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다시는 고구려 쳐들어가지 말라”
2008.12.10 10:38
중국 최대의 정복군주 당 태종, 유언으로 남겨
직접 군사 끌고 출정하고도 안시성 공략 실패

당(唐) 태종 때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무측천은 뛰어난 미모로 나이 14세에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무측천은 황제가 죽자 잠시 감업사에서 여승으로 지내다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정략적인 여걸이었다.
무측천이 아들뻘 되는 고종의 황후가 된 사실은 유목민의 ‘수혼제’(Levirate) 풍습과 같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태종은 이민족에 대해 ‘화하일가’(華夏一家, 중국 본토에서 같은 집안을 이룰 만큼 가까운 핏줄이라는 의미)를 말하고는 했다. 어쩌면 태종 스스로 유목민족적 기질을 소유했던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 제국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인물은 태종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신하의 올바른 충고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훌륭한 관료를 임명했다. 그리하여 명재상 방현령(房玄令)·두여회(杜如晦)와 장군 이정(李靖)·이적(李勣), 간관(諫官) 위징(魏徵)·왕규(王珪) 등의 보필을 받아 ‘정관(貞觀)의 치세’(627∼649)라고 일컬어지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정관치세’라는 태평성대 이룩
하루는 태종이 창업(건국)과 수성(발전)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를 묻자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은 생사가 달린 일이므로 더 어렵다”고 하였고, 위징은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 삼아 “창업도 어려우나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였다. 태종은 위징의 수성지난론(守成至難論)을 옳다고 여겨 국가경영에 참조했다.
태종이 남긴 말들은 그의 사후 50여 년이 지난 후 오긍(吳兢)이 편찬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남아 있는데, 이 책은 이론서라기보다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엮은 정치 실천 지침서다. ‘정관정요’는 태종과 신하들 간의 국정운영에 대한 모든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후일 황제들이 애독하는 제왕학 교과서가 되었다.
정관치세는 태종의 아버지 고조(이연)에 의해 그 기초가 다져졌다. 당 건국 초기의 지배 영역은 관중에 국한될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정치를 바로잡고 법령을 간소화해 수양제의 실정으로 어지러워졌던 민심을 수습했다. 군사상으로도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해 원교근공 정책으로 개별적 병합을 추진해 통일을 완성했고, 그 결과 태종은 많은 병사를 얻게 되었다. 이들 병사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태종은 대외 정벌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첫 대외 정벌로 629년 11월 통한도(通漢道)행군총관으로 이적, 정양도(定襄道)행군총관으로 이정을 임명해 돌궐을 공격했다. 그 결과 돌리(突利) 가한이 투항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계속하여 630년 정월 이정이 돌궐을 대파했다. 2월에 이정이 음산에서 돌궐을 공격하자 힐리 가한이 멀리 도망갈 정도로 이정의 전과는 매우 컸다. 그는 끝까지 추격해 3월 대동도(大同道)행군부총관 장보생이 힐리(署利) 가한을 생포했다. 다음달 당은 돌궐을 제압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태묘에서 고사를 올렸다.
당나라는 돌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게 되자 631년 4월 수나라 말기 돌궐로 잡혀간 많은 중국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면서 비단과 금은을 보냈다. 이에 돌궐은 5월 남녀 8만명을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태종은 이어 수나라 병사로서 고구려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유해 처리 문제에 손을 댔다.
같은해 8월 태종은 당의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해 중국인의 유해를 수습해 장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던 것은 당시 고구려의 실정을 염탐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631년 8월부터 당 조정에서는 동북방의 고구려를 제압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있었다.
고구려 침공 분위기 무르익어
고구려 정벌에 유달리 애착을 가졌던 당 태종.
태종은 즉위 초만 해도 고구려를 공격하던 수나라가 멸망했던 사실이 잊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정관정요’ 권9 ‘의정벌’(議征伐) 제34에서 태종은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해마다 수많은 백성을 동원해 전쟁터로 몰아 넣었소.백성의 원한이 폭발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마지막에는 백성의 손에 피살되었소. 돌궐의 힐리 가한도 틈나는 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다 자기들 백성이 지칠 대로 지쳐 끝내 망하고 말았소”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태종은 수의 멸망 원인이 고구려와 전쟁이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태종의 입장에서 고구려가 돌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증언한 셈이다. 당시만 해도 당의 군사력이 고구려를 제압할 정도로 강성하지 못한 데다 돌궐 공격에 국력이 너무 많이 소모되어 더 이상의 영토 확장 전쟁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은 돌궐에 이어 서북방의 여러 국가를 점령하고 나서 대외 정벌에 자신감이 생기자 고구려 침공을 꿈꾸기 시작했다. 당의 서북에 위치한 당항(黨項, 632)과 토욕혼에 대한 대대적 토벌(635년)에 놀란 구차(龜玆)· 토번(吐蕃)· 고창(高昌)· 여국(女國)· 석국(石國) 등이 사신을 파견해 태종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의 서북쪽이 어느정도 평정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631년 8월 당의 광주사마 장손사가 죽은 수나라 병사의 유해를 거두어간 뒤 8년 동안 당과 공식적인 교섭이 없었다. 정관 13년(639)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싶다. 다만 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당 태종은 백제 무왕이 죽자 의자왕을 책봉했지만 고구려의 경우 이와 유사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와 당 태종의 관계를 밝혀 주는 기록은 640년 고구려의 세자 권(영류왕의 아들)이 장안에 갔던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의 권력 변화에 상당히 신경썼다. 예컨대 당은 641년 고구려 태자의 입조 답방 형식으로 직방랑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했는데, 사실 그는 첩자였다.
한편 641년 11월 설연타(薛延陀)가 동라(同羅)·복골(僕骨)·회흘·말갈과 연합해 낙양까지 진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으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목 기마민족의 기동성을 감안한다면 신속한 게릴라전으로 낙양까지 진격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다. ‘구당서’의 ‘태종본기’ 정관 16년(642) 조에는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임금 고무(영류왕)를 시해하고 영류왕 형의 아들 보장을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연개소문의 군사쿠데타는 당과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관 18년(644) 10월 서역에서 당에 평정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였던 언기(焉耆)마저 안서도호 곽효각(郭孝恪)에 의해 멸망했다. 태종은 당의 북방과 서방에 대한 평정이 완료되자, 644년 11월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다.
이는 당이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많은 군사를 확보했던 시점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구당서’의 ‘태종본기’ 정관 18년조에는 태종이 ‘태자첨사·영국공 이적에게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유성(柳城)에서 출정하도록 하고, 예부상서·강하군왕 도종을 요동도행군부총관으로, 형부상서·운국공 장량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각각 삼아 래주(萊州)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또 좌령군 상하·노주도독 좌난당을 평양도행군부총관으로 임명, 중국 안의 정예 군사 10만명을 징집해 출정토록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첫 조치였다.
연개소문 응징하려고 출정
정관 19년(645) 2월 6군을 거느린 태종은 고구려로 쳐들어가기 위해 낙양을 출발했다. 태종 재위시 군사를 거느리고 황제가 직접 출정했던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태종의 염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낙양에서 출정한 태종은 3월 정주(定州)에 도착하자 신하들에게 고구려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태종은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차례 원정해 모두 패퇴했다.
지금 내가 동으로 진격한 것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때 죽었던 중국인의 원수를 갚고 한편으로는 고구려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다. 또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은 데다 내가 아직 늙지 아니할 때 사대부의 여력을 빌려 이를 정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월 태종의 군대가 정주(定州)를 출발할 당시 사도· 태자태사 겸 시중·조국공 장손무기(長孫無忌), 중서령 잠문본과 양사도가 수행했다. 당나라의 전 군이 동원된 것이었다.
4월 태종은 유주(幽州) 남쪽에 도착해 승리를 다짐하면서 군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였다. 같은달 요동도행군총관 이적이 고구려의 개모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보병과 기병 4만명을 급파해 반격을 개시하자 당의 행군총관 장군예는 도망쳤다.
5월 태종이 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패장 장군예의 목을 베어 죽였다. 요하의 임시다리를 이용해 요동 땅을 밟은 태종은 이적과 함께 요동성을 포위한 뒤 화노(火弩)를 성 안으로 비오듯 퍼부으며 공격했다. 결국 요동성은 함락됐다. 태종이 패장의 목을 친 것은 고구려 정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될 듯싶다.
그해 6월 태종이 이끄는 당의 군대는 안시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 고연수와 고혜진이 병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지원하러 왔으나 당의 군대가 안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았다. 이 때 당군을 지휘해 싸운 장군은 이적이었고, 태종은 군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지켜보고 있었다. 고구려 군의 피해가 커지자 고연수는 어쩔 수 없이 무리를 거느리고 당에 투항했다. 이 때 강하군왕 도종이 안시성에 수십만 명의 무리가 있다고 태종에게 아뢴 사실과 안시성에 고구려와 말갈 병사들이 친 진이 무려 40리나 달했다는 것은 막강한 고구려의 군사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7월에도 이적은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씩 안시성을 공격할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이 때 도종의 부장 부복애(傅伏愛)가 흙으로 쌓은 인공산을 지키지 못하고 패퇴하자 태종은 그의 목을 베었다. 태종은 패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본보이려고 부복애의 잘린 목을 군사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당군은 9월이 되도록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동 지방에 일찍 추위가 찾아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자 태종은 후퇴를 결정했다. 태종이 안시성 주위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서자 성주 양만춘이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취했다. 이에 태종은 안시성을 끝까지 지킨 그의 용맹과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한다.
10월 태종은 임유관(臨 關)으로 돌아갔다.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태종의 완패였다. 이때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이 7만명에 달했다. 이들 고구려인들이 다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태종은 후퇴를 너무 슬퍼하면서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이 원정을 막았으리라”라고 탄식했다. 태종 스스로도 고구려 원정이 무모했다는 것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태종은 그 다음해에도 고구려를 친정(親征)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필산(駐?山)의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쳤는데,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고구려가 승세를 탄 데다 당나라 전군의 전투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첩자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이적이 거느린 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하자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기록들에서 보듯 태종은 고구려를 넘지 못할 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관 23년(649) 5월 태종이 나이 52세로 죽으면서 유언으로 ‘요동지역’(遼東之役)을 그만두게 했다는 사실도 태종이 고구려를 무서워했다는 증거다.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