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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 선조 ‘화하족’ 왕명·국명 들쭉날쭉 제각각

송화강 2019-05-05 (일) 17:03 6년전 9178  

중국 선조 ‘화하족’ 왕명·국명 들쭉날쭉 제각각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2-15 19:45:3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필자는 최근 연재를 통해 태고시대의 환국과 상고시대의 배달국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특히 우리 한민족이 고대에 주역이 된 데 배경을 집중 다루고 있다. 한민족이 아시아를 주름잡은 이유에는 지역적 특성을 간과할 수 없다. 중국 대륙의 서북지역에는 광막(廣漠)한 불모의 사막지대가 있다. 반면 동남부에는 초원이 광대하게 형성돼 있고 하천유역의 평야지대가 있다. 그것이 해안에 달하고 있다. 이 일대가 우리 선조들이 터전이었던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바로 이 축복된 지방에서 문화를 꽃피웠다.
 
또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라야의 높은 연봉이 펼쳐있는 남록(南麓)의 이곳은 수리(水利)가 풍부한 평원이 펼쳐져 있고 바다에 연해 있어서 문명의 발상에 중심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요동 또한 평원과 흐르는 강의 천혜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우리 한민족은 배달국시대에 와서 세계문명을 낳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상고시대부터 많은 소국이 산재해 활거한 것에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좋은 여건과 민족의 우수성에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회조직의 정체성(停滯性)이 왜곡된 역사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망각한 채 여전히 정체성(正體性)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바른 역사를 되찾지 않고서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조작과 왜곡을 막을 수 없다.
 
일본의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후임총독에게 우리역사를 부정케 하는 정책을 쓰도록 주문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나는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하기 어려웠다. 대 일본제국주의 식민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인 역사를 각색해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다.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해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문화 역시 일본의 아류임을 강조해 교육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을 잃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나고 싶어 할 것이다. 창씨개명을 통해 먼저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그것이 식민국민을 식민 국민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조선식민통치사 중)
 
이후 일본 총독이라는 자들은 다같이 ‘조선사편수회’를 총독부하에 두어 역사를 왜곡해 가르쳐 우리 국민의 가치관을 변질시켰다. 그 결과 한국 국민의 가치관이 변하고 연대성이나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역사를 잃고 자존심이나 자긍심은 잃어버린 채 국가에 대한 정체성(正體性) 조차 희박해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는 세태가 되게 됐다. 이제는 우리들이 한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바로 찾고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 이번 칼럼에서는 배달시대 한민족의 역사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믿을 수 없는 거짓의 중국역사 제대로 알아야
 
중국은 한민족의 역사를 자기나라의 역사로 둔갑시켰다. 인물과 지명은 물론하고 고대부터 우리 것을 도용하고 있다. 헌원황제는 분명히 배달민족 또는 후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고대 황제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화하족 또한 후대에 가서 인구가 늘고 세력이 강해 졌다고 해도 그들 나라의 국조(國祖)나 역대왕의 삼황오제를 비롯한 대다수가 배달민족의 혈통이었다. 중국은 이를 숨기려 그 많은 서적들을 불사르고 조작하려 하나 우리역사에 분명한 기록이 명시되어 있어 숨길 수 없다.
 
배달민족이 세운 나라들도 명기하지 않으나 배달국시대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가 몇몇 기록에 보인다. 예컨대, 대효(내몽골지역 추정), 창힐(배달계통, 만주)이 북쪽에 존재했다. 하지만 배달계통 민족들이 세운 나라가 3개밖에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중에 후기하겠지만 중국은 한, 당, 송, 명나라 때 많은 역사 왜곡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까닭에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역사의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중국은 의도적으로 대도시의 위치도 행정관서에 의해 억지로 이전 개명이 추진됐다. 예컨대 평양이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양이라는 도시는 중국 내에 여러 곳에 있었다가 사라지거나 개명됐다. 태백산도 섬서성에만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태백산만도 여러 개가 있다. 예컨대, 부루칸산=(불함산(不咸山= 태백산), 바이칼호수 근방 천해(天海)의 태백산, 태산(泰山)의 태백산, 서안의 태백산, 감숙성(甘肅城)내의 태백산, 태원(太原) 근방의 태백산, 하얼빈 완달산의 태백산, 사아란산(斯阿蘭山)의 태백산, 우리나라 백두산의 태백산, 강원도의 태백산 등이다. 아사달(阿斯達) 지명도 하얼빈의 아사달(阿斯達), 장춘농안 백악산의 아사달(阿斯達) 등이 있다. 이처럼 역사를 연구하며 인명과 지명을 고정적 관념에서 우리식으로만 보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우리와 차이가 너무 난다. 치우천황시대(BC, 2707-2600) 당시의 기록들은 주로 화하족과 전쟁기록이다. 이 때 화하족의 나라는 신농씨(神農氏)를 지나 유망(楡罔)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데, 당시 화하족의 분포지역은 불분명하다. 화하족은 일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점차 사방으로 확산됐다. 규원사화에는 우리민족이 중국의 내륙지방 특히 산동성과 회대(淮臺) 지역에 중국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는 기록이 몇몇 나온다. 유망(楡罔)왕이 당시 하남성 황허 밑 공상(空桑)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나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망(楡罔)이 공상에서 거느린 민족도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24대 왕으로 나와 있다. 유망(楡罔)도 동이족으로 유력시 된다. 그 유망(楡罔)도 치우천황에게 항복했고 제후국에 불과하다.
 
중국의 기록들은 들쭉날쭉하다. 중국 화하족의 나라를 다스린 왕들은 수십 명에 이르게 된다고 하나 정확한 국명도 전해오지 않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재위기간도 각각 다른 국명으로 나와 있다. 분명한 것은 이들 나라들도 배달국에 복속된 제후국이었다는 것이다. 치우천황은 돌을 멀리 날려 보내는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당시 중원 21개국을 빠르게 정벌했다. 이는 동이계(東夷系) 나라임이 정확하다는 것이 재야 학자들의 주장이다. 서양 학자들도 중국 대륙에 일찍 들어와 산 민족은 알타이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韓民族)이라고 했다. 중국화족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한민족의 선조들인 것이다.
 
중국국조(國祖)와 통치한 왕은 거의 배달민족 혈통
 
중국은 고구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자 막대한 역사자료를 가져갔으며, 남은 자료들은 불태웠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역사왜곡을 시작됐다. 우리는 기록이 없으니 치우천황도 전설의 천황으로 보아 왔으나 배달국의 제왕으로 중국을 평정한 위대한 황제였다. 일제도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단군조선도 전설의 나라로 없는 것으로 뭉갰으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해 되살아났다.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가 있었는데, 병주(兵主)가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제(齊)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산동성에 있었던 비교적 강한 군사력을 지닌 대국이었다. 하늘, 태양, 달 등 자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齊)나라 민족은 우리 동이족이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따르면 해대(海岱=중국 동해안 지역)의 땅은 이미 엄(奄), 람(籃), 양(陽), 개(介), 우(隅), 래(萊), 서(徐), 회(淮), 이(夷) 8족이 자리 잡고 사는 곳이 됐다. 이 기록으로 보아 치우천황이 회대(淮臺)를 점령함에 따라 북쪽에 있던 배달족들이 남으로 이주해온 것이 틀림없다. 회대는 산동성(山東省), 남부 강소성江蘇省), 하남성(河南省) 지역을 가리킨다. 중국고지도(中國古地圖)에 나타난 것을 보면 위의 8족이 북으로는 하북성(河北省), 산동성부터 남으로는 하남성, 안휘성(安徽省), 강소성까지 걸쳐 살며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8족과 구려, 구이족(九夷族)은 동일한 동이족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부족의 명칭이 달라진 것뿐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나와 있는 8족은 허구가 아니라 실재한 역사임이 판명되고 있다.
 
이들 배달국의 제후국들은 배달국의 문물과 종교며 사상이며 풍속을 거의 배달국 것을 따랐다. 위에 언급한 대효와 창일(창힐)도 배달계통으로 배달국의 도사(道士)로부터 술(術=기술과 학술, 도(道), 문물제도를 배워갔다. 창일(힐)도 부도(符圖=하느님의 나라, 지역, 사상체계를 가리킴)와 글(배달국의 종교인 신도, 신교의 경전)등을 받아 갔으며 치우를 섬겼다. 치우천황은 배달국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인데, 자오지(慈烏支)의 오(烏)자는 태양문화에 있어 새를 가리킨다.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도 여기에서 발단이 되고 있다. 그 당시에도 배달족들은 새 깃을 머리에 쓰는 관이나 모자에 꽂는 풍습이 있었다. 이 관습은 고조선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 왔다.
 
묘족(苗族), 위대한 우리 선조들의 혼과 맥 계승
 
지금도 중국 남부지방에 가면 묘족(苗族)이라고 자처하는 소수민족들이 사는데, 이 묘족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시조가 치우천황이라고 하고 있다. 배달국 이전의 환국시대부터 묘족이라는 부족이 있어 왔는데, 이들은 다름 아닌 배달족의 일파로서 치우천황시대의 백성들이었다. 후시대에 풍(風)이라고 불렀던 동이족들은 치우천황의 직계후손들이다. 묘족(苗族)은 씨를 심어 농업에 종사하는 동방족(東邦族)을 가리키는 의미다. 묘족은 배달국 이전부터 농업을 발전시킨 정통배달족이었다. 이들은 배달 구려족의 일파로서 배달국시대에는 양자강 남부의 광활한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음이 중국 고대지도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는 역적 헌원을 치우천황이 토벌할 때 묘민(苗民)들이 치우의 군사로 용감히 선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5천년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인과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 속에서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이들의 민족정신이 놀랍다. 이들의 자긍심이 역사의 위대함에서라 볼 때 우리는 부끄럽다.
 
인류가 이 지구에 나타난 것이 BC 200만년 경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까지 자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스럽게 지켜온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하며 존경의 념(念)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조상의 자랑스러운 얼을 간직하고 지난날 찬란했던 배달시대의 세계문명을 꽃피운 긍지를 살아 숨 쉬고 있는 듯 느끼고 있다. 비록 지금은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 통일로 오지에 살게 됐으나 자랑스러운 배달의 자손임을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묘족은 우리가 본받을 한민족의 후손임이 틀림없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이들의 유적과 문화를 탐사하면 우리 고대사 연구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 歷史’, 株式會社 文理發行<日本史と世界史の關係が一目でつかめる‘絶對 中學社會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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