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역사적 사실이나 경과를 파악하다보면 보다 정확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중국과 일본이 날조·조작하며 왜곡하는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감각을 회득(會得)해서 역사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술한 칼럼에서 필자는 원시사회의 인류역사에서 제일 먼저 자각한 우리 민족이 건설한 요하문명을 시작으로 황하문명까지 우리 한민족의 주도한 것을 살펴봤다.
이제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서(史書)가 거의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어디서 자료를 찾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이 같은 사료문제 때문에 식민사관의 학노들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말한다며 일제가 황당무계하게 만든 역사만을 추종하고 있다. 그리고 불공정한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 근거한다면서 상고사 고대사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고구려가 국사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한 것이 1세기경이고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때(346~376) 고흥의 ‘백제서기’가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신라는 545년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고 고려는 ‘왕조실록’을 편찬했다는 기록들이 있을 뿐이다. 이 책들은 바른 전통과 자립정신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책들마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김부식은 당시 있던 책들도 창고에 숨겨 놓고 우리 역사의 근간을 흐려놓았다. 이 같은 부류들이 오늘에도 우리 역사, 특히 상고사와 고대사를 연구도 하지 않은 채 정통을 주장하면서 혼탁하게 하고 있다.
고려에 와서는 몽골과 금(金)에 예속체제를 강요당한 정세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고려왕조 실록’ 역시 조선조로 바뀌던 혼란기에 분실·변작됐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를 본국으로 받드는 의존체제에다가 호(胡)와 왜(倭)의 장기간에 걸친 연속 침입으로 많은 사료와 문화재가 소실 또는 망실됐다. 이들이 훔쳐간 사료 또한 적지 않다. 한 예를 든다면 우리가 받은 931회의 외침 중 800여회가 일본의 침입이었다. 불과 40년 동안 591회의 왜구가 침입해 480여 곳의 사찰을 불 살르고 우리역사와 유물들을 약탈한 일도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조상의 손으로 기록된 원형대로의 자주적 역사자료를 찾아보기 힘들다. 자주적인 사관과 중국경서에 대한 비판적 해설 까지도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해서 정부의 억압과 당파 간의 견제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중에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우리 역사가 절반이하로 잘려지고 강역도 좁혀지는 등 날조·조작이 극에 달했다. 오죽하면 조작된 역사마저도 말살될 뻔 했다. 우리의 역사지지(地誌), 사상 등에 관한 모든 서적을 초등교과서까지 거둬들여 없애버렸을 정도였다. 타국의 간섭 아래 눈치를 보아가며 본의 아닌 것을 남겨놓은 우리 조상들의 기록이 간간히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매우 거만한 외국의 불공정한 필법에 의해 그들의 감정에 맞도록 조작된 사료들이 남았다. 이들 사료들은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자료인 이른바 외사(外史)들이다. 지금 이 외사가 우리 고대사의 주된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원시사회에 우리민족이 문명을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과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시사회와 문명의 발생 전 상황
인류가 문자를 이용해 생활을 기록하게 된 것은 약 5000년 전 부터다. 문자발명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 인류는 간단한 석기를 써서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유사시대의 100배 이상이 된다. 구석기시대의 정체(停滯)가 계속되는 홍적세(洪績世) 후기에 현재 인류가 나타났다. 홍적세(洪績世)의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인류는 동굴이나 강가에 살면서 타제석기를 사용해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너무 특이했다. 우리나라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에 관한 역사연구를 추적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농경, 목축을 하며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고, 바로 우리 선조들이 그 중심에서 이끌었다. 리를 보면 한없는 자긍심과 자부심 그리고 한민족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인류 최초로 금속기(金屬器) 문자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성과 국가발전상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우리 한민족은 요하문명을 발생시킨 것을 시작으로 메소포타미야 문명, 이집트문명, 인도문명, 황하문명을 발전시켰다. 이들 5대문명의 공통점은 대하유역(大河流域)의 비옥한 농경지역에서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후가 요하지역의 겨울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온대로부터 아열대지대에 걸쳐서 건조지대에서 문명이 발상했다는 점이다.
요하는 대륙성 기후의 땅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인류최초의 요하문명을 발생시켰다. 이 위대한 요하문명의 일어난 경로를 보면 너무나 위대한 우리 선조임들을 거듭 알기에 자랍스럽다. 인류역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의 특성은 ①불을 사용하고 ②도구를 제작하고 ③언어를 사용하며 ④직립보행을 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인류가 출현한 것은 지질연대의 제3기말 경인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현재 확인된 최고(最古)의 유물을 보면 홍적기(洪積期) 초기의 것이다. 홍적세의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등장한 원인류(原人類), 구인류(舊人類)는 동굴이나 호반(湖畔)에 살았다. 이들은 타제석기(打製石器=구석기)를 사용해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따라서 홍적세(洪績世) 후기 즈음에 현재의 인류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류는 점차 진보해 석기 외에 골각기(骨角器)를 사용해 동굴회화(洞窟繪畵)를 그려서 남겼다. 홍적세 말기에서 충적세(冲積世) 초기에 농경목축이 시작돼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기초를 굳히게 된다. 그 중심에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연대를 말할 때 선사시대, 원사(原史)시대, 역사시대(BC 4000년)로 구분한다. 고고연대(考古年代)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靑銅器)시대, 철기시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빙하기는 제1, 제2, 제3, 제4빙하기를 거쳐 후빙기(後氷期)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인류는 원인류(原人類), 직립원인(直立猿人), 북경인류(北京人類), 구인류(舊人類), 현생인류(現生人類=신인류), 현대인종 등으로 나눠졌으나 학자에 따라 또는 새로운 화석의 발견으로 인류연대가 바꿔지는 일이 종종 있다.
한민족의 바른 역사 제대로 찾아야
상고사를 연구할수록 인류문명과 문화발전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된다. 외침에 의해 수많은 역사자료가 말살되면서 우리의 상고시대와 고대역사가 신화로 전락돼 만신창이가 역사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천민(天民=천손)의 자손으로 하늘에 제사하고 선조를 숭앙하며 거대한 제국의 상고시대를 거친 민족임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그 고유의 전통이 여기저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느낀다. 이 전통들은 민족과 함께 살아 민족을 가호하며 단결시켜 주는 구심점이 됐다. 다만 각 사서의 저자에 따라 그 표현방식이 불교적 혹은 선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예컨대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 채색하고 수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속에 단군이 꾸며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써 채색하고 수식했다. 그렇다면 신화 때문에 사적을 말살 할 것이 아니라 꾸며 놓은 신화적 요소를 조심스럽게 추려내고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상징적으로 표현된 설화 속에서 바른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종교적 색채를 제하면 우리 역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고려조에서는 몽골의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강회금지정책 아래서도 호국불교 신앙과 함께 단군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조선조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 때문에 불교는 억압했지만 단군숭상 사상만은 유지해 단군과 고조선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 후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의 역사가 잘려지면서 식민사관의 교육으로 전락했다. 식민교육에서는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고대 3조선은 물론 예맥(濊貊), 부여, 숙신(肅愼), 삼한, 가야(伽倻) 등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사정없이 말살됐다. 왜곡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이뤄졌다. 우리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강성해 요동과 산동반도는 물론 중국 중원을 장악했다. 요동, 산동반도, 한반도를 본거로 거대한 왕조를 이룬 것을 오늘날에는 모두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라시아는 물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수도 또한 여러 곳에 두고 엄청난 국력을 과시했다. 이미 백두산과 평양이란 지명이 중국에도 많았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렇게 강성한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중국 통일을 이룬 중국이 강자가 되면서 이들에게 밀리기도 하고 살기 좋은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이 과정에서 산하와 도시의 명칭을 요동, 산동반도, 중원 지역에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옛 활동지역의 것은 잊어버리고 반도의 역사만을 알면서 지명의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문화적 선도자였다는 것과 그 활동지역이 넓은 지역이었다는 것은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 등 현대 중국학자들이 고대 한민족의 옛 지명을 찾아내면서 드러나고 있다.
한민족의 우수성이 증명되는 것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가는 세계 최초로 공인(公認)된 것들을 살펴보면 안다. 우선 ①2만 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전남 장흥군 출토의 신석기 유물이다. 신석기보다 더 오래전인 구석기 유물도 경기도 연천에서 발굴되고 있다. 구석기 유물의 대표는 돌도끼, 신석기 유물의 대표는 마제(磨製)석기인데 중국의 황하문명은 신석기시대 후반에 일어난 문명이다. 두 번째로 ②쌀농사 역시 세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시작했다. 1만5000년 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59톨의 볍씨가 출토 된 것은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1만5000년 전후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1만2000년)보다 약 3000년이나 앞선 볍씨다. 중국의 쌀농사보다 더 앞선 것이다. 한국에서 중국, 세계 각 곳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일본은 나카오(中尾佐助)의 신학설이라 하며 일본의 중학사회역사 책등에 기술해 최고(最古)의 농경이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지대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 번째로 ③토기도 세계 최초다. 제주도 고산리(高山里)에서 출토된 토기는 1만 수천 년 전 것으로 기존에 세계최초라던 수메르문명 토기보다 수천 년이 빠른 것이다. 동이족의 문명이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섰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것도 만주지방에서 출토됐다면 중국은 자기 것이라 우길 것이다. 네 번째로 ④배 만들기(造船) 역시 세계 최고(最古) 최초다. 8000 년 전 경남창녕군 부곡면 출토는 이집트 쿠푸왕 시대의 배보다 3400년 앞서고 일본의 이키리키(伊木力)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선다. 세계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⑤고래잡이 또한 세계 최초로 우리 한민족이 시작했다. 8000년 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는 영국 BBC 방송도 ‘한국이 고래잡이 최초’란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로 ⑥고인돌 및 천문세계도 최초다. 8000년 전 전남 화순군에 있는 고인돌을 비롯해 강화도 등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상·고대부터 배달문명이 존재했다는 요지부동의 증거이다. 일곱 번째로 ⑦빗살무늬토기가 세계 최초다. 8000년 전 강원도 양양군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한국에서 시작해서 시베리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중국의 빗살무늬토기는 탄소측정결과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여덟 번째로 ⑧세계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도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개발했다. 1376년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은 중국이 먼저 발명했지만 최무선(崔茂宣)이 독자적으로 연구 끝에 자연화약을 자체개발하고 함선에 실어 발사하는 화포와 화통은 우리가 세계최초로 개발했다. 이 무기는 1380년 두 번에 걸쳐 침입한 왜구 620척의 선단(船團)을 진포·관음포 싸움에서 격파해 대승케 하는데 기여했다.
아홉 번째로 ⑨세계최초 금속활자는 1377년 직지심경(直旨心經)이다. 이 직지심경의 인쇄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70년 앞선 것이다. 이는 우리 금속인쇄문화가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를 본 세계인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열 번째로 ⑩세계최초 로켓과 신기전도 개발했다. 신기전은 1448년 당시 한 번에 일백 발씩 발사되는 최첨단 비밀병기였다. 당시 두만강, 압록강 국경을 침입한 여진족들을 물리치는데 사용된 다연장로켓(9MRL)의 원조다. 열한 번째로 ⑪세계최초의 철갑선 개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철갑선인 거북선으로 일본군과 싸워 23전23승이라는 해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거북선은 태종실록(1413년)에 최초로 나타난다. 열두 번째로 ⑫앞서 칼럼에서 자세하기 기술한 피라미드의 건조 또한 세계 최고(最古)의 것이다.
이 외에도 현대에 와서는 줄기세포와 체세포 개발도 세계최초로 했다. 황우석 연구팀이 2004년 세계최초로 시도해 외국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중이다. 줄기세포 기술이 질병치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 및 창의력과 무관치 않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홍익인간사상’, 日本 三省堂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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