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왕국' 가야를 깨운다] 4. 가야 멸망의 진실
"고구려 남정" vs "연맹의 구조적 한계" 뜨거운 논쟁 여전
금관가야 전성기 지배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29호분 발굴 당시 전경. 사진=경성대·부산대 박물관 제공
가야는 <삼국사기> 등 관련 문헌에 따르면 42년 금관가야, 대가야가 건국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이후 500년을 존속하다 532년 금관가야가, 562년 대가야가 각각 신라에 병합되면서 종언을 고한다.
가야의 쇠퇴·멸망의 원인을 두고는 현재도 논쟁이 뜨겁다.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이 근본 원인이라는 의견에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제국(諸國) 간 연맹'으로 운영된 구조적 한계 등이 거론된다. 가야권 내 주도권 변화와 멸망을 전후한 가야인들의 왜(倭) 등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 등에 대해서도 보다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외부 vs 내재적 요인 놓고 '팽팽'
백제·신라 세력 확장 영향설도
"왕성 등 새 고고학 기반서 논의를"
일본 열도서 가야 유물 다수 발견
부족한 왜 관계 연구 지원책 필요
■가야 멸망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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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오사카부립 치카츠아스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삼각판혁철단갑' |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군의 남정이 경자년(400년)에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지원 요청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 신라 영역으로 침범했던 왜(倭)를 쫓아내고, 다시 달아나는 왜를 추격해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을 침공했다는 것이다.
남정의 영향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금관가야 지배집단의 유적인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조사를 주도했던 신경철 부산대 고고학과 명예교수 등은 남정으로 인해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금관가야가 치명적 타격을 입어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등은 남정이 금관가야 쇠퇴의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4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세력 확대와 신라의 낙동강 하류 진출 등도 주요 요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에선 "고구려의 남정이 실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가야 멸망의 근본 원인을 내재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남정이 가야사에서 일대 사변임은 분명하지만 '철의 왕국'으로서 경제적 이득 획득에 매몰돼 재생산기반(농업)의 조성과 확대에 소홀히 했던 것과 '소국 연맹체'란 체제의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학설이다. "후기 가야연맹 시기 대가야와 안라국이 이원화되면서 생긴 분열이 백제와 신라, 왜의 외세 개입을 불러 멸망을 불러왔다"(김태식 홍익대 사학과 교수)는 견해도 있다.
홍보식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시각 차이가 큰 것은 역사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점도 있지만, 물질자료에 대한 철저한 비판 없이 특정 연구자 또는 학맥을 따라가는 탓도 적지 않다"며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기존의 고분 유적을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수장층 고분과 왕성(王城), 주요 생산유적 등에 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에 기반을 두고 논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운 쇠퇴기 가야인들의 행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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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4세기 도질토기. |
고구려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입은 금관가야의 지배층 중 상당수는 이후 대가야의 본거지인 경북 고령과 다라국(경남 합천), 안라국(경남 함안)과 왜로 대거 이주해 선진 문물을 전수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최근 고대사학계 내에서 가야 연맹체의 헤게모니와 관련해 '금관가야 대(對) 대가야' 구도로 논쟁이 벌어졌지만 금관가야의 주도권과 영향력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실제로 5세기 이후 대가야와 안라국, 다라국 권역에서 새롭게 등장한 수장층의 대규모 고분군과 갑주(甲胄), 마구(馬具)와 토기 등은 이미 4세기 후반 금관가야 권역에서 성립하고 유행한 문화요소였다. 묘제와 출토 유물로 금관가야와의 계통성(系統性)이 확인되는 것이다.
가야인들의 왜로의 이동도 많은 물질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5세기 이후 일본 열도의 중심인 오사카부(府)와 나라·시가현(縣) 등에서는 가야식 마구와 스에키(須惠器, 도질토기), 금속제 장신구류들이 대거 발견됐다. 고대 사회에서 수공업품의 주된 수요자가 지배층이고, 이들이 장인들을 직접 관리했다는 점에서 옛 가야 지배층이 왜로 이주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또 6세기 전반에 들어서면 후쿠오카·에히메·시마네·도야마·야마가타현 등 다양한 지역의 고분에서 소가야(경남 고성)계와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됐다.
지명에서도 가야인들의 도래(渡來)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오사카 남부 가와치 지역의 중심에는 가라쿠니노무라지(韓國連)를 주신으로 모시는 가라쿠니신사(韓國神社)가 있다. 가라쿠니는 가라국(加羅國), 즉 가야국이고 이 지역의 이치스카(一須賀) 고분군은 가야계 이주민들의 무덤이다.
하지만 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이에 대한 지원·육성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승철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장은 "일본에서는 가야계 이주민들을 주제로 한 학술지와 단행본을 간행할 만큼 관심도 높고 연구 성과도 집적되어 있다"며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의 가야인, 가야문화 연구가 개인의 노력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