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민족은 개인과 인류의 중간적 위상을 갖는 집단으로 개인의 생존과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는 토대가 된다. 민족이 멸망하면 그 안에 속한 개인은 타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거꾸로 민족이 강대해야만 인류의 공존과 평화에 기여한다. 이는 19세기까지 세계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즉, 강대한 민족이라야 인류의 평화를 주도 할 수 있음은 불문가지다. 강대민족에게는 이 같은 힘을 지탱하는 사상이 뒷받침되고 있다. 따라서 사상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을 최대목적으로 한다.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자면 그 민족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견지해야한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없애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어느 민족이고 자기 주체성을 존중하면서 외래 사상을 신앙하는 민족은 생존발전하지만 주체성을 잃고 무분별하게 외래사상을 맹신하는 민족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증거해 왔다. 특히 몽골사와 조선조시대의 역사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고려는 주체성을 존중하면서 불교를 신앙함으로 그 불교로 흥하게 했다. 몽골은 주체성 없이 불교를 맹신함으로 인해 그 불교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 또한 일본은 주체성을 존중하면서 유교를 신앙함으로 그 유교로서 흥했다. 조선은 주체성 없이 유교를 신앙하며 ‘이 나라는 주자의 나라’라고 지나치게 맹신해 그 유교의 주자학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 즉, 유교보다 위대한 사상이 없다고 맹신해 서구문화를 반대함으로서 멸망을 초래했던 것이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한 편견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를 발견치 못하고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현재도 그런 위험이 지속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 국민들 가운데는 주체성이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옛날 부족시대는 불합리한 감정에 의해 투쟁함으로 부족투쟁이 격렬했다. 그 당시에도 자주·자존의 민족의식이 있는 부족은 승리했지만 자주·자존의 민족의식이 없는 부족은 패배했다. 따라서 고대 국가에서도 강렬한 민족의식이 요청되면서 타민족의 신은 거짓의 위신(僞神)이요, 자민족의 신만이 유일신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신사상(一神思想)이 나온 유래다. 인류사상 최초에 일신사상을 발견한 민족은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혹자는 최초의 일신사상을 발견한 나라가 이집트라고 하고 있으나 필자는 우리 민족이라고 확신한다. 이집트는 그 생명선인 나일강을 일원적(一元的)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같은 요청에 의해 통일국가가 성립됐다. 아울러 군주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군주를 신이라 하며 페이로스4세가 신권정치를 행하게 된다. 이집트는 이를 기반으로 거창한 피라미드(Pyramid)를 건축했다.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천제(天帝)의 후손이라는 하늘의 자식인 천민(天民) 사상을 가져왔다. 고구려 시대에도 동명성왕이 동명왕을 천제의 자(子)로 존중하고 고구려 민족이 천제의 후손이라는 자주·자존의 민족정신을 고취해 결국 동양의 패자(覇者)가 됐다. 그러나 조선조는 중국의 신이 진신(眞神)이요, 한국의 신은 허위라는 노예사상을 신앙함으로 퇴락하게 됐다. 환국과 배달국의 국위가 만방에 떨치게 된 천제(天帝)의 후손이라는 하늘의 자식인 천민(天民) 사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자기들이 천민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고대에 어떤 민족이 있었는지,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여러 민족에 대한 호칭과 우리 선조가 고대 어떠한 호칭으로 불렸는지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 일의 고대사가 거짓역사라는 것 등을 거듭 적시하고자 한다.
고대 아시아지역의 여러 민족에 대한 호칭과 한민족의 나라호칭
먼저 우리의 고대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대에 어떤 민족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아시아지역의 여러 민족을 보면 거란, 돌궐, 동호, 말갈, 맥, 몽골, 물길, 선비=오환, 선(先)퉁구스, 여진, 읍루, 이(夷)=동이(東夷), 퉁구스 흉노 등이 있다. (1)우선 거란은 열하성 한수(漢水) 남쪽에서 화룡의 북쪽까지에 사는 부여계, 선비의 후손이며 중국의 원위(元魏 AD 220)를 자칭하는 민족이다. (2)돌궐은 선비족의 후예로 후위(後魏)의 테무제(AD 423) 이후 알타이산(金山) 지방에서 일어난 민족이다. (3)동호는 한나라 초 (BC 209)에 조양지방의 조선인들을 사기를 쓴 사마천이 지칭하는 조선인다. (4)말갈은 수나라와 당나라 초(BC 670)까지의 원형의 퉁구스 만주족을 일컫는다. (5)맥은 단군조선 일부와 부여에 대한 호칭이다. (6)몽골은 부여계 번조선인(동호)의 후(後)인 선비족이 4세기 중엽부터 형성된 족속을 말한다. (7)물길은 남북조시대(AD420~580)의 읍루(挹婁)인들이다. (8)선비=오환은 전한(前漢) 중엽(BC100)부터 시작해 번조선 즉, 동호의 후 족속을 가리킨다. (9)선(先)퉁구스는 18세기 이래 선국인들이 지칭한 중국 본토내의 조선족을 말한다. (10)여진은 10세기 말엽 요제(遼帝)가 남북 만주에 거주하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이다. (11)읍루는 한나라 (BC 200)에서 진(晋)(BC 419)까지 만주 동북방에 살았던 어렵/혈거(穴居)족이다. (12)이(夷)=동이(東夷)는 요임금시대로부터 시작된 동방족의 칭호를 말한다. (14)퉁구스는 18세기 이래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만주족의 칭호이다. (15)흉노는 선진(先秦)(BC 249)에서 한대(漢代)(AD 220)까지의 북방민족 일반을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기록한 호칭이다.
환국(桓國)시대에는 우리 한민족의 나라만도 16분국(分國)이 있었다. 이들 나라는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卑國), 탁위국(涿韋國),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등이다. 또한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그의 편저인 ‘조선사연구’에서 우리 한민족의 호칭은 194종이나 된다고 했다. 그 예로 배달국, 조선, 숙신(肅愼), 직신(稷愼), 발숙신(發肅愼), 발조선(發朝鮮), 번한(番韓), 진한(眞韓), 마한(馬韓), 삼한(三韓), 주신(珠申), 구환(한)족(舊桓(韓)族), 구려족(九黎族), 삼묘(三苗), 구이(九夷), 대진국(大震國), 번조선(番朝鮮), 말조선(馬朝鮮), 진조선(辰朝鮮), 동이(東夷), 예(濊), 맥(貊), 학(狢?), 부여(夫餘), 동북이(東北夷), 고구려 신라. 백제, 후고구려, 고려, 발해, 조선, 대한 등이 있다고 했다. 고대 아시아 민족들은 거의가 우리 배달조선민족의 후예인 한민족들이다. 돌궐족은 오늘의 터키에 사는 원래 투르크족이라고 했는데, 선비족의 후손들이다.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나라와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고대시대 가을추수 후 같이 춤을 추고 노래하며 음식을 나눠먹었던 형제들이다. 그래서 역사왜곡 없이 고대역사를 배운 터키인들은 고대 우리와 같이 어울린 것을 알기에 우리를 보면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에 대한 호칭은 너무나도 다양한 가운데 수많은 부족국가를 이루며 대륙에 산재해 살았다. 그러나 중국사서의 조선 관련기록은 믿을 것이 못 되기에 연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중국의 기록은 조작, 변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위만 에게도 밀렸다. 조선을 침범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의 고대사는 허황된 것이 너무 많다. 예컨대, 우리 고조선은 한무제(漢武帝)에게 패했다고 하지만 패한 바가 없다. 한 무제(漢武帝)는 BC 109년부터 전 군을 동원해 위만조선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그 패배의 책임을 물어 한나라 장수 양복, 순체 등을 처형했다. 한나라가 승리했더라면 장수들의 죽임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왕검성 내에서는 최, 참, 음, 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과 달기 등을 죽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을 함락했다든가, 한나라 군이 승리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한나라 군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는 역사기록은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다. 이는 일제에 의한 역사 왜곡에서 나온 허위다. 역사서는 위만조선이 쿠데타로 망한 뒤 설치된 4군은 한나라가 다스리던 한 4군이 아니라 조선 사람인 참, 최, 음, 협 4인이 다스린 평주(平州), 추저(萩菹), 날양(捏陽), 홰청(澮淸) 지역이다. 이는 조선 4군이라고 사기에 명기돼 있다. 사기에는 그 위치가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라고 했다.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고 삭제한 사마천도 이 사실만은 그대로 기술했는데, 이를 두고 마치 한(漢)나라가 4군을 설치해 다스린 것처럼 포장한 것은 아무리 한자를 몰라도 한글본 사기열전만 자세히 검토해보면 그 진위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중국 25사에는 한사군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한마디로 이는 역사왜곡이었다. 한문기록은 잘못 기록하면 원래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가 있다. 중국 25사 등에서 주장하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 등 4군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옛 부터 있어왔던 군현의 이름이며 태수라는 직책의 사람들이 대대로 다스려 온 지방이었다.
일제에 의해서 조작, 말살, 왜곡, 축소한 반도사관의 역사조작인 조선사편수회 37권의 조선사가 한사군, 기자조선 등을 날조한 것인데, 지금도 이를 그대로 언급한다는 것은 역사무지다. 중국은 역사를 조작하는데 이를 그대로 받아 들여 해방 후부터 이를 기술하고 지도책에도 우리고조선의 광활했던 영토가 한반도로 축소해 출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근거도 없이 불명확한 기자조선도 마치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처럼 평양등지에 가짜 기자묘를 세우고 제사까지 지내는 조선의 관료들과 조선선비, 역사가들이라는 자들의 무지함이 지나치다. 한심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학계의 실권을 장악한 역사학자라는 자들의 추악한 일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은 우리 역사와 아무 관련이 없다. 협잡꾼 위만이나 기자가 조선의 위엄에 도전한 사실이 없다. 도전할 처지도 아니었다. 고대 우리역사는 중국을 지배하고 군림한 역사였다. 민족의 반역행위를 하는 강단파 학노(學奴)들의 죄과는 이처럼 너무 엄청나다. 한민족은 고대 중국을 지배했지, 중국에 예속된 일이 없다. 이미 기술한 은나라 역시 동이족의 나라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임혜상은 조선은 진시황 이전부터 한 무제 때 중국 본토 내의 강북(황허북쪽), 동반(동해안)의 민족이라고 했고 은은 동이다고 했다. 동이는 동방에서 일어났고 은인 기자가 동으로 조선에 망명했다고 썼다. 대부분 중국학자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936년 서양고고학자 앤더슨은 은왕(殷王)의 묘인은 허고분(殷墟古墳)을 발굴 연구했는데, 은(殷) 민족이 알타이어족인 동방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사기평림, 맹자에 순(舜)임금은 은(殷)민족의 시조이며 동방에서 발해를 건너와 황허에 문명을 연 인물이라고 나와 있다.
우리의 역사는 유추과학이 아닌 실재한 역사
어떤 사학자는 역사는 유추과학(類推科學)이라고 하나 우리나라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국, 고려, 조선은 유추의 역사가 아니라 1만년의 면모를 보여주는 실재한 역사다. 중국과 일본의 야비한 역사왜곡으로 인해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음은 비극이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현대사는 오늘, 미래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근현대사에 중점을 둬서 공부하면 되지만 상고대사는 현대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고증을 통해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해야 한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침묵의 화석인골(化石人骨)은 인류의 걸어온 것을 말해준다. 19세기말 이래 각지에서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돼 인류의 조선(祖先)의 모습이 명백하게 됐다. 인류의 발전사를 보면 200만년에 걸쳐 인류는 빙기(氷期)와 간빙기(間氷期)의 시대를 살아 왔다. 이 과정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진보하고 끝내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됐다. 그것은 노동하는 것에 의해 가능했다. 인류는 수렵과 노동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불(火)을 일으키고 신(神)을 만들어 냈다. 처음 초원지대에서 일어난 농경은 대하(大河) 유역에서 발달해 이를 토대로 문명이 일어나고 지배자가 출현해 국가를 세웠다. 즉,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를 거쳐 고대부터 대하를 중심으로 문명을 일으켰고, 이 문명은 지배자를 출현토록 해 국가를 형성시켰다. 또한 농경과 함께 일어난 목축을 토대로 한 기마민족은 문명과 국가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가 중국의 중원(中原)을 정복한 민족이다.
이 중원은 우리가 정복한 황하유역을 말한다. 황하문명도 바로 우리 배달민족이 일으킨 것이다. 주지의 사실들이지만 인류가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 때부터 농경이 시작하기 까지 200만년 간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해 수렵·채집을 하던 시대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磨製石器)가 사용돼 농경, 목축을 시작한 시대다. 인류문명의 발전은 신석기시대에 와서 급속하게 진전된다. 신석기시대 농경이 일어나면서부터 석기는 돌이나 모래로 갈아 마제석기(磨製石器)로 되고 농경용 쟁기와 삽, 괭이 저장용 토기 등 발명돼 이때부터 직물도 시작됐다. 농경민, 유목민, 수렵민이 등장한 것이다. 즉, 농경이 시작된 1만 년 전에는 야생동물이 가축화되어 목축도 시작했다. 이어 목축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유목민이 돼 농경민과 분리됐다. 또 북방 유라시아 산림에서는 주로 수렵과 어로(漁撈)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 선조들은 유목과 반목축, 반수렵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 중에서 승마한 채로 궁시(弓矢)를 사용하는 기마전술을 몸에 익혀 기동력을 높인 민족이 있었다. 즉, 기마민족이라고 하는 민족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마민족의 어떠했는가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BC 3000년 전 4대문명이 일어나는데, 그 중심에 우리 한민족이 있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계를 주도한 민족이다. 앞으로도 세계를 주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옛 영광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중·일이 우리 역사를 변조·왜곡하며 추한 작태를 보이나 우리민족과 역사는 영원하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야비한 역사찬탈은 있을 수도 용납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의 지성과 노력으로 역사를 바로 찾고 민족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최진열 ‘대륙에 서다’,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吉川幸次郞 ‘漢の 武帝’ 등 다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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