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한국사는 중국과 일본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말살하는 역사왜곡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 동시에 세계사도 망가졌다. 그것은 우리의 진실된 역사를 모르고 세계사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인데, 우리의 상고사 제국 역사가 곧 세계사의 대부분이었다고 할 만큼 위대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역사는 러시아 푸틴박사를 비롯해 미국의 Jon Carter Covell 박사, 컬럼비아 대학의 Gari Ledyard 등 많은 외국학자들에 의해서 그 실체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바이칼 호수를 비롯해 아시아 대륙의 주인으로서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고조선,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계승해 왔다. 이 같은 역사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었다. 특히 상고시대 제국의 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황하문명 등 5대 세계문명을 주도하고 한자를 비롯해 고대 여러 문자를 발명했다. 또한 주역, 철학, 사상, 군사학, 천문학, 정치제도를 가장 먼저 제도화 하는데서 나아가 이를 여러 나라에 전수(傳授)하는 역할을 해 천자(天子)의 나라라는 위상을 굳건히 했다.
그러나 이를 전수받고 발전해 온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거꾸로 날조하며 패륜적인 해적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사상과 제도 문물의 원류가 한민족에게서 전수됐던 것이지만 이들 역사들을 모두 지우며 역사서도 수십 만 권을 분서(焚書)해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했다. 그 흉계는 천인공노할 일로 용납이 돼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 세계 최초 강대국으로 세계문명을 이끈 역사, 즉 엄연히 존립했던 환국과 배달국이 없었던 것으로 돼 버렸다. 심지어 단군의 고조선마저 지우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지난한 과정을 우리는 보아 왔다. 하지만 역사의 지문은 사람의 지문처럼 달라질 수도 그리고 없어질 수도 없다. 이번 칼럼은 제국의 혼과 맥을 이어 강대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예맥조선을 마저 살펴보고 가고자 한다.
우리는 중국과 쟁패전(爭覇戰)에서 승리한 재패자(制覇者)
예맥조선은 고조선을 이어 지극히 강대했다. 동주(東周)시대부터 한 무제까지 1천여 년 동안 중국 한족을 정벌하고 정복·지배한 나라가 예맥조선이다. 이 같은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춘추, 노(魯), 연(燕)은 물론 진(秦)을 타도한 강성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二十七, 天官書 第五)에 보면 당시 대륙은 9종의 이(夷), 8종의 적(狄), 7종의 융(戎), 6종의 만(蠻), 화하족(華夏族)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 중 예맥과 진진(秦晉)은 강대해서 호전적이었다. 예맥은 당시 중국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대표해 중국과 패(覇)를 다투었던 나라다. 다시 말해 대륙의 천상천하를 양분(兩分)해 하나는 예맥이 차지하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차지했다. 이 두 세력이 대표적으로 일승일패의 패를 다투었다.
일찍이 예맥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보다 먼저 건국하고 이들을 지배하면서 예맥에 일부 예속시켰다. 고대 우리 한민족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족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음이 밝혀졌으며 한족과 일승일패의 쟁패전(爭覇戰)에서 한민족(韓民族)이 승리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중국 4천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가 진(秦), 수(隨), 당(唐)이다. 진은 중국을 통일하고, 수는 오호(五胡)가 중국을 침입해 300년 간 남북조로 분열시킨 것을 재통일했다. 당은 북으로 돌궐(突厥), 고창(高昌), 토곡혼(土谷渾), 설연타(薛延陀)를 정복하고 철륵(鐵勒), 회흘(回紇)을 예속시켰다. 이들에게 밀리지 않고 제압한 우리 민족은 한족과의 쟁패전(爭覇戰)에서 승자였던 것이다. 중국이 동양의 패자(覇者)라고 한다면 우리는 동양의 패자(覇者)를 이긴 제패자(制覇者)다. 예맥도 그 용맹함이 온 천지에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역사연구가 부족해 예맥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 지금이라도 예맥에 대해 더 심도 있게 연구를 해야 한다.
고대 중국인은 우리 한민족을 처음에는 맥(貊)이라고 하다가 후에는 예(濊), 혹은 예맥(濊貊)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모두 종족에 대한 표현이다. 맥(貊)이라는 것이 중국에 나타난 것은 오랜 일이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고대 우리민족에 대한 칭호로 중국 ‘사기’에는 “예맥 역시 조선에 속하며 그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와 삼한 즉, 백제와 신라 등의 시원(始原)이다”고 했다.
이들 모두 같은 조상의 후예이며 같은 조선족에 속한 다는 것을 ‘양서(梁書)’, ‘남사(南史)’, ‘통전’, ‘삼국지’, ‘후한서’, ‘당서(唐書)’, ‘수서(隨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등 수많은 역사서들이 예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후 그 뜻의 범위가 줄어 주로 동예를 지칭하는 것으로 됐다. 이는 중국이 역사 왜곡을 하며 우리 역사를 변조하면서 그 명칭도 줄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옥저와 동예는 대체로 고구려의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옥저, 동예라고 했다.
예맥은 마직(麻織), 잠사술(蠶絲術)이 발달되고 어염(魚鹽) 등 해산물과 해표피(海豹皮) 같은 피물(皮物), 우마(牛馬)의 축산물과 단궁(檀弓)이라는 명궁(名弓) 등을 생산해 무역의 대상이 됐다. 예맥의 언어 습속, 의식주, 예절, 법제 등은 대체로 고구려와 비슷했다. 혼인제도에 있어서 옥저(沃沮)의 민며느리제도는 고구려의 데릴사위 들이는 것과 비슷했다.
주목할 것은 예(濊)에는 동성친척 간에 혼인을 피하는 불혼(不婚)의 법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맥은 환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새 집을 지어 옮겨 사는 기휘(忌諱)와 위생의 풍습이 있었다. 또 추수 후 무천(舞天)이라는 공동 대축제의 국중행사가 있었고 경제와 제천의 구역인 산천을 중시했다.
예맥은 강직, 용맹, 근후, 질박, 성실하고 보전(步戰)에 능했다
1천년 동안 중국 한족을 정벌·정복하고 지배한 예맥인의 성품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근후, 질박(質朴), 성실하고 보전(步戰, 보병전투)에 능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는 곳에는 ‘도적이 없고 부녀는 정숙하고 신실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위서(魏書)’와 ‘동이전(東夷傳)’ 제30의 예전(濊傳)에는 ‘문을 닫지 아니하되 도적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예맥은 당시 한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도 통제하지 못할 만큼 강성했다고 전해진다. 서기전 2세기 말부터 1세기 초 사이에는 원래 고조선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던 곳에 한민족의 부여, 고구려, 예맥, 옥저, 낙랑(한사군의 낙랑과는 다른 한반도 내 최리(崔理) 왕의 낙랑국), 마한, 진한, 변한 등 여러 제후국(諸侯國)들이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열국시대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부여, 고구려, 예맥, 옥저 등은 지금의 난하로 부터 요하사이에 위치하던 나라로서 부여국 왕처럼 단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때는 북경부근에 위치한 한사군 중의 낙랑군과 한반도 평양지역 최리(崔理)의 낙랑국처럼 요하 서쪽과 요하 동쪽에 낙랑이라는 같은 지명의 군(郡)과 국(國)이 동시에 존재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예맥에 대해서는 소외시키고 있으나 예맥조선은 기자조선 보다 먼저 건국되고 순수한 이민족(異民族)인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과 병립(竝立)하며 1천여 년 동안 중국대륙에 진출하는 강대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변조된 위서(僞書)를 참고해 또 다른 역사이론으로 우리역사를 망치고 있다.
중국은 순수한 한족의 집단인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단군을 계승한 것처럼 역사왜곡을 하지만 이들 한족(漢族)인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치 못한 것은 이미 다 전술한 그대로다. 위만조선이 순수한 한족(漢族)인 기자조선을 탈취한 것이고, 당시 우리 조선을 침략하지 못했다. 또한 한 무제가 순수한 한족의 집단인 위만조선을 정복해 사군을 설치한 것이지,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해 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모두 허구의 조작된 역사다.
한나라는 고조선이나 예맥조선, 부여, 고구려를 당하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한민족을 정복하지 못했음이 분명하게 판명되고 있다. 그것도 국내 학자보다 외국 학자들의 상고시대 역사 연구에 의해서 더 규명되고 있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국내학자들은 중국의 고대부터 역사와 지도를 조작된 위서(僞書)만을 근거로 ‘고조선이 무너진 것과 함께 일어난 거주민의 이동 결과로 한반도와 동부만주지역에 열국의 정치적 재편성이 이루어져 제일 먼저 패권자로 등장한 나라가 부여다’고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 된 연구 결과다. 고조선을 계승한 것은 부여가 아니라 예맥이다. 예맥을 계승한 것이 부여다.
그리고 예맥은 중국에 진출하는 강대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 밝혀졌다. 부여가 예맥을 계승하고 고구려로 이어진 것이 올바른 역사다. 따라서 우리나라 학자는 위서의 자료로 자기주장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인류문명 발달역사와 함께 신뢰 할 수 있는 사료로 제대로 된 연구영역을 다각도로 넓혀가야 한다.
중국의 고지리지(古地理誌)로 조작을 면한 산해경(山海經, 第十一, 海內西經)에 보면 부여국이 예맥의 고지(故地)라고 했다. 진서 부여전(晉書夫餘傳)에 그 왕의 인문(印文)에 예맥왕의 인(印)이 있고 나라 중(國中)에 예맥의 성(城)이 있는데,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했다. 아울러 삼국지 부여 전(夫餘 傳)에 선대(先代)로 부터 전해 온 옥벽규찬(玉璧珪瓚)에 예맥왕의 인(印)이 찍혀 있다고 했다.
또 후한서 동이전에 예맥의 노인들이 예맥은 고구려와 종(種)이 같다고 말하고, 고구려의 일명(一名)이 맥이(貊耳)라고 했다. 일본 서기(日本書紀)에는 오진(應神)이 왜왕 1대인데 15대 왕인 킨메이(欽明) 천황15년 10월 2일조(條)에 ‘예맥을 맥(貊)’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가 예맥조선을 계승한 것을 적시한다고 하겠다.
이상의 고찰에서 한민족(韓民族)의 계보를 정립(定立)하면 환국과 배달국에서 고조선=숙신씨(肅愼氏)-예맥-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계승 발전한 것이다. 이 같이 한민족은 상고시대 환국 53대 3301년, 배달국 18대 1565년, 단군조선 47대 2096년의 실재한 7천년 제국의 역사 등 1만년 역사를 창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사가들은 크게 반성하고 역사를 제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위정자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국가 도약의 길로 온 국민이 나아갈 수 있도록 과감하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외교적 마찰이나 갈등 때문에 자숙하는 것은 온전한 패배주의다. 그런 행동은 국가 지도자의 자격이 있을 수 없다. 국민들이 위대한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국가 지도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점이다. 예맥은 제국역사의 명맥을 이은 대륙의 주인이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최진열 ‘대륙에 서다’,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주해 환단고기’,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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