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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여전한 논쟁 ‘한사군 한반도설’…명백한 조작

송화강 2019-05-05 (일) 16:41 6년전 10114  

여전한 논쟁 ‘한사군 한반도설’…명백한 조작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7-07-09 15:32:2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한사군 한반도 설치설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일제로부터 광복한지 73년이 흘렀으나 반도식민사관자들이 조선사편수회의 왜곡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논쟁은 계속된다. 한사군 문제는 그 전제(前提)와 시각(視覺)에서 기인했다.
 
이 문제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전제(前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어떤 근거로 “대륙이다”, “한반도다” 하느냐의 문제다. 둘째는 한사군에 대한 평가가 어떤 근거를 두고 하느냐의 차이다.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한반도설이 무엇을 두고 옳다고 하는지 신념적·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이성적 객관적으로 위치고증을 하고 말하고 있는지, 그 시각에 그 옳고 그름이 판가름이 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 진실 규명이 관건이다.
 
한사군(漢四郡)은 위우거의 본거지와 그 인접지에 국한됐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의 설치가 반도 내에서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 학자가 다수이었다는 것은 역사연구부족에서다.
 
그것은 과가 조선학자의 다수가 중국의 허위 아니면 과장(誇張)된 사적이라도 충실히 신봉해 중국에 대한 우선적 선입감에 지배 됐으며 당시의 국제정세를 검토하지 아니하고 오직 중국문화와 그 사적(史蹟)만을 절대 신용 한 것이 문제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한사군 왜곡에 내세우는 근거가 되는 사적은 [한서(漢書)]와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이다. 이것은 한사군이 설치 후 약 200년이 지난 서기100년경의 저술이었다. 그것은 상전이 벽해(碧海)될 수 있는 막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간이다.
 
만일 조선의 옛터가 조선반도에 내에 국한 됐다면 그 근본 조건이 우선 한(漢)의 세력이 조선반도를 석권 할 파죽(破竹)의 대군으로 침입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한나라가 압록강 대안땅(對岸地) 까지를 점령 한 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또 위만왕조(衛滿王朝)가 만주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일괄해 통치하며 인심을 수습해 조선인 전체의 지지를 얻었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곳은 우리 민족이 사는 곳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위만이 외부에서 도망해온 자이었기에 인심은커녕 우리민족을 다스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밝힌바 대로 위만조선은 당시 막강한 예맥조선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고립했으며 조선반도와는 왕래가 두절 됐을 뿐더러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예맥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다. 오늘은 이에 대해 좀 더 보완하고자 한다.
 
한(漢)은 낙랑군도 포기한 상태였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를 혼란스럽기 하기 위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조작하나 이는 근거가 없는 역사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대륙(요서)에 있었다. 한반도에는 존재한 사실이 없다.
 
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존재가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는 지리적 여건이 결정한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고조선과 고구려 한사군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대륙에 있었다. 한국역사는 처음부터 대륙에서 시작했다.
 
지난 1만1000년 전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 백제도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충청도 전라도로 보고 있으나 아니다. 백제는 대륙에 200성(城)을 가지고 다스린 대제국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상고시대부터 고대 중세까지 대륙에 있었다.
 
우리나라 식민사관자들은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나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설치한 적이 없음은 이미 밝혔다. 당시 한(漢)은 그럴 처지도 힘도 없었다. 한사군 중 임둔, 진번이 이미 포기하고 현토군도 대부분이 예맥이 차지한 상태이고 낙랑군도 포기한 상태였다.
 
최동 선생은 한(漢)이 낙랑군을 포기한 데 대한 견해를 그의 저서 [조선상고민족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낙랑군은 조선의 옛터이며 그 주민 대부분이 예인(濊人)이라는 당시 조선인이었다. 고로 한인(漢人)이 통치하기 곤란 했고 겸해 예맥족을 대표하는 고구려가 그 동북지방에서 신흥국가로 대두해 종족끼리의 연락 내통도 있었을 것이다.
 
한(漢)은 임둔(臨屯) 진번(眞番)의 2군(郡)을 우선 포기하고 낙랑군 역시 분해해 퇴각했다. 흉노와 돌궐이 강한 때여서 한(漢)나라는 외역(外域)인 낙랑군 통치에 적극적일 수 없었으며 한무제(漢武帝) 이후로는 내치(內治)도 번망한 것이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낙랑군(樂浪郡)이 유명무실한 현실을 청산코자 했다. 서기30년 낙랑군 동부 도위(都尉)의 관직(官職)을 폐하고 영동칠현(嶺東7縣)을 완전히 포기 한 것이다.
 
당시 그 지방은 주민의 전부가 조선인이었으며 그 두목인 거사(居士)를 후(候)로 봉했는데 법권자(法權者)로 한 듯하나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통치를 할 수가 없음에서다. 여기서 [개기종야(皆其種也)]라고 하는 다소 분개한 흥미 있는 어투가 나온다. 이[개기종야(皆其種也)]라는 분개한 어투는 한사군을 포기하는 한 증거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한사군포기한 말. 개기종야(皆其種也)는 그 증거다.
 
[개기종야(皆其種也)]는 통치를 못하는 것을 분개하며 나온 말인 것이다. 즉, 중국이 요동 남쪽에 있는 낙랑군을 포기 하면서 약이 올라서 한 소리라는 것이다. 그 말에는 2가지 뜻이 있다. ‘수(數)가 하도 많다’는 것과, ‘왜 이렇게 떼거리가 많으냐! 감당치 못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위만을 치고 한사군(漢四郡)을 정하긴 했지만 동이(東夷)인 예맥족(銳麥族)=(濊貊族) 수(數)가 많기도 하고 힘이 너무 강해서 말을 안 들어 어떻게 해 먹을 수가 없다.’고 분개하며 실토한 역사적 기록인 것이다.
 
당시 한나라가 한사군을 두려고 했으나 이미 임둔, 진번이 예맥에 흡수되고 현토군도 다 흡수된 마당에 한사군의 중심 군(郡)인 낙랑군(樂浪郡)도 포기 할 수밖에 없음을 입증 한 것이다.
 
이는 중국이 한사군을 임의로 설치해서 당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주축이 된 예맥으로 중국이 제 뜻을 실현하지 못하게 되자. 이상하고 격분한 어투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개기종야(皆其種也)]라는 말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어쩠건 자유롭게 내버린 것으로 미루어 보면 한사군을 둔 것만은 사실이나 한사군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조선 동이인 예맥인들로 실력이 대단해서 중국이 제 뜻을 실현하지 못하게 되자 이상하고 격분한 어조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개기종야(皆其種也)]라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반도내의 낙랑국(樂浪國)이나 대방(帶方)은 한 번도 한인(漢人)들이 자리 잡지 못한 곳이다.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로 정인보(鄭寅普)선생이“중국인의 한사군이란 무실한 무론(誣論)에 불과 한 것이다.”고한 결론이 옳은 것이다.
 
즉 ‘한사군은 중국인들이 허세(虛勢)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판정지울 수 있다. 이것을 일본은 중국인의 무론(誣論)에 불과 한 사실을 왜곡해 마치 조선이 중국에 지배를 받은 양 왜곡한 것은 허구로 그 거짓은 진실이 아니기에 다 밝혀졌다.
 
이로써 보면, 한사군은 합군 혹은 포기 했다는 말도 이해 할 수 있다. 중국은 뻥튀기를 하며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조작 하나 그런 일이 없음을 중국역사에도 분명하게 명기(明記) 돼 있다.(三國志第三十, 東夷傳).
 
중국민족은 사군(四郡)에 예속돼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고 위만조선 지역에 거주하던 한민족(韓民族)은 한무제의 지배를 받는 중국민족과 분리돼 한무제의 지배를 받지 아니 했다고 했다. 이것은 한무제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하지 못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시 예맥(銳麥)이 한사군 중 3군(임둔, 진번, 현토)을 빼앗아 갔어도 예맥이 너무 강성했기 때문에 한무제(漢武帝)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예맥조선(銳麥朝鮮)은 당시 가장 강성했었다.
 
이는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1천여 년 간 중국대륙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이 중국역사에도 명기돼 있는데 춘추시대에 중국 정벌한 기록도 아래서 볼 수 있다.
 
중국이 한민족(韓民族)지배한 적 없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고대 강대국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예맥조선(銳麥朝鮮)과 부여(夫餘)와 고구려이었다. 한서(漢書)에 엄우(嚴尤)가 왕망(王莽)에 대해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대우(大憂)라고 말 했다고 했다. (漢書 九十九中 列傳 第六十九中 王莽).
 
여기서 대우(大憂)는 대 정벌(大征伐)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 했지, 중국이 우리한민족을 정벌하거나 정복당한 적이 없고 지배하지 못했다.
 
중국은 정벌이나 정복을 하지 않으면서도 과대망상 적으로 과장(誇張)하나 그들의 수법을 제대로 알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들의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어디까지 거짓말이지 역사가 아니다.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대 우리한민족(韓民族)의 국가는 ‘반도식민사관자’들의 연구도 하지 않고 마치 우리가 중국의 한(漢)나라나 진(秦)나라에게 정복당한 것 같이 역사를 엮어 놓고 있으나 그 내면을 보면 우리가 중국을 정벌하고 정복한 역사임을 잘 알 수 있다.
 
중국사서(史書)인 한서(漢書)에 나타난 것으로도 증명 할 수 있다. 예컨대 예맥(銳麥)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시대에 한(漢)을 정벌해 많은 해를 끼치었다고 했다. (漢書 二十四下 食貨志 第四下). 중국과 일본의 말하는 왜곡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또 전한서(前漢書)에 [簫望....信讓 乎蠻貊 福祚流于無窮萬世之長策也 天子 采之]라 했다. (前漢書 七十八 簫望傳 第四十八). 즉 소망(簫望)이 예맥(銳麥)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하는 것이 국가보존의 양책(良策)이라 주장하니 천자(天子)가 그 주장을 채택했다고 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高句麗) 모본대왕시대(慕本大王時代)에 고구려 군이 한나라 요지(要地) 태원(太原)을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동이 항복하고 배상금을 바치었다. 그런데 중국은 후한서에 채동이 은신(恩信)으로 불러 항복 받았다고 기록했다. (後漢書 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高句麗).
 
여기서 보듯 중국은 일방적으로 중국이 인류의 종주국(宗主國)이라 자처하며 중국인은 패(敗)한 것을 승리(勝利)로 기록하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이라 기록하는 상습(常習)이 있다. 이는 중국사(中國史)를 연구하는 자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 예맥(銳麥=예맥(濊貊)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했다는 것은 예맥(銳麥)이 대 정벌(大征伐)에 항복(降伏)해 배상금을 바치고 영토를 양여(讓與)했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 한 후에 진번, 임둔, 현토, 등 3군(郡)을 예맥에게 빼앗긴 사실도 예맥이 한(漢)을 제압(制壓)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맥(銳麥)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도 타도했다.
 
우리는 예맥조선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잘 모르고 있으나, 예맥은 오래전부터 후(侯), 읍(邑), 군(君)이라는 3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다. 예맥은 한족(漢族)과의 쟁탈전에서 한나라에 밀린 적이 없다. 일시 불리했을 때 퇴각은 있을 수 있으나 밀리지 않은 강대한 국가였다.
 
예맥을 힘으로 감당 못한 한무제(漢武帝)는 많은 재물로서 군(君)이라는 부족, 남녀(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君)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 한 것도 한무제(漢武帝)가 무력으로 예맥을 저항치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崔仁 韓國의 再發見 第二章 五節 漢四郡參照).
 
당시 예맥은 거칠 것이 없었다. 중국의 시전(詩傳, O宮九章註)에 신안호씨(新安胡氏)가 노(魯)를 정복했다 하고, 사기(史記)에 태사공(太史公)은 연(燕)이 북으로 예맥의 압박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直面) 한때가 수차(數次)라고 했다.(史記 燕召公世家 第四).
 
그리고 사기(史記)에 연(燕)이 예맥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고도 했다. (史記 百二十九 貨殖列傳 第二十九 鳥氏과) 이것은 예맥은 경제적으로도 연(燕)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맥조선(銳麥朝鮮)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도 타도했다. 우리가 알기로 중국4천여 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시대다. 진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隨)를 격멸하고 당을 격파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강대한 진(秦), 수(隨), 당(唐)을 제압한 민족이다. 우리가 중국한족과의 쟁패전(爭覇戰)에서 예맥이 진(秦)과 진(晉)을 고구려가 수(隨) 당(唐)에 승리한 제패자(制覇者)이다.
 
중국의 재래(在來)의 중국사가(史家)들은 진(秦)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말들 하나, 아니다. 이것은 진(秦)이 예맥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했다고 하는 것은 표면을 보는 선전이고, 실제로 진(秦)을 타도(打倒) 한 것은 예맥조선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뤘기에 중복하지 않고 생략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한족(韓族)은 고대 중국의 한족(漢族)과의 쟁패전(爭覇戰)에서 격렬히 겨뤘으나 우리한민족(韓民族)이 승리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우리가 중국에 패한 것 같이 역사를 조작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중국의 역사조작과 왜곡된 것들은 거짓역사이기에 다 밝혀 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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