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흔의 재(嶺) 너머 이야기
개천절과 단군, 버림받은 역대 건국 시조
2014-10-3
 |
|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단군성전에서 사단법인 현정회 주관으로 단군 제향 행사인 대제전이 열리고 있다./조선DB |
개천절(開天節)은 형식만 남은 국경일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 땅에 문명과 나라를 연 시조(始祖) 단군(檀君)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개천절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데도 역대 어느 대통령도, 어느 정치인도 단군 사당에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6ㆍ25 기념식을 하면서 국립묘지의 문을 닫아걸어놓고, 호국 영령들께는 감사 표현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지구 상에는 자기 나라를 열어준 시조를 모르는 민족이 태반이 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 우리가 문명국가의 반열에 들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시조가 누구인지 알 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라를 세울 때 이미 ‘홍익인간’이라는 더 하고 뺄 것도 없는 훌륭한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까지 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복된 민족입니까.
자기 나라 시조 박대하면서 잘 되는 민족 없고, 남에게 존경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래는 수년 전에 썼던 글인데, 여러 군데 수정 후 다시 옮깁니다.
///////////////////////////////////////////////////////////////////////////////////////
하늘을 우습게 아는 민족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하늘을 섬겨 왔습니다. 시조(始祖)이신 단군(檀君) 할아버지는 ‘하늘님’의 직계 자손이니 단군께서 세운 ‘고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 나라를 건국(建國)한 건국 시조들도 대부분 그 뿌리가 하늘과 닿아 있습니다.
중국의 옛 문헌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시기 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서로 어울려 즐기며 갖가지 의식을 벌였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 시조와 조상을 섬기는 것은 사실상 동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늘을 받드는 것, 시조를 섬기는 것, 조상에게 감사하는 것,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믿는 것이 독립적인 믿음이 아니라, 결국은 천지만물 중에 가장 높은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제사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좀 더 형식화된 면은 있을지 몰라도,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우리의 중요한 사상체계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화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우리는 하늘과 단군, 여타 우리의 건국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에 한 치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조(朝)는 단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단군의 사당을 수시로 정비하고, 제사를 나라에서 주관했습니다. 조선 왕조는 단군뿐 아니라 역대 건국 시조에 대한 예의도 깍듯이 지켜왔습니다.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고려 태조(왕건)의 사당을 세우고, 역대 임금에 대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배달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선(先) 왕조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고려도 500년간 단군을 비롯한 다른 선대 국가들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잘 모셨을 것을 의심할 바 없습니다.
정조 임금 때 기록을 보면 “백제 시조 온조(溫祚) 왕을 모시는 사당 이름이 격에 맞지 않으니 제대로 된 사당 이름을 내려달라”는 신하들의 건의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온조 임금 사당은 세종 때 지어져 나라에서 봄 가을로 제사를 소홀하지 않게 모셔왔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시조 사당의 이름이 다른 시조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는 것을 신하들이 지적한 것입니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역대 건국 시조들을 모시는 사당에 ‘숭(崇)’자와 ‘전(殿)’자가 들어간 이름을 임금이 직접 내렸습니다. 그런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만은 오랫동안 ‘온조왕 사(祀)’라고 되어 있어 뜻있는 선비들이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겠다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건의를 받은 정조 임금은 당장 ‘숭렬전(崇烈殿)’이란 이름을 내리고, 제문을 직접 쓰셨습니다.
구(舊) 대한국의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도 하늘에 제사지내고, 단군 사당을 보수하고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하늘을 공경하고, 각 나라를 세우신 시조들을 거의 하느님과 동격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런 후손들의 노력이 가상해서 조상이 음덕(蔭德)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시조이신 단군은 삼국시대부터 각 왕조로부터 단 한 번도 소홀함이 없이 제사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아 온 것은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를 세운 단군 시조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 하겠습니다.
김일성에 의해 사라진 수천년의 문화유산
역사를 좀 아는 사람들이 말하길 “한국사(史)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은 ‘한국이 생존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살아남아 세계사 속에 이름을 남기고, 후손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 자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설사 민족이 겉모습은 유지하더라도 혼(魂)이 사라지면 민족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만주족의 경우 비록 DNA 테스트를 해서 민족의 독특한 형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세(外勢)에 의해 민족이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내부의 돌연변이 때문에 민족 전체가 ‘혼 빠진’ 민족이 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60여년 전 6ㆍ25 동란에서 국토 전체가 김일성이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을 겁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이라는 변종 때문에 껍데기만 남고 혼은 사라진 민족이 될 뻔했는데, 용케도 우리 남쪽이라도 살아남아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이 멸실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좀 아는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아시아에 두 개의 기적이 있는데 하나는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고 합니다. 수천년 간 중국의 등쌀을 이겨내며 살아남은 것도 우리에게는 ‘기적’이었지만, 중국까지 공산화된 마당에서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공산화되었으면 김일성이에 의해 사라진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은 후에 회복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땅이 중국만큼 넓지 않은 북한은 하루아침에 수천년의 전통문화를 쓰레기통에 처넣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 민족은 외세뿐 아니라, 같은 피를 받은 사람 손에 의해서도 사라질 뻔했는데, 이를 지켜낸 것도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땅에 나라가 들어선 후 수천년간 조상과 건국 시조를 깍듯이 모셨으니 산천초목도 感泣(감읍)이 있다는데 어찌 조상인들 음덕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 눈 덮힌 숭열전의 모습. 숭열전은 백제 시조 온조왕과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였던 완풍군 이서를 모신 사당이다. 정조 임금이 현판을 내렸다. /경기관광공사 |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단군과 역대 건국 시조
문제는 수천년 동엔 하늘에 제사를 지내오며 하늘을 두렵게 생각해오던 우리가 언젠가부터 하늘을 우습게 아는 민족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끊이지 않던 단군에 대한 나라 차원의 제사가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나라에서 단군을 내팽개치니까 단군이 심지어 무슨 종교단체 교주(敎主) 비슷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역대 건국 시조에 대한 대접은 또 어떻습니까? 그나마 요즘 지자체 장들이 자기 고을의 홍보를 위해 지역과 연고가 있는 건국 시조의 제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이를 두고 나라에서 정식으로 제사를 지낸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백제 온조왕의 사당이 이름이 격이 맞는다고 부끄러워했는데,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 문화를 꽃피우고,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준 역대 건국 시조와 임금님에 대한 제사를 내팽개쳐 놓고도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래위가 뒤죽박죽이고 질서가 없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합니다. 콩가루 집안이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쩌다 몇 세대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망한 집구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콩가루 집안 사람들은 두려워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기 집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늘을 공경하지 않으면 사람이 두려워할 대상이 없어지고, 선(善)한 본성을 조ㅊ을 때 두어야 할 기준이 없어집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쁜 유혹이나 죄를 짓는데 쉽게 빠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 선비들이 한 시도 자기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고, 몸가짐에 조심한 것도 바로 하늘과 조상이 늘 자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는 제대로 된 품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격조는 대체로 그 나라 구성원들의 사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구성원들이 자기의 역사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역대 자기 나라 건국 시조를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의 조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노인을 어떻게 대접하는가, 애국자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하는 것 등을 살펴보면 한 나라의 품격에 대한 견적이 대강 나타납니다.
미국 사람들이 링컨을 비롯한 자기들 건국 시조를 매우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같이 존경하게 됩니다. 자기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결코 남들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시조 단군을 버리는데, 일본 사람이 와서 “우리가 단군의 제사를 모시겠다”고 할 리는 만무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단군과 건국 시조에 대한 추모(제사)만큼은 특정 종교단체나, 지자체, 혹은 문중에 맡겨 놓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격을 찾는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이 조상의 음덕이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라가 아닐 진데, 역대 건국 시조를 지금처럼 우습게 대접하고, 교만하게 살아서야 하겠습니까. 하늘을 두려워하고 받드는 것은 우리가 하늘의 성품을 닮으려 노력해온 선조의 자세를 잇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신사를 찾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우리의 지도자들도 단군 사당이나 역대 건국 시조, 종묘 등을 찾아 예를 표하는 것을 일상화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