리유민이 일본을 개명 사회로 이끌었던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필자가 유학시도 일본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이 지진으로 망한다 해도 하나만을 구할 것은 백제관음(百濟觀音)이라고” 이 백제관음도 백제유민이 만들어 준 것이다. 또한 대불주조(大佛鑄造)의 기술지도자인 국중공마려(國中公磨呂)의 조부가 백제 인이다. 따라서 대불주조(大佛鑄造)도 백제인의 기술로 만들어 진 것이다. 오늘 일본이 제멋대로 역사며 문물을 자기들이 만들었다지만 실제는 우리 유민이 만든 것임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학자들 보다도 역사연구며 미술사도 뒤지고 있고 소홀히 다루고 있다. 그러니 미술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허구성과 기만성 경천동지할 일
백제에서 건너온 망명사관(亡命史官)은 신라에 백제가 망한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는 것 외에 새로 섬기게 될 일왕(日王)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일본이 BC660년에 ‘진무덴노(神武天皇)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의계보에서 나온 1대조로 일본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로 자리매김하고, 1000여년이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1대 진무덴노(神武天皇)에서 14대 츄우아이(仲哀天皇)까지 가공의 왕을 만들어 수명도 100년 이상 통치한 양 역사를 조작하게 된다. 이는 근래 세상에 나온 고서(古書)들에 의해 다 판명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BC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에 있었으며 금속문명은 도래하지 않은 야만인 상태였다. 최초의 거주민은 누구였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원시도구를 만들어 썼던 호모 사피엔스가 그대로 멸족했는지 아니면 그 다음 신석기 조몬(繩文)시대 인류는 모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알래스카까지 뻗어간 북방민족에 속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조몬토기(繩文土器)는 BC 3000년대와 그 보다 늦게 까지 분포한다. 일본 홋카이도 섬 북단에 남아 있는 아이누 족은 오랫동안 조몬(繩文)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본토인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니다.
일본서기를 쓰는 사관은 일본의 신생왕가를 오랜 왕가로 탈바꿈 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로 오랜 가계를 노래로 외우던 우리나라 세년가(歲年歌)와 같은 가다리베(語部)의 사람들의 것을 한자로 쓰는데 어려움이 많아 어떤 것은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서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모순과 오류는 그다지 괴이할 것도 없다. 그중 가장 큰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을 완전히 지울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최초의 왕조는 일부학자들이 ‘기마족(騎馬族)’이라고 하는, 4세기에 와서 일본에 등장하는 부족으로 바다건너 북쪽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 세기에 걸쳐 한국과 북쪽 끝에서 남쪽 까지 휩쓸었던 부여족으로 3세기경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녔던 이들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간 369년 무렵에는 가야와 백제에 많은 ‘시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바다건너 왜 땅 남서부로 건너간 많은 한민족들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왔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에 최초의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 집권체제와 기마병을 전수했다. 그러나 8세기 역사학자들의 임무는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이들이 이룩한 중앙집권국가를 당대 일왕 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음으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가능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000년을 조작하는 일본 역사가 나온 것이다.
한국의 선진문화 일본에 전수(傳授)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略史)에는 “일본에 논농사와 금속문화가 들어온 것이 BC 9세기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보다 500년을 앞당겨 쓴 것이다. 그리 또 일본 외무성은 “야마토정부(大和政府)는 5세기경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그 시기 일본 열도는 여전히 구석기 조몬시대(繩文時代)여서 철로 된 창이나 칼, 논농사도 없었고 대단위 정부조직도 없었다. 고고학을 연구하는 세계의 학자들은 이러한 일본 외무성의 역사기술이 웃음거리이나 일본인들은 이를 그대로 믿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온 문화, 논농사, 금속문화가 전래되고 수천 년 동안 수렵으로 먹고 살았을 뿐 이들은 논농사법과 옷감을 짜는 견직 기술과 금속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던 ‘일본의 한국에서’ 논농사법과 금속지식 등을 지닌 완전히 다른 혈통의 야요이종족(彌生種族)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조몬인(繩文人)을 밀어내고 규슈(九州)에 첫 정착했다. 이들의 가진 신기술은 일본 땅 절반을 넘어 동부 오사카(大阪), 나라(奈良)로 날로 퍼져나갔고 이들이 일본 야마토정부(大和政府)를 수립하게 된다. 이 때 토기 생산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규슈 고분에서 발굴되는 야요이인(彌生人)의 두개골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유사하다. 이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은 여러 곳에 한국문화의 본산지를 이루었다. 그 중 규슈지방 북쪽 해안의 이즈모(出雲)지방, 야마토로 알려진 오사카(大阪)지방, 나라평원(奈良平原)이 발달의 본산이다.
이 당시 일본에 대한 중국의 사서(史書) ‘한서’(漢書)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의하면 “왜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이들을 호칭한 말은 왜(倭), 난쟁이 족속, 그런 것인데 왜인들은 새해도 모르고 사계절도 모른다. 그저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한해를 가늠한다. 한족장이 다른 족장들보다 강력해 보인다. 규슈에 그 족장의 부족장이 있다.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고 여자들은 몸에 분홍과 붉은 물감 칠을 하고 길은 날짐승의 통로나 다름없고 좋은 논이 없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아 나무그릇에 담아서 맨손으로 집어먹는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중국기록도 3세기 후반 일본문명은 거의 원시나 다름없었다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당시 상류층은 조그마한 봉분형(封墳型)무덤을 만들고 청동(靑銅)거울이나 동검(銅劍) 동탁을 부장했다. 청동방울을 쓰는 한국인의 도래로 청동과 더불어 철기를 사용하며 지석(支石)을 세우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같이 한국에서 들어온 유민들은 낙후한 일본에 와서 쉽사리 지배층이 되어 보다 낳은 삶을 추구하는 한국유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민족주의란 개념도 없고 한국과 왜국에 대한 충성으로 대립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는 주요 수송통로이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한국유민들은 한국을 떠나와서도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며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율령국가(律令國家)로의 발전은 7세기에 와서다.
한국학자는 외국학자보다 뒤지고 있는 현실
코벨(Jon Carter Covell)과 앨런 코벨 두 사람은 한국의 고대사 가운데서도 가야유물(伽倻遺物)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채고 4세기에 바다를 건너 고대 왜를 제압한 가야와 부여족이 한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기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바쳤다. 미술사에서 비롯된 존(Jon)의 학문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을 가리키고 있다’, ‘고대사의 진실이다’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복잡한 근저를 파헤치는 엄청난 작업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서는 은폐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그 때까지도 몇몇을 빼놓고 학자들 다수가 그 같은 진실을 밝히고 가르치는 일에 ‘겁을 먹고 있다’. 고 존(Jon)은 갈파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집필 작업을 “타자기를 삽과 곡괭이로 삼아 한국문화의 광산에서 보물을 캐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에 당황한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학노들의 반발로 거의 쫓겨날 지경까지 됐지만 “그렇다면 더욱 본격적으로 파 헤쳐 보겠다(I’ II step it up”) 하면서 연구를 했다고 피력하고 있다. 코벨박사의 이런 연구과정에서 한국정부가 베푼 지원이나 배려는 없었다. 하물며 6개월마다 VISA갱신의 어려움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연구한 것을 발표하는데도 신분을 숨기느라고 조상4대의 이름을 빌려 가명으로 원고를 월간 ‘자유’에 발표 할 수 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럼에도 고작 한국인 학자는 대부분이 학자라면 누구라도 했어야 할 한국미술사나 역사의 추구를 게을리 하고 있음을 번역한 김유경 선생도, 편역자의 말에서 이를 개탄하고 있다.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 기마 족과 왜(倭)’ P1~13참조>
우리나라 학자라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사대주의 노예근성에서 못 벗어난 자가 많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나왔을 때 코벨(Jon Carter Covell)과 앨런 코벨 박사는 국내학자보다 더 진지하게 일본의 역사왜곡형태를 파헤치고 비판했다. ‘역사를 통해 본 일본의 역사왜곡’ 글에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학자들은 이에 못 따르고 있다. 때문에 일본인은 90% 이상이 자기나라의 진짜역사를 모른다. 진짜역사는 숨기고 왜곡된 역사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필자는 금년 6월 메이지(明治)대학 한국동창회에 참석한 일본인 리더와 대화하며 일본의 역사왜곡사실을 말하니 너무 놀라고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필자의 고증에 당황하며 ‘역사공부를 하고 와서 다음에 토론하자’고 해 그러자고 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한국에서 건너간 망명사관(亡命史官)들에 의하여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나오나 너무 거짓되고 과장되고 황당한 역사서로 각색된 것을 볼 수 있다. 진실은 30% 수준이다.
세계를 주름잡은 한민족 제대로 알아야
그러나 이 두 책은 8세기 당대의 일본 왕을 합법화 시키느라고 나온 서물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이런 역사 왜곡을 했느냐에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역사를 만들고 조작했기 때문이다. 일본 왕가가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밖에 안 돼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자가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 된 역사서가 없었다. 7세기에 역사서라는 것이 있었으나 왕권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 버려 일왕은 백제에서 망명 온 학자들에게 ‘일본서기’를 편찬토록 했다. 그러나 그 역사서는 너무 허구성이 많은 역사서이다. 일본은 있지도 않은 ‘391년 왜군이 조선에 출병하여 고구려와 싸웠다’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를 한국에 두었다’ 등 너무 큰 거짓을 저지르고 있다. 맹랑한 일본사를 보노라면 기가 찬다. 허위투성의 조작된 위조역사(僞造歷史)는 역사가 아니다. 이런 역사만을 역사로 알고 수치를 모르는 일본인을 보노라면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일본의 야만적인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강탈당한 것 외에는 한 번도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라요 일본에게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준 국가이다. 그러나 일본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나라의 범주를 못 벗어나는 족속임을 오늘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고대부터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중앙아세아 중국, 한반도 일본,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 인도, 카자흐스탄 등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지도한 민족이다. 신라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許皇后)와 결혼한다. 이 허 황후는 자기 성을 달라 해서 허씨(許氏)가 나왔다. 그래서 김 씨와 허 씨가 결혼을 안 하는 이유는 여기서 발단한다. 허황후(許皇后)는 김수로왕과 사이에 10명의 아들과 딸 둘을 낳는다. 또 고대 물고기 그림이 문 아치에 있는 것도 우리와 같은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물고기 그림도 파키스탄, 중국 운남 성 사천에도 물고기 그림 있고, 레바논 시리라 예루살렘에도 이 물고기 문화권에 있다. 제주의 돌하르방도 남방에 유래하며 인도네시아 발리에 하르방(할아버지) 하르망(할머니)도 있다. 어린것도 있다. 우리는 한국계계절풍을 이용해서 방글라데시 까지 항해 BC 650년경 마랏카 해협을 넘어 동남아에도 그보다 더 멀리도 왕래했다. 손문(孫文) 석가(釋迦)도 한국계계절풍을 이용해서 방글라데시까지 항해 BC 650년경 말래카 해협을 넘어 동남아에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손문도 석가도 중국이나 인도 사람이 아닌 우리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사실은 이미 기술한 대로다. 그리고 중국발상의 문화 기원은 한국이다. 이런 역사 사실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탈을 우리는 제대로 막고 바로 역사를 되찾아 가야 한다. 천신신화(天神神話)도 유목민에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선생의 한국고대사 서물들과 ‘부여 기마 족과 왜(倭)’를 참조 인용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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