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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 한민족, 청동기·철기 주도해 강대국 위상 떨쳐

송화강 2019-05-05 (일) 17:05 6년전 9269  

한민족, 청동기·철기 주도해 강대국 위상 떨쳐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12-21 20:17:25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물건을 가공하는 이기(利器)의 발달은 인류의 생산발전에 기초가 됐다. 그래서 고고학에서는 문화의 발전단계를 이기(利器)의 재료에 의해서 구분한다. 그것은 석기시대와 금속기시대(金屬器時代)로 대별되고, 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나뉜다. 또 금속시대(金屬時代)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와 철기시대(鐵器時代)로 나눠진다.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해 농경이 시작하기까지 약 200만 년 간(年間) 이어졌다. 인류역사의 99% 이상이 구석기시대였다.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해 수렵(狩獵), 어로(漁撈)와 채집(採集)에 의한 생활을 한 시대다. 19세기 이후 각지에서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돼 인류 조선(祖先)의 모습이 명백하게 됐다. 따라서 인류의 기원은 200만 년 전 손으로 도구를 만들었던 때부터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유추하게 됐다. 당시는 지구상에서 빙하(氷河)가 시작한 때다. 200만 년 전 홍적세(洪績世)에는 빙하(氷河)가 발달한 한빙기(寒氷期)가 4회, 따뜻한 빙기(氷期)가 3회 있었다. 신인(新人)의 출현은 제4빙기(氷期)의 끝날 즈음이다. 그것은 화석인골(化石人骨)을 측정한 결과다. 화석인골(化石人骨)을 오래된 순으로 보면, ①원인(猿人)-직립보행하고 간단한 도구를 만든 200~100만 년 전 사람 ②원인(原人)-불을 사용하고 언어가 상당히 발달한 50~30만 년 전의 사람 ③구인(舊人)-죽은 자를 매장하는 등 종교를 만들기 시작한 20~7만 년 전 사람 ④신인(新人)-벽화 등 예술을 낳게 하고 활과 화살 등을 발명해서 들짐승사냥이 진보하고 현대인과 같은 특징을 한 사람으로 수만 년 전의 사람 등이다. 이치럼 농경(農耕)이 시작되기까지 200만년을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신석기시대는 돌과 모래로 닦은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한 시대다. 또 수렵과 어로중심의 채집과 농경을 시작한 기원전 6000년 경 보리 등의 농경(農耕)을 시작하고 저장용 토기(土器)등 을 발명했으며 직물(織物)을 시작한 시기다. 인류를 원숭이로부터 분류해서 진보시킨 것은 노동이었다. 이후 농경민(農耕民), 유목민(遊牧民), 수렵민(狩獵民)으로 나눠지고 농경(農耕)이 시작된 곳에서는 야생동물을 가축화(家畜化)하고 나아가 목축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와 유목민이 됐다. 이를 통해 농경민과 분리돼 갔다. 수렵민(狩獵民)은 북방 유라시아의 산림 등에서 주로 수렵(狩獵)과 어로(漁撈)를 하고 살았다. 유목민과 반목축(半牧畜), 반 수렵민(半狩獵民)들 중에는 승마(乘馬)를 한 채 활을 쓰는 기마전술(騎馬戰術)이 몸에 익어 기동력(機動力)이 뛰어난 민족이 있었다. 이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 계열(韓民族系列)이었다. 이 후 우리 한민족은 살기 좋은 대륙의 평야지대에서 타민족(他民族)을 지배하며 왕조를 세우고 많은 민족과 제후국(諸侯國)을 지배하는 왕조를 이루었다. 이번 칼럼은 지난회의 구석기시대에 이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그리고 철기시대(鐵器時代)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이 시대에 산 우리 한민족의 족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
 
중국은 소위 대중화(大中華)라는 제국주의에 편향(偏向)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위조하며 우리 역사를 대신 중국의 것으로 바꿔놓는 일을 당나라 때부터 했다. 그러나 역사는 유적과 유물로 증거된다. 중국의 역사는 우리 선민(先民)이 남긴 족적을 통해 중국 역사가 아닌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오래전부터 대륙과 한반도에 먼저 선주(先住)해서 살았음은 이미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변조(變造)하고 왜곡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민도 왜곡된 역사에 길 들여져 필자가 말하는 역사의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국보다 먼저 우리 한민족이 중국대륙에 선주(先住)해 세계최초의 요하문명(遼河文明)을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서 일궈낸 사실이다. 황하문명도 중국 한족의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이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BC 6000~4000년경에는 우리나라에 신석기인(新石器人)이 이 땅에 정착해서 산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함경북도 웅기(雄基) 굴포리, 부산 영도의 동삼동(東三洞), 강원도 오산리 등의 BC 6000년대 신석기시대 토기문화들을 비롯해 BC 6000~5000년대 발해연안에 걸쳐져 있는 즐문토기문화(櫛文土器文化) 등이 그것을 웅변해 준다. 우리 민족은 BC 4000년대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지역과 산동반도 대륙까지 진출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즐문토기(櫛文土器) 연대가 강동구 암사동(岩寺洞) 유물로 확인되듯 유럽이나 시베리아 보다 1천년 이상 앞선 BC 5~6000년대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 BC 6000~4000년경에 신석기인(新石器人)들이 한반도에서 정착해 살았다. 전국 주요 지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유물들이 그것을 웅변해 준다. 환국은 고고학적 문화단계로 나누면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고, 배달국은 신석기말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초기단계에 해당한다. 사진은 구석기시대(위)와 신석기시대의 유물(가운데) 및 토기들 모습. ⓒ스카이데일리

이 시대의 유물로는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데 석기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가 있다. 즐문토기는 V자모양의 밑이 뾰족한 회색토기(회색토기(灰色土器)로서 표면에 빛으로 구은 것은 평행하는 선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즐문토기의 유적이 평남 대동(大同)의 청호리(淸湖里)와 서울 암사동(岩寺洞) 등 각지에 널리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활발한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즐문토기(櫛文土器)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나 만주의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BC 6000~5000년 경으로 보이는 발해 연안의 자산문화(磁山文化)와 배리강문화(裴李崗文化)의 빗살무늬토기 등은 요녕성(遼寧省)과 몽골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사방으로 흩어져 진출 한 흔적을 알 수 있다. 이후 BC 1800년경에 채문토기문화(彩文土器文化)가 만주와 한반도에서 그 영향권을 확대해 나감에 따라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즉, 즐문토기(櫛文土器)는 변형(變形)이 되고 또 뇌문토기(雷文土器) 같은 새로운 토기가 나타나게 됐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의 유적은 함경북도 청진(淸津)의 농포동(農圃洞), 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의 지탑리(智塔里), 강원도 춘천(春川)의 교동(校洞)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 같이 맥을 이어가며 끊이지 않고 계승 발전하며 한민족을 형성해 갔다. 이후 오랜 역사동안 서로 융합하고 더 발전시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에는 치열한 전쟁 중이기에 청동기의 무기를 쓰게 되는 청동기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
 
고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의 시작은 BC 3000~2700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청동기를 이용한 금속문화(金屬文化)의 발전으로 전쟁 시에 청동기무기가 등장했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천자(天子)인 14대 치우천왕(蚩尤天王- BC,2707~2598) 때에 중국사기(史記)에 나오는 헌원황제(軒轅黃帝)와 전쟁 시 구리와 쇠로 병기를 제작해 전쟁을 시작한지 1년 만에 9제후(九諸侯)를 제압, 평정했다. 아울러 병장기를 정비해 공상(空桑)을 점령함으로써 헌원(軒轅), 창힐, 대요 등 12제후국(諸侯國)을 평정 할 수 있었다. 이는 청동기로 무장한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에 기인했다. 왕동령(王桐齡)이 쓴 ‘중국통사(中國通史)’에까지 4000년 전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호남성(湖南省), 강서성(江西省) 등은 묘족(苗族)이 점령했다. 이 종족의 국명이 구려(九黎)라 했고 그 군주가 치우(蚩尤)라고 했다. ‘상서(尙書)’에서도 구려(九黎)는 치우(蚩尤)의 백성이며 그 무리라고 했다. 이는 배달국치우(蚩尤天王)가 21개 제후국(諸侯國)을 평정하고 동부아시아를 개척해 통치한 강대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은폐할 수 없는 중국은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기들 조상이라고 모시고 있다. 인면수피(人面獸皮)한 언어도단이다. 일본 또한 단군조선(檀君朝鮮)도 신화(神話)로 돌리는 웃지 못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다. 아키야마 겐소(秋山謙藏)같은 일본학자는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125面)에서 “신화는 인류의 역사와 그 발단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며 일본역사의 신화를 미사여구로 극찬하고 있으나 조작된 신화는 국민을 기만하는 신화일 뿐이다.
 

 ▲ 고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의 시작은 BC 3000~2700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청동기를 이용한 금속문화(金屬文化)의 발전으로 강대국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진은 청동무기와 장신구들(위) 및 청동기시대 많이 사용된 각종 칼돌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우리역사는 신화가 아니고 실재했기에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부정할 수 없다. 환국은 고고학적 문화단계로 나누면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고, 배달국은 신석기말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초기단계에 해당한다. BC 27세기에 배달국 제14대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일명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하는 우리 배달국(倍達國)의 치우천왕(蚩尤天王)은 같은 한민족(韓民族)인이면서 중국 한족(漢族)의 왕이 된 헌원(軒轅黃帝)과의 전투에서 헌원(軒轅)이 백전백패시켰다. 당시의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한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해 중국사기(史記)는 ‘천하무적이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헌원(軒轅)의 무리들은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해 “몸은 짐승 같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머리에 쇠 이마(獸身人語銅頭鐵額)”라고 표현을 했다. 이는 앞선 청동기 문화가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꽃피웠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농기구로 보이는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유구석부(有構石斧) 및 마제석검(磨製石劍)이 발견된다. 이는 우리나라 농업기술이 당시 상당히 발달했음을 반증한다. 이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 즉, 청동기(靑銅器)는 BC 3~2000년 경에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청동검(靑銅劍), 청동도자(靑銅刀子), 세형동검(細形銅劍), 마제석검(磨製石劍), 동선(銅鏇), 동부(銅斧), 동극(銅), 동모(銅鉾), 동탁(銅鐸), 청동(靑銅)단추, 식옥(飾玉), 용범(鎔范), 부범(斧范), 다유기하문경(多紐幾何文鏡) 등이 대동강유역 동북지역 및 남한에서 나오고 대구(帶鉤)는 마형(馬形), 호형(虎形)의 무늬로서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발견됐다. 이는 우리 민족의 유적이며 유물들이다.
 
한(韓)민족은 철기시대도 대륙을 주도했다
 
우리한민족은 철기시대에도 대륙을 주도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수 천년이상 늦게 이주해온 한족(漢族)은 우리 역사를 뒤엎어 놓으려고 힘과 인구를 앞세워 다시 중국을 자신들 중심으로 조작하는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학자 양계초(梁啓超)와 사부아(謝扶雅) 등도 대륙을 주도한 것은 한민족(韓民族) 이었음을 긍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청동기(靑銅器)들이 유문토기(有文土器), 다음 무문토기(無文土器), 각형토기(角形土器)를 동반한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밑이 평평한 토기들이 동북아시아 흑룡강 송화강 연해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대륙문화의 특색을 나타냄과 동시에 우리 한민족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동, 남, 북, 서로 진출한 흔적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민족의 문화가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륙문화임을 입증하고 있다.
 
 ▲ 한민족은 철기시대에도 대륙을 주도했다. 고대 한민족(韓民族)은 철광(鐵鑛)의 개발을 급속도로 발달시켜 중국과 일본은 물론 여러 나라들에 철을 수출했다. 사진은 철기시대 각종 철제무기들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금속기문화(金屬器文化)는 평등했던 씨족사회계층(氏族社會階層) 내에서 빈부의 차를 만들게 했다. 따라서 원시 공동사회는 붕괴되고 부족연맹체(部族聯盟體)가 출현하게 된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거쳐 철기시대(鐵器時代)에 와서 철기(鐵器)사용으로 인류역사는 크게 발전한다. 이것은 철(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문명(文明)이라고 말하는 사회는 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만큼 철은 문명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고대부터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철을 둘러싸고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가.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도 제철을 생산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같이 고대에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철광(鐵鑛)의 개발을 급속도로 발달시켰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에서 철의 공급을 받았다. 철은 전쟁과 결부돼 있기도 했다.
 
철은 생활에 있어서 최선이나 또한 최악의 도구이기도 했다. 철(鐵)의 뜻글자인 한문(漢文)의 철(鐵)은 이인(夷人)의 금속(金屬)을 의미하는 글자(金+夷)를 쓸 정도로 철기문화(鐵器文化)는 우리나라로부터 중국, 북아시아, 시베리아, 일본 등지로 진출해 나갔다. 이 시대 철(鐵)의 유물로는 농구(農具)인 철리(鐵犁), 철겸(낫), 철초(삽), 철검(鐵劍), 철모(鐵鉾), 철극, 마구(馬具), 명도전(明刀錢), 포전(布錢) 등이었다. 이러한 유물이 우리나라 위원(渭原), 창성(昌城), 강계(江界), 영변(寧邊)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유적(遺蹟)으로는 목조가옥(木造家屋)이 출현했다. 분묘(墳墓)의 형태로는 토광분(土壙墳)과 옹관묘(甕棺墓)가 대표적이다. 장례문화에 있어서는 분묘(墳墓)로, 강원도 춘천(春川)과 부산지역에서 보이는 적석장(積石葬)이 있다. 그 대표적인 분묘(墳墓)로서 ‘고인돌’과 거석문화(巨石文化)로 한국각지에 널리 분포돼 있다. 이 시대 이후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에 걸친 유물들인 것이다. 이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다른 원시인들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태양거석문화(太陽巨石文化)의 기념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부터 철기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BC 770~403년)에 철기가 사용됐다. 가야(伽倻)는 철의 수출을 위해 일본에 가야의 분국(分國)인 임나부(任那府)를 두어 강철의 검(劍) 등을 일본에 많은 은(銀)과 바꾸어 수출 할 정도였다. 일본은 이 임나(任那)도 일본이 한국에 세운 식민지라고 하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미나나(任那)는 부여가 일본에 세운 부여의 식민지였다. 이를 부정(否定)하는 학자는 없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는 “역사는 참으로 시대의 증인이요, 진실의 등불”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도 시대의 증인으로 진실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 국민도 이제는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때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상고’, 최인 ‘한국학강의’,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 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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