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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낙랑(樂浪)과 낙랑국(樂浪國) 달라…“무지는 수치”

송화강 2019-05-05 (일) 16:43 6년전 10243  

낙랑(樂浪)과 낙랑국(樂浪國) 달라…“무지는 수치”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7-17 14:10:37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지난 6월 우리나라 3대 일간지 중 한 매체에서 ‘평양의 낙랑이 후에 중국의 낙랑으로 옮기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역사를 모르는 무지를 넘어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왜곡한 역사만을 알고 제 나라의 올바른 역사를 모르는 행태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웃의 중국과 일본이 자기나라 역사의 부실과 열등의식으로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지우려고 사주(使嗾)하는 판국에 신문에 나온 기사였다.
 
‘한사군반도설’은 국내식민사관학자라는 자들이 아무 논증 없이 중국과 일본의 일방적 주장만을 받아들여 나온 것이다.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樂浪郡)은 난하(灤河)유역 만리장성 밖의 조그마한 구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양의 낙랑국과 낙랑군은 전혀 다른 집단이다.
 
평양부근의 낙랑국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리(崔理)의 왕국으로 세간에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연애로 잘 알려진 나라이다. 이를 혼동해서 구별하지 못한 역사의 무지가 낳은 기사였다.
 
이러한 기사를 보면 역사를 왜곡하는 국가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갈 정도 다. 오늘은 낙랑에 대해 잘못 전해지고 있는 오류(誤謬)와 왜곡사실을 다루려 한다.
 
낙랑(樂浪)과 낙랑(樂浪國) 혼동은 역사무지(歷史無知)다.
 
과거 일본인들은 우리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우리가 평양에 세운 낙랑국(樂浪國)을 낙랑(樂浪郡)으로 혼동시키려 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잘못 전달됐다. 이는 식민사관의 광태(狂態)에서 나온 것으로 일고의 가치가 없다. 무지가 신문에까지 등장했다. 역사무지의 수치다.
 
평양부근의 낙랑국(樂浪國)에서 발굴한 고물(古物)의 지명과 연대를 맞추어 보면 중국의 한나라가 몰려서 쫓겨 다닐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에 잡혀온 중국인포로들이 많았다. 유물은 이들의 흔적일수도 있다. 그런데 확실치도 않은 낙랑고적을 빌미로 낙랑국(樂浪國)이 다 중국 것이라며 일본인들이 ‘한사군반도설’을 끄집어냈다.
 
이는 이미 밝힌바 대로 허구의 역사이다. 그간 우리는 한 번도 그러한 주장의 배경을 스스로 연구하지도 않고 일본이 조작해 놓은 ‘한사군반도설(漢四郡半島說)’을 고지 곧 대로 그대로 멋모르고 따라갔다.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없었다고 바로 생각한 정인보(鄭寅普)선생의 ‘조선사연구’는 국사의 좋은 자료다. 선생은 평양에서 나왔다고 일인(日人)들이 말하는 한(漢)나라의 낙랑유물이라는 봉니의 위조설과 점제현신사비의 정체를 명쾌하게 파헤쳐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일본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그 용도나 재질 상 당연히 부수러지게 마련인 봉니가 어떤 과정으로 발굴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정 선생은 “일인들이 발굴한 70여개의 봉니는 유독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며 낙랑의 명(名)을 나타내는 군명과 관명이 어긋나 믿을 수 없으며, 역사조작의 재주꾼인 일본인들이 당시상황에 맞추어 조작해 낸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관인(官印)은 후인들이 속여서 팔기 위해 많이 위조한데 대한 경계가 일찍이 역사기록이 있는데 낙랑명(樂浪名) 봉니의 위조는 한사군의 존재에 관한 것인 만큼 더욱 교묘하다.
 
점제현신시비란 것도 그 출처가 사뭇 수상쩍은 것임을 갈파했다. 한사군의 역사는 왜곡이다. 그 동안 한사군을 있는 것으로 전제한 것은 애초엔 그런 소리가 없다가 4군 설치 후 200년이 지나 중국인들의 역사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기록한데서 시작 했다.
 
그러나 중국이 한사군을 감당하거나 제대로 권력을 행사 한 적이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강점하면서 제일 먼저 일본인들만의 참여로 낙랑국(樂浪國)을 발견해 봉니와 같이 조작된 유물로 우리가 일찍이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다고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도 과거 한사군(漢四郡)이란 것을 통해 조선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듯이 과장(誇張)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짜 한사군을 만들어 놓고 사대주의(事大主義)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하는 그들의 야심표현(野心)表現)에 불과 하다. 실은 소부분의 지역을 그나마 더러는 포기하고 더러는 합치해서 자기네의 영토로 해보려고 애쓴 것에 불과 하다.
 
당시 우리한민족(韓民族)이 너무나 많고 유세(有勢)해서 중국이 그 희망을 단념 한 것이 분명하다. 최동 선생도  ‘조선상고민족사’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고 했다.
 
한사군(漢四郡)에 대한 잡음이 많은 이유는 왜인가
 
최동 선생의 주장은 “사군(四郡)은 반드시 위우거의 통치 본거지와 그 인접지에 국한 됐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군(四郡)의 설치가 반도 내에서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 학자가 다수이었다.
 
그것은 과거 조선학자의 다수가 중국의 허위 아니면 과장된 사적이라도 충실하게 신봉해 중국에 대한 우선적선입감에 지배 됐으며, 당시의 국제정세를 검토하지 아니하고 오직 중국문화와 그 사적을 절대 신용한 것이었다.
 
그 근거가 되는 사적은 ‘한서(漢書)’와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였다. 그것은 사군설치 후 약 200년이 지난 서기 1백년 경의 저술이었다. 그것은 ‘뽕밭이 변해 푸른 바다 가 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수 있는 막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간이었다.
 
만일 조선의 옛터가 조선반도 내에 국한됐다면 그 근본 조건이 우선 당시 한(漢)의 세력이 조선반도를 석권(席捲) 할 파죽(破竹)의 대군으로 침입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한(漢)이 압록강 대안지(對岸地)까지 점령한 후에야 가능 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위만 왕조가 만주와 조선왕조를 일괄하며 통치하며 인심을 수습해 조선인 전체의 지지를 얻어야 될 것인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위만왕조는 예맥족(銳麥族=濊貊族)이라는 조선인의 사면초가로 고립화 했으며 조선반도와는 왕래가 두절 됐을 뿐더러 조선인이 위만조선에서 계속 이탈 하고 있었다.
 
낙랑군을 포기할 만큼 한(漢)은 조선을 대적할 수 없었다.
 
한(漢)이 낙랑군(樂浪郡)을 포기한데 대한 최동선생의 견해도 옮긴다면 낙랑군은 조선의 옛터이며 그 주민 대부분이 예인(銳人=예맥인)이라는 당시의 조선인이었다.
 
때문에 한인(漢人)이 통치하기 곤란 했고 겸해 예맥 족을 대표하는 고구려(高句麗)가 그 동북방에서 신흥국가로 대두해 동족끼리의 연락하고 내통도 있었을 것이다.
 
한(漢)은 임둔, 진번의 2군을 포기하고 낙랑군 역시 분해해 퇴각했다. 흉노와 돌궐이 강한 때여서 한(漢)나라는 외역(外역(域)인 낙랑군통치에 적극적일 수 없었으며 무제(武帝) 이후로는 내치로도 번망한 것이었다.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낙랑군의 유명무실(有名無實)한 현실을 청산코자 했다. 서기30년 낙랑군(樂浪郡)동부도위의 관직을 폐하고 영동(嶺東)7현을 완전히 포기 한 것이다.
 
당시 그 지방은 주민의 전부가 조선인이었으며 그 두목인 거사를 후(候)로 봉했는데 법권자(法權者)로 한듯하다. 개기종야(皆其種也)라고 하는 어투는 다소 분개한 흥미 있는 어투이다.”(自單單(干干) 大嶺以西, 屬浪浪, 自嶺以東 7縣 都尉主之, 皆以穢爲民, 後, 省都尉, 封其渠師, 爲侯. 今不耐穢, 皆其種也. ‘三國志’ (최동 [조선상고민족사]420~421면, 546~548면).
 
위의 최동선생이 말하듯 한사군을 포기한 증거가 중국역사에서 확실히 잡혔다. ‘개기종야(皆其種也)’란 말이 그것이다. 이는 중국이 낙랑군을 포기하면서 약이 올라 한 소리인데 그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수가 하도 많다’는 것과 분개해 ‘왜 이렇게 떼거리가 많으냐? 감당 못하겠다’는 것이다. 즉, 사군(四郡)을 정하긴 했지만 동이(東夷) 예맥족(銳麥族)=濊貊族) 수가 많기도 하고, 힘이 너무 강해서 말을 안 들어 어떻게 해 먹을 수가 없다고 실토한 것이다.
 
한(漢)나라는 한사군(漢四郡)을 뒀으나 한사군 지역주민의 대다수가 조선 동이(東夷) 예맥인(銳麥人)들로 실력이 대단해서 중국이 제 뜻을 실현하지 못하게 되자 이상하고 격분한 어투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개기종야(皆其種也)’라는 것이다.
 
한반도내의 낙랑국(樂浪國)이나 대방은 한 번도 한인(漢人)들이 자리 잡지 못한 곳이다. 중국인들이 한사군(漢四郡)이란 무실(無實)한 무론(誣論)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여기서 한사군이 합군(合郡), 혹은 포기상태가 왜 됐는가를 상고해보면, 중국과 일본이 말하는 한사군(漢四郡)이란 실체가 없는 무실(無實)한 무론(誣論)에 불과하다는 정인보 선생의 결론은 바로 밝힌 것이고, 과언(過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음은 물론, 우리와 상관없는 것임을 중국문서역사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최태영[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49~53면, 참조·인용)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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