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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제1대 일왕은 단군 73대손 [1]

송화강 2019-05-05 (일) 17:23 6년전 10469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제1대 일왕은 단군 73대손 [1]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2-10-20 16:57:36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한국인이 일본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일본궁궐에서는 엥기시키(延喜式) 제사를 할 때 신라 가야 계통의 원신(園神) 1좌와 백제 조상신인 한신(韓神) 2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일본 궁궐에 신라, 가야, 백제에서 간 선조들이 조상들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자들이 많다. 일본의 에가미(江上波夫)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말하면서도 일본 천황가(天皇家)를 백제가 아닌 ‘위지’(魏志) 한전에 나오는 진왕(辰王)과 관련시켜 백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에가미(江上)는 4세기 초에 스진천황(崇神天皇)이 이끌고 온 기마민족의 후예에 의해 구주가 정복된 다음 4세기 말 오진천황(應神天皇)이 인솔 하에 기내(畿內)지역으로 진출해 야마토(大和) 조정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Gari K. Ledyard 교수는 346년에 선비족에 의해 멸망된 부여의 전사들 일부가 만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김해를 지나서 일본의 구주로, 그리고 마침내는 야마토(大和)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고 제기해 수정된 기마민족설을 내세웠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원탁(洪元卓)씨는 그 부여의 전사(戰士)를 아예 백제인으로 대치함으로서 바다를 건너와서 일본을 정복하고 야마토(大和) 조정을 건설한 것은 일단의 백제인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나온 한국사 책 가운데 ‘원효전집’(元曉全集)이나 율곡(李珥) 선생이 쓴 ‘향약’(鄕約)을 일본인이 연구해서 내 놓고 있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쫓겨 간 뒤에도 연구를 계속해서 내놓은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가 낸 35권의 한국사는 왜곡된 것이기에 다 갖다 버렸다고 했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역시 왜곡 조작된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책의 내용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다. 얼마나 역사왜곡을 했는지 증명되는 예다.
 
일본 역사서의 진무는 가공의 인물이다
 
일본을 한국인이 세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궁내성(宮內省) 문고인 상기(上記)와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똑 같이 그 내용이 표리(表裏)와도 같다고 하고 있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다케우치 고마로(竹內 巨磨)가 개인 소장문서로 전해져 왔다. 상기(上記)는 고사기(古事記) 몇 대를 압축한 것을 여러 대(代)를 펼쳐서 설명한 것으로 고사기(古事記) 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단군의 손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73대손이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요시다 하치로(吉田八郞)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상기(上記)에 의해 계산하면 이론의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니니기노미코토(瓊瓊靈神) 이래 상가야 왕조의 73대 손이다. 진무의 조부가 제70대, 진무의(神武) 아버지가 71대이다. 72대는 진무의 형인데 갇힌 몸으로 즉위해 전사했고, 73대 진무가 왜를 개국해 일본 제1대 일왕이 된 것이다” 현재 일본 역사서에서 말하는 진무(神武)BC660~585)는 있지도 않은 가공의 천황이며 허구의 날조된 거짓의 진무다. 이는 진무가 단군의 후손으로 일본에 온 사람의 73대손이란 설명이다.
 
1920년대 최태영 선생이 대학생인 때 최 선생을 아끼던 은사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佐崎박사같은 사람은 최 선생과의 대화에서 “네가 하는 옛글과 한문이 옳은 것이다”고 했다. 직접적인 지적은 아니라 해도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지는 말이었고 최 선생은 그 때 확신을 얻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최 선생이 상기(上記)를 본 사람의 쓴 책을 갖고 본 결론은 우리 한(韓)민족이 일본에 가서 일본을 세우고 경영한 사실이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를 연구한 가시마 노보루(鹿島昇) 같은 사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역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일본 국내의 역사는 아니다.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는 단군국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열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 단지 거기서 왔다거나 그 곳을 통과해서 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민족 이동의 결과 이곳은 망명지이자 분국으로 이동한 것이 된다” 이것은 단군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사람들의 단군조선의 역사와 그 이전의 실크로드 역사를 일본의 일로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는 한국 역사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의 경우는 대륙시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일본 열도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 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좋다고 보고 있다. 다케우치 고마로(竹內 巨磨)도 소장하고 있는 이 다케우치 문서(竹內 文書)가 위서(僞書)라고 해서 탄압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수진전(秀眞傳)은 우수한 진짜 전기 역사라는 뜻이다. 상가야 왕조사의 뿌리는 수진전(秀眞傳)에 근거한다. 이 수진전(秀眞傳)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원전(原典)이라고 한다. 마쓰모토 젠노쓰게(松本善之助)가 도쿄 골동상에서 수진전(秀眞傳), 원(原)수진전(秀眞傳)의 일부를 발견했다. 소장자의 친척 한 사람이 일부를 빼내어 골동상에 내놓아 알려지게 된 것이다. 후손들이 잘 간수해 오다가 “조상들의 물려준 책 더럽히면 안 되니 불을 놓자”고 해서 태워 버린 직후였다. 1980년 각 방면의 연구자 7인 이상이 모여 수진전(秀眞傳)의 여러 문제를 토론한 일본의 ‘역사와 현대’ 여름호 좌담회 내용으로 수진전(秀眞傳)이 설명되고 있다.
 
수진전(秀眞傳)은 천(天), 지(地), 인(人)의 3권으로 돼 있다. 처음의 두 권은 오모노누시쿠시미가타마(大物主櫛甕玉命)가 역사적 문서 부분은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가 각각 편집했다. 예부터 역사서를 만드는 것은 대체로 정권이나 왕조가 변한 때다. 신의 체계와 왕의 체계를 하나로 짜낸 왕권의 권리증서 같은 사서(史書)로서 오늘날 사학의 상징하는 사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일본에서도 계도系圖(위조)가 주제가 된다.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는 왕조가 바뀌며 난이 일어나자 신구 양정권이 만족하도록 사서를 만들어서 한 계통의 왕조가 존재한 것처럼 만들었다. 내란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타협하여 역사를 위조 한 것이다. 수진전(秀眞傳)의 형성 연대는 오모노누시쿠시미가타마(大物主櫛甕玉命)가 야요이 시대쯤 만든 것을 그 후 미와(三輪秀聰)가 적당히 선집해 인(人)의 권으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수진전(秀眞傳)의 주요 주제 또한 “일본 역사가 아닌 한반도의 실크로드의 역사이고 그 역사를 일본사로 차용했다”는 것이 가시마 노보루(鹿島昇)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는 “모든 것이 이입된 것은 아니며 순수한 일본 것도 있었다”면서 이는 중요 한 것이기 때문에 원문을 정밀히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수정된 부분이 있다고 인정 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진전(秀眞傳)은 ‘일본서기’의 제기(帝紀)구사(舊辭)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를 연구해온 마쓰모토 젠노쓰게(松本善之助)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사기, 일본서기, 제기(帝紀)구사(舊辭) 훨씬 전에 수진전(秀眞傳)은 한문으로 번역돼 있었다. 그 시기는 한자가 일본에 들어온 오진천황 때 쯤일 것이다. 그 때 활동하던 귀화인(바다 건너온 한국인)들은 일본 내의 여러 가지 옛것들을 바르게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당시 귀족자체가 귀화인들과 같은 사고를 하는 자들이었음으로 일본의 고대전통을 충실하게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수진전의 한문번역된 오진천황대 제1기에는 벌써 그 내용이 10분의 1쯤으로 압축 삭제됐다고 본다. 그 삭감된 것을 본으로 삼아 이번에는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손댄 것이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됐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또 가시마 노보루(鹿島昇)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간 한인들은 귀화가 아니라 도리어 일본의 본체(本體)였다. 그러면 선 주민(先住民)은 어떻게 됐을까. 그 시점에서 선 주민은 거의 다 피살됐다고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역사를 엮고 가다듬는 수사(修史)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진전(秀眞傳)이 쓰여진 문자는 지금의 가나가 아닌 고대문자이다. 일본의 고대문자 도요구니(豊國)의 고자(古字)보다 새롭고 인간의 지식이 상당히 발달 된 구조의 문자이다. 당시 한인(韓人)들은 부여, 고구려에 와서 한자를 사용하기 전, 단군시대에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를 사용했다고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 최후에 생긴 가림토가 모양만 변형 된 것이 수진전(秀眞傳)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은 최태영 선생이 연구한 결과를 추린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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