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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신라가 공포였던 일본

송화강 2019-05-05 (일) 17:14 6년전 8892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신라가 공포였던 일본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6-22 00:52:08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가야의 식민지였다
 
필자는 중국과 일본이 날조·왜곡한 역사에 대한 원고를 쓸 때마다 탈고를 하고 나면 미흡함을 느끼곤 한다. 오늘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지배했다고 하는 미마나(任那)의 허황된 주장에 대한 글을 보충해서 쓰고자 한다.
 
가야(伽倻)는 일본건국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건국 후에는 백제와 더불어 많은 사람이 건너가서 분국(分國)인 미마나(任那)를 세워 많은 문화전수(文化傳授)를 했다. 이는 일본에 가야라는 지명이 수없이 생기게 된 배경이었다. 일본 땅에 가야(伽倻)라는 이름이 많은지는 이로써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미마나부(任那府)를 한국에 두어 자기들이 한국을 통치했다고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지만 이는 허구이며 날조임을 거듭 밝힌다. 당시 왜의 문화수준은 구석기시대인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머물러 중앙집권화 된 통치행정능력이 없었음은 물론 우리와 비교가 안 되는 야만의 상태였다.
 
하지만 최근 임나의 위치에 대해 이설(異說)이 있음으로 먼저 임나(任那)의 위치부터 밝히고 가려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23년조(條)(註)에 임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10국의 총칭이라고 했다. 또 해동역사(海東繹史) 권제사십일 통일본시말(卷第四十一 通日本始末)에 보면 ‘임나(任那)의 본명은 가라(加羅)요, 대 가락국(大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건설한 나라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二)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대가락국(大駕洛國)은 가야국(伽倻國)이면서 6가야(伽倻)의 하나인데 동은 황산강(黃山江=낙동강), 서남은 창해(滄海=동해), 서북은 지리산(地理山=智異山), 동북은 가야산남(伽倻山南)으로 그 끝을 각각 삼았다고 돼 있다. 신라가 대 가락국을 합병한 후에 김관경(金官京)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칭했다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卷二)에는 김수로왕이 건설한 김관국(金官國)의 일명(一名)이 가야(伽倻)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김해경(金海京)이라고 개칭했다고 했다. 이 가야 혹은 가라(加羅)는 신라보다 1백년 늦게 낙동강 중하류에서 고조선의 제후국인 한(韓)의 지배를 받던 변한(弁韓)지역에 세워진 6개 부족국가들이 세웠다. 이 6가야 중에서 지금의 김해지방에 위치한 금관가야(金官伽倻)가 맹주국(盟主國)이 돼 안으로 결속을 굳게 했다. 이 가야를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미마나(任那)로 부르고 있다. 금관가야는 당시 쇠와 농산물이 풍부해 가야국에 와서 교역을 하던 왜국에 진출, 일본에 임나(任那)라는 분국(分國)을 만들고 그들과 연맹해 신라와 백제에 대항했다. 임나는 가라(加羅) 대가락국(大駕洛國)을 중심으로 구성된 왜 땅에 건설한 가야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일본은 이를 뒤집어 왜곡해 오고 있다.
 
선진문화전수(文化傳授)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다
 
일본문화사 제1편 상고(上古)편 중 ‘나라시대(奈良時代), 제8장조선반도와의 관계(朝鮮半島との關係)’를 보면 ‘일본부(日本府)라는 말은 일본이 21대 왕이라는 유우라쿠(雄略) 천황기(天皇紀)에 비로소 나온다. 또 이 명칭이 어느 때에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노우에(井上秀雄)씨는 조선사 입문에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명칭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어서 신라·백제계의 사료(史料)에만 있고, 일본 측의 사료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이 없다고 했다. 이는 일본이 우리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이 임나(任那)를 지배 통치했다는 기록도 없거니와 이 당시 일본은 씨족사회시대(氏族社會時代)로 소부락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도 통일하거나 통치하지 못한 일본이 조선술이나 항해술이 미개한 때 멀리 해외에 진출해 일본보다 문화와 무력이 월등하게 발달한 가야(伽倻=임나·任那)를 지배 통치했다는 것은 허구의 날조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일본을 지배통치한 것을 군국주의 일본이 침략적 사기를 북 돋기 위해 위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가야, 신라, 백제를 정벌했다 주장하고 있으니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역사왜곡이다.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이 유우라쿠(雄略紀)와 킨메이(欽明紀)에 보이는데, 일본 왕 21대라는 유우라쿠(雄略)은 왜왕 무(武)로 왜왕 무시대(武時代)에 고구려가 5세기 일본을 정벌하니 일본은 고구려에 대항치 못해 송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소위 일왕 29대 킨메이(欽明)시대에 신라가 일본을 누르고 일본에 있는 임나를 탈취했다. 일본부(日本府)는 우리 한민족 가야가 일본에 분국(分國)을 두어 통치한 정부기관이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의 허황된 왜곡역사를 믿지 않는다. 화가삼태랑(和歌森太郞) 교수는 ‘야마도(大和) 조정이 진구우 후(神功后)가 삼한을 정벌했다 함은 무엇인가’라고 했다. 아울러 나오기 고지로(直木孝次郞)는 1971년 8월 16일 매일신문 지상을 통해 ‘일본의 허상과 실상(日本の虛像と實像)’에서 말하기를 4세기말~5세기 초에 왜는 고구려에 대한 문제로 가장 고심했는데 삼한정벌은 주로 신라에 대한 전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의심했다. 399년 가야와 왜에 시달리던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다. 이 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가야를 치고 바다를 건너가 왜를 함락한 때다. 이때에 진구우 후(神功后)가 삼한을 정벌했다 함은 가당치 않다. 종이에 기록해서 옮긴다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구우 후(神功后)도 실재인물인지 확실하지 않다.
 
신라가 왜를 정벌했는데 왜가 신라를 정벌했다고 조작
 
삼한을 정벌했다는 진구우 후(神功后)도 실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많은 일본 학자의 견해다. 이노우에(井上光貞)씨는 일본국가의 기원(日本國家の 起源)에서 황실계도(皇室系圖)는 오우진(應神)까지 대략 신용하고 오우진(應神)의 부모인 츄우아이(仲哀)와 진구우 후(神功后)는 의심스럽다는 것이 사학자 津田氏 이래의 정설로 돼 있다고 언급했다. 고대 일본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일본을 지배했다. 이 바다를 지배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었다. 이 당시 일본은 바다 지배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스가하라(菅原道具)가 견당사(遣唐使) 폐지를 해야 한다고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동해에서 신라해병에게 피습될 위험이 큼으로 견당사(遣唐使)를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中村新太郞)箸 ‘日本と 中國の 二千年’ 260면)]. 이는 신라가 동해를 지배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신라 해병을 방위하기 위하여 정병을 동원해 추토(追討)하고자 했으나 모든 사람이 신라 해병을 두려워 해 도피함으로 부득이 죄수를 징발해 방위했다고 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진구우 후(神功后)가 신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고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두려워 고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일본이 신라를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한 까닭이다.
 
동사각목(東史綱目 第二卷上,儒禮王 12年)에 보면 김세겸(金世鎌)에 ‘오우진(應神)천황 22년(291)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大阪)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고 했다. 이 같이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한 일이 있어 일본이 신라를 크게 두려워한 것이다. 진구우 후(神功后) 정벌 설은 시전비궁장(詩傳閟宮章)과 같은 기원사(祈願辭)이다. 비궁장(閟宮章)은 노(魯)나라가 한민족(韓民族)의 강력한 예맥(銳麥)을 정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맥(銳麥)이 도리어 노(魯)나라를 정복했다. 그런데 예맥(銳麥)의 정벌에 고민하는 노(魯)나라가 예맥(銳麥)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은 것이다.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저항치 못해 신사(神社) 불각(佛閣)에 기도할 때에 신(神)의 조화(造化)로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어 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구우 후(神功后)의 정벌 설은 도리어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하고 일본이 인력(人力)으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지 못한 고심(苦心)을 폭로한 것이다. ‘일본의 2000년/신화시대~근세’에 보면 ‘886년에 건아이하(健兒以下)의 병사를 동원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 할뿐 아니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서국각지(西國各地)에 배치하고 신라를 바라 볼 수 있는 고지에 사원을 세우고 경승왕경(景勝王經)을 독경(讀經)해 불(佛)의 보호에 의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지코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가야의 식민지 통치한 정부기관
 
이에 대한 방증으로 869년 5월에 신라의 해적선 2척이 하카다항(博多港)에 침입하니 일본 정부는 신라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높아서 신라를 두려워하던 일본정부는 신라에 대한 공포심이 높아 대재부(大宰府)의 관리를 질책(叱責)해 이방면의 군비를 증강했다. 또 이세다이징구(伊勢大神宮)와 石淸水八幡宮에 각각 칙사를 보내고 폐백(幣帛)을 봉수(奉修)하고 각지 사원(寺院)에 금강반약경(金剛般若經)을 수법(修法)해 신라의 침입을 방위코자 했다. 신라 쪽에서 고성(鼓聲)만 들려도 왜는 크게 신라를 두려워했다. 또한 왜는 대신궁(大神宮)(宇佐八幡宮)을 비롯해 여러 신궁(神宮)과 불상(佛像)과 산능(山陵)은 물론 전국신사(全國神社), 불각(佛閣)에 칙사(勅使)를 파견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하는 기원(祈願)을 했다고 한다. 신라가 두려워 공포에 떠는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였다 함은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지 못한 고심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한반도의 세력은 미개한 일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기 면이나 말(馬)을 사용한 기마군 병의 위력은 일본이 따를 수 없는 군세(軍勢)였다. 이런 신라의 강한 군세(軍勢)에 열세의 일본이 열등한 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염원일 뿐 일본이 신라를 침입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실정으로는 불가능한 일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왜의 상황에서 일본이 가야(任那)를 지배했다는 것은 개가 웃을 일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우리민족이 일본을 통치한 정부기관이다. 가야론(伽倻論)에서 주의 할 점은 일본인들이 가야(伽倻)가 562년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에 흔히 가야와 신라를 같은 나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야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왜는 가야를 임나(任那=미마나)로 부르며 옛적에 가야 인이 규슈(九州) 등에서 만든 가야의 식민지 미마나(任那)와 혼동하고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180도 다르다. 그런 잘못 된 생각으로 가야를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로 잘못 부르는 것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그들이 떠나간 고향이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이 설치됐던 곳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찍이 가야국의 유력한 사람들이 왜의 땅으로 건너가서 일본국 건설에 참여했다. 이들은 가야가 이미 망해 신라에 병합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떠나온 한반도 안의 일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살았던 구역을 엉뚱하게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옛 고국을 회복하는 일을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우리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라면 역사를 왜곡변조하며 자랑하는 일본사가(史家)가 대서특필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부의 명칭이 신라 백제계의 사료에만 있고 일본 측의 사료에 없는 것을 보면 일본부는 일본이 우리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우리민족이 일본을 통치한 정부기관이다.
 
조작된 일본역사 거짓과 과장으로 포장
 
일본역사에 있어서 임나문제의 기원은 10대 왕 수진덴노(崇神天皇) 65년 7월에 ‘임나가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했다’는 조문(條文)인데 이 외의 다른 곳에서는 일본이 가야(임나)를 지배·통치했다는 기록이 없다. 일본사가(史家)들은 수진덴노(崇神天皇) 65년 7월에 ‘임나조공 설’을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통치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전부 허구이다. 최초에 일본을 개국했다는 진무(神武)도 조작·허구이거니와 이 수진덴노(崇神天皇)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수진덴노(崇神天皇) 시대는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씨족시대로 일본 국내도 통일·통치하지 못했다. 이 같은 일본보다 문화며 무력이 앞선 선진국인 가야(任那)를 일본이 지배 할 수 없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소위 29대 킨메이(欽明) 일왕이 571년 대담하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일본이 임나라고 부르는 가야를 멸한 이유를 묻고 “신라를 쳐부수고 임나를 다시 세우라고 유언했다”고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일본사서(日本史書)에는 가야국이 완전히 멸망해 신라에 병합된 562년 후에도 조공이니 공조니 하는 것을 600년까지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허황된 역사를 믿는 일본은 그 허황된 역사라도 믿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러한 일본인들이 임나지배의 꿈을 완전히 버리고 아주 단념한 것은 나당연합군에게 폐망한 38대 덴지덴노(天智天皇) 이후였다고 한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일본민족 상당수가 우리와 같은 조상을 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이다.(DNA 검사결과도 말해준다) 우리가 본체이고 일본은 역사적 우연에 의해 떨어져 나간 종족으로 역사의 깊이가 다르다. 또한 정신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조상의 주 발상지는 바로 우리나라이고 국가성립과 문화와 문물제도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가 없이 우리나라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일본은 점차 발전했다. 그렇긴 해도 현재의 일본이 한국이 아닌 것처럼 현재의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다. 우리는 과거 수천 년 동안 일본을 어미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은혜로, 때로는 망나니같이 나올 때는 위엄으로 대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은혜를 잊고 과거 자신들의 유민이 된 원한을 골수에 품고 있는 민족이다. 특히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한국사를 질시해 온 그들은 고대사를 5천년 이상 잘라버리고 ‘한국은 약한 민족’으로 이민족을 침략한 사실이 없다’는 등 무기력한 민족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조작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금도 강단파 학자라는 자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다. 이는 미친 짓이다. 이 날조의 앞잡이가 교토대학의 조교수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인데, 그는 한국사는 신라부터 시작이라고 당치도 않은 설을 주장했다. 이런 미친 자의 조작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리 실정이 너무 안타깝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침략사관’과 역사왜곡은 너무나도 비사실적이며 역설(逆說)이다. 그 정도가 과감한데 놀라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우리나라 학자 중에는 연구는 하지 않고 이 이론을 맹신하는 자가 있음은 통탄 할 일이다.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강점을 전후해 우리에게 끼친 해악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지금도 옛날의 그 행악한 속성은 변하지 않고 은혜는 잊고 망언으로 우리를 대하는 일본이다. 참으로 못 말리는 민족이다. 이럼에도 아직 ‘조선사편수회’의 역사만을 믿는 강단파의 학노(學奴)들의 수준에서 안주하고 변함이 없는 것은 비극이다. 이들은 국가 요직을 독점하고 한국역사의 연구예산은 모두 쓰면서도 일본이 깔아놓은 ‘식민사관’과 ‘황국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의 주구노릇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시정 못하는 정부 역시 너무 무관심 한 것 같다. 일찍이 우리민족은 중국대륙과 만주와 한반도를 먼저 선주(先住)한 주인이며 찬란한 1만년의 역사인 환국(桓國)의 시대를 갖고 있다. 물론 고조선의 임금이던 단군들은 실제 인물이다. 저 광활한 대륙과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정벌하고 1만 년 전부터 이 광활한 세계를 호령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을 후손들은 잊지 말고 그 뒤를 이어야 한다. 우리는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변조’ 및 ‘역사왜곡’을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요직만을 탐내며 만족하는 벙어리가 다 돼 있는 사람들도 한민족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진정성 있게 나서야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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