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191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계획해 이듬해 발족시켰다. 우리역사를 말살해 조선인의 기(氣)를 꺾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첫 작업은 조선의 주요 역사서(歷史書)와 자료 등을 은밀히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일본지배에 불리한 사서(史書) 22만여 권을 인멸(湮滅)했다. 그들의 근간에는 한반도를 영구지배하려 한 의식이 자리했다.
조선을 강탈한지 10년 째 되는 해 우리 선조는 일제의 수탈과 만행에 견디다 못해 무단철권정치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이다. 이에 일제는 우리애국지사 8000여 명을 학살하고 1만5000여 명을 투옥시키며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수그릴 줄 알았던 조선인의 기세는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일제은 3·1운동과 같은 민족적움직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역사말살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192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편찬위원회가 활동했다. 이름과 달리 조선사말살이 주목적이었다.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기(氣)를 꺾고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조장해 조선인의 혼을 빼놓으려 했다. 일제는 이를 한반도침략의 완수로 여겼다. 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박영효(朴泳孝) 등 친일세력들이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고문이었고 총독무 정무총감들이 회장을 맡았다.
또한 중추원(中樞院)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도쿄대(東京大) 구로사카 가쓰미(黑板勝美), 교토대(京都大) 미우라(三浦周行)와 교토대학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 龍)와 경성제대(京城帝大) 총장과 친일학자 등 수십 명이 동원 됐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총독(總督)이 앞장서 조선전역과 만주의 역사자료를 거두기 시작했다. 대마도주 종(宗)씨 가문소장(家門所藏) 조선 관계사료 등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수십 년간 얼마나 많은 자료가 이렇게 됐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총독부 발표만도 22만권이 넘는다. 사대부(士大夫) 가문에서 소장한 책들은 집계조차 불가하다.
오늘은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상고사와 고대사 그리고 단군역사 등을 잘라내 매국반도사관을 낳게 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조선사편수회의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의 만행
일본이 남긴 자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불과하다. 모든 자료는 사라졌다. 특히 상고사·단군관련자료 등은 완전히 고갈시켰다. 엄청난 왜곡의 출발인 셈이다.
조선사편수회는 무려 16년이란 기간 동안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라는 거금이 투액이 투자 된 사업이다. 이곳에서 1938년 조선사를 완성했다. 무려 35권, 2만4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였다. 하지만 이는 매국반도사관자를 양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사사업개요’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우리 상고사·고대사를 어떻게 말살시켜갔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선생은 일본인과 어떻게 싸웠으며 이병도(李丙燾)와 신석호(申奭鎬)가 이마니시 류(今西 龍)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살펴보려면 이 책을 봐야 한다.
이 책은 200부 소량만 제작 됐기에 일반인은 잘 알 수 없었다. 후일 사학자 장도빈(張道彬)선생이 생전에 이 책을 어렵게 구해 그 내용이 처음 폭로 했다. 일본의 ‘조선사’ 편찬목적은 일본에 없는 유구한 조선상고사,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고대 고조선과 단군(檀君), 발해(渤海)등을 노골적으로 우리역사에서 다 없애버리려 함이었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9차에 걸친 위원회 ‘회의기록’은 조선학자들이 주장하는 단군(檀君)과 조선 ‘상고사(上古史)’부분을 일인(日人)들이 순차적으로 깔아뭉개는 과정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칼자루를 쥔 일인들의 교활(狡猾)한 말과 소리 없는 공포분위기로 버무려 져 있다.
1923년 첫 번째 위원회에서 조선학자의 의견에 따라 단군을 고조선건국과 함께 망라하겠다고 발언한 일본인위원 가시와라(栢原昌三)는 수개월 후 돌연사(突然死)하고 이 발언을 의결(議決)한 중추원서기장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는 위원회직후 파면됐다. 그들 목적을 위해서다.
이 때 이들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편년체(編年體)로 한다는 것이었고, 자기네들이 선택한 사료만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단군의 고조선은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백문보(白文寶)가 “우리 동방의 단군으로부터 3,600년이 지났다”고 한 ‘상소문’을 통해 단군 두 글자가 언급됐다.
이나바(稻葉岩吉)는 “이것으로 단군을 다뤘다”고 1935년의 마지막위원회 때 보고 했다. 이들이 만든 35권의 ‘조선사’는 일본이 1000년이나 왜곡한 일본사보다도 8500년이 앞서는 환국, 배달국, 단군의 고조선을 없애고 우리역사가 신라부터 시작 된 것처럼 왜곡해 다룬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100만원이라는 엄청난 많은 예산을 들인 편찬에는 일제가 절대 신임하는 자들만이 참여했다. 거액의 돈으로 한일(韓日)학자들을 어렵잖게 이 사업에 끌어 들일 수 있었다.
일제(日帝)는 그런 조선사를 완성해 놓고는 제 딴엔 성공한 줄 알고 그걸로 조선이 일본과 동족인데 자기네 역사가 더 긴 종가(宗家)라고 주장하고 일대 문화사업을 펼친 듯 호도해 조선인의 저항을 수그려 트린 후 조선으로 부터의 수탈(收奪)을 더욱 확실히 한 것이었다.
최남선, 이능화 등 조선학자들의 취한 태도
일본이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어떠했을까. 당시 최남선(崔南善), 이능화(李能和)는 편찬위원회 위원이고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는 이마니시 류(今西 龍)와 함께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때까지의 편술자(編述者)였다.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눈에 들어, 하라는 대로 일본정권의 뜻대로 ‘신라건국부터 시작된 조선사를 찬술(撰述)한 책임자’였다. 우리역사를 철저하게 왜곡한 조선 사람인 것이다.
반면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는 12년간 아홉 번의 편찬위원회의 일본 어용학자들 틈에서 단군(檀君)과 발해(渤海)등 고대역사를 말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대담하게는 못 나서고 자기의견을 피력했을 뿐, 조선사 왜곡에 대해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대들지는 못 했다.
단지 “조선인들은 단군의 역사를 사실로 알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한 번도 강하게 주장 한 적이 없다.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만행 일당이 그 말을 받아 “소용없는 말이다. 단군개국의 확실한 날짜가 없으니 편년사(編年史)에 기록 할 수 없다”면서 다 무시 해 버렸다.
이에 대해 조선학자의 계속된 항의엔 “그건 따로 모아 별책(別冊)으로 넣으면 된다”고 거짓말로 받아 넘긴다. 이 때, 최남선 선생이 석유환국(昔有桓國: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이것을 일인(日人)들이 나라를 사람 환인(桓因)으로 변조한 사실을 지적했다.
일제(日帝)는 결국 최남선을 돌려 세우고 그가 없는 새에 단군을 삭제하기로 결의한다. 최남선 이능화도 한계가 있었다. ‘단국은 절대이다.’ ‘실존인물이다.’ ‘단군고조선은 한권의 책을 할당해야 한다.’ 그렇게 담대히 말하지 못 했다. 일본은 계획한대로 철저히 제멋대로 왜곡했다.
당시 분위기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발해국도 얘기해야 하지 않겠느냐, 중요하지 않느냐” 그렇게 미온적으로 말했으니 회의록은 결국 역사전체의 줄거리를 따지지 않으려고 신화(神話)니, 확실한 연대(年代)가 없느니, 하며 회피하는 일본 측을 위한 기록이 됐다.
일본은 ‘조선학자들이 어떻게 말하든 단군시대(檀君時代)는 없는 것으로 한다.’고 작정한 그들이었다. 단군조선(檀君朝鮮)과 발해(渤海)를 말하던 최남선 선생도 중도에 변절했다. 7차 위원회 이후 그의 모습은 안 보인다. 그에 대해 ‘해촉’이란 단 두 글자 외는 아무 설명이 없다.
초태영 선생은 변절한 대가로 3만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있으나 어떻거나 단군역사를 살려 보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열한 배일(排日)사상은 없는 것 같다고 최태영 선생은 말하고 계셨다. (이상은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56~57면 참조 인용).
한편 프랑스 말도 하고 유식한 이능화(李能和)선생은 처음부터 편찬위원이 돼 해임당하지 않고 끝까지 일 했다. 아마 최남선 선생보다 일본인들의 비위를 덜 거슬렸던 것 같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인들끼리는 처음부터 단군을 신화(神話)라고 보자 느니, 고려 말의 백문보(白文寶)나 [세종실록]을 다룰 때 단군(檀君)을 언급하자는 등 말이 많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조선사에 단군조선과 발해가 있었다는 것을 아주 싫어해, 결사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조선민족을 말살하면 일본족의 근본도 없어지는 것인데 일본은 어리석은 조작을 한 것이다. 일본민족은 거의가 한국에서 건너간 것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말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조선사말살 주범이다. 조선사 말살한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이론은 철저한 거짓 왜곡인데도 매국사학자들은 아직도 이 이론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르고 있다.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조선사 왜곡공로로 교토제대 강사였다가 총독부의 후광을 얻고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로 취직했던 자로 인간말자이다.
일제의 하수인으로 나서 편찬자(編纂者)가 된 것을 기화로 천하 대담한 만행(蠻行)을 했다. 이병도(李丙燾)는 그런 이마니시(今西 龍)와 배짱이 맞아 끝까지 실제 일을 담당함으로서 조선인의 가치관을 변질시키는 역할을 맡아 천추에 욕먹을 짓을 했다. 광복 후도 변함이 없었다.
반면 이병도와 와세다(早稻田)대학 동문으로 사학을 한 최정순은 “협력 할 수 없다” 하고 이들 집단에서 뛰쳐나와서 광산업에 나셨다. 당치도 않은 이마니시 류(今西 龍)란 자가 끼어들어 조선역사를 전적으로 묵살 하는데 고문으로 앉아 있던 박영효(朴泳孝)역시 영향력을 발휘할 인간이 아니었다.
박영효(朴泳孝)는 조선말기 개화당(開化黨)으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미국에 도피(逃避) 했다가 거기서도 “미국은 양반 못 알아보는 나라”라며 돌아온 무능한 부잣집 철부지로 조선 임금의 사위임에도 일본 귀족(貴族)이 돼 ‘가문(家門)이나 양반스럽게’ 누리다 죽었을 뿐이다.
이완용(李完用)과 권중현(權重顯)고문에 대해서는 그 역적들이 무슨 조선사를 바로 할 인간들이겠는가! 또한 이마니시 류(今西 龍)같은 소인배가 1932년 경성제대교수로 재직 중 급살(急煞)한 것은 천벌을 받은 것으로 안타깝게도 그 자가 쓴 ‘조선사’는 이미 다 만들어 진 뒤였다.
그는 이 세상에 나와서는 아니 되는 인간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데려온 하수인이었던 그자는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까지 돼 해서는 아니 되는 우리 사학에 두고두고 해악(害惡)을 남겼다.
이후 ‘단군이 실증사학의 조건에 맞지 않으니 단군은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다.’라며 단군과 고조선을 묵살한 우리학계 일부가 받아들이고 외국에 까지 단군 없는 우리 역사가 소개 됐다.
이를 지켜 본 러시아의 사학자 푸틴 박사는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있다고 하는 데, 엄연히 실존 한 단군의 고대역사를 왜 없다고 하느냐” 질책을 할 정도로 우매한 매국 자들이다.
과거 조선 사람들이 배운 조선의 교과서에 단군의 고조선개국이 분명히 언급돼 있는데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고조선을 부정하는 학자라는 자들이 이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지식이 있어 단군과 광역국가 고조선을 부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의 이름으로 일제가 던져 준 자료만을 취해 역사의 큰 줄기에서 그처럼 분명한단군의 광역국가(廣域國家)를 부인하고 가장개명(開明) 한 듯 하는 것이 학문(學問)의 전부는 아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실증사학(實證史學)으로 단군의 광역국가는 없다’고 증명된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의문이 풀길이 없다고 최태영 선생은 말씀 하시는데 그것은 일본의 최고 권위의 동양사학자이고 최태영 선생의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시 스승이시며 히로히토 왕세자(王世子)의 스승이던 사사가와(笹川臨風)박사는 조선사편수회에 2-3일 있다가 그냥 돌아갔다. 왜 일까?
사사가와(笹川臨風)박사가 서울에 와서 이마니시 류(今西 龍) 일당이 하는 소리를 듣고 ‘이런 역사 나는 쓸 수 없다’고 해서 돌아 간듯하다고 최태영 선생은 은사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역사는 진실만이 역사이지 거짓 역사는 역사라 할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 때문에 조선사 자료, 특히 상고사 자료가 깡그리 없이 졌고, 역사책을 다 거둬가 없애버렸으나 우리역사는 지금도 살아 있다. (이상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54면 이하 참조 인용)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를 망치려고 작정하고 일본이 거국적으로 나서서 왜곡했는데 이 왜곡된 잘못된 역사를 모르는 자는 사학자(史學者)도 아니며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자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