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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숙신씨(한민족)는 고대 대국가 [2]

송화강 2019-05-05 (일) 17:16 6년전 9691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숙신씨(한민족)는 고대 대국가 [2]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5-25 07:33:1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숙신씨(肅愼氏)는 한민족의 상징이며 고대 대국가였다
 
오늘은 우리역사의 올바른 사실을 알기 위해 단군조선의 신화와 숙신씨(肅愼氏)에 대해 최태영 선생과 최인선생의 연구를 참고해 살펴보려고 한다. 진서각주(晉書斠注-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四夷)에 보면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이고 백두산에 거주한다고 했다. 숙신씨(肅愼氏)는 하(夏), 은(殷), 주(周) 3대 이전에 중국과 떨어진 동북지대 일대에 대국을 건설해 지금의 길림성 동쪽 모든 지방을 모두 차지했다. 한날시대에 읍루가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영토에 진출했으나 읍루(挹婁)의 본부는 숙신씨(肅愼氏)의 서쪽에 있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조영이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오루하(奧婁河)를 점거한 후 오루하(奧婁河)가 읍루(挹婁)로 전음(轉音)됐다. 즉, 읍루라는 명칭은 오루하(奧婁河)라는 명칭의 변화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 일명이 읍루(挹婁)라 함은 그릇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는 순(舜) 하후(夏后)시대부터 저명한 대국가다. 읍루(挹婁)의 명칭은 후한서에 비로소 보이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군주의 제도가 없고 부락마다 추장이 있을 뿐이다. 읍루(挹婁)는 숙신씨(肅愼氏)의 영역에 속한 하나의 부족이었을 뿐 국가의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읍루(挹婁)가 인구 증가로 각지에 부포되고 숙신씨(肅愼氏)는 점차 쇠퇴해 읍루(挹婁)를 견제치 못하고 읍루(挹婁)가 숙신씨(肅愼氏)의 영토에 진출했다. 이 같은 유래를 모르고 숙신씨(肅愼氏) 일명(一名)이 읍루(挹婁)라 함은 큰 오류다. 이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순(舜)의 25년 숙신씨(肅愼氏)가 궁시(弓矢)를 중국에 수출했다고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서(晋書)에 숙신(肅愼)의 일명이 읍루(挹婁)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서각주(晉書斠注-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四夷)는 오사감(吳士鑑), 유승간(劉承幹) 두 사람이 진서(晉書)에 주해(注解)를 하고 있다. 즉, 진서(晋書)에 숙신(肅愼)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라 기록한 것은 그릇된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는 4300년 전에 저명한 문화국이요 읍루(挹婁)는 후한시대에 비로소 나타나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숙신씨(肅愼氏)의 일명이 읍루(挹婁)라 한 것이 그릇된 것이라 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는 우리 한민족의 상징이며, 또한 당시 대국가(國家)를 지칭하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는 고도로 발전한 국가였다
 
동이족에 문화계와 야만계가 있다. 숙신씨(肅愼氏), 고죽국(孤竹國), 부여(夫餘), 고구려가 문화계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숙신씨(肅愼氏)는 존경할 민족이요 특이한 민족이라고 했다. 이는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숙신씨(肅愼氏)는 4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수서(隨書-卷六十七, 列傳 第三十二 裵矩)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고죽국에는 문화가 고도로 발전해 백이숙제(伯夷叔齊)같은 군자가 출생했다. 그리고 고죽국은 3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에 부여는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배작(拜爵), 세작(洗爵), 읍양(揖讓)의 예의가 있다고 했다. 이는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는 2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대개 부여가 고죽국의 문화를 계승하고, 고죽국이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를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 함은 고구려가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를 계승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숙신(肅愼)이 우마(牛馬)를 사랑하였는데, 고구려가 우마를 죽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숙신의 문화를 계승했다는 반증이다.
 
또한 수경주석(水經注釋)에 진시왕(秦始王) 22년 연(燕)을 분할해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니 영지(令支)가 예속됐다. 영지는 본래 고죽국이라 했다. 요사(遼史-卷四十, 志 第十, 地理志四)에 ‘평주는 은나라시대에 고죽국(고죽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산융국(山戎國)이라 칭하고 진(秦)나라시대에 요서우국평이군(遼西右北平二郡)을 설치했다’고 했다. 그런데 통전변방문 동이(通典邊防門 東夷(序略)에 진세(晋世)에 백제가 요서, 진평이군(晋平二郡)을 점유했다고 했다. 이는 백제가 고죽국을 직접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는 중국에 광역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고찰하면 한민족은 문화계로서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야만계(野蠻系)는 읍루(挹婁)를 비롯해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 등은 배를 타고 타민족을 침략하고 추월(秋月)에 독약(毒藥), 전시(傳時)를 만들어 짐승을 학살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오줌으로 얼굴을 씻는 추악한 생활을 했다고 동이고략(東夷考略-第1面)에 나와 있다. 요컨대 동이족 중 문화계(文化系)와 야만계(野蠻系)를 구분하면 한민족(韓民族)이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계승하고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 등이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이 자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단국신화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를 묘사한 것
 
단군(檀君)에 관한 여러 신화(神話)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역사적 신화는 허공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실생활을 근거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단군신화가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과 완전히 부합된다. 단군(檀君)이라는 명칭은, 임금이라는 뜻도 있으나 여기서의 단군은 단궁(檀弓)을 잘 쏘는 무사(武士)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진서(晋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단궁(檀弓)을 사용했다고 했다. 단군신화는 환국시대(桓國時代)부터 있는 신화로 단군조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사편수회’는 단군조선 때인 것으로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그 역사가 태백산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런데 산해경(山海經) 별문(別文)에 숙신씨(肅愼氏)가 백두산에 살았다 하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진서(晋書, 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 四夷)에도 백두산에 거주한다고 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출발점이면서 세계로 뻗어간 우리 한민족의 근원지인 효시가 되는 곳이다. 단군조선의 신화에도 4300년 전에 이곳서 개국했다고 했다.
 
그런데 죽서기년 권상(竹書紀年 卷上)에 숙신씨(肅愼氏)가 순(舜) 25년에 만 여리(萬餘里)나 동 떨어진 중국에 궁시(弓矢)를 수출했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어느 민족보다 선진대국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진서각주(晉書斠注)에 숙신씨(肅愼氏)가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한 것이 단군이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했다는 신화로 표현된 것이다. 단군신화에 단군이 산신(山神)이 됐다함은 산악을 존중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앞서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동북산(東北山)에서 석족(石鏃)을 채취 할 때에 반드시 먼저 신에 기도한다고 했다. 산에서 생산되는 석족(石鏃)을 위해 기도하는 신은 수신(水神), 화신(火神), 일신(日神), 천신(天神)이 아니고 산신(山神)이다. 또 신화(神話)에 호랑이와 곰이 한 굴에 살았다 함은 짐승도 평화를 사랑해 싸우지 않고 한 굴에 사는 도덕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단군신화에 형(刑)을 주(主)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기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도둑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단군시대에 편발(編髮)했다고 했는데, 전기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편발(編髮) 했다고 했다.
 
단군신화의 특징은 숙신씨(肅愼氏) 실생활 묘사한 것
 
단군신화에 일대 특징이 있다. 그것은 평화세계다. 인류사상 상고부족시대는 평화가 없는 시대다. 많은 부족이 사방에 분립하고 불합리한 감정으로 상대하므로 부족투쟁이 격렬했다. 또한 사방에 있는 맹수와 독사를 방위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맹수·독사의 화가 참혹했다. 또한 상고시대는 기후가 안정되지 못하므로 때로는 장마가 장기간 계속돼 대홍수가 산야를 휩쓸었다. 홍수를 막을 기술이 발달되지 못해 홍수의 피해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신화(神話)는 부족투쟁, 맹수·독사의 화(禍), 홍수의 해(害)로 장식한 불 평화세계였다. 그런데 한민족(韓民族)의 단군신화에는 불 평화세계에 관한 문구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도리어 신이 인간이 되기를 원해 신인(神人)이 화합하고 곰이 사람되기를 원해 곰과 사람이 화합하고 홍익인간을 제창해 인간을 사랑하고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주장, 세계를 침략하지 않고 교화(敎化)한다고 했다. 그리고 홍수의 해가 전혀 없었다. 이는 인류사상 독특한 신화다. 역사적 신화는 실생활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가족 중 평화적 실생활을 가진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전기(前記)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는 도둑이 없음으로 재물을 들에 방치하고 나무를 사랑해 나무껍질로 의복을 만들고 소와 말을 사랑해 우마가 3년 동안 졸고 있었다 했다. 후한서에는 숙신씨(肅愼氏)는 오곡과 마포가 있고 적옥(赤玉) 호초(好貂)가 생산된다고 했다. 이는 침략하는 살벌함이 없음으로 국민이 낙토안업(樂土安業) 해 생산에 힘쓰는 평화세계를 이룩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숙신씨(肅愼氏)가 타 민족과 투쟁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홍수의 피해 맹수 독사의 화를 당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상은 숙신씨(肅愼氏)의 평화세계를 전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상고부족시대에 단군신화와 같은 평화적 세계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서 볼 수 있고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와 같은 평화적 세계는 오직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다. 그러면 단군신화는 분명히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다. 다시 단군신화에 천신이 한국 땅을 내려다보고 ‘홍익인간’을 말했다고 했다.
 
홍익인간 이념을 지닌 우리 한민족이 인류평화의 맹주다
 
홍익인간은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는 박애(博愛)다. 박애는 편협한 민족애가 아니고 광범위한 인류애다. 또한 천신(天神)은 세계를 상대하는 것이지 한 지방을 상대하지 않는다. 세계를 상대하는 천신(天神)이 한국 땅을 내려다보고 인류애를 말한 것은 한국 땅을 중심으로 인류 평화를 이룩한다는 뜻이다. 즉, 한민족(韓民族)이 인류평화의 맹주(盟主)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4300년 전은 모든 원시민족이 몇 백리 소부족 생활을 하는 시대다. 이 시대에 숙신씨(肅愼氏)가 궁시(弓矢)를 중국에 수출해 무력이 만 여리에 떨치는 대국으로 등장했다. 이 같은 대국이 인류의 대표라고 자처했던 것이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숙신씨(肅愼氏)가 분명한 동이족이다. 동이족 중 한민족이 숙신씨(肅愼氏)의 주류이고, 다시 숙신씨(肅愼氏)가 한민족에 합류해 완전한 한민족으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이족 중 한민족(韓民族)과 숙신씨(肅愼氏) 가 동일한 문화계(文化系)라는 사실을 살펴봤다.
 
그러면 한민족이 숙신씨(肅愼氏)요, 숙신씨(肅愼氏)가 한민족이란 결론에 이른다. 위대한 숙신씨(肅愼氏)가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식민사관에 절여있는 우리의 암적 존재인 식민사관을 탈피하는 길이며 이것이 서곡(序曲)이다. 회남자(淮南子 地形訓)에, 해외 36국 중에 숙신민(肅愼民)이 있다 하고, 그 주(註)에 숙신씨(肅愼氏) ‘일일 숙경야 신이야’(一日 肅敬也 愼異也)라고 했다. 즉, 숙신씨(肅愼氏)는 존경할 민족이요 특이한 민족이라는 일설(一說)이 있다고 한 것이다. 고대 한족(漢族)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씨(氏)라는 존칭을 붙인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에 대해 이례적으로 씨(氏)를 붙여 숙신씨(肅愼氏)라고 존칭했다. 이는 바로 존경할 민족이요 특이한 민족이라는 표시다. 고대 한족(漢族)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을 이 같이 우대한 원인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는 한민족이 최초의 문화민족으로 등장하고, 최초에 강대 족으로 등장한데 있다. 한민족(韓民族)이 최초에 문화민족으로 등장하고 강대한 민족으로 등장한 역사에 관해서는 이미 본 기획시리즈 원고 32편 등에 기술했다. 이러한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에 대해 폄하하는 중국과 일본은 이제 그 수치스러움을 알아야 한다.
  
Marcus Tullius Cicero는 “역사가의 제일 계명(誡命)은 결코 감히 허위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로, 진실한 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아가 그의 저술 속에서도 “편견과 악덕의 기미가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과 작금 광기의 망언들은 허위를 말하고 진실을 억압하며 편견과 악덕이 난무하는 추태다. 이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역사의 진리를 망각한 행태다. 여기에 무사안일과 개인의 영달만을 탐하며 중국과 일본의 왜곡되고 변조한 허구의 역사만을 신봉하는 학노(學奴)들이 있다. 칼라입은 “역사는 사가(史家)가 현명한 만큼, 그리고 안식과 기백(氣魄)을 타고난 만큼 완전하다”는 말을 했다. 학노들은 이를 외면하며 역사가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해 바른 것을 말해 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와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이들은 연구는 외면 한 채 중국과 일본의 왜곡역사에 안주하고 있다. 이것은 큰 문제다. 정부도 ‘역사는 지나간 정치요 정치는 현재의 역사이며 역사는 미래까지도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대수술을 실천해 주기를 기대한다.
 
“역사는 풀지 않은 예언의 두루마리다”고 한 James Garfield의 말과 “모든 역사는 똑똑히 말 못하는 성서다”고 언급한 칼라일의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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