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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백제가 아닌 가야가 지금의 일본을 열었다

송화강 2019-05-05 (일) 16:53 6년전 9258  

백제가 아닌 가야가 지금의 일본을 열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9-13 20:49:1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미국의 저명한 동양미술학자인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박사와 그의 아들 앨런 카터 코벨(Alan Carter Covell) 박사 모자는 1978~86년에 걸쳐서 쓴 1400편의 글과 5권의 한국문화사 저작을 통해 한국의 고대사 가운데서도 가야유물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챘다. 이들은 우리 한민족이 4세기에 바다를 건너가 미개한 고대 왜를 제압한 가야 부여족이 한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리고 있다.
 
특히 존 카터 코벨은 미술사를 통해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은 한국 땅을 가리키고 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녀는 나아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복잡한 근저를 파헤치는 엄청난 작업에 이르게 된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은폐하고 한국에서 조차 그 때까지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학자들 다수가 진실을 밝히고 가르치는 일에 ‘겁을 먹고’ 있다고 존은 일갈했다.
 
그녀의 한국문화사 연구에 당황한 것은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조차 일부 학노(學奴)들의 반발로 거의 쫓겨날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국의 우리 사학계가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를 증거해 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것은 변화가 없다.
 
현재도 진실 된 역사복원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일본인에게 속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일본이 제시하는 것만을 사료로 보고 이를 실증주의 학문이라고 외치는 학노들의 존재에 있다. 이들은 기득권을 고수하는 반도식민사관학자라는 자들이다. 어느 것이 진정한 실증주의인지는 고증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들도 왜곡되기 전 우리의 바른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도 눈감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강단사학은 한국사학계의 암 덩어리가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번 칼럼은 부여기마민족이 일본을 지배한 사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에 식민지미나마(任那)를 세운 가야
 
존 카터 코벨박사 모자가 쓴 1400편의 글들은 ‘역사를 통해 본 일본의 역사 왜곡’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의 역사왜곡 행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한국정부로부터 일체의 지원을 받지 않은 제3국의 학자가 자발적으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제시한 논거는 일본은 물론 우리 사학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코벨 박사 모자의 연구는 한국과 한국인이 1500년 이상 일본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도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준 그 내용과 중요성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코벨 박사 모자에 따르면 일본은 기마민족인 우리 한국인이 먼저 세운 나라였다는 것이다. 기마민족은 중앙아시아 및 북 아시아에서 수없이 여러 번 역사의 변환을 불러온 막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기마민족은 여러 부족이 함께 어울려 융합해 대 집단을 형성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따라 좀 더 살기 좋은 평원지대로 이주하고 중국과 인도의 부패왕조를 전복시켰는데, 북극 아래 시베리아 지방에서부터 남으로 만주까지를 휩쓸었다고 코벨 박사 모자는 밝히고 있다.
 
우리는 삼국시대의 경우도 고구려, 백제, 신라로 알고 있으나 이것 또한 잘못이다. 종래의 삼국시대는 삼국이 아닌 가야를 포함한 4국으로 불러야 옳다. 우리 사학계는 다시 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일본은 자국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왜가 한국을 점령했다고 중국의 역사왜곡과 같은 수법을 쓰고 있으나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한국에서 바다 건너 왜를 정벌한 사실을 코벨 박사 모자는 외국학자로서 깊이 연구하고 올바로 지적 하고 있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났을 때도 국내 어느 학자보다 더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역사왜곡을 파헤치고 지적·비판 한 당시 학자는 존 코벨과 앨런 코벨 이었다. 가야는 일본에 식민지 미나마(任那)를 세워 일본을 지배했다. 코벨 박사는 일본의 역사를 연구한 끝에 부여 기마족의 일단이 일본을 정복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들 증거로는 말과 유물 및 유적, 그리고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의 칠지도(七支刀) 등이었다. 이중 칠지도(七支刀)는 무속적인 형태의 칼인데, 칼등에 서기 369년에 해당하는 연대가 있다. 아울러 금으로 한문이 새겨진 칠지도는 실제적인 일본 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이라고 코벨 박사는 지적했다.
 
369년 왜(일본)에는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으며, 백제에서도 최고의 지식인만이 당시 동아시아의 유일한 기록문자 이던 한문을 읽고 썼다. 이 칠지도(七支刀)는 신공(神功=진구왕후)이라는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부여 왕녀가 이끌었던 기마민족 일단이 369년 한국에서 건너가 일본을 정복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라고 했다. 이 때의 기마민족에 의한 왜의 정벌을 감추려는 시도가 후일 8세기에 일본 역사에서 행해졌다.
 
일본은 가소롭게도 신공(神功)왕후가 한국을 정벌한 여걸이라고 묘사하며 신공(神功)왕후가 한국의 왕녀가 아닌 순수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너무나 적극적이고도 대담한 역사왜곡을 마구잡이로 했다. 즉, 한국이 정벌한 사실을 180도 반전시켜 신공(神功)왕후가 한국을 침입했다고 조작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존 코벨 박사와 알랜 코벨 박사의 일본 정벌론은 일본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뒤집고 그리피스의 글과 개리 레저드(Gari K, Ledyard) 교수의 주장을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제3국학자의 논리로 매우 중요하다. 존 코벨박사의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에 이 같은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야마토(大和)는 가야가 세운 일본의 첫 나라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동경대 교수는 1948년에 고고학적 연구를 근거로 일본은 4세기 초 가야의 진왕(辰王)이 이끌고 온 기마민족의 후예(後裔)에 의해 구주(九州)가 정복된 다음 4세기 말에 오진(應神)왕의 인솔 하에 기내(畿內) 지역으로 진출해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건설됐다고 주장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저드(Gari K, Ledyard) 교수 또한 346년에 선비족(鮮卑族)에 의해 멸망된 부여의 전사들 일부가 만주로부터 한강 유역을 거쳐 가야(任那)를 지나 일본 구주로, 그리고 마침내는 야마토(大和)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고 주장했다.
 
야마토(大和)는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일천황의 궁궐과 수도가 있었던 나라(奈良)분지를 말하는 것으로 황실의 직할구역인 기내(畿內, 大和, 山城, 河內, 和泉, 攝津) 5국의 중심부를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부여의 전사는 아예 빼고 백제 인이 일본을 정복하고 야마토(大和)정부를 건설했다고 수정된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아니다. 야마토(大和)는 가야에서 건너간 가야 인이 세운 것이지, 백제 인이 세운 것이 아니다.
 
가야(伽倻) 혹은 가라(加羅)는 기마민족인 부여가 한반도로 내려와서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신라보다 약 100년 늦게 낙동강 중·하류에서 고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인 한(韓)의 지배를 받던 변한(弁韓)지역에 세워진 6개 부족국가들이다. 이 6가야(금관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대가야) 중에서 지금의 김해지방에 위치한 금관가야(金官伽倻)가 맹주 국이 돼 안으로 결속을 굳게 했다. 그들은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나타난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받들었다.
 
가야는 고구려, 신라, 백제보다 늦게 건국했으나 철과 농산물이 풍부했기에 이를 수입하고 자 자주 가야에 와서 교역하는 왜에 진출해 일본에 작은 분국 미나마(任那)라는 분국(分國=식민지)을 세웠다. 가야가 고구려, 신라, 백제보다 먼저 일본을 지배한 것이다. 가야는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로부터 압력을 받아 어려운 상태에 빠질 때는 분국인 미나마(任那)와 연맹해 신라, 백제에 대항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오히려 가야에 시달리게 됐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한다. 고구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군대가 399년 가야를 치고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함락한 것은 이 때의 일이다. 그 후 고구려의 세력이 팽창해 광개토호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이 532년에 남침해 오자 이 때는 가야, 신라, 백제가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정세가 변해 신라가 532년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백제도 가야를 침범해 가야의 영토를 빼앗았다. 이렇게 되자 세력이 약해진 가야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공격했으나 여의치 않아 562년 고령의 대가야마저 신라에 병합됨으로서 6가야가 멸망하게 된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내항(來降)한 것도 가야주민들이 모두 왜로 이주하고 왕실만 남아 있어서 사실상 국가가 붕괴됐기 때문이다. 가야는 건국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일본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국 국내학자 중 부여의 전사(戰士)였던 기마민족(騎馬民族)인 가야(伽倻)를 빼고 백제가 야마토(大和)정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연구부족의 탓이다. 야마토(大和)는 가야 사람이 세운 나라가 확실하다. 가야가 먼저 야마토(大和)정부를 세우고 일본을 300년 동안 지배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일본의 왜왕 1대는 가야 후손 웅신(應神)이다
 
어느 나라나 그 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지역이 있다. 미국의 경우는 이민자들의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플리머스록, 제임스타운, 세인트 오거스틴 같은 곳이다. 일본의 경우 일본 신도(神道) 신앙으로 닦여진 세 곳의 성소(聖所)가 있다. 그들의 조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으로, 그 곳에는 셋의 신사가 있는 곳이다. 즉, 이즈모신사(出雲神社), 이세신사(伊勢神宮), 그리고 이소노가미신사(石上神社)이다.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이슬람 교도들이 한번 이상 메카를 성지 순례하는 것과 같이 찾는 곳이다.
 
해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받드는 이세신사(伊勢神宮)를 찾는 일본인들은 청동거울이 소장된 곳의 두꺼운 장막 앞에서 절을 한다. 아마테라스는 712년과 720년 편찬된 일본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지금 천황 가계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신이다.
 
이즈모신사(出雲神社)는 2000여 년 전 한국 땅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식민구역으로 만들어 정착했던 곳이다. 이곳 신사에 모신 바람의 신 스사노오미코토(素찬嗚尊)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오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소노카미 신사(石上神社) 즉, ‘부여바위 신’의 신사이다. 이곳은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 아래 이룬 문화구역 아스카의 중앙 기차역에서도 도보로 20분 거리 언덕 숲에 있다. 부여 왕족 혈통의 여걸 왕녀 진구(神功)가 이끈 일단의 기마민족이 배를 타고 이곳 일본으로 건너와 선진문명과 기술을 전파한 곳이다. 이소노카미는 일본 고대사에서 잘 알려진 곳이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칼은 무속적인 형태의 칠지도(七支刀)이고 신위는 전부 한국인이다.
 
일본인 조상이 모셔져 있다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유민(流民)의 신위가 36위 모셔져 있다. 여기에 처음 나오는 신위가 가야 신라 계 원신(園神)이다. 다음이 백제계 신 2위가 모셔져 있는데, 바로 한신(韓神)이다. 이들 신위 셋은 맨 윗자리에 모셔져 있다. 그 밑에 3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저드(Gari K, Ledyard) 교수의 ‘기마민족(騎馬民族)정복 설’은 바로 가야를 의미한다. 가야는 건국 후에 많은 사람이 건너갔고 백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거듭 강조하지만 미나마(任那)라는 분국을 세웠던 것은 가야다. 활발한 문화전수를 통해 지금 일본에는 가야라는 지명이 많음도 이를 증명해 준다.
 
당시 왜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인 야요이(彌生) 시대에 머물러 중앙집권화 된 통치행정 능력이 없었다. 일본 역사책을 보면 서기전 1세기에 점을 치는 조선무녀(朝鮮巫女) 히미코(卑弥呼)여왕 2대가 통치했다는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이 구주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나, 이는 부족국가 수준으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일본에 나라는 왜(倭)라 하는 서기 390년 일본에서 태어난 오진(應神)이 왜왕 1대다. 일본의 역사는 2600년이라 하나 1천년은 누가 봐도 허황되게 근거 없이 조작됐다. 지금 일본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한 조작왜곡의 역사이고, 상고 및 고대의 일본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m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韓廷昊 ‘대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책과 길-국민일보] 존 카터 코벨 ‘부여기마족과 왜’… 日정벌 일깨우고 역사왜곡 꾸짖다
 ▲ 일본 뿐만 아니라 국내 강단사학계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박사가 쓴 대표적 저서들. <표지 이미지=교보문고> 

[국민일보=2006년 12월 15일]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한국미술,불교,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되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 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 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 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학고재)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이번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 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 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한다. 미국의 그리피스, 페놀로사, 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 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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