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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북아역사재단, 동북공정·식민사관 대변자인가

송화강 2019-05-05 (일) 16:48 6년전 9024  

동북아역사재단, 동북공정·식민사관 대변자인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5-10-10 23:05:18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경악할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왜곡
 
이달 5일 중앙일보 10면에 “‘한반도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를 미 의회에 보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동북아역사재단’이 사대주의자와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과 일본의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과 변조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됐다. 수백억원의 혈세 예산을 쓰는 재단이 역사왜곡의 부당함을 규명해야 함에도 오히려 ‘동북공정’의 왜곡한 역사를 인정하는 내용의 자료와 잘못된 지도 등을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2012년 8월 미 의회조사국(CRS)에 ‘한, 중 경계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한국의 시각’이란 검토 자료를 제출했다고 하니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한사군(漢四郡)은 애초부터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고 그 한사군도 세운지 26년 만에 우리 한민족의 예맥조선(銳麥=濊貊)이 3군(郡)을 점거했다. 이처럼 우리는 중국을 지배한 민족이었다. 중국이 조작한 역사와 일제 ‘조선사편수회’가 왜곡·날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동북아재단은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추구하는 기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동북아재단은 2년 전에도 ‘간도가 우리 땅이 된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도교육청의 간행물에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데 동북아 재단은 ‘간도는 우리 땅이 되어 본적이 없다’고 망발을 해 필자가 이에 대한 반론을 스카이데일리에 게재한 사실이 있었다. 도대체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앞잡이 노릇만하는 중국동북공정의 부속기관인지 묻고 싶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지금까지 연구 검토한 것이 아직도 이런 수준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광복70주년이 돼서도 식민사관 수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지고 한탄스럽다.
 
중국의 왜곡된 역사를 받아들이는 재단을 존치할 이유가 있는가. 무엇 때문에 정부는 헛된 예산을 쓰며 이러한 자료를 만드는 재단을 배제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재단은 과연 누구를 위해 세워진 재단인가. 일찍이 김부식(金富軾)은 중국에 잘 보이려고 단군조선을 말살하는 역적질을 했는데, 지금 일련의 동북아역사재단 작태를 보면 김부식과 같은 우리역사를 말살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2008년부터 46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역사지도’에도 독도를 누락시켰다는 기사도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이미 독도는 512년 신라 지증왕(智證王)13년(서기512년) 우산국(于山國) 정벌 때부터 오늘까지 엄연한 우리의 영토인데, 이를 누락시키는 것은 항간의 소문대로 동북아재단에는 일본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자들이 들어가 앉아서 일제식민사관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간도나 독도가 우리영역이 아닌 것으로 의적인 누락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번 칼럼은 중국 대륙은 물론 동북아의 강대한 우리 선조였던 예맥에 대한 고증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중국의 ‘예맥’ 관련 기술…사실과 다른 왜곡에 따른 모순 드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의 정벌을 받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이때 중국을 정벌한 동이족은 바로 예맥(銳麥=濊貊)이었다. 진(秦)을 정벌한 것도 예맥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논어(論語卷, 十四, 憲文 第十四)에도 명기돼 됐다. 또한 후한서(後漢書)에도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을 정벌한 민족은 예맥이라는 사실을 동이전(東夷傳)에서 기록하고 있다. 중국학자 양계초(梁啓超)도 춘추전국시대에 동이(東夷)가 중국을 정벌하다가 퇴각한 사실을 패했다고 쓰고 있다.(梁啓超 著 國史硏究六篇, 歷史上 中國民族之觀察 32面)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면 그 당시 진(秦)의 국내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싸우면 적에게 포로가 되고 주둔하면 사병이 전멸되었다’, ‘진(秦)의 국민이 출전하는 것을 사형장에 가는 것 같이 두려워서 도피했다’는 기록이다. 이에 진(秦) 정부는 죄인을 징발하여 출전케 하니 이것이 소위 적술(謫戌(귀향살이 군인이라는 뜻)이다. 이것도 성공을 못하자 800명의 용병(傭兵)을 쓰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앞서 진(秦)나라는 국경을 방위하고 영토를 얻으려는 탐욕으로 예맥과 남월(南越)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국민이 분출한 극열(極烈)의 화(禍)가 고도에 달했다. 이 때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같이 호응했다. 이는 진(秦)이 강권(强權)으로서 국민을 억압한 폐해다.
 
재래(在來) 중국사가(中國史家)가 진(秦)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선전하나 진(秦)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의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했을 뿐이다. 그럼으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을 보는 선전이요, 실제로 진(秦)을 타도한 자는 예맥과 남월(南越)이다. 이로서 최강국이라는 진(秦)이 일찍이 망하게 된 것이다.(資治通鑑 卷十五, 漢紀七, 太宗孝文皇帝下)
 
또한 예맥(銳麥=濊貊)이 진(秦)의 뒤를 이은 한(漢)나라를 정벌한 사실도 예맥이 얼마나 강한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한서에 따르면 예맥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시대에 한(漢)을 정벌해 많은 해(害)를 끼쳤다고 했다.(漢書, 二十四下, 食貨志 第四下) 진(秦)이 망한 후 한나라시대에도 이처럼 예맥은 중국을 정벌했다. 전한서에 보면 고구려 모본대왕(慕本대왕(大王)시대에 고구려군(高句麗軍)이 한나라 요지(要地)인 태원(太原)을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항복하고 배상금을 바쳤다.(前漢書, 七十八, 蕭望傳 第四十八)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종주국(宗主國)이라고 자처하는 중국인들은 이를 거꾸로 후한서(後漢書)에 ‘채동(蔡彤)이 은신(恩信)으로 불려 항복받았다’고 기록했다.(後漢書, 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高句麗) 중국은 패한 것을 승리로 기록하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이라 기록하는 상습이 있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이따금 국내 저명한 학자들도 이러한 기록을 의심하지 않고 인용하는 것을 볼 때는 안타깝다. 이러한 왜곡된 것을 인용하면 예맥이 항복해 배상금을 바치고 영토를 양여(讓與)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사실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정 반대다.
 
예컨대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이중 진번(眞), 임둔(臨屯), 현토(玄菟)등 3군(郡)을 예맥에게 빼앗긴 사실은 예맥이 한을 제압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서기전 108년에 한무제(漢武帝)가 세웠다는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고 이미 필자도 계속 밝히고 있듯이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를 지배하기는커녕 한사군(漢四郡)도 예맥에 예속되다시피 했다. 예맥은 후(候), 읍(邑), 군(君)이라는 3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는데 한무제(漢武帝)가 군(君)이라는 부족의 남려(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 한 것도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예맥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 철수 한 것이다.
 
정부의 국정교과서 간행 기대할 만한 결정…잃어버린 상고사·고대사 제대로 기술해야
 
훌륭한 학자라고 해도 중국의 왜곡된 문면(文面)만 보고 연구하다보면 오류를 낳을 수 있다. 고대사는 하물며 통설도 바꿔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면적으로 기존의 학설만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역사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史實)의 추구만이 아니라 역사의 특이한 기술(記述)이 어떤 배경에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 배경이 전승자(傳承者)에 의해서 어떠한 의의(意義)를 갖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논술(論述)하는 경우도 있어 그 방법이 타당한가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중국은 허구의 기서(奇書), 위서(僞書)의 역사서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4천여 년 간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중원(中原)을 지배한 역사는 1천년에 불과하다.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시대다. 진(秦)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국(皇帝國)이라고 칭한 나라였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해 국위(國威)를 떨치기는 했다. 진나라를 중국을 대표하는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은 진(秦)이라는 명칭에서 나올 만큼 중국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로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대제국이었다.
 
또한 강대한 오호(五胡)가 중국을 300년간 남북조(南北朝)로 분리·분열시켰는데, 이 남북조를 재통일한 나라가 수(隨)나라다. 수(隨)나라는 중국 역사상 특기할 강국이었고 당(唐)은 수(隨)보다 더 강대했다. 중국역대제왕(中國歷代帝王) 중 제1인자로 칭하는 당태종(唐太宗)은 주변의 모든 국가인 북으로 돌궐(突厥), 고창(高昌), 토곡혼(토(吐谷渾), 설연타(薛延陀)를 정복하고 철늑(鐵勒), 회흘(回紇)을 예속시켜 세계 역사에 기록할 강국이었다.
 
그런데 예맥(銳麥=濊貊)이 진(秦)을 타도(打倒)하고 고구려(高句麗)가 수(隨)를 격멸(擊滅)하고, 당(唐)을 격파(擊破)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공지(共知)의 사실이다 이러한 우리의 고구려를 ‘지방정권(地方政權)’ 운운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요하공정’은 우리역사를 뒤바꾸는 역사말살 행위다. 우리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쟁패전(爭覇戰)에서도 늘 승리해 왔다.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간행하겠다는 결정은 매우 타당하고 잘한 일이다. 앞으로 역사교과서는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도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오염된 역사를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이제 정부의 주도하에 훌륭한 역사교재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南帝 ‘命理속의 哲學’,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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