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의 고대 선박 부재 발굴 현장.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리나라 고대사를 기록한 대표 역사서의 초점은 '삼국'이다. 이 시각은 수백 년 뒤 오늘날 역사 교과서까지 이어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려진 또 하나의 문명 '가야'는 고대사 마지막 장 끄트머리에 옹색하게 자리한다.
기록상 삼국시대는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나당 연합군이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때까지다. 초점을 달리해 가야를 포함하면, 시대는 훨씬 길어진다. 가야사 복원은 가야의 잊힌 역사를 넘어, 삼국시대 프레임에 갇혀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고대사 수백 년을 온전히 비추는 일이다.
'임나일본부' 왜곡에 뒤늦게 연구
국가 체제·시기 등 의견 분분해도
철기·토기 등서 우수한 문명 확인
해상 통해 日에 문물 전하고 교역
■"새 문물 받아들인 중심지"
국내에서 본격적인 가야사 연구가 시작된 건 1970년대다. 이제는 용도 폐기된 학설이지만, 가야(임나)가 왜의 속국이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제강점기 전후 일본 사학자 사이에 제기된 이래, 가야사 연구는 국내 학계에 금기시된 분야였다.
연구 출발이 늦은 데다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보니 가야사는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금관가야)과 고령 지산동고분군(대가야)의 발굴 조사로 속속 실체가 드러나고 있지만 물증과 문헌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많아 명쾌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중앙집권적 국가로 나아가지 못한 연맹체 국가였지만, 구체적인 정치체 형태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부족국가 수준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완전한 정치체를 갖춘 소국, 나아가 도시국가의 원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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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발견된 판갑옷. |
가야사는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연맹과 대가야를 맹주로 연합한 후기 가야로 나뉘는데, 이마저도 이론이 있다.
최근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에서 대가야 토기 분포지역을 근거로 '2세기 무렵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기 가야는 실체가 없고, 가야 연맹은 4세기 이후 급부상한 대가야부터 시작'이라는 주장을 펼쳐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기존 정설마저 뒤집는 학설이 제기된다는 건 그만큼 가야사 정리가 미진하고,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부산대 고고학과 김두철 교수는 "고령(대가야) 토기와 소가야 토기의 분포지역이 겹치는 데다 토기만으로 정치적인 영향력 아래 놓였다고 결론짓는 건 무리"라며 "당시 신라(경주)가 내륙 주변부 세력 중의 중심 정도였던 반면, 3세기 말부터 낙동강 하구지역에서 번성한 '김해(대성동)-부산(복천동) 연합세력(금관가야)'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지로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발굴 유물 문명 우수성 말해가야사를 둘러싼 여러 논란 속에서도 발굴되는 유물들은 가야 문명의 우수성을 묵묵히 말해준다. 철로 만든 투구와 갑옷 등은 대표적인 가야 유물로 '철의 왕국'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가야토기 역시 불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준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 지역과 전기, 후기에 따라 두루 발견되는 도질토기는 섭씨 1100도 이상의 가마에서 구워내 단단한 데다 수분흡수율이 거의 없어 액체를 담을 수 있다. 고온의 열기를 견디기 위해 그릇 표면에 뚫은 구멍은 미학적으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다.
해상교역도 가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구와 해안을 접하고 있어 백제보다도 앞서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펼쳤는데, 상호교역이라기보다 일방적인 가야의 '문물 전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가야토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에키 토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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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 고분 29호분에서 발견된 도질토기. 경성대·부산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
더 나아가 일본의 야요이시대에서 고분시대로의 전환이 가야의 영향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400년 고구려군 남정으로 전기 가야연맹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금관가야 세력 상당수가 왜로 건너가는데, 이후 이들의 이주 지역에서 대고분군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부산대 신경철 명예교수는 "일본 고분시대의 시작과 발전이 가야의 정세 변동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가야사 연구는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가야의 해상교류와 관련해 2012년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서 고대 선박 부재와 노 등 상징적인 유물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목재의 종류나 형태상 일본 선박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지만 3~4세기에 이미 원양 항해가 가능한 구조의 선박이 존재했다는 점은 당시 바다를 통한 김해지역과 일본의 활발한 교류를 실증하는 대목이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송원영 운영팀장은 "가야가 해상교역을 통해 성장한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국토가 좁고 자원도 적은 우리나라가 21세기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