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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우리 고대사 왜곡한 허구의 기록 중국 사기(史記)

송화강 2019-05-05 (일) 17:04 6년전 9707  

우리 고대사 왜곡한 허구의 기록 중국 사기(史記)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1-25 17:33:0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그것도 세계 최고(最古)의 광역국가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세계 대문명을 주도한 우리 민족이 지금은 너무 무지한 데 놀라고 실망스러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웃 나라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고 조작하며 또 우리역사를 도둑질하고 있다. 이제는 반도역사가 아닌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중원과 아시아를 넘은 우리의 상고사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어떤 역사로 세계에 이바지 했는가에 관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구·조사해 그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한민족이 위대한 발전을 일구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재평가 해 한국역사의 특질이 다른 민족과는 달랐다는 것을 재인식 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확실히 알고, 아울러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가장 알고 싶은 한국역사의 진실과 우리민족의 얼을 제대로 알아야 할 절실한 때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고대 상고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생활을 하고 있는 시대와는 전혀 다르고 다른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념은 과거의 발전을 고찰하는 경우에 정확한 표준이 될 수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대사를 제대로 고증(考證)해 우리 손으로 세계에 알려야 할 책무가 더욱 절실하다. 위대한 역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연구에 들어가서도 매우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오로지 역사는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원칙하에 오늘은 배달국치우천왕(蚩尤天王) 시대에 있었던 헌원황제(軒轅黃帝)와의 역사전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같은 내용을 근간으로 중국의 역사왜곡이 어디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요(堯)·순(舜)시대의 나라와 임금도 우리 배달족으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음을 기술하고자 한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전설의 인물이 아니다
 
중국은 동방족인 우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곡필(曲筆)하면서 무시(無視)·축소(縮小)하고 있다. 이는 전 중국사서(中國史書)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그들은 일본처럼 자기들 역사에 우리들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 역사가 전란 중에 소멸된 것을 기화로 제멋대로 변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고대역사를 잃어버린 우리 한민족의 조상까지 전설로 했다가 지금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인해 한민족의 역사가 명명백백한 배달국 역사마저 일부도 중국의 역사로 탈 바뀜 된 상황이다. 중국은 지금도 ‘동북공정’을 계속하며 우리역사를 도적질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왜 중국은 이 같은 시도를 계속하는 것인가. 그것은 17세기 만주 여진족(女眞族)이 중원을 정벌한 후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해 300여 년간 중국한족(中國漢族)을 지배했으나 지금은 청나라(여진족)의 역사와 문화가 중국의 것이 돼 버린 전철을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도 적용하려고 하고 있는 의도다. 그들은 우리의 고대국가들도 한반도와 그 인접한 좁은 땅에서 우리 역사가 펼쳐진 것같이 일본과 보조를 맞추어 끈질기게 역사조작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중국 한족보다 먼저 중국에 선주한 민족이다. 한민족은 만주, 한반도는 물론 중원대륙에 기름진 황하, 양자강 유역과 내륙에서 정착해 상고시대부터 살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중국25사 기록에 따르면 구이족[백이(白夷), 현이(玄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적이(赤夷), 견이[(畎夷)=서이(徐夷)와 , 회의(淮夷), 도이(島夷), 황이(黃夷), 풍이(風夷), 려이(黎夷) 또는 양이(陽夷)]이 나중에 중국에 온 중국화족과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1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역사왜곡은 당치도 않다.
 
중국의 화하족(華夏族)은 인구가 증가하고 세력이 강해졌지만 그들 나라의 국조(國祖)나 역대 왕(歷代王) 다수가 배달민족의 혈통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벌인 중원의 21개 제후국(諸侯國) 정벌도 동이계(東夷系) 나라들을 정벌한 것으로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당시 치우천왕(蚩尤天王)에 관한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그는 전설의 천왕이 아니라 실재 인물로 21개 제후국(諸侯國)을 정벌한 배달국의 제14대천황이다. 그러나 중국사서는 이 조차 조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기술한 상황이 사서(史書)에 나온 것은 허황된 내용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먼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기록은 ‘군사를 정비하여 양수(洋水)를 떠나 공상(空桑)로 쳐들어갔다’고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神市本紀) 3장에는 ‘양수(洋水)에 출진해 공상(空桑)에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고 했다. 공상(空桑)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여기서 양수(洋水)와 공상(空桑)의 거리는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공상(空桑)은 하남성(河南省) 정주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산동성(山東省) 태산에 있었다는 공상(空桑)까지는 2000리가 넘어 산동성(山東省)의 공상(空桑)은 아닌 듯 하다) 치우천왕(蚩尤天王) 군대가 양수(洋水) 지역으로 쳐들어가자 이곳의 왕이었던 유망(楡罔)은 역시 배달족인 중국서 동이 군장으로 알려진 소호(小昊)로 하여금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군대를 막게 했다는 기록이 국내외에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기록에는 또 “치우씨(蚩尤氏)는 웅호창(熊虎槍)을 휘들러 소호(小昊)와 크게 싸우고 안개를 일으킴으로 넋을 잃고 혼란하게 되니 소호(小昊)는 크게 패해 공상(空桑)으로 달아났다. 이때 치우(蚩尤)는 공상(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서만 의지하면 우리의 바른 역사는 찾을 수 없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같은 배달국의 위대한 14대 천황이었다.
 
헌원황제(軒轅黃帝)도 배달국의 제후(諸侯)였다
 
그런데 중국은 치우천왕(蚩尤天王)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이를 신화로 포장한다. 중국의 신화(神話)에서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지위를 노려 괴신(怪臣) 72명과 반기를 들었다고 허황된 신화로 설화(說話)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헌원(軒轅)의 군대가 7번 싸워 7번 패했으나 마지막에는 치우(蚩尤)의 군대를 이겼다고 우리 기록과는 정반대로 말도 안 되는 다른 기록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다. 예컨대 ‘헌원(軒轅)은 하북성(河北省) 탁록에서 치우(蚩尤)군에게 크게 패한 후에도 군비를 정비하고 그가 발명했다는 지남차(수레)를 이용해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휘하에서 싸우던 웅용과 천녀발을 유혹, 그들로 하여금 치우군대를 선봉에서 공격해 10여년간 73차례 싸워 이긴 적도 있었다고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설화(說話)를 만드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끼워넣은 것이다. 헌원(軒轅)은 죽을 때까지 치우천왕(蚩尤天王)과 대적하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군사를 피해 일생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하물며 사마천은 중국의 위상을 높이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장수 중에 치우비(蚩尤飛)가 있었는데 전투 중에 전사했는데 이를 두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죽인 것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중국의 있지도 않은 역사사실을 왜곡하는 자세는 지탄 받을 일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기름진 회남(淮南)과 산동(山東)을 노려 동으로 오려는 헌원(軒轅) 군사가 오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를 만든 다음 오장군을 파견해 치우천황시대 활동하던 서쪽의 고신(高辛)을 공격, 공을 세우게 했다고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에 언급돼 있다. 당시 고신(高辛)의 나라는 치우천왕(蚩尤天王)에 의해 정벌 당했지만 그도 우리 배달민족이었다. 그런데 고신(高辛)의 기록이 어떤 문헌에는 170년이나 늦게 기록되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가. 이는 의도적 왜곡이나 착오이다. 고신(高辛)은 치우천왕(蚩尤天王)시대의 사람이다.
 
중국의 기록은 100%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사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허황된 허구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도 중국의 사기(史記)를 많이 이용하는데, 사기(史記)는 믿을 것이 못된다. 사기(史記)는 3류 소설에 불과 할 정도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다. 헌원(軒轅)은 산서성 지역의 황토(黃土)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황제(黃帝)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배달국의 제후(諸侯)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환단고기 소도경전(蘇塗經典) 본훈(本訓)에 ‘동방의 선인(仙人), 자부(紫府)선생이 청구국(靑丘國) 대풍산에 살면서 헌원(軒轅)황제에게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주어 의인이 됐다’고 나와 있다. 이 기록엔 헌후(軒候)라고 나와 있다. 이는 헌원(軒轅)이 배달국의 제후(諸侯)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헌원(軒轅)은 유웅국(有雄國)의 왕이었다고도 기록돼 있다. 헌원(軒轅)은 회남과 산동의 기름진 평야지대로 진출을 끊임없이 기도해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패권을 겨루었으나 성공하지 못한 왕이었다. 그는 기름지지 못한 섬서성에 있다가 후에 하북성(河北省)으로 북상해 탐록을 근거지로 했는데, 그는 111년을 살고 그의 능은 섬서성 중부 황릉현 서북 교산(校山)에 잠들고 있다.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헌원황제(軒轅黃帝)는 치열하게 싸웠으나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기록할만한 역사가 없는 중국역사에는 헌원황제(軒轅黃帝)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하며 배달국도 자기역사로 편입하려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중국의 시조로 받들고 있으니, 참으로 못 말리는 역사왜곡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인가는 고신(高辛)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고구려 동명성왕의 조상 고신(高辛)은 누구인가
 
고신(高辛)은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보면 치우천왕(蚩尤天王) 시대(BC 2706~2598년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중국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연대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고신(高辛)은 태어나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음악을 좋아해 각종 악기와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신(高辛)은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헌원황제(軒轅黃帝)시대에 산 사람이다. 그는 산동성 일부지역의 군장(왕)이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사람인 전욱 고양(高陽)(사기 BC 2531~2436년 추정)의 뒤를 이은 왕이 아니었다. 고신(高辛)은 70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105세까지 살았다. 그는 은(殷)나라 시조인 설(挈)이나 주(周)나라 시조인 후직(后稷)을 배출한 가계라고 한다. 중국 사기(史記)등에는 첫째부인이 강원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이 됐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부인 간적(簡狄)이 낳은 아들이 은(殷) 왕조 설(偰)이 됐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고신씨(高辛氏)가 통지씨 족략,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창힐과 더불어 고신(高辛)도 치우의 후손이라고 했다. 제곡 고신(高辛)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조상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淮北)-회대(淮臺=산동성)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에는 제곡의 아들이 요(堯)임금으로 돼 있다. 요(堯)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시기와 비슷하다. 중국은 요(堯)임금 이전 인물들을 실재역사보다 신화나 전설로 기록한 것이 많다. 일본도 진무덴노(神武天皇)를 1000년이나 조작하며 전설화 한 것처럼 인물과 역사를 과장하기 위해 신화나 설화를 조작해 성스럽고 위대한 이미지를 더 하기 위해 만들고 있으나 이들 인물들은 추적해 보면 거의 동방의 배달국(구려족=구이족 =동의족)이다. 중국은 동방의 배달국의 실재역사를 축소시키고 혼란시키고자 신화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기술한 태호복희(太昊伏羲, BC3512~3419)는 배달국의 왕족이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배달국의 14대 천왕(天王)이다. 중국 고대문헌 중에는 국가나 민족 집단을 정확히 기록 하지 않고 은유법(隱喩法)이나 신화적(神話的)으로 기술한 것이 많다. 요(堯)임금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부도지에도 간간이 나와 있다. 요(堯)임금이 구려(동이족), 묘족에 대한 적대행위로 군사공격을 감행했으나 단군조선(유호씨)에 의해 진압됐다. 그러나 사마천이 쓴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과장되게 도덕정치 국태민안, 태평성대라는 말로 과장되게 쓰여 지고 있으나 요(堯)임금은 무서운 고문과 형벌, 살인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나와 있다. 사마천이 쓴 중국의 사서(史書)는 거의가 과장되고 치장된 허구적 사실들이 많다. 중국 고금명인대사전(古今名人大辭典)에는 요(堯)임금은 도당씨(陶唐氏)부락의 군장으로서 하북성(河北省) 당현 일대, 태원, 산동성 도구 등에 있었고 수도(首都) 즉, 근거지는 후에 섬서성, 평양성(平陽성)에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漢)족의 원고사(原古史)의 하나인 부도지(府都地)에도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기록이 나온다. 그 내용은 ‘도요(陶堯)가 천산의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일차로 성을 나간 사람들의 후예였다’는 것이다. 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도 동방의 배달족이라는 점이다. 또한 부도지(府都地)에 요(堯)임금이 구주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를 오중(五中)에 사는 제왕이라고 칭하고 당의 도읍을 세워 부도(단군조선을 가르킴)와 대립했다. 이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선포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堯)임금은 재위에 오른 지 98년, 118세를 살고 왕위를 순(舜)에게 물려줬다고 했으나 이 또한 조작됐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등 기록은 고조선(古朝鮮)의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요(堯)임금을 대신해 우순(虞舜=舜)에게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지역의 여러 제후국(諸侯國)들을 다스리도록 명했다고 나와 있다. 중국사기(史記)의 기록은 허구(虛構)로 가득 찬 조작된 3류 소설일 뿐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日本 三省堂編修所 編, 各國別[世界史の 整理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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