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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광고토대왕비를 훔쳤다

송화강 2019-05-05 (일) 17:18 6년전 9345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광고토대왕비를 훔쳤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2-12-29 20:20:11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 碑文)의 변조는 일본의 침략사와 관련이 있어서 오늘은 좀 더 그 사실을 살피고 가려 한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하며 영토의 확장에 놀라운 활약을 했다. 그러나 38세의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도 서거했다.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2년 후 414년,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그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릉 옆에 높이 6.3m의 비를 세워서 사(四)면에 1800여자의 비문을 새겼다. 이 비는 압록강 중류에, 예전 고구려 수도로 한 적이 있는 집안(輯安)에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거비를 발견한 일본은 고대 조선 지배를 증명하기 위해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 碑文)의 변조를 필연적으로 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각지는 물론 청국과 시베리아 일대까지 밀정을 파견했다. 특히 명치 10년대의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는 조선의 고대사까지 연구하고 있던 차였다.
 
예정대로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 碑文)을 변조한 일본은 역사를 조작하고 명치유신 이후 노골적으로 나온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하는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일본은 1882년 육군 중위 사코이 가게아키(酒勾 景信)의 보고 후 저명한 한학자(漢學者)를 동원해서 해독·해석을 마쳤다. 이후 1889년 6월 회여록(會餘錄) 제5집으로 출판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같은 해 1889년(명치22년) ‘명치헌법’과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공포하고 그 이듬해에는 ‘교육칙서(敎育勅書)’를 발표한다. 소위 침략적인 군국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목적에 따라 급피치로 진행하는 시기에 맞추어 회여록(會餘錄)을 출판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사학계는 가뭄에 물을 만난 듯 다양한 논문 잡지로 이 왜곡된 사료(史料)를 갖고 경쟁하듯 발표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4세기 말~5세기 초에 걸쳐서 사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 碑文)은 일본에 있어서는 조·일관계사의 근본 사료로서 무한의 공헌을 학계에 한 것이 된다. 일본의 고서(古書)로 보는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8세기에 나온 것으로 4~5세기의 일본은 왕의 즉위며 타계한 해가 제대로 된 것이 없는 터였다. 이에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 碑文)은 4~5세기의 일본고대사와 조·일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금석자료(金石資料)가 됐던 것이다. 그것이 사실상 우리민족의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일군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훔친 이유였다. 나라를 온전히 도둑질 한 것 보다 더욱 천인공노할 역사 도둑질이다.
 
우리가 비의 발견이 늦어진 이유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 관해서 우리나라의 고 문헌은 어떻게 다루고 있었는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반경부터 AD 668년 존속한 신라, 백제와 3국의 하나로서 그 영역은 요하이동(遼河以東)으로부터 한강하류 지역까지 미치고 있는 강력한 왕조였다. 이 같이 영역을 넓일 수 있었던 것은 광개토대왕과 이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이 군림한 5세기 말의 100간으로서 6세기말~7세기 초에는 4번에 걸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군도 격파했다. 중국 수(隨)나라 왕조가 37년 만에 망하게 된 것도 11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살아 돌아간 자가 몇 천 명 정도로 패한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같이 고구려는 강성한 나라였다. 광개토대왕의 비가 있는 집안(輯安)은 장수왕이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기까지의 2백 수십 년 간 도읍으로 번성했다. 집안(輯安)에는 도읍성지를 비롯해서 산성과 많은 고분(古墳)들이 남아 있다. 다카마스 쓰가(高松塚) 벽화고분의 발견 후 일본에서도 주목을 끈 무용총(舞踊塚)은 집안(輯安)의 교외(郊外)에도 현존하고 있다.
 
그런데 집안(輯安)은 668년 고구려 왕조가 멸망한 후 폐허화해서 1880년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발견 될 때까지 그곳이 고구려의 왕도였던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곳이 조선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은 17세기 이후 소위 봉금제(封禁制)가 됐기 때문에 조선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의 발이 갈 수 없었다. 또 7세기 후 압록강 이남의 영역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그 이북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지배에 들어가나 발해는 이곳에 서경압록 부(西京鴨淥 府)하의 4주(四州)의 하나로서 환주(桓州)를 뒀다. 926년 발해의 멸망 후 이 방면을 지배한 요(遼)도 녹주(淥州)를 집안(輯安)에 두었다. 그래서 요(遼)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는 집안(輯安)이 고구려의 구도(舊都)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그 후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지배한 금(金)과 원대(元代)에는 잊어버려 중국 측의 문헌은 물론 조선의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15세기 중엽 이후 여진족의 국경 침범과 관련해서 그들의 침입로가 되는 집안(輯安) 지방의 동정이 국방상 중시됐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자세한 조사 관찰이 행해져 그때 마다 변계지도(邊界地圖)가 작성됐다. 이러한 기록에는 예외 없이 장군총(將軍塚)이나 광개토대왕비에 관한 것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금(金)의 황성(皇城), 황성묘(皇城墓)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광개토대왕비가 이끼와 잡초로 뒤 덥혀져 있기 때문에 비문의 판독이 될 수 없었고 집안(輯安)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때 여진족의 각 부족을 통합한 누르하치(奴兒哈赤)는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나 패퇴한다. 그 결과 청(淸)의 지배계급은 조선 침략 대신 1637년 조선과 청국 간에 소위 봉금제(封禁制)를 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압록강대안(鴨綠江對岸)의 청국 측에 광대한 무인지대를 두어 사람의 거주는 물론 밭의 개간까지 금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이 늦어지게 됐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우리나라 기록
 
집안(輯安)이 조선 문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조선의 국방상 압록강 대안(對岸)의 움직임이 주목되기 시작한 14세기 후반에 와서다. 즉, 고려는 북방으로 부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1361년 강계(江界)에 독노강 만호(禿魯江 萬戶)를 두었으나 9년 후 1370년에 조선왕조의 태조(太祖)가 되는 이성계가 북원(北元)의 동녕부(東寧府)를 토벌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집안(輯安)을 거쳐서 갔다. 결국 15세기에 편찬 된 고려사(高麗史)에는 그곳을 황성(皇城)이라 쓰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그 황성(皇城)이 여진의 황성(皇城)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문헌에서는 황성(皇城)이 제도(帝都)를 의미하기 때문에 황성(黃城)으로 하고 있음을 본다. 광개토대왕의 비가 있는 집안(輯安)은 장수왕이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기까지의 2백 수십 년 간 고구려의 도읍으로 번창했다. 여기에는 도성지(都城址)를 비롯해서 산성(山城)과 많은 고분(古墳)이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445년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집안(輯安)에는 속전(俗傳)으로서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하는 성지(城址)가 있어 그 북방 7리(里)의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방 석릉(石陵) 2기(二基)가 있다고 쓰여져 있다. 기술한 내용이나 정확한 것을 보면 실제의 견문에 의한 기술이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실제로 보면서 고성지(古城祉)가 금의 황제성(皇帝城)이라는 속전(俗傳)을 그대로 실고 있는 것은 그 때 이미 비문이 덩굴과 잡초 등이 얽혀 있어 판독 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
 
15세기중엽 이후 여진족이 때때로 조선의 북방 국경지대를 침범하게 되자 침입거점으로 이용되는 집안(輯安) 지방의 동정에 주의하게 돼 이런 일이 문헌에 쓰여 지고 있는데, 황성(皇城)이나 황성평(皇城坪)으로 돼 있다. 용비어천가보다 41년 후인 1486년에 편집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집안(輯安)을 황성평(皇城坪), 장군총을 황제묘(皇帝墓)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듬해인 1487년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成俔)의 시 망황성교(望皇城郊)에는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의 묘사가 있으나 거기에도 한불독자(恨不讀字)로 돼 있다. 비가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곳을 지나치고 있고 설령 비를 봐서도 판독이 안 돼 읽을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납 할 수 없는 광개토대왕비 변조
 
또 1536년 집안(輯安) 주변에 잠입한 여진족에 대해 퇴거를 유고(諭告)한 심언광(沈彦光)이 시를 남기고 있는데, 황제유분거갈(비)존(皇帝遺憤巨碣(碑)存)이라 해서 큰 비석이 있다라고 만 쓰고 있다. 1595년 건주위(建州衛)에 청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를 방문하고 그의 통호요청(通好要請)에 응하는 한편 그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신충일(申忠一)의 견문을 기록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도 누르하치(奴兒哈赤) 본영의 97항목에 달하는 견문사항이 집안(輯安) 부근에 관해서 관찰은 정확했으나 황폐한 장군묘 라든가 대왕 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었다. 이 같이 우리나라 많은 학자와 관리가 집안(輯安) 가까이 갔으나 지나가면서 광개토대왕 비문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있으나 그 내용을 말한 자는 없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비가 일본에 의해서 변조 날조 된 것이다.
 
1880년 발견된 비가 1882년 9월~12월 사이 비문에 끼어 있는 이끼나 잡초를 일본의 염탐꾼에 의해서 불태워지게 됨에 의해서 비문의 판독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거칠게 태워 비 표면의 여러 곳이 박리(剝離)되어 귀중한 비문을 다수 잃었다. 그들은 이미 원 비문을 탁본하고 계획적으로 이를 변조 한 것이다. 이렇게 비(碑)가 노출됨에도 그때 현지에는 굴곡이 심한 비면에 견딜 수 있는 대형의 종이와 양질의 먹으로 탁본을 한 흔적이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탁본이 만들어 진 것은 1887년(명치 20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1899년을 전후해서 가을경에 비 전면에 석회가 발라져 그 석회면 위에 어느 비문과 다른 많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 사실도 명백해 졌다.
 
재일역사 학자로 연구가인 이진희(李進熙)교수는 호태왕(好太王 碑の謎)에서 “이러한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碑文)이 어떻게 연구됐는가의 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간 결과 종래 ‘학문적으로 해결, 끝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해온 것에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각지는 물론 청국과 시베리아 일대까지 밀정을 파견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고대사까지 연구하고 있던 명치 10년대의 일본 육군참모본부로 하여금 고대에 있어서 조선 지배를 증명하는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碑文)의 출현을 절호의 기회로 삼도록 한다. 이를 위해 비를 변조한 일본은 예정대로 대륙침략을 감행한다. 즉, 정한론이 행동에 옮겨진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역사와 영역을 탐내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계속되고 있으며 영토도 넘보며 염탐꾼을 보내는 일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야비한 그 기만성, 사기성, 죄악성은 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잘못됨을 반성하지 않은 채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행하는 행보는 결국 일본의 수치와 불행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변조된 역사는 역사가 아니며 기만으로 남의 영역을 탐내는 것은 도적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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