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필자가 국회 TV를 보는 중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건립추진 위원회 위원장이 나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사업 상황을 말하는 중에 ‘조선조’를 ‘이조’라고 언급했다. 필자가 평소 존경을 하던 위원장의 말 실수에 일제의 역사왜곡이 우리 지도층에까지 부지불식간에 얼마나 뿌리박히고 만연돼 있나를 실감했다. 일제는 1925년 6월 일왕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官制)를 제정·공포하고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조선사편수회는 사료수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했고, 학자들에게 공갈과 매수 등의 방법으로 위협했다. 이를 통해 조선사편수회는 우리나라 ‘상고사’를 없애는 작업에 들어가 전력투구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긴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는 데서 일본역사의 열등감을 불식시키고 우리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조선 상고사’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까지 일본에 동화를 시키려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 상고사’는 이 같은 목적에 결정적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허구의 역사를 거침없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역사편수과정에서 ‘조선 상고사’뿐만 아니라 옛날 만주 연해주지방에 살던 퉁구스족인 숙신(肅愼)과 발해(渤海)도 아예 제외시켰다. 아울러 역사왜곡을 주도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 설을 만들어 철저하게 왜곡한다. 고조선 기(古朝鮮 記) 중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했다는 것은 최남선 선생에 의해 사실이 밝혀졌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며 우리의 선조를 경멸하게 하기 위해 가증스러운 왜곡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사 편찬을 맡은 어용학자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하게 했다.
“첫째, 조선반도 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을 상고삼한(上古三韓) 삼국, 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 등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史說)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이처럼 조선사 편찬의 시대구분을 제1편 삼국이전, 제2편 삼국시대, 제3편 신라시대, 제4편 고려시대, 제5편 조선시대 전기, 제6편 조선시대 중기, 제7편 조선시대 후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의 ‘조선 상고사’는 온전히 빼버렸다. 이에 필자는 최태영 선생이 일본에 가서 직접 확인한 상고시대 단군이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일본에 있는 단군사당(檀君祠堂) 교구산구 제문, 축사(玉山宮祭文, 祝詞)를 다루려 한다.
일본에 있는 단군사당(檀君祠堂)의 세년가(歲年歌)
최태영 선생은 지난 1985년, 일본에도 상고사에 관한 세년가(歲年歌)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임진년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자기조상신을 가져간 단군신상(檀君神像)이 있는 가고시마 현(鹿島懸) 미야마(美山)에 있는 단군사당(檀君祠堂, 교구산구·玉山宮)에 가서 조사했다. 최 선생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곳의 종주자(宗主者)이자 조선인 도공 14대 심수관(沈壽官)을 방문해 일본의 조선인 도공들이 세운 단군사당(檀君祠堂, 교구산구·玉山宮)의 축문(祝文)과 축가(祝歌)에 전해오는 ‘세년가’(歲年歌)를 찾아내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 내용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1598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기구하게 조국을 떠나 일본 가고시마(鹿島)에 정착한 40~70여 조선인 도공(陶工)들이 평양 숭령전(일제는 숭령전 문간과 본체건물 하나만 남기고 다 허물었음) 옥산궁을 본받아 ‘단군사당’(檀君祠堂)을 지었다. 그래서 이곳 이름도 평양의 옥산궁을 본받아 옥산궁(玉山宮)이라고 한다. 4백여 년 전의 단군사당은 평양을 위시해서 조선 각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4백 년 전의 세년가(歲年歌)와 축가 및 제문(祭文)
해마다 음력 8월 15일 단군제를 지내왔는데 이때 불리던 축가와 제문, 교구산구 유래기(玉山宮由來記)가 도공 14대 심수관(沈壽官) 댁의 가보로 전해내려 온다. 우리말로 된 내용을 일본어로 그대로 표기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를 통해 4백 년 전의 세년가(歲年歌)가 축가(祝歌)와 제문(祭文)으로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일본에서 단군을 모신 두 군데의 신사(神社)중 하나인 교구산구(玉山宮)는 심수관(沈壽官) 댁의 마을 뒷산에 있다. 나머지 다른 신사(神社)는 조선인 도공들 중 일부가 후대에 규슈(九州) 가사노하라(笠野原)로 이주하면서 세운 것이다. 최 선생은 산길에 서있는 홍살문 격인 도리이를 몇 개나 통과해 교구산구(玉山宮)에 도착했다. 지금은 일본식 건축물로 변화되긴 했지만 평양 단군릉을 말하는 옥산궁(玉山宮)이란 이름을 끈질기게 간직해 온 목조사당 안에는 놀랍게도 단군바위가 모셔져 있었다. 이 바위에 대해 이곳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다. 1673년 조선의 하늘로부터 큰 바위가 날아와 이곳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바위는 그 당시 뜨거웠다고 하며, 이곳 사람들 꿈에 단군이 바위로 현신해 나타난 것이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17개 성씨로 구성된 조선도공 집단의 단합을 위해 이 돌을 옥산궁(玉山宮)에 모셨다. 사람보다 더 큰 자연석 돌단군의 둘레에는 방울과 흰 종이로 접은 사사끼나무가 걸려 있었다. 추석날 ‘고려 무’(高麗舞)를 추고 ‘고려 떡’을 해 먹으면서 단군제사를 지낼 때, 이 바위를 공개하고 축가와 축문을 읽고 있다. 최 선생은 이에 대해 “14대를 내려오는 동안 이제는 그 뜻도 잘 모르고 발음도 어눌해진 우리말로 노래와 제문을 외우는 것을 보고 민족의 역사가 글보다 입으로 전해지는 세년가(歲年歌)로 인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축문(祝文)에서 단군을 최고의 존귀한 조상으로 받들면서 운명적으로 객지 떠돌이가 된 그들의 새로운 삶을 수호해 달라고 축원한다. 축문에는 또 땅의 개간과 갖가지 생업에 눈을 돌리면서도 어느 하루 만큼은 조상 단군을 기리는 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추스르는 강인함이 배어난다. 그 구심점이 바로 단군이었던 것이다.
단군사당(檀君祠堂)의 수난(受難)
12대 심수관(현재 심수관의 할아버지, 사쓰마 도자기의 중흥을 이룩했음)이 생전에 단군제의 비용을 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있던 1920년대에는 일본 당국이 단군 하나만을 모시는 것을 금하고 여러 명의 일본인 조상들을 같이 봉안토록 했다. 이때 일본 신 중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가 선택돼 단군과 같이 모셔졌다.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는 신라인이었다. 얼마 후 그것도 안 된다고 해서 단군이 아주 없어질 뻔 한 것을 12대 심수관이 고급 로비를 통해 “단군을 계속 받들게 해 달라”고 일제에 부탁했다. 그의 노력으로 단군은 간신히 밤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맥을 유지하게 됐다. 사당은 처음엔 조선식이었지만 1910년대에 개축 할 때 조선식 건축을 금한 조치로 일본식이 됐다는 것이다. 1930년대 들어 ‘단군 제’(檀君祭)는 급기야 폐기 됐는데, 14대 심수관은 그 전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성대 의과를 나온 한 청년이 동네사람들을 선동해 ‘돌덩이를 놓고 단군이라고 숭배하는 것은 야만국의 행태이며 우리의 수치’라면서 단군 제를 중단하자고 나섰다. 그토록 12대 심수관이 지켜냈던 단군 제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이에 14대 심수관도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온 동네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져 대립했다. 결국 단군 제의 존속을 투표에 붙였으나 중단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 때부터 ‘단군 제’(祭)는 이곳에서 없어진 것이다. 그때 심경을 14대 심수관(沈壽官)은 “옛날 것 지키려고 하다 할 수 없이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역대 조상들 가운데서도 물선(낯선) 나라에 와서 역경을 이겨낸 1대 조상들의 새로운 힘이 언제나 뜨겁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고 회상했다. 단군 제는 이곳에서 중단됐지만 그래도 400여 년 동안 내려온 축가(祝歌)의 내용은 조선인 도공의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오면서 힘을 얻었던 원천이 됐다. 따라서 그것이 얼마만큼 소중한 것인지를 소리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구산구(玉山宮) 유래기(由來記)
옥산 궁은 아다 시피 조선 개조 단군의 묘라.
평양의 옥사신궁에 신주를 만들어 사당을 마련하고 모셨다.
큰 집에 아름답고 좋은 것들로 정성을 다하고 평양 황도(皇都)에 근축(謹築)하니
최고로 귀한 신령이라.
임진왜란에 조선을 칠적에 우리조상들이 가져 왔다.
교구산구(玉山宮) 신무가(神舞歌)
오늘이라, 오늘이라(オノリラ. オノリラ.) 제물도 차렸다(チエムルドサイズル).
오늘이라 (단군축제가) 오늘이(オノリ) 고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イリドノサイ), 저리도 노세.(여러 가지로 노세 라는 뜻)
제일(祭日)이라 제일이라 우리어버이 우리아방(ウラバン)=<고어(古語)로 아버지다>
조신(祖神)은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コスライナ コスライナ)
자나 깨나(チヨ ナサイナ) 잊지 않으리라.
교구산구(玉山宮) 제문(祭文)
교구산구 제문, 축사(玉山宮祭文, 祝詞)의 큰 뜻은 아래와 같다.
대한 혼이여 굽어 살피소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떠돌이의 원객(遠客)이 되었나이까.
일하여 살아가며, 영귀(榮貴)하게 되도록
애호 교도해 주소서, 무궁한 행복을 비나이다.
비애를 그치고 합력하여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우며
누에치고 고기 잡자.
길이길이 우리를 모두 수호해 주소서.
마시자 다 함께.
우는 새도 즐겁고 산에는 샘이 솟는다. 꽃은 피었다.
노자, 노자. 모두 함께 마시자. 산과 언덕을 모두 개간하자.
길이길이 이어가도록 우리들 모두 수호하소서.
이 축사와 별도로 한 귀퉁이에 山好水好(サンチヨコ ムルジョタ=산 좋고 물 좋다)라고 한자에 일본 가나(カナ)를 달아놓았다. 이것은 일본 가나로 써 놓은 축가가 우리 한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 분명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문자에 의한 기록 외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세년가(歲年歌)에 의해서도 단군이 조선의 국조(國祖)이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설득돼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역사를 왜곡했던 이병도 박사도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년가와 동국세년가며,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의 기록들을 보고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의 역사왜곡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관의 글을 썼다. 그는 최태영 선생과 공저로 ‘조선 고대사’를 간행하며 식민사관에 입각한 우리의 역사왜곡이 잘못이었음을 말하고 타계했다. 그런데 그 제자와 그 손자 벌 되는 학자 아닌 학노(學奴)들은 일본의 왜곡한 역사만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직도 이 같은 학노들이 우리 학계에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지극히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실은 모두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학노들은 머지않아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자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루속히 후학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이들도 최선을 다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요 같은 국민이기에 기대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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