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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신라를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 한 일본사

송화강 2019-05-05 (일) 16:52 6년전 9227  

신라를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 한 일본사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12-21 00:18:46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일본 군국주의 노골화 배경은
 
일본의 역사를 기록한 ‘기기’(記紀)를 보면 5세기 이후는 기록을 근거로 쓰여졌지만 그 이전은 자연이나 선조의 신화·전승(傳承) 등을 천황 중심의 신화에 꾸며서 만든 것으로 기술돼 있다. 따라서 5세기 이후의 기록은 일단 사료가 되나 그 이전에 관해서는 전혀 사료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제1대 천황은 1천년이나 조작했다. 이를 근거로 보면 진무덴노(神武天皇)는 서력으로 서기전 660년의 구력(舊曆) 1월1일(新曆 2월11일)에 즉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조작을 명치정부(明治政府)는 그대로 받아 2월11일을 기원절(紀元節)로 했다. 그러나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이를 폐지했으나 다시 ‘건국기념일’로서 부활시킨 일본이다.
 
지난 11월 국회해산 후 이달 14일 실시한 일본의 총선에서 아베신조(阿倍晋三)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했다. 아베는 자신이 정치에 입문한 목적이자 사명이라고 밝힌 ‘전후체제탈피’를 통해 다시 전전상태로 회귀하는 정책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외교 국방상의 대책은 안중에 없고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여전히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싸움만 하면서 일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분석은 제쳐둔 채 눈앞의 분쟁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지난날 일본이 조선에 보낸 운양호가 강화도에 침입해 수심측량 등 불법을 범하고서도 오히려 우리에게 불법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 불평등조약을 체결했었다. 이는 국제법무지에서 빚어진 것이었는데, 지금도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1904년), 한일협약(1907년), 한일 병합조약(1910년) 등이 조약이 아닌 것을 지금도 조약이라고 하는 무지가 여전하다. 지금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조약이 아닌 것을 조약이라고 일본이 말하는 그대로 적고 있다. 이 같은 무지는 정말 낯 뜨겁다. 조약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능력, 자격, 상호동의의 존재, 목적 등이 합법성으로 적법해야 한다. 아울러 확정 가능한 내용으로 해야 하고 강압성이 있으면 무효화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약은 조약형식의 실효성이 있어야 한다. 즉 대표의 서명, 발효일의 기입, 기타 문서로서 완결이 돼야 조약이 성립하는 것임에도 이를 위반한 것을 조약이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지금도 우리와 상관없는 청일 간에 맺은 ‘간도조약’까지 한일협정시 국회가 비준하고 있는 마당이니 일본이 우리를 향해 아직도 뻔뻔스럽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고종황제의 칙령 41호에 의한 황제의 서명으로 날인 한 적도 없고, 황제가 위임한 대표도 아닐 뿐만 아니라 강박에 의해 대표까지 부패했던 것 등이 무효의 원인이 되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이에 항변도 하지 않고 일본의 각본대로 다 들어주고 있다. 일본의 논리는 ‘한국을 침략한 적이 없고 국가의 배상도, 위안부 문제도, 사죄문제도 이미 법적으로 다 끝난 것’으로 내세워진다. 우리는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현 교과서에 조차 일본이 써 준대로 ‘을사보호조약’이니 ‘합병조약’이니 하면서 조약이 아닌 것을 모두 인정하는 무식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에 일본은 한국을 우습게보며 침략하지 않았다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은 한술 더 떠서 ‘구미열강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려고 한국에 진출했다’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제 우리도 지식기반 사회에 정치인, 언론인, 학자, 국민 등 누구 할 것 없이 국제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년이면 해방 70년에 한일수교 50주년이 된다. 하지만 해방 후 수교해서 정상화 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일본은 391년에 일본군이 백제, 신라에 출병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또 56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멸망시켰다고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끝없이 하고 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을 때부터 일본의 국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칼럼은 일본의 백제나 신라 정복은 없었다는 사실과 오히려 신라가 왜를 정복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신라 정복·통치설은 날조,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 했다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신공후(神功后)가 신라를 정복·통치했다고 침략적 사기긴작을 위해 조작했지만 사실 왜는 신라를 매우 두려워 했다.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는 “4~5세기 초 왜가 고구려 때문에 신라를 침공 할 수 없는데 신라를 정복했다고 하는 것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신공후(神功后)는 실재인물인가”라고 의구심을 품은 사실을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1971년8월16일, (日本の虛像と實像)에서 언급하고 있다. 신공후(神功后)가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에 대해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허구라고 말하고 있다. 이노우에(井上光貞)도 “황실계도(皇室系圖)는 오진(應神)까지 대략 신용하고 오진(應神)의 부모인 츄우아이(仲哀와 신공후(神功后)는 의심스럽다고 하는 것이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래의 정설로 돼 있다”(日本國家の起源 204面)고 했다.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의 신공후(神功后)가 삼한(三韓)을 정복했다 함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 당시 왜는 신라에 대한 문제로 고난을 당한 까닭에 정벌 설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사가(史家)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일본이 신공후(神功后)의 신라 정복 및 통치를 내세운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의 침략적 야욕을 북돋기 위해 조작하고 위조한 것이 분명하다. 고대 일본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일본을 지배했다. 해양대국으로 대제국이었던 백제가 그렇고 신라가 그렇다. 승하하라(菅原道具)가 견당사폐지(遣唐使廢止)를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바다에서 신라해병에게 피습될 위험이 큼으로 견당사(遣唐使)를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中村新太郞著, 日本と中國の2千年 260面). 이는 신라가 일본의 바다를 지배한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일본문화사(日本文化史)에 보면 “신라가 일본에 대한 태도가 오만해 덴베이(天平) 6년(734년) 12월에 신라사절이 오고 그 이듬해 2월에 입경했다. 신라를 ‘왕성국(王城國)’이라 칭(稱)함으로 이를 책(責)하고 그 사절을 거절했다”는 내용이 있다. ‘왕성국(王城國)’은 천자(天子)의 나라를 칭하는 것으로 신라가 일본을 지배하는 상국(上國)이라 칭(稱)한 것이다. 사실상 신라는 일본을 같은 동급(同級)의 나라로 예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했다. 811년(嵯峨天皇 弘仁 2년)에 “신라의 해적선이 대마도 사스우라(佐須浦)에 출현함으로 다사이후관내(太宰府管內)와 낭아도(長門, 石見, 出雲) 등 각국에 경호령(警護令)을 내렸다. 신라의 적선(賊船)이 자주 일본의 변경을 위협했다. 신라인이 상업을 빙자하고 일본에 들어와서 일본 국정을 정탐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승화(承和)10년 8월에는 “다사이후(太宰府)가 정월 중순으로부터 8월 6일까지 멀리 신라 측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리고 황혼이 되면 또한 불이 보인다고 아뢰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신라는 출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신라의 침략에 신경을 쓴 것이다. 나아가 신경과민이 된 상태였다. 일본은 사자(使者)를 대신궁외(大神宮外), 여러 신궁(神宮)과 산릉(山陵)에 파견해 신라의 퇴각과 국내의 평안을 기도했다. 신라해적(海賊)을 방위키 위해 정병(精兵)을 동원해 추토(追討)코자 했으나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도피함으로 수인(囚人=죄수·罪囚)을 징발하고 방위했다(日本文化史 第14章 百濟, 高句麗及び新羅との交涉203面~4面)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공포대상이었던 신라 침입에 대비한 기록들 많다
 
일본은 886년에 건아이하(健兒以下)의 병사를 동원해 신라의 내습(來襲)을 방위할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서국각지(西國各地)에 배치하고 신라를 바라 볼 수 있는 고지에 사원(寺院)을 세우고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독경(讀經)하여 부처의 보호에 의해 신라의 침입을 방위코자 했다. 서기869년 5월에는 신라의 해적선 2척이 하카다항(博多港)에 침입해 견(絹), 면(綿),을 탈취해가니 일본 정부는 신라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다사이후(太宰府)의 관리를 질책(叱責)해 이방면의 군비를 증강하고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 석청수팔번궁(石淸水八幡宮)에 각각 칙사(勅使)를 보내고 전국의 신사(神社)에 폐예(弊帠)를 봉수(奉修)했다. 아울러 각지 사원에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수법(修法)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위코자 했다. 이 같이 신라를 두려 워 할 때에 신라에 잡혀 갔다가 도탈(逃脫)하여 돌아온 자가 신라가 대선(大船)을 만들고 병사를 훈련 중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에 두려워하던 일본 정부는 우사궁(宇佐八幡宮)을 비롯해 전국신사(全國神社), 불각(佛閣)에 칙사(勅使)를 파견해 신라의 내습(來襲)을 방위(防衛)하는 기원(祈願)을 했다.(日本と中國の 2千年 260面)
 
이상의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일본에서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선단(船團)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것이다. 그는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따라서 신공후(神功后) 신라 정벌설(征伐說)은 시전 비궁장(詩傳 閟宮章)과 같은 기원사(祈願辭)다. 비궁장(閟宮章)은 노(魯)나라가 우리 민족인 예맥(銳麥=濊貊)을 정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맥(銳麥)이 도리어 노(魯)나라를 정복했다. 그런데 예맥(銳麥)의 정벌에 고민하는 노(魯)나라가 예맥(銳麥)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은 것이다.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저항하지 못해 신사(神社), 불각(佛閣)에 기도할 때에 신(神)의 조화(造化)로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어 읊은 것이다. 그런데 신공후(神功后)의 신라 정벌설(征伐說)은 아이러니컬하게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하고 일본이 인력(人力)으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지 못한 고심(苦心)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본 왜왕 1대의 오진왕(應神王)은 신공후(神功后)의 아들이고 닌도쿠 왕은 신공후(神功后)의 손자가 아니다. 오진왕은 가야계이고 닌도쿠 왕은 백제계이다. 앞서 김세염(金世溓)의 해사록(海槎錄)에 보면 오진천황(應神天皇) 22년(서기291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大阪)근처(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하고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고 했다.(東史綱目 第二卷上 儒禮王十二年(註)
 
4세기(世紀)~7세기(世紀)를 고고학상(考古學上)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한다. 당시 우리 한민족이 이동해 간 나라(奈羅)와 오고치(河內)-오사카부(大阪府)에는 거대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계 삼대(三大)무덤의 하나라는 사가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왕(仁德王)의 무덤이다. 일본인들이 닌도쿠덴노릉(仁德天皇陵)이라고 말하는 고분이다. 이 능에는 우리 철제무기인 부장품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은세공(細工)과 마구(馬具) 등이 호우(豪雨)로 일부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일본 역사 2600년은 허구, 1천년 이상 줄어든 약 1600년 이다
 
일본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닌도쿠덴노릉을 발굴해야 하는데, 일본은 이 능을 발굴하지 않는다. 발굴하면 일본의 고대역사가 우리의 것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속에 덴노(天皇)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제1대 진무덴노(神武天皇) 이후 대대로 통치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허구다. 역사는 그 유물이 말한다. 닌도쿠덴노릉(仁德天皇陵)을 발굴해 보면 일본이 역사왜곡을 어떻게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에 1천년을 매우기 위해 실재하지 않은 왕들을 엮어 놓았으나 거듭강조하지만 1대에서 14대까지는 허구다. 16대 닌도쿠덴노(仁德天皇)까지는 덴노(天皇)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일본 학자들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천황의 명칭이 실제로 쓰게 된 것은 6세기말의 성덕태자(聖德太子)때부터다. 서기전 660년 일본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거짓이다.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의 미수노(水野祐) 교수는 일본의 역사는 오진왕(應神王)이 제1대부터 1659년으로 보고 있다. 미수노(水野祐) 교수는 일본 역사는 ‘978년이 위조’라고 했다. 일본은 일본인들이 15대 덴노(天皇)라는 오진왕(應神王)이 제1대 일본의 왕인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 이전에 일본 규슈(九州)에서 무녀(巫女) 희미고(卑弥呼) 2대가 다스렸다는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은 부족 집단으로 국가라 볼 수 없다. 일본 역사 속에는 3세기에 이도국을 국가라고 하나 우리가 이런 부족을 모두 국가라 하면 우리는 환국 12부족 등 근세까지 수천개의 국가가 있는 셈이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일본 역사를 2600년이라 하나 허구다. 여기서 약 1천년을 뺀 역사가 일본 역사로 봐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승국 번역·주해 ‘환단고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김부식 ‘삼국사기’, 한창건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遠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邊健太郞 ‘日韓倂合小史’. 島田正郞 ‘アジア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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