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일본역사의 허구(虛構)는 다 들어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기네 보다 유구하고 우월한 역사를 가진 조선인들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한민족의 자부심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 옛날 조선이 강대하고 광활한 독립국가가 있었던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 잊어버리도록 하기위해 날조를 서슴지 않았다.
환국(桓國) 3301년과 배달국(倍達國)1565년 도합 4866년간 다스린 상고사는 물론, 47대 2096년간 다스린 고조선(단군조선)의 단군(檀君)도 모두 실재가 아닌 신화(神話)라는 사상을 퍼트렸다.
또 일본은 환국(桓國)이 기재(記載)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불태우고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식으로 변조하며 일본이 일찍부터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다고 실재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사실처럼 날조(捏造)했다. 일본 역사는 1000년이나 날조하고 진무덴노가(神武天皇)가 서기전 666년에 일본국을 건설하였다고 조작했다.
그러나 진무덴노가(神武天皇)는 1000년 후의 인물이다. 이런 허위조작은 1200여 년 간 지하에 묻혀있던 ‘천황가(天皇家) 7천년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수록한 [신황기(神皇紀)]와 [수진전(秀眞傳)], [상기(上記)] 다케우치문서(竹內文書)[구카미문서(九鬼)]등 나오고 난 후 이를 연구한 미와구니미쓰(三輪邦光), 아고 기요히코(五鄕淸彦), 가시마 노부루(鹿島 昇), 마쓰모토 젠노스케(松本善之助)등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 의하여 이러한 일본의 역사가 다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역사왜곡에 앞장섰던 학자들까지도 일본역사는 조작으로 믿지 않고 있는데도 우리나라 강단학자라는 자는 지금도 일본이 왜곡하고 사실이 아닌 허구의 역사를 사실인양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허구성과 사기성과 기만성을 인정하는 일로 있어서는 아니 되고 벌써 살아져야 함에도 오늘날까지도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는 수치스러운 교육을 답습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역사가 우리 한민족이 대륙을 지배한 우리 역사로 대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일본의 고대역사서는 다 우리의 고대사를 자기들의 역사인양 왜곡하고 있다.
더구나 일제(日帝)시대 우리상고사를 말살시키고 고대사까지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부류가 “한국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라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함으로써 그 이전의 수천 년의 한국 상고사와 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추종하는 우리나라의 사학계는 아직도 반성은커녕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일본의 국수주의 사학자들도 천황가(天皇家) 7000년의 신황기(神皇紀) 등 새로운 역사진실의 밝혀지면서 양심적인 학자들이 일본역사가 왜곡된 역사임을 밝히고 있는데 우리는 제자리걸음이다.
그 대표적인 자 중 한 사람은 일본고대사 <신대기일서(神代紀一書)>를 주장하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던, 가지마노부루(鹿島昇)같은 일본학자다. 그는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신황기(神皇紀) 등을 새로운 역사서적을 접하면서 일본역사가 얼마나 황당하고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반성하고 있음도 있는데 오늘의 우리사학계는 그리 변화가 없다. 오늘도 우리가 너무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는 가야(伽倻)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고 져한다.
왜를 정복한 가야의 역사 재조명해야
가야(伽倻)는 일본이 야마토 정권 이전인 서기전 108년보다도 적어도 500년 이상 전부터 고대 변진족(弁辰族) 사람들이 김해를 중심으로 이곳에 부족국가를 세우고 북방과 서방으로부터의 압력에 대항하며 공존공영(共存共榮)의 길을 찾아 국가연맹을 결성하고 있었다.
그 연맹이 바로 6가야연맹(六伽倻聯盟)이다. 당시 낙동강유역의 부족은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제국(諸國) 중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반로국(半路國), 미조사마국(彌鳥邪馬國), 구사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사국(安邪國) 6국이 6가야연맹(六伽倻聯盟)을 구성하고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들은 유리한 지리적 이(利)를 이용해서 일찍부터 산업을 발달시켰다. 그들의 갖고 있는 전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수로왕(首露王)]의 전설이다. 서기 42년에 6가야연맹(六伽倻聯盟)의 새로운 맹주(盟主)로서 등장한 구사국(狗邪國)의 [수로왕(首露王)]에는 인도로부터 왕비(王妃)를 맞이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것이다.
전설이긴 하나 낙동강하구에 위치한 구사국(狗邪國)은 해외에의 창구(窓口)로서 또 중요 생산물의 집산지(集散地)로서 그 해외활동이 눈부시게 활발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이 연맹을 결성하고 최초의 맹주(盟主)로 맞이한 것은 낙동강중류에 있었던 미조사마국(彌鳥邪馬國) 지금의 고령(高靈)지방이었으나 후일 수로왕대(首露王代)가 되어서 구사국(狗邪國) 지금의 김해(金海)에서 맹주(盟主)가 된 역사도 있어 이 이국(二)國)은 혈연(血緣)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서로 경쟁적 입장에 선 것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가야(伽倻)는 지리적 위치상 낙동강상류에 있는 미조사마국(彌鳥邪馬國)이 상가라(上加羅), 하류 하구(河口)에 있는 구사국(狗邪國)이 하가라(下加羅)로 불리워 지고 있었다.
후일 서로 상위(上位)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상가라(上加羅)는 대가야(大伽倻), 하가라(下加羅)는 본가야(本伽倻)로 말하게 되었다. 이 가야는 당시로서는 고도의 산업기술을 몸에 익힌 6가야(六伽倻)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을 피해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남해(南海)에 활로(活路)를 찾은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 된다.
즉 그들은 배를 조립하여 만들고 해협(海峽)을 건너 또 하나의 왜(倭)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이 때가 서기전 250~600년경이라 추정된다. 일본은 이 역사를 숨기려고 있지도 않은 서기 660년 전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일본을 세웠다고 조작하는 것은 이 가야의 왜(倭)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이 시기 일본열도주민은 소위 승문문화(繩文文化)시대로 이들의 생선(生鮮)을 주로 먹는 생활수단으로서 하고 있던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 곳에 도래(渡來)한 6가야부족(六伽倻部族)은 이미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이루고 철(鐵)을 쓰고 말(馬)을 타고 대륙도 누빈 기마민족(騎馬民族)으로 일본에 처음으로 말을 타고 상륙한 데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의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말하게 된 것이다.
가야의 유민은 최초 구주(九州)로 들어가서 200~300년에 걸쳐서 제 부족(諸 部族)마다 점진적으로 개척을 진행시켜 어느 부족국가는 동(東)으로 진출하여 가고, 또 어느 부족국가는 구주(九州)에 정착한 것이다.
일본은 구주(九州)로부터 점진적으로 일본열도(日本列島)를 지배하고 소위 야마토(大和) 국가도 우리 유민에 의하여 나라가 세워 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어의 어원(語源)은 가야족(伽倻族)이 가져온 경상도방언이 고대조선어이라는 것을 언어연구가들은 말하고 있다. 두 개의 문명이 겹칠 때 혹은 충돌할 때 언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어는 고도(高度)한 문명(文明)을 가진 쪽이 반드시 지배(支配)한다는 것이 문명의 정설(定說)이다. 따라서 일본에 있어서도 가야로부터의 유민(流民)들이 언어 즉 고대조선어는 원주민의 언어의 영향을 받아서 약간의 혼효(混淆)변화했다. 유민은 일본열도를 지배하고 소위 야마도 말을 형성해 갔다.(朴炳植‘日本語の悲劇’36~37面 參照).
일본을 개화시킨 것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流民)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流民)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본의 문화를 높이고 일본인을 문맹(文盲)에서 깨우쳐 준 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 건너가서이다. 일본에 한자(漢字)가 들어간 것도 백제학자가 일본에 전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이미 한자는 일본에 들어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일본에 한자를 가져온 것은 일본의 첫 번째 왕인 오진왕(應神王)16년 왕인박사가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져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3세기말에 들어온 것이 된다.(실제는 370년 전후로 보고 있다.) 이미 밝힌 바대로 한자(漢字)는 우리 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고 일본에 전해진 것은 백제 이전 가야에 의해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소수상류사람만이 한자를 알고 있고 일반인에게는 보급되지 않았다. 또한 한자의 음(音)은 당시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음(音)이며 같은 시대의 음(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의 한자음과 일본의 한자음을 비교해함에 의해서 고대 조선음(古代朝鮮音)이 어떻게 변화해서 야마토음(大和音)이 되었는가를 입증함에 의해서 한일의 언어를 구분하는 학자의 연구 성과를 볼 수 있다. 일본에 들어간 한자(漢字)의 음(音)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즉 한음(漢音)과 오음(吳音)이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가(假)라는 한자는 한음(漢音)에서는 ka라 말하고 오음(吳音)에서는 ke라고 한다. 3세기말부터 4세기에 걸쳐서 한자의 음(音)은 틀림없이 한음(漢音)이었으나 일본의 한자(漢字)는 그렇지 않고 오음(吳音)이 주류(主流)이고 한음(漢音)은 훨씬 뒤에 견수사(遣隨使)와 견당사(遣唐使)들에 의해서 돌아온 후기음(後期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음(漢音)만 가지고서 일본의 한자음(漢字音)과 우리 한음(韓音)과 동시대(同時代)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朴炳植‘日本語の悲劇’64面以下 參照).
결과적으로 안 것은 한음(漢音)과 오음(吳音)은 틀린 것도 있으나 그 자체는 그리 크게 틀린 것이 없고 음(音)이 변화가 조금 있을 정도이다. 한음(韓音)의 사(邪)는 SA로 한음(漢音)은 SYA로 오음(吳音)은 JYA로, 미(米)도 MI가 한음(漢音)은 BEI, 오음(吳音)은 MAI로 두(斗)는 한음(韓音)은 TU, 한음(漢音)은 TOU로 오음(吳音)은 TSEU로 발음하고 또 계(係)의 경우도 한음(漢音)은 KE이고 한음(漢音)은 KEI로 발음하고 오음(吳音)은 KAI로 되는 정도로 그리 대단치 않으나 같은 한음(漢音)이라도 옛것과 지금의 변화는 있다.
따라서 한음(韓音)과 오음(吳音)의 구별은 근본적으로는 문제는 그리 되지 않는다. 필자가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일본어가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은 한자(漢字)와 히라가나(平假名-ひらかな)와 가다가나(片假名-カタカナ)라는 3개의 문자를 쓰는데다 한자(漢字)에는 음(音)과 훈(訓)이라는 것이 나눠서 쓰는데 을자(乙字)의 을(乙)의 발음만도 7가지로 하는데 혼란스러웠으나 같은 음이면 문자의 형태가 어떠하던 간에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근본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문자(文字)가 나오기 이전부터 일본의 언어는 우리말이 존재하고 있었음도 숨길 수 없다. 여기서 일본의 고대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모든 신사(神社)에서 올리는 제문(祭文)도 우리말을 쓰고 있었다.
예컨대 황궁(皇宮)에서의 제사(祭祀)를 드리는 제문(祭文)도 또 일본인의 조상이 모셔져 있다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제문(祭文)과 단군신상(檀君神像)을 모신 옥산신궁(玉山神宮)의 미다마진자(美玉神社)에서의 제문(祭文)도 다 우리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을 개화(開化)시킨 것이 다른 민족이 아니라 우리 유민(流民)이 일본에 가서 일본을 개화(開化)시킨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말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일본을 개화시킨 것은 우리 유민들에 의해서 이뤄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 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 ·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南帝 ‘命理속의 哲學’,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