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며 날조까지 하고 있지만 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은폐할 수 없다. 우리 한족(韓族)은 선진민족으로 활약했던 고조선의 중심인 요동을 무대로 대륙을 지배했다. 요동의 넓은 땅에 나라를 이루고 살았던 역사적 사실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국 한족이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00여년에 불과하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 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살아 왔다. 당시 강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다. 중국의 여러 강국인 한(漢)나라, 수(隨)나라, 당(唐)나라가 공격한 곳이 바로 요동이었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주목적이 우리 한(韓)족을 막기 위한데 있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중국의 요임금 다음 순임금이 우리 한족이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강대한 고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서 한반도 까지 전체를 빽빽이 차지 한 것이 아니라 그물코처럼 곳곳의 산수가 좋은 몇 군데를 차지하고 살았다. 때문에 광역에 걸친 지역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 마니산도 단군의 손이 원래 거주하던 곳이다. 고조선 강역은 고조선-부여-예맥-고구려로 이어진다. 원래 우리가 살다가 한사군에게 뺏겼던 땅, 요동의 고토는 500년 후 광개토대왕 때 다시 회복됐다.
러시아의 학자 U.M 푸틴은 많은 중국 사서에 의한 사료 분석과 최근의 북한 등의 연구 그리고 과거 동아시아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근거로 고조선(古朝鮮)의 영역을 추정했다. 그에 의하면 과거 고조선이었던 지역은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의 청동기(靑銅器)는 중국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것으로 현재의 요동지역과 청천강 이북지역에 이러한 유물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와 한국 북부(청천강 이북)를 중심지역으로 하고 있었다고 푸틴은 주장한다. U.M 푸틴은 1982년도에 발간한 책 <고조선>에서 남북한, 중국, 소련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총 망라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밝혔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허구다
또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언급돼 있다. 푸틴은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곧 했다.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랴오똥(遼東)이란 말은 지금의 요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하(중국)의 동쪽 변경을 뜻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의 점령 이후 지명이 된 것이다. 우리민족은 원래 본바닥이던 요동에서 살았고 이후 한반도로 밀려 온 것도 사실이다. 단군의 손 한족들은 중국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칠 때 세력이 미약해 져서 만리장성 안에서부터 밀려나기 시작해서 요동에서 쫓겨나 한반도 삼한(三韓)으로 전락한다. 우리조상들은 만리장성안의 지역을 차지하고 살다가 요동-만주- 한반도로 이주해 왔고 더러는 일본까지 갔다. 이때부터 일본으로 간 역사가 시작됐다.
예국(濊國), 맥국(貊國)도 모두 만리장성 앞의 부여 근처에 있다가 남하해 지금의 강원도로 쫓겨 내려왔다. 삼한은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으로 발전한다. 한반도 남단 깊숙이까지 밀려온 한족(韓族) 가운데 제일 먼저 건국을 선언한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간섭이나 시달림을 덜 받아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을 이룰 수 있었다. 구려는 고구려의 먼저 이름이다. 고구려는 중국을 맞상대 해 싸우고 요동에 늦게 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던 부여를 정벌해 합치느라 건국이 늦어진다. 백제는 언제나 고구려의 뒤를 따라 붙었다. 후에 백제가 강해지면서 요서지방에 고구려 영토를 포위하는 성을 11개쌓았다. 이를 두고 고구려와 일대 충돌이 일어나자 아래로 내려와 신라와 연합했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고 고구려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땅을 되찾았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한테 주지 않았다. 이에 백제는 분개해 다시 고구려와 연합했다. 이 때 신라 백성들이 왜국으로 가는 바람에 백성을 잃은 금관가야(金官伽倻)등을 쳐서 합병한 신라는 다시 강해졌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를 등에 업고 중국식으로 변신하면서 임금 복색부터 바뀐다. 고구려가 신라에 패망 할 때 정복되지 않고 남은 11개성이 발해가 되어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했다. 신라 이후 왕씨(王氏)가 계승해서 고려(高麗)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요동의 국토는 잃었다. 고려에서 역사서를 쓸 때 이런 사실을 다 참고해서 썼을 텐데 고려를 이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고려실록을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에 고려사가 이어지지 못했다. 고려실록이 그대로 있었다면 고대사 자료가 없어서 김부식이 당나라에 까지 가서 당의 구미에 맞는 역사를 자료로 해 고대사가 신라의 편협한 삼국사기를 쓰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너무 우리나라 역사가 변조되고 날조·왜곡됐다는 데 분통이 터진다. 고구려 705년간 중국은 35번 정권이 바뀌고 300년간 통치한 나라도 전무한 상태다. 요·금·청은 중국역사나 당은 289년 통치한 나라다. 때문에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56민족)를 지향한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와 비교가 안 된다. 여기서 우리고대사와 실제 인물인 단군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서(古書)에서 보는 고조선 역사와 단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단군에 대해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그는 중국에 요공(要功)해서 살려고 했다. 그는 단군과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 찾는 파벌을 제거해야만 신라 출신인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고토를 찾으려는 묘청(妙淸)도 그런 김부식에게 토벌됐다.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우리 역사가 두 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고구려 계통의 역사는 비밀에 묻혔고, 신라계통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진짜 역사는 모두 박제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고구려에 관한 역사서를 찾아 볼 수 없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망한 뒤 그곳에 있던 고구려 사서를 중국이 싹쓸이 해서 모든 역사서를 당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를 전하는 사서(史書)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구려 역사를 전하는 사서(史書)로는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있다.
이 규원사화(揆園史話,1795)는 발해에 가 있던 고구려 사서까지 중국이 다 거두어 간 뒤 남은 것 중 예(濊)·맥국(貊國)이 가평과 춘천으로 쫓겨 오면서 보관해 전한 사서를 토대로 쓴 것이다. 우리가 고대사를 어떤 시기부터 신용 할 수 있는가는 규원사화라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옛 책에 있는 그대로 인용·소개하지 않고 요점만 뽑아 우리의 근원을 제대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북애(北崖)는 규원사화의 서문에서 “요동평야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고 부르면 대답할 만큼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조상의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 간지 천년이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다. 공자에게 미쳐서 그렇게 됐다. 공자가 조선에 태어났다면 중국을 오랑캐라 하지 않았겠는가. 왜 중국책에만 빠져 스스로 업신여기고 조상의 자랑을 찾지 않는지 한자의 공과가 반반이다”고 하고 있다. 학계는 규원사화를 신뢰하고 있다. 이 규원사화 이외에도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구성하는 5개의 역사서 환국(桓國)을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紀)> 세종·성종·예종실록에서 <삼성기(三聖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들은 일본인들이 태워서 없애버린 문헌이자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는 단군세기(檀君世紀)가 있다. 단군세기는 단군조선 47대 단군의 세세한 업적을 전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편입된 이 기록은 신라 때의 역사서이다. 우리가 신화나 전설로 허망하게만 취급해온 단군대의 이야기가 일본의 고대사서 4종을 맞추어 보면 중복되면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단군조선과 일본의 상고사가 그렇게 접점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는 섬승노(陝野奴), 즉 배폐명(裵幣命)과 장수언(長髓彦)의 내란 부분이다. 배폐명의 이야기는 환단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고 장수언의 내란은 상기(上記)에 나와 있다. 이러한 고서에서 단군에 관한 것을 엿 볼 수 있다. 예컨대, 3대 단군 가륵(嘉勒)때인 BC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참하였는데 그 후손에 섬승노(陝野奴)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도망해 세 섬에 의거하고 왕이라 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35대 단군 사벌조(沙伐朝)에는 BC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규슈(九州)의 구마소(熊襲)를 평정했다. 36대 단군 매륵(買勒)조에는 BC 667년 섬승후 배폐명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왜의 세 섬의 왕을 칭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일본은 한족(韓族)이 가서 세운나라다
이에 상당하는 일본 상고사상기<上記>는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1000명을 싣고 왜(규슈)로 처 들어와 장수언(長髓彦)으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수십 년 후 평정 됐다”고 했다. 우리가 왜와 싸운 게 아니고 규슈에서 장수언 이라는 유력한 세력가를 일으켜 왜왕으로 삼고 수십 년간 다른 대치세력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때의 왜는 규슈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이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이다. 후일 일본에서 진무일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왜의 지도자가 장수언의 대치세력이었는데, 진무일왕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이 전쟁에 진무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우다 진무의 두형이 죽고 진무 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왜가 우리의 제후국(諸侯國)에 준하는 부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진무에게는 후일 스진(崇神)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 되는데, 일본사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이런 것이다. 배폐명 혹은 섬승노 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선단규모가 70척, 500척인 것으로 미루어 국가적 정벌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왜를 치러간 기록은 부여 때도 나온다. 일본 상고사 연구자들도 이 사실을 주목 한다. 진무의 가계(家系)는 상기<上記>에 의하면 일본에 온 단군의 손의 73대가 되므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이라고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배폐명(裵幣命)의 사실을 접하면서 진척되지 못하던 연구가 일본의 고대사서(古代史書) 상기<上記>와 미야시다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記>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단군조선은 더 이상 부정 할 수 없는 것이며, 일본은 완전히 한족(韓族)이 가서 건설한 나라라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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