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는 우리 동이겨레 조상이다
2010.12.23 13:32
공자 曰 "나는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있었으니"
우리 손으로 ‘우리 겨레 조상 공자’ 영화 한편 못 만든 것은 역사의식부재 탓

공자(孔子)의 아버지 공숙양흘(孔叔梁紇)은 나이 70이 되었어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친구에게 한탄한다. 공자의 이복형 맹니(孟尼)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래서 친구의 딸 셋 중 17세인 막내딸 안씨녀(顔氏女)와 정을 통해 공자를 낳는다. 니구산(尼丘山)에서 100일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노(魯)나라 창평 추읍(鄒邑) 궐리(闕里) 이다. 추읍은 숙양흘이 다스리던 읍. 여기에는 추성(鄒城)이 있고 이 추성의 서쪽 경계에 니구산(尼丘山)이 있으므로, 니구산이 연주(?州) 추성에 있다 한다. 이 추라는 땅이 노현(魯縣)인데 옛날 주나라 때 까지도 주루국(?婁國)이라 했다.(사기 권74) 공자는 이 연주 추성에서 나서 자랐으나 뒷날 커서 연주 곡부현(曲阜縣)으로 옮겼다.
공자는 어느 겨레 사람인가. 먼저 그가 나고 살던 연주의 추 읍, 추땅(鄒地) 또는 추나라를 살펴보자. 추 땅, 추나라가 본래는 주 땅(?地)이요, 또 주루국 이었으므로 ‘추’는 본시 ‘주’다.(사기 권74. 장삼식 大漢韓辭典) 이 추나라나 노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다. 한 옛적 동이겨레의 한 갈래인 내이(萊夷) 모이(牟夷) 개이(介夷) 거이(?夷) 등이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전체를 차지해 살았고 또 여기엔 동이겨레의 예절과 풍속까지 늘 쓰고 있었던 것이다. 주(?)나라가 노나라에 가깝게 있었으므로 그것을 또한 동이(東夷)라 했다.(容齊隨 권5. 林惠祥 中國民族史 上卷 第二章)
공자의 출생지가 추 읍이고 또 살던 곡부가 모두 연주인데, 이 연주는 옛날 동이 9주(九州)들 가운데 1주(州)요 동이겨레가 살던 동이 땅이다. 추와 노가 있던 산동성은 동이 땅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공자가 마침내 동이사람인 까닭에 맹자는 말하기를 “공자의 도는 맥겨레의 도”라 했다.(‘孟子’ 권20. 孟子曰 子之道 貊道也) 맥(貊)은 북쪽의 동이겨레를 말한다.(貊北方夷狄之國名, ‘孟子’ 권12) 사기(史記 권47)나 공자세기(孔子世家 第17)에 “공자는 은(殷)나라의 성인인 탕(湯)임금의 후손이다”고 했고, ‘송미자(宋微子)’에는 “공자는 은나라 탕 임금의 후손인 송(宋)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라 했다.
미자의 후손인 송나라 양공(襄公 BC 7세기)의 아들이 불부하(弗父何)인데 이이가 탕 임금의 후손이다. 불부하의 4대손인 공부가(孔父嘉)가 공자의 6대조부가 된다. 이이가 송나라 재상 화독(太宰 華督)에게 살해 당함을 보고 그 아들이 노나라로 달아났는데, 이때부터 공씨가 노나라 사람이 되었다고한다.(사기 권38. 宋微子世家 第8)
‘사기’ ‘맹자’ 등 기록 분명히 밝혀
미자는 은나라 맨 끝 임금인 폭군 주(紂)의 서형. 주의 포악이 날로 심해 그를 멀리 했는데 주(周) 무왕이 주와 은을 물리친 이후, 미자로 하여금 은나라를 대신하여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동시에 미자의 요청으로 미자의 나라를 송(宋)나라로 했다.(사기 권38. 殷本紀 제3. 周本紀 제4 등) 다시 말해 공자는 탕임금의 후손이자 미자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는 은(殷)의 후손이다. 은은 동이겨레 나라이다.
공자가 동이겨레 사람임을 자기 자신이 분명히 말했다. 그는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공아, 천하가 도 없어진지 오래이므로 이제는 나를 높이지 아니 할 거다. 하(夏)나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빈소를 동쪽 뜰에, 주(周)나라 사람들은 서쪽 뜰에, 또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신다. 어제 밤 꿈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있었으니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 그는 이 말을 하고 7일 만에 돌아가셨다.(당시 나이는 73세 또는 74세)
우리는 왜 ‘공자’ 영화 못 만드나
극장가에서 ‘공자-춘추전국시대’가 인기리에 상영됐다. ‘와호장룡’ ‘적벽대전’의 제작진이 35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했다. 감독은 후메이. 인기배우 저우룬파(周潤發)가 공자 역을 맡았다. 전통적으로 엄숙한 성인으로 알고 있는 공자가 아닌 지략가 공자를 그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후메이 감독이 ‘공자’를 기획하게 된 동기 부여가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 조상’이라는 데에 자극 받은 결과라고 한다. 역사를 왜곡한 동북공정으로도 모자라 자칫 공자마저 한국에 뺏길까 염려해서인가.
문제는 우리다. 조선조 500년 유교문화사회를 형성 했으면서도 우리 손으로 ‘우리 겨레의 조상 공자’ 영화 한편 만들지 못 했잖았는가.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오는 소치이다. 산업화, 정보화, 선진화로 내 달리는 것도 좋지만 이에 못지않게 자기문화, 자기조상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김주호 국립 몽골대학교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