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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고대사 책 모두 태웠다

송화강 2019-05-05 (일) 17:18 6년전 9369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고대사 책 모두 태웠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1-12 19:15:39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왕조 신위(神位)는 조선유민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업무에 관여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로 하여금 단군신화 설을 만들어 역사왜곡에 앞장섰고 단군이전의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변조했다. 하지만 이는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에 의해 사실이 아닌 날조된 것으로 폭로됐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까지 변조·조작해 가야(伽倻)가 일본에 세운 가야의 분국(分國=식민지)을 일본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라 하며 한국에 있었다고 억지를 써 왔던 일이 우선 거짓으로 드러났다. 또 일본에 건너간 우리 유민(遺民)들이 일본에 나라를 세우고 그 왕들이 한국계이며 제사를 드리는 원신(園神=가야 신라)과 한신(韓神=백제)도 다 한국계라는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적시됐다. 실제로 일본의 궁내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일본 왕실의 조상격인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받드는 이세신궁(伊勢神宮) 아마데라스 오가미(天照大神) 36좌(座) 등은 일본이 모시는 조상신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있는 원신(園神)과 한신(韓神)의 신위(神位)다. 이들은 신라, 가야, 백제에서 간 우리조상들이 일본을 건설했다는 움직일 수없는 증거다.
 
또한 일본 궁궐에서도 제사를 드릴 때 나타난 제례(일본궁궐제례, 宮闕祭禮)에도 신위(神位) 36위를 모신다. 엔기시기(延喜式)에 나타난 그대로 원신(園神=신라, 가야 조상) 1좌(座)와 한신(韓神=백제조상) 2좌(座)를 모시고 있다. 그 나머지 신위는 아래에 모시고 여기서 낭독하는 제문(祭文)도 한국어인 것도 최태영 선생의 고대사 연구와 엔기시기(延喜式) 연구로 확되는 사항이다. 일본의 DNA도 인간 유전인자를 비교·연구한 결과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 톳도리대(島取大) 이노우에 다카오(井上貴央) 교수와 도쿄대(東京大) 도구낭아 가쓰시(德永勝士) 교수 등 의해 확인됐다. 역사적·과학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그들은 일본에 유민(遺民)된 한(恨)을 계속 뼈 속까지 지니고 우리나라에 적대시하며 역사도 청·일전쟁 이전부터 왜곡을 준비해 왔다. 일본은 ‘조선사’를 편찬하기 이전부터 철저하고 치밀하게 역사왜곡을 준비했다.
 
상고사에 관한 사서를 불태운 일본의 야만성
 
이러한 일본이 개항 이후 부국강병정책(富國强兵政策)으로 국력이 강해지자 무력으로 조선을 침탈하고 조약이 아닌 ‘한일합병늑약’을 조작하자마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바로 우리나라 고대사를 왜곡하는 역사편집에 착수했다. 일본은 역사자료가 되는 서책(書冊)과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면 모두 수집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는 소실·인멸하고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역사를 왜곡했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보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1923년(大正12년)~1937년(昭和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에 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해 소각·인멸했는지는 그 정확한 숫자를 알기도 어렵다. 이 같은 사료의 인멸은 우리나라 역사에 열등의식을 가진 일본이 우리나라 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를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려 했으니 천인공노할 행위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조선사를 왜곡시키기 위해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조선 총독부는 취조국을 설치해 한국의 관습제도와 역사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동년 11월부터 우리나라 고문헌과 사서(史書)를 압수·약탈했다. 특히 국내에 남은 단군고사(檀君古史)는 모두 압수해 갔다. 상고 및 삼국시대의 신지비사(神誌秘史),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해동비록(海東秘錄) 등도 당시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이 서적들은 단군조선이 47대 실재했다는 것을 인정한 사서(史書)로서 고조선역대실기(古朝鮮 歷代實記)였으나 일본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부 소각해버렸다.
 
통일신라시대에 저술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단군기(檀君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신라고사(新羅古事), 백제신선(百濟新選), 화랑세기(花郞世紀), 한산기(漢山記), 선사(仙史) 등의 책도 모두 소실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발해(渤海) 건국 후는 대조영이 아우 대야발(大野勃)을 시켜 찬수하게 한 삼국유사보다 560년 전에 나온 단기고사(檀奇古史)가 수난을 겪어 그 원본이 압수·소실됐다. 발해왕조는 이 단기고사(檀奇古史) 외에 단군조선 이후 역조(歷朝)의 왕대실기(王代實記)를 편찬한 비사(秘史)로서 조대기(朝代記)가 있었다. 이 조대기는 삼국유사보다 35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아울러 926년 발해가 거란(遼)에 멸망 할 당시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등 유민(遺民)이 고려에 망명해 귀화 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 역대실기(歷代實記)나 진역유기(震域遺記) 등 책들이 있었으나 일제 때 단군고사는 거의 압수·소각됐다.
 
단군관계 사서(史書)들을 말살기도(抹殺企圖)한 일본의 흉계
 
위의 외에도 47대 단군이 실재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 사서(史書)로는 고려 중엽 편찬된 삼성기(三聖記)나 고려 말기 나온 단군세기(檀君世紀), 삼성밀기(三聖密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신선전(神仙傳) 등이 있다. 또 1675년 조선 숙종(肅宗) 원년에 나온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신단실기(神檀實記), 동사연표(東史年表), 조선사략(朝鮮史略), 대동사강(大東史綱), 조선역사(朝鮮歷史),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해동춘추(海東春秋), 민족정사(民族正史) 등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 때 소멸되거나 그 이전에 전란으로 소실·인멸돼 현존하고 있지 않다. 이 책들이 지금 존재한다면 일본의 궁내성(宮內省) 도서관에 상당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역사열등의식 때문에 절대로 일반에 내놓지 않는다. 그들이 역사에 자신이 있다면 세계3대 무덤이의 하나로 보는 인덕천황(仁德天皇)의 무덤을 절대로 발굴해서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발굴을 못한다. 오진(應神天皇)과 인덕천황은 백제 근초고왕의 왕손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날조가 모두 밝혀지기 때문이다.
 
단군에 관한 비 근거 사서도 상당수에 달한다. 소위 불가사서(佛家史書), 어용사서(御用史書), 유가사서(儒家史書)로 보는 서책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승일연(僧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0를 비롯, 왕암기(帝王諳記&·1287), 동국사략(東國史略·1403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년), 은제시주(應制詩註·1462년), 동국통감(東國通鑑·1485년), 동국여지승지승람(東國輿地勝地勝覽·1486년),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1705년), 동사강목(東史綱目·1758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년), 해동역사(海東繹史·1814년경), 동사보감·東史寶鑑),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유교와 존화사상(尊華思想)을 국시(國是)로 하는 조선에 들어서자 유교사서(儒敎史書)와 어용사서(御用史書)를 제외한 사서들이 이단사서라고 박해를 받았다. 아울러 태종11년(1411년)에는 궁중에 비장(秘藏)돼 내려오던 신지비사(神誌秘史)와 해동비록(海東秘錄) 등 많은 서적을 없앤 일도 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이런 정책은 완화됐다. 세종은 왕명으로 고사서(古史書)와 비기류(碑記類)를 널리 구해 보존하려 힘썼다. 이후 세조·예종·성종은 전국팔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해 조선팔도의 관 민가(官民家)와 사찰 등에 소장돼 있던 도가사서(道家史書)들을 찾아 올리라는 구서령(求書令)을 내려 많은 사서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이괄(李适)의 난 등에서 많은 사서가 소실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북애자(北崖子)가 전국방방곡곡을 편력 답사해 옛 사서들을 대부분 수집했다. 1675년에는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저술하게 된다. 이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종래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이 범해온 동이문화(東夷文化)에 대한 자비(自卑)에서 벗어나서 자주적 입장에서 단군의 실재한 실사(實史)를 만들어 낸다. 그 후 이는 실학자 등 민속학자들 저서의 본보기가 됐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만 해도 단군에 관한 일부사서는 있었으나 일본은 우리의 찬란한 고조선의 개국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는 모두 인멸(湮滅)하는데 광분해 역사 말살(抹殺)을 기도 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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