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주자(朱子) 사상은 대 중화사상(大 中華思想)
주자(朱子)는 소위 대 중화사상(大中華思想)을 신앙하여 일평생 중국을 높이고 한국을 헐뜯는데 광태를 부린 자이다. 주자의 사상을 고찰해 보면 그는 반한사상(反韓思想)으로 중국을 높이고 철저히 한국을 배제했다. 그 실례(實例)를 든다면 논어권구 자우편(論語卷九, 子穻篇)에 있다. <<공자(孔子)가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말하니 어떤 사람이 한국은 루(陋, 천하고 볼품없는)한 나라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가 군자거지 하루지유(君子居之, 何陋之有)라 대답했다. 즉, 한국은 군자가 살고 있음으로 루(陋)가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무도(無道)해 자신의 사상을 보급시킬 수 없고 한국은 루(陋)가 없는 군자국(君子國)임으로 사상을 보급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을 떠나서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 같은 해석은 안사고(顔師古)를 비롯한 많은 학자의 해석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만이 군자는 공자(孔子)가 자기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는 엉뚱한 해석을 했다. 즉, 한국은 루(陋)한 나라이이니 공자 같은 군자가 가서 살면 그 루(陋)가 없어진다고 해석했다. 주자의 해석 같으면 공자가 중국을 떠나서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공자가 사는 중국이 루(陋)가 없어서 그 사상을 보급시킬 수 있을 터인데, 공자가 어째서 중국을 떠나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말했겠는가.
공자(孔子)는 자신의 사상을 보급시키려고 중국내 여러 나라를 주유 하였으나 무지한 중국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무도(無道)를 개탄했다. 공자가 자신이 사는 중국의 무도(無道)를 변화시키지 못했는데, 한국의 루(陋)를 변화시키겠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주자의 억지해석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사방민족 중 어느 곳을 물론하고 현자인 공자가 가서 사는 곳은 다 루(陋)가 없는 군자국이 될 터인데, 하필 한국을 택하고자 했겠는가 말이다. 겸손을 가르치는 공자가 자신 같이 높은 군자가 가서 살면 루(陋)한 나라도 루(陋)가 없어진다는 무리한 말투로 루(陋)가 없다고 오만한 말을 했겠는가. 공자가 말한 군자거지 하루지유(君子居之, 何陋之有)는 한국은 군자가 살고 있음으로 루(陋)가 없다고 찬양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 학자라는 주자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그릇되게 해석을 했을까. 여기서 우리가 유의 할 점이 있다. 주자는 소위 대 중화사상(大中華思想)을 신앙하여 일평생 중국을 높이고 한국을 헐뜯는데 광태를 부렸다. 그런데 퇴계는 주자의 성리설(性理說)을 그대로 추종하고 율곡 또한 주자의 성리설(性理說)을 추종하면서 소이발자(所以發者)는 이야(理也)요 소이발지자(所以發之者)는 기야(氣也)라는 설명을 했다. 퇴계와 율곡은 주자의 사상을 추종했기에 본질상 중국사상이지 한국사상이 아니다. 도리어 주자의 사상은 반한 사상이다. 이렇기에 일본인도 주자를 추종하는 퇴계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을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고대 한민족사부터 없애려 했다
▲ 중국 남송때 주희(朱熹,주자)의 주자학(朱子學)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주자학을 본국 이상으로 신봉한 우리나라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꽃을 피웠지만 한민족을 멸시한 대 중화사상(大中華思想)을 심화·고착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은 공자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 전경. ⓒ스카이데일리
필자가 일본에 유학을 갔을 때 일본인이 한국에는 대학자로 이퇴계와 이율곡을 꼽는 것을 보며 한 때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역사연구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두 선생의 학문적 발전은 훌륭하다고 하겠으나 주자의 성리설의 해독에 대한 것을 일깨우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주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한국을 배제하는 반한국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한 사상이 조선조를 지배한 까닭에 우리 유생들도 대중화사상에 절여져 조선조의 역사적·정신적 정신세계가 일제에 더 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분명한 것은 중국문화를 개척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인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고대 은(殷)나라에서 중국문화를 개척한 것은 한민족(韓民族)이었다. 은(殷)나라는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은인들은 백의를 입고 난생설(卵生說)을 주장했다. 난생설이 바로 한국적이다. 오늘 중국의 양심적인 신진학자들이 은인은 한민족이라 긍정하고 있다. 특히 서전(書傳, 진서중·秦誓中)에 보면 주무왕(周武王)이 은왕(殷王) 주(紂)와 개전(開戰)할 때 그 필승의 조건으로서 ‘수유억조이인 이심이덕(受有億兆夷人 離心離德)이라고 했다. 즉, 은왕(殷王) 주(紂)가 이인억조(夷人億兆)를 거느리고 있으나 이심이덕(離心離德) 한다고 한 것이다. 이인(夷人)은 동이족(東夷族)을 가리킨 것이요 억조(億兆)는 국민이다. 다시 말하면 은(殷)나라의 국민은 강대한 동이인(東夷人)이다. 그러나 은왕(殷王) 주(紂)는 배반하고 있음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 두려워 말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한 것이었다.
이는 추호의 의문이 없는 해석이다. 주 무왕(周 武王)이 말한 이인(夷人)에 대해 춘추좌전(春秋左傳)을 해설한 두예(杜預)도 사리(四夷)라고 해석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卷四十一, 昭公八)에 사리(四夷)는 사방에 있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방에 있는 민족 중 동이(東夷)가 문화적으로 대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고문에 동이(東夷)를 사리(四夷)라고 칭한 예가 많이 있다. 또한 춘추전(春秋傳)에 주극동이 이운그신(紂克東夷 而隕其身)이라고 했다. 은왕(殷王) 주(紂)가 동이를 선치(善治)를 하지 못해 멸망한 것이라고 했다. 주 무왕(周武王)이 말한 이인(夷人)은 동이(東夷)를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주자의 제자 채침(蔡沈)이 주자의 명을 받들어 서전(書傳)을 해설하는데, 이인(夷人)은 동이(東夷)가 아니고 평인(平人)이라고 해석했다. 평인(平人)은 범인(凡人)이다. 상서상해(尙書詳解)에 은왕(殷王) 주(紂)가 학정(虐政)을 행함으로 현인(賢人)은 도피하고 범인(凡人)만이 남아있었다고 그럴듯하게 해석했다. 그러면 무능 유순한 범인(凡人)이 억조가 있으나 은주(殷紂)를 배반함으로 싸우면 승리할 것이니 용기를 내라는 해석이 된다.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오히려 강대한 동이족이 있으나 은주(殷紂)를 배반함으로 싸우면 승리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한 것이 분명하다. 소위 대학자 채침(蔡沈)이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그릇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주자의 중화사상을 계승해 한민족을 배제·말살하려는 고의적인 생각에서 무리한 해석을 한 것이었다.
퇴계, 율곡 사상은 대 중화주의사상에 함몰
- 퇴계 “큰 명나라는 인류의 종주국이다”
- 율곡 “명 군주는 우리의 황조(皇朝)·황상(皇上)이다”
주자(朱子)와 그 제자들은 이처럼 고대부터 위대한 은(殷)의 문화를 한민족이 건설한 것을 마치 중국인이 한 것인 양 조작하고 가르쳤다. 주지하다시피 주자(朱子)의 사상은 대 중화주의사상(大中華主義思想)이다. 그 사상은 중국인만이 사람이고 타민족은 짐승같이 하시(下視)하는 것이었다. 중국문헌을 보면 주자(朱子)가 고문(古文)을 해석하는데 한민족을 배제· 말살한 것이 수없이 많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냉정히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자인 퇴계와 율곡의 사상은 주자(朱子)를 추종했을 뿐이다. 이들의 사상에서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위대성과 기개나 기상을 찾아 볼 수 없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퇴계선생이 위대하다면 주자의 이 같은 대 중화주의(大中華主義) 광태에 맞서서 이를 배격하고 한민족의 위대함을 제창해 잘못된 주자의 대 중화주의(大中華主義) 해석을 바로 잡아 한민족(韓民族)의 위대함을 존중했어야 했다. 퇴계는 ‘주자가 경전 등 고문(古文)을 그대로 해석해 천하후세를 가르친 덕업이 높고 크다’고 주자(朱子)의 광태를 찬양했다. (퇴계선생문집 卷之 四十二, 朱子序說要序). 한국을 말살한 주자의 대중화주의를 찬양한 퇴계는 일본 원의청(源義淸)에게 보내는 글에 대명위천하 종주국(大明爲天下 宗主國)이라고 했다.(退溪先生文集 卷之八). 즉, ‘큰 명나라는 인류의 종주국’이라 말한 것이다. 또한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드는 퇴계는 명나라 정부를 본조(本朝)라고 칭했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正體性)은 찾아 볼 수 없다.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 경기도 파주 이이 유적 내에 있는 율곡 이이의 초상화. ⓒ스카이데일리
본조(本朝)는 조국의 정부를 가리키는 문구(文句)다. 그는 한민족(韓民族)을 중국의 한민족(漢民族) 후손이요 한국은 명나라를 본국으로 받들라고 한 것이다. 율곡도 주자의 대중화주의를 비판 없이 추종해 언필칭(言必稱) 명나라 군주를 우리의 황조(皇朝), 우리의 황상(皇上)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 군주는 한민족의 조선(祖先)이요 한민족의 군주(君主)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명나라 군주를 존중한 율곡은 명나라 황제의 대은(大恩)이 하늘같이 높아서 한계가 없다고 하기까지 했다.(栗谷全集卷之十三, 本國祭世宗皇帝文). 또한 율곡은 명나라 황제가 한국을 명령하는 조서(詔書)를 갖고 온 왕 사신(王 使臣)을 천사(天使)라 부르고 천신(天神)같이 존중해 구송요언 동구이(口誦堯言 動九夷)라고 했다.(栗谷先生全書卷之一, 詩下) 즉, 왕 사신의 성스러운 말은 한국을 감동시켰다고 한 것이다. 또한 율곡은 천마(天馬)를 읊은 시에 한가사엽섭구이 성외이물래화하(漢家四葉懾九夷 城外異物來華下)라고 했다. 즉, 중국이 4세대 동안 한국을 억누르니 한국이 중국을 두려워 해서 특이한 천마(天馬)를 중국에 바쳤다고 했다. 그리고 율곡은 명나라 서울을 신경(神京)이라고 부르고, 한국을 구이(九夷)라고 칭했다. 구이(九夷)는 무도한 되놈의 나라라고 하시(下視)한 것이다. 이 같은 율곡의 말은 전혀 근거 없는 망언이다. 사대병(事大病)에 걸려 그와 같은 망언을 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퇴계·율곡의 성리학설(性理學說), 조선 망하게 한 단초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자의 대중화주의 사상은 대 식민주의사상이다. 중국이 타민족에 대해 무력을 가하지 않고도 문화와 사상으로서 타민족을 흡수할 수 있게 해 결국 중국에 예속케 하는 단초가 됐던 것이다. 퇴계와 율곡은 주자의 대 식민주의에 취해 위와 같은 망언을 했다. 아무리 중국의 압박이 있더라도 대 학자가 조국과 타국을 구별치 못하고 조국을 무시하고 외국을 찬양한 것은 분명한 망발이고 망국(亡國)의 망언이다. 이러한 사상이 조선왕조의 근간 사상으로 자리 매김한데서 조선왕조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퇴계와 율곡은 성리성(性理說)에 밝음으로 대 명현(名賢)의 반열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그 성리성(性理說)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는 자주성이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국가정책을 반대하고 공산공론(空想空論)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두 선생의 높은 학문이 한국에 기여 한 바가 없는바 아니지만 주자학이 가져다 준 피해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율곡이 임진왜란에 앞서 주장한 ‘10만 양병설’은 왜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것이었기에 선견이 있었다고 보이지만 총체적으로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이 조선왕조를 망하게 한 기본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자주독립의 정신을 말살하고 물질문명을 반대한 퇴계, 율곡의 사상은 대 중화주의에서 못 벗어나게 했다. 이들이 끼친 악 영향은 한민족의 영혼마저 시들게 했다. 지금도 주자의 대 중화주의 사상과 식민사관이 정비되지 않음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 변조를 하는 이유는 이 같은 중화주의 식민사관과 무관치 않다. 중국의 역사나 일본의 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적 우수성과는 상대가 안 되는데도 여전히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를 조작하며 자민족의 우월감을 유지시키려고 억지 강변을 일삼는다. 아니 국력을 내세워 제멋대로 역사조작을 하고 있다. 이는 미술품 분야도 마찬가지다. 미국인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미술사와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1910~96)는 그가 연구한 미술품들에 대해 한국에 체류하며 연구한 결과 “그동안 ‘일본 것’ 혹은 ‘중국 것’으로 알아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사실은 한국 땅에서 건너왔거나 한국인 예술가의 손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또한 한국적 주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81년 12월 16일 코리아 타임스에 쓴 글에서 “내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는 깨달음을 고백했다. 그는 이어 “내가 그동안 배워온 한국, 중국, 일본의 예술사 전반에 걸친 재성찰의 필연성을 불러왔다.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문화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각성을 하게 만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동북아 재단은 무엇을 하는 재단인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오류에 대해서 손을 못 쓰고 있다. 왜곡과 변조된 역사 그대로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으니 언제 이 늪에서 벗어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초중고 교과서에 왜곡·날조된 역사가 버젓이 게재되고 있다. 우리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동북아역사재단’은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재단인지 묻고 싶다. 역사왜곡에 대한 반론다운 반론을 이 재단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연구도 않으면서 국고만 축내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때가 됐다. 지금까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대 연구 성과물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것은 주자의 대 중화주의 사상과 일본의 식민사관에 절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아니라면 왜곡된 역사에서 탈피하려고 애쓰는 노력을 보여 줬으면 한다. 이를 보여 줄 수 없다면 여전히 일본과 중국이 심어놓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의 자학사상과 대 중화주의사상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상의 글은 최태영 선생의 ‘단군을 찾아서’와 최인선생의 ‘한국학 강의’ 및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 박사의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등의 저서를 참고·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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