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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중·일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동북아 시조 숙신씨(한민족)

송화강 2019-05-05 (일) 17:16 6년전 9673  

중·일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동북아 시조 숙신씨(한민족)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5-18 18:29:4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인류역사의 시대구분과 한민족의 본원(本源)
 
인류역사는 사람에 따라 그 시대 구분을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류역사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전기시대, 원자시대, 우주시대, 지식정보화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고대국가 건설을 한 4300년 전은 석기시대로 이 시대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돌과 철을 파괴하는 고시(楛矢)·석족(石鏃)과 다른 민족에게 없는 대궁(大弓)을 만들었다. 또한 인류역사는 씨족시대, 부족시대, 부족연합시대, 귀족시대, 군주시대, 민주시대로 발전해 왔다. 우리 한민족이 나라를 세운 4300년 전은 또한 씨족시대, 부족시대이다. 이 시대에 동서민족이 몇 백리 안에서 작은 소부락을 이루어 생활을 했다. 이 때 우리는 어느 민족보다 먼저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 운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우리보다 뒤늦게 나라를 이룬 중국을 지배하며 만 여리나 되는 지역까지 궁시(弓矢=활과 화살)를 수출한 대 민족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민족(韓民族)의 본원(本源)인 숙신(肅愼氏)의 역사에 명기(明記)돼 있다. 이 같이 우리 한민족은 최초에 인간을 발견한 문화민족이요, 최초에 경이적인 무기를 만들어 최초에 만 여리에 떨친 강대 민족이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역사적 민족인 우리 한민족에 대해 중국이나 일본이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역사적으로 선진민족인 한민족을 폄하하는 역사왜곡은 인류의 올바른 역사를 뒤엎는 범죄행위이기에 용납할 수 없는 야만행위다. 우리 역사는 문자시대에 진입이 안 된 시대부터도 세년가(世年歌)를 통해 역대의 사적을 엮어 가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했음도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또한 우리 민족의 본원을 찾아보면 한민족의 본원은 숙신씨(肅愼氏)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위대한 숙신씨(肅愼氏)가 한민족의 본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한국사 탐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사에서 숙신씨(肅愼氏)에 관한 연구가 미진하고 이를 그대로 간과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연구방향을 모르는 것이 된다. 아울러 이는 위대한 우리의 자아(自我)를 발견치 못하는 것이기에 숙신씨(肅愼氏)에 대해 문헌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숙신씨(肅愼氏)에 관해서는 중국고서에도 나와 있으므로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숙신씨(肅愼氏)는 동이족으로 한민족의 본원
 

 ▲ 고대 우리민족(韓民族)은 국가 건설을 시작한 기원전 4300년 전에 돌 화살촉(석족·石鏃)이나 고시(楛矢, 화살)를 만들어 아시아 1만여리에 지역에까지 수출했다. 지금으로 보면 첨단무기 수출이다. 그만큼 우리의 고대국가가 강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황하문명 보다 빠른 요하문명의 발원지인 만주의 고조선 지역에서는 BC2400여 년 전 청동기 유물도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족과 청동기 유적.  ⓒ스카이데일리

우리의 시조는 누구인가에 대해 최인 선생은 숙신씨(肅愼氏)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한 최인 선생의 주장을 중심으로 글을 써가고자 한다. 중국에서 고서 중 가장 중요한 책은 삼국지와 후한서(後漢書)로 본다. 후한서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와 글자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서적이다. 얼마나 역사의 문헌이 없기로 이런 서적을 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 숙신씨(肅愼氏)에 관해 쓰여 져 있는 내용이 있다. 삼국지(三國志-魏志 卷三十, 東夷)에 동이유숙신(東夷有肅愼)이라고 기록하고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족이라고 했다. 또한 후한서 동이전에 숙신래헌석노고시(肅愼來獻石砮楛矢)라고 했다. 즉,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전에 기입했다. 또한 진서(晋書)에도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전에 기입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숙신씨(肅愼氏)는 동이족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점은 고대 부족시대에 동이족도 여러 부족으로 분파돼 분립한 것을 알 수 있다. 관자(管子-小匡 第二十)에 보면, 관자에 도하(屠何)가 동이의 선(先)이라 하고 고죽(孤竹)을 참(斬)하니 구이(九夷)가 항복했다고 했다. 이는 고죽국(孤竹國)이 동이(東夷)에 속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또 진서각주(晉書斠注-卷三 帝紀第三)에 보면 동이(東夷)가 백여국으로 분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사(中國 古史)에 보면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도 동이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동이족이 여러 부족으로 분파·분립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동이족 중 4300년 전에 나타나 중국문헌에 오른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뿐이다. 그러면 숙신씨(肅愼氏)는 모든 동이족의 시조이다. 발해국지 장편(渤海國志 長編-卷十六, 族俗考 第三)에는 ‘근세 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모두 숙신(肅愼)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肅愼氏)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에서 분파된 동이족 중 숙신씨(肅愼氏)의 정통을 계승한 자가 바로 한민족(韓民族)이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卷一,地理志)에 보면 예맥(銳麥)은 동이(東夷)의 해상(海上)에 있다. 다시말해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에 모(貌)로 기록됐는데, 호문(籇文)·초문(草文)을 해석한 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숙신지명(肅愼之命)은 중국고서(中國古書)에 편명(篇名)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우리 한국에서 볼 수 없다. 때문에 그 내용은 미상이고 아울러 소개 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숙신(肅愼)을 맥(貊)으로 보고 있다.
 
숙신(肅愼)이 동이족의 시조(始祖), 예맥(銳麥)은 동이족의 주체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 상에서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에 모(貌)로 기록했다고 한 것은 숙신(肅愼)을 모(貌)로 기록했다는 뜻이다. 석문(釋文)에는 이를 맥(貊)이라고 풀이했다. 즉, 숙신(肅愼)이 예맥(銳麥)이고 예맥(銳麥)이 숙신(肅愼)이라고 가리킨 것이다. 서전(書傳)에 ‘주무왕(周武王) 당시 숙신씨(肅愼氏)의 하고 화살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서(同書) 무성편(武成篇)에 주무왕 당시 예맥(銳麥)이 한족(漢族)과 병칭(竝稱)돼 있다. 그러면 숙신씨(肅愼氏)와 예맥은 동일한 시대에 존재했다. 숙신씨(肅愼氏)는 동이족의 시조요, 예맥은 동이족의 주체이다. 동이족의 시조와 동이족(東夷族)의 주체가 동일한 시대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숙신(肅愼)이 예맥(銳麥)이고 예맥(銳麥)이 숙신(肅愼)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할 수 있는 방증이다. 이후 숙신씨(肅愼氏)와 그 지파(支派)가 부여, 고구려에 합병돼 완전한 한민족(韓民族)으로 성장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숙신씨(肅愼氏)의 분파인 읍루(挹婁)가 한나라가 흥한 후 부여에 합병됐다’는 내용이 있다. 또 진서각주(晉書斠注-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四夷)에는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肅愼)·읍루(挹婁)를 합병했다.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략 할 때 그 이십사군(二十四軍) 우익에 숙신도(肅愼道)가 있는 것을 보면 숙신이 고구려에 합병된지 이미 오래다’라는 기록 역시 있다. 송서(宋書-卷九十七,列傳 五十七)>에 보면 ‘고구려가 숙신씨의 고시(楛矢)·석족(石鏃)을 중국에 수출 했다’고 하고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太祖) 8년 12월 조(條)에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설하고 숙신을 합병했다고도 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함경도가 본래 고구려 영지다. 이는 고 지봉유설이권(芝峯類說二卷)에 기록돼 있다. 그리고 함남 북청군 신창읍 토성리(咸南 北靑郡 新昌邑 土城里)에 숙신씨(肅愼氏)의 고도(古都)라는 기념관(紀念館)이 있는데, 그 명칭이 청해관(靑海館)이다. 이곳에는 고려 말기 정몽주가 ‘숙신 유민 차일방(肅愼 遺民此一方)’이라고 지은 시가 계시돼 있다. 즉, 정몽주가 이곳은 숙신씨가 살던 곳이라는 시를 읊은 것이다. 이 기념관은 오늘날에도 보존돼 있다. 이는 숙신씨(肅愼氏)가 고구려에 합병됐다는 기록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韓民族) 시조는 숙신씨(肅愼氏)인가
 
 ▲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동북아의 시조격인 숙신씨(肅愼氏)와 그 지파(支派)는 부여를 이어 고구려에 합병되면서 완전한 한민족(韓民族)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강성했던 부여와 고구려 태동기의 강역도. 국립중앙박물관. ⓒ스카이데일리

우리나라의 장엄한 역사는 단군조선 이전부터 있었다. 환국이란 신시시대(神市時代)가 1565년간 지속됐다. 이 시대 우리 고조선이 아세아를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을 숨기고 단군을 신화화하며 제아무리 역사를 왜곡한다고 해도 이를 숨길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은 환국에서 처음 환웅이 데리고 온 무리가 3000명의 군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단군 조를 논하며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회피해 빼버리고 단군도 신화화 하나 이 신화는 환국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단군보다 1500여 년 전에 환웅이란 임금들이 환국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 역사를 일본은 단군신화로 상징화 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신화가 있고 그 신화에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는 것이 상식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조선 개국부터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요하문명의 발원지인 만주의 고조선 지역에서 BC2400여 년 전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면서 증명된다.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는 광역국가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 깨어난 민족이다. 석기시대부터 다른 곳에서 이주해와 요동과 한반도에 가장 먼저 정착했던 주인이다. 그리고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한 위대한 민족인 것이 판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민족의 계보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고대부터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우리 한민족의 계보(系譜)에 대해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바와 같이 인류역사는 신학시대, 철학시대, 과학시대로 발전해 왔다. 4300년 전은 신학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동서민족이 다신사상 혹은 일신사상에 잠들어 인간을 무시했다. 그러나 한민족은 4300년 전에 ‘홍익인간’의 인간주의를 제창하고 나라를 세웠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는 증명 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10만 년 전 빙하기 등의 영향을 받은 민족이 대이동으로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인간이 거주했다. 그 때 어떤 민족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동양미술 학자 미국의 코벨박사는 백인종인 코카서스인종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종족들이 역사적인 설정아래 혼합해 한데 뭉치기 전 환국신시대에는 곰, 호랑이, 태양, 조상 등을 섬기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환웅 대에 와서 단군(배달임금)이 나와 환국을 무력 통일하고 서기전 2333년 아사달(중국 하얼빈)에서 조선(朝鮮)이라는 광역국가를 개국했다. 단군(檀君)은 환웅(桓雄)의 자손으로서 우리민족의 개조가 되는 조상이다. 그리고 우리 고조선 한민족(韓民族)의 시조는 숙신씨(肅愼氏)라고도 말해진다. 이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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