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한민족(韓民族)의 구성(構成)으로 본 일본
일본을 답사한 최태영 선생의 연구를 통해 일본에 사는 한민족(韓民族)의 구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간 유민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민족(韓民族)이다. 이는 사학적 관점(史學的 觀點), 인류학적 관점(人類學的觀點), 고고학적 관점(考古學的觀點), 언어학적 관점(言語學的觀點) 등에서 그 힘을 빌어 구명(究明, 사리를 궁리하고 밝힘)할 수 있다. 먼저 사학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발달된 민족은 모두 그렇지만 우리민족도 결코 온전한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수개 이상의 다른 혈족들이 섞여 있다. 한족(韓族) 외에도 한족(漢族), 몽골족, 만주족, 왜인 등 기타 요소가 다소 포함돼 있다. 그러나 복잡다이(複雜多異)한 복합체는 아니다. 주된 기본적 요소는 언제든지 자약(自若, 큰 일을 당해도 침착하고 태연함)하고 그것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일본에 가서도 늘 지배적 위치에 있으면서 다른 요소를 융합해 왔다. 근래에 일본인의 DNA 조사를 통해서 나타난 것을 봐도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운 DNA를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한국의 유민임을 알 수 있다. 인류학적, 고고학적 언어학적으로 봐서 일본인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임을 입증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함에도 일본은 마치 일본민족이 단일민족인양 포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을 침범하면서 한국과 같은 한민족임을 감추고 그들의 열등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범죄를 범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은 제국주의 망령에서 못 벗어나 침략야욕을 못 버리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 한민족이 아니지만 고대 12부족이 추수한 후 같이 떡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마시던 1만 년 전 역사를 상기하며 우리를 형제로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면 “형제, 형제”하며 반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 주고 글과 문물을 전해줬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소인배적 행태를 한다. 이를 보면 일본과 터키는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인다. 일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백제, 고구려, 발해, 신라, 가야가 망하면서 유민이 된 망국의 한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광개토대왕 5만 기병이 침범할 당시 부득이 한국을 등진 유민의 한도 서려 있다. 또한 한국이 자기들의 본체인 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려는 속셈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을 침략하면서 그들은 한국의 문화선진민족임이 두려워 역사왜곡을 하지 않고는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역사왜곡을 해 왔는데, 그 왜곡과 변조·날조가 실로 엄청난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제와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역사왜곡 만행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무력으로 삼킨 후 총독부는 우리 가치관과 위계질서며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전면에 나선다. 그 선두에는 간교한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있었다. 일제는 그를 시켜 1512년 경주 부윤(府尹) 이윤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정덕본(正德本)을 영인(影印)하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개찬, 교토대학 영인본이라는 이름을 붙여 각계에 배포하고 널리 유포시킨다. 이윤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정덕본(正德本)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은 현재 서울대 도서관 소장의 것을 봐도 판명되는 일이다. 그러나 간사한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바꾼다. 그는 이를 통해 그의 학위논문인 ‘단군 신화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한다. 이니마시 류는 단군 고(檀君 考)라는 단군 신화 설을 만들어 그의 모교인 교토대학에서 ‘조선고사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1921년 학위를 받는다. 이어 교토대학(京都大學) 강사로 있다가 미우라(三浦周行) 교수를 따라와 조선사편찬에 관여해 16년 2개월 20일 동안 우리고대사를 황폐화 시킨다.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단군을 신화로 조작하고 단군의 존재를 없애려 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총독부 산하 공무원을 동원해 총 23만권을 불사른 것도 모자라 명문대가에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는 고서(古書)들을 모아 없애는 등 가진 악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관한 것은 서희건 편저 ‘한국 상고사의 실체와 일제의 한국사 왜곡·말살 진상’(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1권57면 이하(참조 바람)를 봐도 알 수 있다. 일제는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및 상고사, 삼국시대의 신지비사(神誌秘史), 해동비록(海東秘錄),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많은 사서, 전기, 위인전, 야화 등 귀하고 소중한 고서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렇게 없어진 사료가 엄청난 수 달한다. 이제는 일제가 날조해 빼버린 고조선의 입국(立國) 사실을 비롯해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본 위치로 환원시켜야 한다.
고마신사(高麗神社), 백제신사(百濟神社) 답사에서 본 유민역사
최태영 선생은 1985년 일본에 가서 직접 답사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선생은 일본의 고마신사(高麗神社)라는 곳을 방문해 그 정황을 말하고 있다. 원래 오이소(大磯)에 있던 고려산 고라이(高來=고려라고 드러내고 쓰지 못해 택한 위장된 표현) 신사가 백제계 일왕에 의해 도쿄 근처 무사시노로 쫓겨 간 뒤에는 이름을 제대로 찾아 고마 신사가 되었다. 원래 모시던 약광(若光=일본서는 쟈코라고 발음한다) 조상 외에 일본정부의 법에 의거해 일본 신인 오진(應神)일왕,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 등을 지금은 같이 모시고 있다. 오이소(大磯)는 ‘어서 오이소’라는 뜻으로 선래자(先來者)들이 후래자(後來者)를 환영한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고구려 마지막 왕의 왕자 약광(若光)이 고구려 멸망 후 조국을 떠나 8개의 돛을 단 배를 타고 이곳에 와 닿았다. 그는 돛대 위에 올라서서 “나는 고구려 왕자인데 고구려에 있지 못해서 이 곳으로 왔다. 나를 왕으로 받든다면 잘 살도록 해주겠다”고 소리쳤다. 한 배가 나타나 약광(若光)의 배를 끌어다가 비끄러맸다. 1799명의 사람들이 모여 고구려 촌을 이루었다.
‘어서 오이소’는 그 때의 소리치는 광경이 지금도 재현되는 선제(船祭)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날 바람이 불어 매어둔 배가 육지로 올라왔다. 오이소(大磯)의 주민들은 배에 바퀴 4개를 달아 기념물로 만들어 끌고 다니며 연년이 그 배에서 약광(若光)을 모셔오는 행사를 한다. 최태영 선생은 약광(若光)의 59대손 고마스미오(高麗澄雄)와 서신 왕래 후 친해져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최선생이 고마신사(高麗神社)에 갔을 때는 고마스미오(高麗澄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은 그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족보가 1259년 화재로 소실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을 여러 성씨로 갈린 후손들이 모여 다시 복원한 뒤 이제껏 잘 보관해 오고 있다고 했다. 대화 중 한국에 사자춤이 있다는 최치원의 기록을 말하니 이곳 신사에 고구려 때 전해졌다는 사자의 탈과 춤추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약광(若光)은 실물 크기의 목상으로 모셔져 있고 일반 공개가 금지돼 있었다. 고마스미오(高麗澄雄)씨는 최태영 선생에게 “일본식으로 말 할 필요가 없으십니다”고 까지 했다. 최 선생은 이에 “조국을 떠나 고생하다 돌아가신 조상들이올시다. 이곳의 후손들이 잘되게 돌봐 달라”고 묵도했다고 한다.
고마신사(高麗神社)에 참배하는 사람은 하루에 17만 명이 참배하기도 했는데 “대신(大臣)으로 내정돼 와서 참배하는 이는 모두 한국계”라고 했다. 고마스미오(高麗澄雄)씨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 일본 여성과 결혼해 순전한 한국의 혈통은 끝났다. 그러나 맏아들인 장자(長子)만은 지금도 고려 성(姓)을 갖는다. 지금도 고마신사(高麗神社)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마신사(高麗神社)에서 조금 더 가면 고구려 불상을 모신 신다이지(深大寺)라는 절이 있으며 이절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메밀국수가 고구려에서 유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도쿄로 가는 길에 내리마(練馬)라는 지하철 정거장이 있다. 이곳은 고마신사(高麗神社)를 본부로 군사조련을 하던 곳으로 지하철 정거장이 있었다. 최태영 선생은 도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마저 이곳을 보았다고 답사한 것을 술회하고 있다.
한편 최태영 선생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왕자에게 제사지내는 구다라 신사(百濟神社)를 보고 백제사(百濟寺)터로 왕인박사(王仁博士)의 묘를 찾아 갔다. 선생은 한 노인이 밤에도 돌아가지 않고 있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노인은 “오사카(大坂)에 있는 왕인박사(王仁博士)의 묘는 가짜이고 진짜는 다른데 있다”며 자기 집에 데려가 옛날 지도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를 인연으로 그 후에 많은 자료를 최태영 선생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왕인의 마지막 후손인 아도는 오사카에 살다가 1980년대에 병으로 작고했다. 왕인의 목상(木像)은 그때까지 잘 보관돼 왔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했다. 그 노인은 내놓고 “아도가 혈통을 지키기 위해 한국여성과 결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다”고 했다. 그 따님에게 “혹시 부친이 남기신 글 같은 게 있으면 보여 주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런 것 없습니다”고 냉정히 말했다고 했다. 역시 부모가 순수한 한국혈통이 아니기에 왕인 선조에 대한 것이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가 하는 왕인박사(王仁博士)묘 답사소감을 최태영 선생은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