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단군 이전의 한민족사
역사학자들은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쪽방향으로 이동해 왔다고 보고 있다. 중국대륙에 일찍부터 들어와 산 민족은 알타이어를 사용하던 민족이라고 서양학자들도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기원은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조명을 해보면 태고 때부터 구석기시대 이후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끊이지 않고 이어오면서 한민족의 활동무대는 실로 광활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강역은 중국과 만주일대滿洲一帶), 연해주(沿海州), 몽골, 발해연안(渤海沿岸), 요동반도(遼東半島), 한반도 등이었다. 중국의 산동성(山東省)·하북성(河北省)·하남성(河南省)·강소성(江蘇省)·안휘성(安徽省) 중북부·호북성(湖北省)·절강성 등이 그 강역 안에 있었던 땅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지역에서 토착해 살았다. 그때 우리 한민족과 함께 산 인종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설은 나누어지고 있으나 그 당시 몽골족과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역사학자인 유.엠. 부틴 박사와 동양미술사학자 코벨 박사의 주장이다. 또한 일설에는 이스라엘의 단(檀)족속도 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대륙과 유라시아 및 한반도에 제일 먼저 정착했던 주인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일찍이 고대부터 깨어 있는 민족이었다. 다시 말해 10만여 년 전 빙하시대 대 민족이동으로 중국과 요동 한반도에 들어와 제일 먼저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한민족(韓民族)은 BC 71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환국(桓國)을 건설했다. 환인(桓仁=桓因), 안파견천왕(安巴堅天王)에 의해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서 나라가 건국됐다. 그 뒤를 이어 BC 3898년에 거발환 환웅천왕(居發桓 桓雄天王)이 신시(神市)에다 배달국(倍達國)을 세웠다. 또한 배달국(倍達國)에 이어 BC 2333년 단군왕검이 아사달(阿斯達)에서 대조선국(大朝鮮國)을 세우니 이가 바로 초대 단군(檀君)이시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거발환 환웅(居發桓 桓雄)의 3째 아들로서 신묘년(辛卯年=2370년) 5월2일 인시(寅時)에 배달국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단군이전 환국(桓國)과 신시시대(神市時代) 우리 민족이 여러 종족들과 역사적인 설정아래 융합하며 한데 뭉치기 전에는 곰, 호랑이, 태양조상등을 섬기는 여러 종족들 간에 분열하여 싸우고 있었다. 곰 상징의 종족과는 융화해 통혼하고, 범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 등은 정벌했다. 곰 족과 태양조상을 받드는 환웅(桓雄) 종족이 우세해 다른 종족들을 물리치고 무력통일을 이룬 것이었다. 이 같은 통일까지 싸운 기간이 천 수백 년간 계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시시대(神市時代)에 가장 치열한 싸움인 치우천왕(蚩尤天王)대에 헌원(軒轅)과의 싸움은 사기(史記)에기 기록돼 있다. 정착생활을 하게 된 우리조상들은 환웅(桓雄)을 수장으로 받들어 박달나무(檀木) 아래에 소도(蘇塗)와 제단을 세워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는 경천보본(敬天報本)의 소도교(蘇塗敎)를 펴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그리고 교화하는 가운데 살았다.
한민족의 위대한 지도 역량
고려 말의 학자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신시(神市)를 세운 환웅천왕(桓雄天王)의 공덕은 소도재천(蘇塗在天)의 고속(古俗)에 의해 분명히 전송되어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이 때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특징이 하느님과 조상을 받드는 소도교(蘇塗敎)에 있다고 본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불교와 유교가 들어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단군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세워진 데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 우리 민족이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며 그 지도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환국 이후 배달국을 세울 때도 높은 벼슬을 지녔던 인물 환웅이 선악의 판단 등 360여 가지 직책을 맡은 관리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왔다. 이 무리는 군대였다.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風伯) 등 행정적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따로 있었으며 그 당시 환웅이 거느렸던 3000명의 무리는 소규모가 아니었다. 이 또한 신화적 허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단군조(檀君朝)를 논하며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회피하고 뺀다.
일본이 우리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역사왜곡을 해온 일본의 노력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역사를 변조하고 왜곡해도 최근에 발굴되는 요하문명(遼河文明)에서 보는 홍산문화(紅山文化)등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곳에서 수많은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고 있어 고대 찬란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광역국가가 성립돼 중국대륙과 유라시아 및 일본열도까지 지배하고 그들을 선도한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우리 선조들의 남긴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우수성을 세계의 사학계는 인정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역사가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다고 할 만큼 우리나라는 고대문명역사의 효시(嚆矢)가 됐다. 세계는 우리를 다시 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같이 역사를 과장하지 않는다. 중국은 유물들까지 감추며 역사를 조작하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역시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원시시대에서 벗어난 역사가 수치스러워 환국과 배달국 단군조선을 뭉개며 우리 역사와는 관계없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을 곁들여 놓았으나 허구요 거짓위사(僞史)임이 모두 밝혀졌다. 우리 역사는 사실 그대로다. 중국과 일본같이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지 않으며 유물·유적을 변조하며 허위역사를 조작하지 않는다. 지금도 ‘큰 거짓말은 통한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 변조하며 나오는 중국과 일본의 작태는 용납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일이다.
고대사료(史料) 모두 없앤 중국과 일본
단군이전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의 역사에 대해 주의할 것은 단군이전의 역사를 아예 없애기 위해 중국과 일본이 혈안(血眼)이라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 고대사를 전부 없애려고 수십만 권의 많은 서적을 역사왜곡에 이용할 서책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 없앴다. 그러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나타난 원본 기록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옛날 환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불교가 지배세력이 되면서 비사실적인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昔有桓因)”로 변조된 기록이 나타나게 된다. 환국(桓國)은 불교가 발생하기 전의 역사임을 생각하면 제석(帝釋)이라고 해석되는 환인(桓因)이 변조된 기록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이를 결정적 빌미로 삼아 환국(桓國)으로 표기된 진본사서(眞本史書)까지 위조해 가며 단군을 없애려 고조선을 해체해 그 역사의 전부를 말살하려 했다. 환인(桓因)이란 전통적으로 받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시영선생=부통령)은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해설하고 있다. 환인(桓因)의 아들로 표현되는 환웅(桓雄)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전통적 존숭(尊崇)의 뜻으로 받아들임이 옳다고 최태영 선생은 말한다. 환국(桓國)이 실재한 사실을 조선영조 때 이종휘(李種鰴)에 이어 신채호, 최남선, 문정창 선생 등이 환인(桓因)이 아닌 환국(桓國)을 말했다.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을 세워 환웅(桓雄)족속이 세력을 이루는 동안 우리 한(韓)족이 곰토템 종족과 결혼해 출생한 우리 조상들의 유력한 지도자로 나타난 것이 4300여 년 전이다. 배달국의 마지막 환웅(桓雄) 거불단(居弗檀) 단웅(檀雄)대에 와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나와 배달국을 무력 통일하고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지금의 하얼빈)에서 나라를 열었다. 이 지도자가 단군임금이고 그가 세운 나라를 후일 한자화 해서 조선이라 했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신라 이후 쓰이기 시작 했다. 단군은 환웅의 자손으로서 우리민족의 개조(開祖)가 되는 조상이다. 당시 9환족(九桓族)인 배달동이(倍達東夷) 겨레가 모여 추대로 임금을 뽑으니 이가 초대 단군이시다. 단군이 개국한 조선을 조선, 단군조선,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단군의 손(孫)이 살았던 나라로서 고조선이라고 한다. 중국사서(史書) 위서(魏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기다”고 했다. 신용하 교수는 단군의 고조선 형성을 논한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 사회학’에서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화나 설화의 요소는 한군데도 없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위서(魏書)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해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는 주를 붙였다”고 했다.
우리의 고대사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단군조선은 이로부터 47대 2096년간을 전승했는데, 그 당시 단군조선의 영역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이르기를 삼한오만리(三韓五萬里) 강토로 그 자손들이 세운 구려(九黎), 배달(倍達), 조선, 구이(九夷), 동이(東夷), 예(濊), 맥(貊), 학(狢), 묘(苗) 등의 구주(九州)였다고 했다. 즉, 우리 선조들은 이들 구역(九域)에서 분포해 살았다. 중국은 이 같은 단군조선도 자신들의 역사로 변조 개조(改造)하기 위해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엄청난 역사자료를 가져가 고대 우리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은 물론 우리나라 명칭을 가진 모든 역사자료를 분서(焚書)하거나 없앴다. 그래서 중국에서 고대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리지(地理誌)인 산해경(山海經)은 지리지(地理誌)이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개조(改造)를 면한 책이다. 여기에 고조선의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을 묘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열양동해 남쪽에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한다. 낙랑군(요동에 있었음) 왕검성이 고조선 땅이다. 군자(君子)의 나라로, 서로 사양하고 다투지 않고, 훈훈해 박하지 않다. 음식은 기장을 먹고 짐승도 키워서 먹는다. 의관(衣冠)을 하고 띠를 띠고 검을 찬다. 공자(孔子)는 자기의 도(道)가 중국에서 잘 통하지 않으니 떼를 타고, 구이(九夷=조선)의 나라로 갈까 보다고 했다” 산해경(山海經) 외에 중국의 고서에 조선(朝鮮)에 관한 서적은 위서(魏書)에 나와 있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중국이 우리역사를 흔적 없이 말살하려고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역시 한국을 침략 한 후 역사왜곡을 위해 총독부 집계 상에 나와 있는 것만도 22만권이상의 역사책을 불살랐고, 그 후 수만 권을 더 모아 일본에 가져갔거나 없앴다. 모두 30만권이 넘는 책을 분서(焚書)하거나 가져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우리역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후진의 역사이다. 우리는 상고시대와 고대시대 환국, 배달국, 고조선, 고구려 말엽까지만 해도 문화적 측면에서 군사력은 중원(中原)과 동북아시아 대륙을 압도적으로 지배해 온 강대국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내세울 것이 없는 역사에서 이러한 열등역사를 감추기 위해 허구(虛構)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에 삽입하며 역사변조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고대에 있어서 동양문화의 원류(源流)가 우리 한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 창조자의 역할을 담당해 온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나라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등이기 때문이다. 이들 고대국가의 모든 호칭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같은 겨레였음을 알 수 있다. 정인보(鄭寅普)선생은 우리 한민족에 관한 호칭이 194종에 이른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전쟁에 질수 없는 최고(最古), 최장의 역사와 최고(最高)의 찬란한 문화를 가진 문화민족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할 민족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변조 왜곡에 당당히 임하며 대처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우리 역사의 전통과 한민족의 ‘얼(魂)’을 제대로 찾아서 자랑스러운 선조(先祖)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손이 돼야 함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한국에는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무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 깊은 각성이 요구 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침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외국학자의 빛나는 연구 성과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정부당국도 사이비 학자들을 배제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정책을 펼쳐야한다. 이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최우선의 과제다.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의 사대주의자나, 식민반도사관을 가진 자들에게 우리역사를 주도하게 두는 오늘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엄연히 실재했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단군조선도 신화(神話)로 돌려버린 일본의 간계를 그대로 신봉하는 강단파 사람들에 의해 우리 역사는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갈파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역사를 잊고 이대로 방치 하려는 것인지 정부도 심각하게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어 역사를 정립하도록 했으면 한다. 이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이는 선조(先祖)에 대한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단군조선도 환국, 배달국 못지않은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둔 대제국(大帝國)이었다. 우리의 단군조선을 신화(神話)로 넘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세계 최고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며 자랑스러운 선조(先祖)를 가진 우리다. 언제까지 식민사관의 반도사관과 대중화사대주의 사관에 메어 있어야 하는가. 노예근성의 사가들이나 반민족사관을 가진 자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양심이 있고 양식이 있는 자라면 연구를 제대로 해서, 제대로 판단해서 우리 역사를 바른 위치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은 역사위작(歷史僞作)으로 뒤진 역사를 만회하려고 더 큰 위작(僞作)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본질이다. 일본 또한 우리역사를 변조하며 조작왜곡하고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은폐하고 없애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우리 역사는 엄연히 살아있다. 지금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하에 세계로 웅비(雄飛)하고 도약발전(跳躍發展)을 위해 비상(飛翔)하며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앞으로 더욱 역사의 진실을 밝히며 발전해갈 것이다. 우리 국민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는 바로 보고 바로 듣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서야 한다. 우리의 고대 문명은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서 요하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문명이 고대문명의 효시다. 이는 지금 알려진 BC 3800년경 메소포타미아문명과 BC 3200년경의 이집트 문명이나 BC 3000년경의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BC 2500년경의 인도문명을 촉발시킨 문명의 원류다. 이후 황하의 하류로 이동해 문명을 낳게 한 것이 바로 BC 2000년경의 황하문명이다. 따라서 이 황하문명도 우리 한민족이 일으킨 문명이다. 인류학자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인종으로 편두직모(偏頭直毛=뒷머리가 납작하고 곧은 머리털)에 상투를 틀고 머리에 새의 깃을 꽂고 다니며 하늘백성임을 드러내고 밝은 땅(밝달, 배달)의 나라에서 높은 문명을 탄생시켰던 옛 우리들의 선조인 한민족(韓民族)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외 다수서적과 최인 선생의 ‘한국학 강의’,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정호 ‘대 조선민족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승국 번역·주해 환단고기(桓檀古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せい いくど(盛O度) ‘新.漢民族から大和民族’,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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