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일본 주요 신사(神社)는 한국인 > 역사뉴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역사뉴스

[일본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일본 주요 신사(神社)는 한국인

송화강 2019-05-05 (일) 17:19 6년전 9349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일본 주요 신사(神社)는 한국인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2-12-01 18:22:29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의 우리역사 조작은 열등감 때문
 
우리역사를 왜곡하는데 주도적으로 한 원흉은 일본이고, 그 주구(走狗)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를 비롯한 총독부 관료들은 이를 조직적이고 강압적으로 추진한 핵심인사들이다.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왜곡을 시작하려 할 즈음에 우리 역사 고대사를 놓고 ‘민족을 위주로 하느냐 토지를 위주로 하느냐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역사 석학인 최남선 선생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면서 역사왜곡을 막고자 나섰다.
 
“무릇 고대사는 ‘민족’ 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 또는 ‘문화’를 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라도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이겠으나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전력을 다 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고대민족에 관한 사료(史料)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고 중국의 여러 사적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므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 까지도 면밀하게 조사해 유루(遺漏)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을 망라한다고 해도 그렇게 방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수집해 장래에 참고 해야 한다. 조선 민족은 인류학 상으로도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선의 민족 문화를 밝히기 위해서는 차라리 동방민족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아가 일본은 사료(史料)와 사설(史說)은 물론이고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우리의 방대한 고대사 자료들을 외면했다. 오히려 일본은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변조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초의 의지대로 무차별 역사왜곡에 나섰다. 일본은 우선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됐다”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했다. 또한 ‘단군신화 설’을 만들고 조작해 그 이전의 한국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 버렸다. 이 같이 무자비하게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고 왜곡하는데 앞장선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한발 더 나아가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 설’을 조작·왜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국민들은 이런 역사만을 배우고 믿기까지 하고 있다. 일부 모리배 학자들은 아직도 일본이 왜곡한 역사들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오늘은 일본에 건너간 유민들이 남긴 신사(神社)에 남은 조상들과 일본이 처음 세웠다는 이도국(伊都國)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최태영 선생이 지난 1985년과 1988년 두 번에 걸친 일본 현지를 답사하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했음을 밝혀둔다.
 
최태영 선생의 한국신사(韓國神社) 답사기
 
일본의 신사는 거의 전부 한국인 조상이나 유공자들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이는 그 옛날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자취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를 받드는 사당은 일본 전역에 6000여 곳이 넘는다. 그의 아들 이소다게루(五十猛) 신사, 신리왕자 아메노 히보코(天日槍)와 그의 아들 이데도(五十迹手)를 받드는 신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받드는 교소(許曾)신사, 신라 신사들과 한시신라(韓神新羅) 신사, 백제 왕씨의 신사, 왕인박사 사당들, 왕인의 후손인 스가와라노미치자네(管原道眞)를 받드는 덴만구(天滿宮)들, 고구려의 마지막 왕자 약광(若光)을 받드는 고마(高麗) 신사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이나리(稻荷), 가스카(春日), 야사카(八阪) 신사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국조인 단군을 받들던 교구산구(玉山宮)를 비롯한 한인계의 사당이 수없이 남아 있다. 도쿄 교외 무사시노의 고마(高麗) 신사처럼 후손이 확실하게 이어져 그 권위를 잃지 않고 버텨온 곳이 있는가 하면 유적이 파괴돼 여러 곳으로 해체되고 풀숲, 돌비석 하나에 간신히 이도(伊都)나 가야(伽倻)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옛날 한·일 간의 해협(海峽)에는 육지가 지금보다 많았고 바다의 조수는 부산에서 저절로 이즈모 해안으로 흘렀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즈모 사당의 청동 기둥에는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 제사하는 신사(神社)’라고 씌어 있다. 일본에 10대 수수께끼가 있다. 일본 왕실의 조상격인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받드는 이세신궁(伊勢神宮)보다 아마테라스오미가미의 오빠라고 알려진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의 이즈미 신사가 더 오래됐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스사노오노(素盞鳴)는 한국의 신라 사람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를 기리는 사당인 것이다. 일제 때 가고시마(鹿島)의 교구산구(玉山宮)에서도 단군을 모시는 것이 금지되자 스사노오노(素盞鳴)를 같이 제사 지냈다. 즉, 단군만의 제사를 같이 지내게 했었다는 것은 앞서의 기고에서 소개했다.
 
마쓰애(松江)에서 좀 떨어진 오다(大田)의 한신(韓神) 신사도 이즈미와 함께 일본 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이 신사는 큰 바다로 통하는 항구, 배가 와 닿는 좋은 자리에 있다. 포구가 내려다보이고 앞에는 큰 들판이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 큰 신사다. 그 옛날 한국인들은 여기로 배를 타고 와서 논벌이 큰 곳에 터를 잡고 (한국인이 가면 논벌이 크다=大田이라 한 것임), 한신신라 조상을 모시는 사당부터 세운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혼자 돌 도리이가 있는 신사에 들어가 살펴보니 궁사가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본 결과 구석에 한신 신라신사(韓神 新羅神社)라고 쓰인 현판을 볼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쓰애(松江)에 있는 다른 신사는 오래전 해체돼 조상신들은 다섯 군데로 분산됐다고 한다. 이 사실은 최태영 선생이 백제사에서 만난 노인이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져 가르쳐준 것이었다. 선생은 이를 근거로 흩어져 있는 3~4곳의 신사를 찾아가 보니 “(松江)에서 더 들어간 곳에 본래 이름 가야(伽倻)를 ‘加夜’로 바꾸어 새겨 놓은 것이 유일하게 옛 사실을 말해주는 표적이었다”고 말했다. 최선생은 또 “나머지는 너무 이름이 달라져 있어 한국 신사(韓國神社)였다는 근거라곤 없었다” 고 술회했다.
 
일본 최초 야마다이국(邪馬臺國)도 가야인(伽倻人)이 세운 것
 
일본인들도 자기조상의 유적을 깡그리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는 있다. 신사(神社)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규수(九州) 가고시마(鹿島)의 고려교(高麗橋)를 건너면 바로 한국인 촌이 있다. 고대 한국인들이 놓은 튼튼한 고려 다리였다. 근처에는 고려 우체국이 있었는데, 1985년 우체국 이름에서 고려를 지웠다. 한국의 흔적을 담은 지명도 차츰 사라지는 중이다. ‘松江’ 근처에 있는 교소신사(許贈神社)에는 닭 조각이 두 개 있다. 이는 신라의 계림(鷄林)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교소신사(許贈神社)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모신 신사(神社)로 층층대 양편에 닭이 마주 보고 있었다.
 
또 규수(九州) 후쿠오카(福岡)에 기원전 이도국(伊都國)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처음 국가라고 하는 야마다이(邪馬臺國)이라고 부른다. 그 옛날 가야인(伽倻人)들이 배를 타고 가서 건설한 것으로, 한국무녀(韓國巫女)가 히미고(卑弥呼) 여왕이 돼 구주(九州) 9부족에서 수십 부족을 통일하고 위(魏)나라에 239년에 조공을 해서 명제(明帝)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칭호를 받았다고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은 기술하고 있다. 266년 입공(入貢)이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원래 일본 말을 몰랐다. 백성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고 그 동생이 대리했다. 히미고(卑弥呼)의 다음 대 종여(宗女)도 여왕이었다. 여왕 2대가 통치한 뒤 그 나라는 없어졌다. 일본에서는 규슈의 여왕을 아마테라스 오미기미(天照大御神)로 생각하기도 한다. 최태영 선생은 이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을 답사하기 위해 일본에 갔으나 아는 사람이 현지에 없어서 온갖 지도를 펴 놓고 들여다보니 이도(伊都)라는 한문은 달라도 발음이 같은 이도(系=실)라는 지명이 있었다. 최 선생은 그 곳에 가면 이도국(伊都國)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 예감이 있어 가 보았다. 그곳은 지형적으로도 바닷가에 면하고, 높은 산을 지고 큰 벌이 펼쳐진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 고소신사(高祖神社)라는 오래된 한국 신사가 있었다. 그 뒷산으로 들어가니 귤 밭 숲속에 한국과 관련이 깊은 ‘이도국(伊都國) 옛터’라고 쓰여진 조그만 안내판이 있고 성(城)도 있었다. 이도(伊都)라는 이름은 이도(系)라는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뒤에 감춰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여 왕국(女 王國)이었다. 고소신사(高祖神社) 인근은 지형적으로 바닷가에 연하고 높은 산을 지고 한국인의 특징을 닮은 넓은 벌 다카치오(高千穗) 평야가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고대국가들은 모두 우리나라 유민(流民)이 가서 세웠기에 그 많은 신사(神社)의 신주(神主)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일본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건너 간 유민이 세운 역사였고 실제 통치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변조해도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에 계속)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로그인

최신 댓글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54
어제
500
최대
4,666
전체
1,069,605


Copyright © 한퓨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