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면서
지난주 살펴본 환국시대(桓國時代)는 세계고고학자가 말하는 BC 8496년의 대홍수가 일어 난지 1300년이 지나서 BC 7199년에 세워졌다. 환기(桓紀)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으로부터 9213년 전이다. 이 환국(桓國)은 12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국가 중 통고사국(通古斯國)은 후대에 퉁구스족, 만주, 여진족 등을 의미하고 수밀이국(須密爾國)은 중동의 이라크에 있었던 수메르국을 말한다. 이 모든 민족이 우리 환민족(桓民族)의 분파들이다. 이 12개국 중 6개는 중국이 역사를 말살했으나 지리에 관한 지도에는 남아서 중국의 고지도에서 발견되고 있다. 만주 원류고(原流考)에 숙신나라가 있었고 숙신나라 서쪽에 구막한국(句莫汗國)이 있었다. 비리국(卑離國)은 숙신(肅愼)의 서쪽에 있었고, 선비국(鮮卑國)은 그 나라를 통호, 통고사라고 부른다. 그 나라가 훗날 흉노국(匈奴國)으로 몽골의 전체로 되어 있다. 이를 중국고지도(中國古地圖)와 대조해 보면 너무나 정확한데서 역사 연구자들도 놀라고 있다. 환국(桓國)의 12제국은 신화가 아닌 실재의 국가임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수메르국은 후에 이라크로 이동하지만 수메르국과 우르국은 원래 동아시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초기 환국(桓國)은 천산 신강성(新疆省) 북부서역, 티베트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일본은 ‘환국(桓國)이 있었다’를 ‘환인(桓因)이 있었다’고 왜곡했으나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환국(桓國)이 건재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환국(桓國)에 이어 신시배달국시대(神市倍達國時代)에 대해 첫 번째 글을 써보고자 한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건국과 홍익인간
배달국은 거발환(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이 계해(癸亥)원년(BC 3898년)에 건국해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시조가 된다. 거발환(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은 당시 제사장 겸 강력한 통치자였다. 이는 조대기(朝代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백일사(太白逸史), 삼성기 상·하(三聖記 上·下),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등에 기록돼 있다. 이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건국기록을 보면 환국(桓國) 마지막 천왕인 지위리(智爲利) 환인(桓因)이 다음 후계자를 택하려고 할 때 모든 신하들이 문무를 겸하고 지혜로운 환웅(桓雄)을 천거했다고 한다. 성품이 어질고 용맹하며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환웅(桓雄)은 여러 왕자 중에서도 뛰어났었다. 환웅(桓雄)은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세상을 만드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지위리(智爲利)천왕은 환웅(桓雄)왕자에게 삼위산(三危山:돈황)과 태백산(太白山:白頭山) 사이의 땅을 다스리도록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신하 3000도단을 거느리고 가도록 했다. <<이 삼위산은 현 감숙성(甘肅省) 돈황현(돈황시) 부근으로 알고 있으나 감숙성(甘肅省) 조서산의 서쪽, 감숙성 천수현(天水縣), 감숙성 고첩주위 서쪽, 운남성(雲南省), 사천성四川省)에도 삼위산(三危山)이 있다>> 하늘의 가르침을 열어 이화세계, 즉 합리적인 진리에 맞도록 세상백성들을 교화해 자손만대에 모범이 되는 훌륭한 법을 만들어 다스리라고 했다. 이에 환웅(桓雄)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아래 송화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신시(神市)라고 했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고대 송화는 소밀, 속말, 소머리, 즉 우수(牛首), 우두(牛頭)라고 했다. 이는 힌 소를 잡아 제천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소머리란 지명은 후일 민족이동과 함께 강원도 춘천, 경주, 일본각처로 전래된다. 일본인이 자기조상을 참배한다고 지금도 춘천 경주에 찾아와서 참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도 한민족에서 분파된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오랜 신시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종족들 간에 곰 상징의 종족과는 융합해 통혼하고 범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들은 정벌했다. 곰족과 태양조상을 받드는 환웅종족이 우세해 다른 종족들을 물리치고 무력통일을 이룬 것이다. 환국-신시시대는 여러 부족이 한 종족으로 통일되기까지 서로 싸운 기간이 수천 년간 계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조상들은 환웅을 수장으로 받들어 박달나무(檀木) 아래 소도(蘇塗)와 제단을 세워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는 경천보본(敬天報本)의 수두교(蘇塗敎)를 폈다. 이를 통해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고 교화해 고대 강력한 국가를 이룩했다. 고려말의 학자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에 “신시를 세운 환웅천황의 공덕은 수두제천의 고속(古俗)에 의해 분명히 전송돼 잊히지 아니했다”고 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한(韓)족의 특징이 하느님과 조상을 받드는 수두교(蘇塗敎)에 있다고 봤는데, 매우 주목할 일이다. 배달국은 점차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한편 중원과 황하강 유역에서 역법(曆法), 천문지리, 의학, 율법, 의식주 생활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환국시대(桓國時代)부터 시작한 요하문명(遼河文明=홍산문명·紅山文明)과 황하문명이 바로 우리 한민족에 의한 대위업이다.
중국의 위서(魏書)에는 단군신화가 실려 있는데, 우리 단군신화와 그 내용이 같다. 중국은 배달국 때 나라가 없었기에 역사가 없다. 하지만 배달국은 거발환(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부터 거불리(居弗理) 환웅천황(桓雄天皇), 우야고(우야고(右耶古) 환웅천황(桓雄天皇), 모사라(桓雄天皇) 환웅천황(桓雄天皇) 등이 있었다. 1세에서 3세까지 신시시대 배달국은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방으로 이주하기 시작 했다. 배달국의 중심지가 요동과 산동성(山東省)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강단학계에서는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러한 고대사가 황당무계한 것으로 외면해 왔다. 하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출현으로 삼성기(三聖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記), 규원사화(揆園史話), 태백일사(太白逸史), 부도지(符都誌) 제왕운기(帝王韻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등의 내용이 사실로 기록 돼 있다. 중국의 고지도에도 이 같은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이 환국(桓國)을 계승한 실재한 국가임이 이처럼 모두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며, 이 배달국은 BC 2333년까지 지속됐다.
배달국(倍達國), 환웅천황(桓雄天皇)의 치적
환웅천황(桓雄天皇)은 나라를 개천(開天)하고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로 백성을 교화(敎化)했다고 했다. 삼성기(三聖記) 하편,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진역유기 등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환웅천황(桓雄天皇)은 하늘의 뜻을 받아 이치에 맞도록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기 위해 곡식, 명령, 형벌, 질병, 선과 악 등 360여 가지 일을 고시(高矢), 풍백(風伯), 뇌공(雷公),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에게 직분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또한 역법(曆法)을 창제해 1년을 365일로 하는 달력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혼례 법을 만들어 웅족(雄族)의 규수를 황후로 삼았다. 결혼 예물은 짐승가죽으로 하는 혼례 법을 정하고, 곡식이나 물건을 교환 할 수 있는 시장(市場)도 만들었다. 곡물과 세금을 내도록 하였고, 부자와 군신과 남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음식, 의복, 주거의 편의와 제도를 만들고 머리를 땋게 했다.
그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다음과 같은 오교훈(五敎訓)을 선포해 인륜(人倫)의 도리를 밝히며 교화했다. 오교훈은 (1)자식 된 자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 (2)아내는 자식을 보호하해야 하며 (3)형제는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4)늙은이와 어른은 높이 받들어야 하며 (5)어린이와 약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모든 사람은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등이다. 아울러 공수(貢壽:供授) 혹은 두열(頭列)이라고 하는 음악을 제작했다. 백성들이 열을 지어 돌면서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했는데,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행복을 노래로서 기원한 것이었다. 이 같은 활동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강강술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환웅천황(桓雄天皇)은 물건을 계산하기 위한 산목(算木)을 창제하기도 해 숫자를 나타내는 계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시골에서 성냥개비로 이러한 셈을 할 수 있는 것을 산목(算木)이라고 한다. 숫자를 창제한 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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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의 초대 천황인 거발환(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은 병신년(BC 3805년)에 재위 94년 만에 타계했다. 그의 나이 120세였다. 거발환(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에 이어 거불리(居弗理) 환웅천황(桓雄天皇)이 BC 3804년~3719까지 제2세 환웅천황(桓雄天皇)으로 즉위해 재위 86년, 102세로 운명했다. 이어 제3세로 우야고(우야고(右耶古) 환웅천황(桓雄天皇)으로 이어져 BC 3718~3620까지 99년간 재임하고 135세에 타계했다. 제4세는 모사라(慕士羅) 환웅천황(桓雄天皇), 제5세는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으로 이어진다. 태우의 환웅천황은 아들 12명 중 막내인 태호복희(太皥伏羲)는 팔괘(八卦)와 환역(桓易)을 창제한다. 이 팔괘(八卦)는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이 꿈에 삼신을 보고 삼신산에 가서 방위도(하도·河圖)를 얻고 글자를 창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팔괘(八卦)의 괘도(掛圖)와 환역(桓易)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팔괘(八卦) 방위도(方位圖)는 천부경(天符經)의 원리를 기본으로 8개 방향의 행도로서 세상을 통솔하고 치세의 균형을 잡는다는 깊은 철학이 담겨있다. 이 태호복희(太皥伏羲)가 복희(伏羲)다. 중국인들은 복희를 자기들 삼황(三皇)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다 허구의 거짓말이다. 복희(伏羲)는 엄연한 배달국 5대 천황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의 12번째 아들이자 배달국 우사(雨師)라는 고위 관직을 갖고 있었던 왕자였다. 복희(伏羲) 배달국의 왕자로 한(韓) 민족이다.
중국 삼황(三皇)의 하나였다는 복희(伏羲)의 실체
중국의 역사변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복희(伏羲)에 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복희(伏羲)는 팔괘(八卦)를 그려 널리 알려 졌고 그는 사냥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가록이 많이 나온다. 그 위엄이 남달라 승냥이와 표범 같다고 했다. 그의 옛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중국에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데, 표범의 가죽을 입고 있는 모습이 날카롭고 사납게 그려져 있다. 배달국시대의 산과 들에서 수렵생활을 했던 당시 우리 배달민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옷차림이다. 중국인들은 이 복희(伏羲)를 높이 우러러 보며 중국 최초에 나라를 세운 고대 삼황(三皇)중의 한분인 자기들의 고대 황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삼황(三皇)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수인씨(燧人氏) 중 하나로 보고 있으나 이 삼황(三皇) 모두가 배달민족인데도 중국인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또한 그가 고안한 팔괘(八卦)도 중국인이 발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참으로 너무 뻔뻔한 족속들이다. 복희씨(伏羲氏)는 태우의(太虞儀) 환웅으로부터 서쪽의 땅을 조금 받아 다스렸는데, 그 지역의 경계수장인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해 관할지역 밖까지 통제하게 됐다고 기록돼 있다. 복희씨(伏羲氏)의 관련 기록은 중국 고대사서 상서(尙書)등 여러 사서(史書)에 나와 있고 중국 고대 신화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이 쓴 중국 정통역사라고 하는 사기(史記)에도 이 삼황(三皇)인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수인씨(燧人氏)의 기록이 없다.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 3명의 삼황(三皇)은 화하족(華夏族=중국민족의 총칭)의 왕이 아니라 동방 조선 조상인 동이족의 고대 제왕으로 인식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역사를 왜곡하면서도 중국의 시조로 기록하기에는 당치 않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복희씨(伏羲氏)가 지금은 중국인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복희(伏羲) 왕자는 그 아버지인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의 명을 받아서 서쪽으로 갔던 그 때가 BC 3482~3475경으로 배달국이 건국한지 400년 후의 일이다. 중국은 이때 나라다운 나라가 없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복희(伏羲)왕자가 서쪽으로 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왕이 됐다고 하나 부친의 배달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제후국이면 몰라도 독립국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토(西土)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당시 배달국 초기는 만주지역과 중원내륙의 황허강 이북에 걸쳐 있기에 서토는 지금의 섬서성, 감숙성(甘肅省), 산서성, 사천성(四川省) 등 화하족(華夏族)이 많이 살고 거리도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기록은 없으나 중국인들은 서토를 중국인들의 원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의 나라라 생각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이 서토(西土)에서도 그 지배층은 우리 선진 배달민족이었고 다수의 피지배층은 화하족(華夏族)과 토착민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부도지(符都誌) 제왕운기(帝王韻紀), 규원사화(揆園史話), 백일사(太白逸史), 삼성기(三聖記),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등의 기록들에서 나온다.
중국의 역사는 거의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베낀 위조사(僞造史)임을 알 수 있고, 이 변조한 중국사서(史書)를 믿는 것은 큰 오류(誤謬)다. 일본 또한 우리 상고사나 고대사를 말살하고 세계사의 기초지식(世界歷史の基礎知識(1)에서도 환국이나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사를 마치 한(漢)나라가 조선에 있지도 않았던 낙랑군을 두었던 것 같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단군을 찾아서’, 이강민의 ‘대한국고대사’, 한창건의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의 ‘대조선 민족사’, 西嶋定生, 護雅夫, 木村尙三郞, 猿谷要(世界歷史の基礎知識1).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 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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