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우리 상고사 왜곡 배경
상고사가 없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는 보잘 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던 제후국이었음에도 우리 역사를 폄하하고 변조·왜곡하며 대담하게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제멋대로 한국사를 중국역사와 일본역사로 바꿔놓고 있는 그들의 탐욕을 뭐라 표현 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중국과 일본에 의해 왜곡된 역사만을 배워 온 역사를 진짜 역사로 알고 있는데, 더욱 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필자는 지난 5월 독립기념관에 갈 기회가 있어서 관람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독립기념관 문은 동양 제일이라고 자랑하면서 진열된 것은 일제 조선사편수회 역사의 수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안내원도 우리의 상고사나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인식이 전무한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독립기념관’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역사지식이 없고 주체성이 없는 기념관이 서 있는지 참으로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한민족의 혼이라고 할 정통성에 대한 진열은 그야말로 빈약한 채 상고사의 위대한 역사 환국 53대 3301년, 배달국 18대 1565년의 역사 사료들이 전무했다. 이어진 단군조선도 조선사편수회의 왜곡된 역사 수준의 사대주의 자비적(自卑的)인 역사에 근거를 둔 전시였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일제의 역사왜곡과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서 독립기념관을 세웠는데, 그 목적이 이처럼 일탈돼 있는데 놀랐다.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 그리고 그 세계문명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지만 그 기록이나 유물은 전무하고 삼국시대 이후 것도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나아가 안내원들은 일본이 왜곡한 역사내용을 앵무새처럼 설명해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관하는 당국의 무지에도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이번 칼럼은 중국과 일본의 우리역사 왜곡의 배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두나라는 상고사가 없는데도 버젓이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자기들 것으로 바꿔 놓는 만행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그 속내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고사 없는 뿌리없는 일본, 우리 상고사 없애기에 망동 수준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무력으로 강탈 한 후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앉혔다. 그는 무단정치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데라우치는 우리 땅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온전히 식민지로 제압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을 1910년 세우고 같은 해 11월 한국의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한 일에 본격 착수한다.
데라우치는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조선의 관습과 제도 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워 전국의 각도군 경찰서를 동원, 그들 기준으로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총독부는 종로 일대의 서점과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는 서사(書肆-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를 1년 2개월 동안 이 잡듯이 뒤졌다.
이를 통해 일제는 총 51종 22만여권을 압수하고 일부 고서들은 일본으로 가져갔다. 나머지는 역사왜곡에 필요한 몇 권만 남기고 전기(傳記), 열전(列傳), 충의록(忠義錄), 무용전(武勇傳)까지도 모두 불태우는 치 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전국적으로 뒤지고 또 뒤지며 우리 역사를 뿌리째 뽑아내기 위한 민족혼 말살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당시 총독부 관계자들도 “1918년 말 까지 오로지 사료의 수집에만 매달렸다. 새롭게 발견된 것이 정말 많았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이 같이 압수하고 불태운 것에 만족하지 못한 일제는 계속해서 향교, 서원, 구가(舊家), 지방사대부 양반가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이 일에 일제는 엄청난 인력과 비용 그리고 공을 들였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우리나라 역사자료 씨를 말리려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일제는 서적수색을 계속사업으로 연장하는 동시에 아예 근본 자체를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본격적인 조선사왜곡 편찬업무에 들어간다.
이즈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책을 표방하는 상황에 닥친다. 이 때 부임한 사이토 미노루(齊藤 實) 총독은 1922년 12월 훈령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을 제정·공포하고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해 철저한 역사왜곡을 상고사부터 단행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왜 이토록 끈질기고 악랄하게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당시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이 가장 두려웠다. 조선이 그들보다 유구하고 긴 역사를 가진 강대한 문화민족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의 뿌리는 그 반대로 야만성 이외에는 내세울게 없었다. 이에 대해 재야 사학자들은 “노예가 상전으로 모시던 귀족을 배신하고 그 자리를 강제로 빼앗아 모든 것을 불사르고 정신마저 노예로 만들려 한 것”이라고 비유하며 비판했다.
지난날 왜구들의 경우도 숱한 노략질을 하면서도 조선의 역사와 문화위력을 두려워했다. 일제가 일시에 무력으로 조선을 침탈하기는 했으나 그 정신까지 지배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총과 칼을 내세워 무단정치로 한 순간 지배는 할 수 있었지만 이를 영원히 끌고 갈 수는 없었음을 일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껍데기만의 한반도가 아닌 한국을 온전히 탈취하기에는 그들의 문화총량이 너무나 조선보다 못했음을 일제 지도자들이 알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는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영혼 죽이기’에 혈안이 돼 온갖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이들은 군부를 시켜 광개토호태왕 비를 변조하는 치졸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개토호태왕이 고구려 시절 그들을 구제하고 생명을 보호해 줬음에도 이를 치욕이라 하며 지우려 한 것은 극력한 배신행위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일제는 오늘날 일본의 문명이 있게 한 근간인 백제의 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삭제·조작하는 배신을 거푸 저질렀다.
앞서 일제는 명치유신 때 ‘일본서기’를 재정리, 그들의 역사부터 왜곡했다. 즉, 사전에 계획한 설계도에 따라 우리의 가짜 조선사를 편찬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조선의 땅만이 아니라 민족까지도 일본에 흡수하려고 광분한 나머지 상고사가 없는 일본보다 8천년 이상이 앞서 있는 조선상고사와 고대사를 말살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한·일 양국 국민들이 모두 자기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 일제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조작·왜곡한 역사 설계도로 두 나라의 위상을 새롭게 꿰맞추려 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동생으로 만들려는 망상을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역사교재는 그 굴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로 격 높이며 안으로는 치밀한 전방위 역사왜곡
1922년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조선인학자의 외면으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일제는 1925년 6월 일왕의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꾼다. 동시에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켜 본격적으로 역사 왜곡을 주도한다.
새로 정비된 ‘조선사편수회’는 수장가(守藏家)들이 사료(史料)를 내놓지 않자 수집이 아닌 ‘대여(貸與)’라는 위장된 수탈방법으로 사료(史料)를 거둬들여 모두 불태운다. 이후 1927년 6월 1일 협박과 매수로 확보한 사람들로 조선사편수회 사무분담을 한다.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도 1928년 12월 20일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장을 받는다.
조선총독부는 덕망이 있는 조선 학자를 참여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육당도 끝내는 조선총독부의 위협과 포섭에 못 견디고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키로 승낙하자 일제는 일본내각의 결의를 거쳐 일본내각 임명장을 주고는 그의 참가를 대내외에 선전했다. 이에 육당(六堂)의 죽마고우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은 “육당이 변절했다”고 하면서 “최남선이 죽었다”는 조문(弔文)을 쓰고 그와 절교했다.
동료들에게 치욕을 당한 육당(六堂)은 비록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으로 어쩔 수없이 참여했지만 그 자신이 참가하기 전에 이미 삭제키로 결정한 단군조선을 비롯한 상고사를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육당을 이용하려는 일제가 육당의 조선사 회복의도를 용납할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편찬 업무에 관여하며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 설을 만드는 등 종횡무진 역사왜곡에 앞장섰다. 그는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영인(影印)해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인(因)자를 변조한다. 이 사실을 육당(六堂)이 천인망필(淺人妄筆)이라고 폭로하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일제는 시정할리 없었다.
‘단군신화 설’을 조작한 장본인이 바로 이마니시 류(今西龍)다. 육당은 단군 등 조선상고사는 정편, 보편(正編, 補編)을 제작해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제는 철저히 묵살했다. 일제는 한술 더 떠서 조선사에 있지도 않은 일본 지배사를 포함할 것을 기도하기도 한다.
일제는 7000년에 걸쳐 아시아를 지배했던 제국의 역사인 우리 상고사를 없애기 위해 1923년~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4950종의 역사서를 탈취하고 인멸했다. 하지만 이 조차 대단히 축소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가 얼마나 많은 역사사료를 탈취해고 인멸했는지 알 수가 없다. 경찰까지 동원해 온갖 사료를 무차별 강탈한 조선사 왜곡 편찬작업에서 사진 4511장(文記, 畵像, 扁額) 등도 453점이나 된다고 수탈실적을 축소·기록했기 때문이다.
고 문정창(故 文定昌) 선생은 ‘조선사’ 3편 7권 말미에 백문보(白文寶)의 상소문에 있는 단군의 두자(檀君二字)가 ‘조선사’ 35권, 총 2만4000여 쪽에 나오는 단군기술의 전부라고 지적한데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단군이 나오는 부분을 보면 고려의 국운이 쇠퇴해 북쪽은 홍건적, 남쪽은 왜구의 창궐로 백성들이 곤란을 겪을 때 기회를 잡은 듯 단군을 부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역사를 근거없이 깎아 내리고 위난의 시기만을 확대 강조하려는 일제의 저의를 자명하게 드러내주는 방증인 것이다. 이 같은 수법으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 35권은 1938년 완간된다.(2만4111쪽) 이렇게 철저하게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쓰여지고 왜곡·날조된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를 지금 오늘의 강단파 사학자들은 거의 그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井上 淸 ‘日本の歷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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