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중원정벌, 정복하고 지배한 우리 강대한 국가건설
환국시대부터 환인(桓因)은 한반도는 물론 유라시아를 아우르며 9개의 환족(桓族)이 12개의 분국을 천산 동방에서 동서 문명의 시원국(始源國)을 이뤘다. 이를 망각한 반도사관은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두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연방국가 형태로 환국(桓國)이 53세(世) 3301년을 지내고, 배달국 18세(37세) 1565년을 신시(神市)에서 시작했으며 단군이 다스린 조선은 아사달에서 47세 2096년간 다스렸다.
우리 역사는 대륙역사이기에 이제는 반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민족은 본래 대륙에서 시작해 조선조 초기까지도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중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이집트, 그리스문명도 환족(桓族)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는 환국에서 뻗어나간 세계문명의 시원국(始源國)임을 바로 아는 것이 급선무다. 북미 인디언 문화와 마야, 잉카문화까지도 우리의 선조들이 뻗어나간 것임이 증명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도가 아니라 대륙은 물론 세계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오대양 육대주 문명과 문화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간 것인지를 추적하면 과학적으로 우리 환족의 뿌리를 찾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를 반도에 가두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천체관측과 자연현상에서도 우리가 반도가 아니라 중원대륙을 지배한 민족의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곡된 역사에만 길들여져 있다. 필자 역시 왜곡 역사책만을 보다가 연구를 거듭할수록 우리 역사가 대륙의 역사요 위대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룩한 문명과 지금은 각 국가로 되어 있는 요(遼), 금(金), 원(元)나라와 중앙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추적하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필자도 연구를 하면 할수록 우리 역사의 위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역사가 열등한 중국과 일본의 자격지심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왜곡하고 변조한 역사를 그대로 믿고 우리를 폄하(貶下)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고대(古代)에도 그들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하여 지배(支配)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폄하하나 우리가 앞선 문물제도를 전수시킨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환족(桓族)은 고대부터 한족(漢族)을 지배했다
서기전 3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1200년간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위굴(回鶻), 토번(吐藩)등 유목민족(遊牧民族)이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여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한민족(漢民族)왕조에 위협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하고 우리를 지배한 것 같이 조작하나 이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이 한(漢)은 물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는 것은 일반상식이다. 예맥(銳麥=濊貊;(匈奴), 부여(夫餘), 고구려가 주축을 이루는 우리 유목민족(遊牧民族)은 한족(漢族)을 압도하며 지배했다.
예컨대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흉노(匈奴)의 모돈단우(冒頓單于)는 대륙을 호령하며 동호(東胡), 월씨(月氏), 정령(丁零), 견곤(堅昆)등을 차례로 격파하며 한(漢)나라도 때로는 침입, 지배했다.
한 예로서 전한(前漢)의 고조(高祖);서기전247~서기전195)는 건국해서 2년 후인 서기전 200년에 흉노를 정토(征討)하기 위해 32만의 대군(大軍)을 화북(華北)에 집결시켜 운강(雲崗)의 석굴(石窟) 가까운 평성(平城;산서성 대동현(山西省 大同縣)까지 진군했으나 그때 흉노의 모돈단우(冒頓單于)가 이끄는 40만 기마군단이 나타나 여지없이 격파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이 때 패전을 인정한 고조(高祖)는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많은 선물을 보낸 후에 형제의 약속을 맺음으로써 흉노(匈奴)와 화의를 맺을 정도였다. 화의(和議)의 내용은 양국이 서로 영토침입하지 않을 것, 한실(漢室)의 여자를 단우(單于)에게 시집보낼 것. 그리고 관시(關市)=교역장(交易場)을 개설할 것과 한(漢)으로부터 흉노(匈奴)에 세폐(歲幣;선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화의(和議)는 무제(武帝)가 취임하는 서기전 141년까지 60년간 계속 되었다. 이같이 한(漢)의 후환이 없어진 흉노(匈奴)는 강력한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가지고 대륙을 지배하면서 고비사막 넘어서 도르환 분지(盆地), 다그라마간 사막을 넘어서 서방지역까지 원정(遠征)했다.
서역(西域)에는 당시 루란(樓蘭)과 우전(于闐)등 36개가 되는 오아시스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곳이 흉노의 군문(軍門)에 들어갔다. 따라서 흉노의 영토는 일본학자들도 동(東)은 서만주(西滿洲)로부터 북(北)은 바이칼 호수, 이에니세이 강, 오비강의 상유역(上流域)까지, 서(西)는 다그라마간 사막을 포함해서 파밀고원(高原)까지, 남(南)은 천산(天山)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사이담 분지를 거쳐서 전한(前漢)내의 난주(蘭州)를 거쳐서 만주(滿洲)까지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학자(日本學者)도 주장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중동(中東)과 서방지역인 유럽까지 원정(遠征)하여 이란, 터이키, 헝가리는 물론 유럽까지 광활한 영토를 갖는 나라가 된다. 중국의 학자도 배달시대 우리 영역이 유라시아의 80%를 차지하는 동이(東夷)라 했다. 이러한 우리나라 영역을 반도 안에 가두어서 역사를 논하는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이제 바보짓은 그만 해야 한다.
고대 제후국(諸侯國)이었던 중동의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7개 이상의 스탄(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의 역사와 남방의 스리랑카 등 동남아 역사도 제대로 알고 역사를 말하여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 반도영토에 메인 나라가 아니다.
기마민족이 한족에 끼친 공헌(貢獻)
우리 환족(桓族)이 유라시아를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것은 우리의 앞선 무기와 기마군단의 힘이 컸다. 타민족이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머물때 우리는 철기시대(鐵器時代)를 맞아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투구며 우수한 철제무기(鐵製武器)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환족(桓族)은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무기(先進武器)와 전술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은 예맥(濊貊), 부여(夫餘),고구려 발해를 동이족이라 하며 두려워했다.
즉 환족(桓族)의 기마군단과 기마전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3세기 말기에는 북방 제민족(諸民族)이 남하(南下)했고, 4~5세기에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16國時代)가 되면서 이민족(異民族)과의 혼혈(混血)에 의한 한민족(漢民族)이라는 인종은 절멸(絶滅)시켰다. 그러므로 새로운 한민족(漢民族) 출현으로 수(隨;581~619)부터의 중국인은 신종(新種)의 한족(漢族)이 되었다.
이들은 북방유목민(北方遊牧民)인 흉노(匈奴)=예맥(銳麥)=(濊貊)에 대표되는 철제사용(鐵製使用)이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770~서기전403년)에 군기(軍機)와 농구(農具)가 철로 바꾸면서 농업도 크게 진보하여 농경민족(農耕民族)으로서의 기초를 확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철제무기(鐵製武器)를 사용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기마민족의 기마전술(騎馬戰術)에 골치를 앓아온 이민족(異民族)들은 이를 수입(輸入)하게 된다. 가장 먼저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이 전술의 수득(修得)에 노력하여 한족(漢族)도 이 전술을 사용하게 됐다.
더욱이 한(漢) 이후의 역대왕조(歷代王朝)는 이 기마전술(騎馬戰術)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원정(遠征)을 할 뿐만 아니라 수 천 킬로미터 이상의 먼 거리에 있는 나라들도 원정(遠征)을 시도해 판도확대(版圖擴大)에 크게 기여(寄與)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 한족(新漢族)이 된 수(隨)이후의 중국인(中國人)에게는 남부의 농경민족(農耕民族)도 포함해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서의 체질(體質)이 농후(濃厚)하게 되었다. 이는 기마민족이 대륙에 변화를 가져다 준 결과로서 기마민족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중원의 각국은 계속되는 전국시대(기원전 403~서기전 221년까지)의 약 200년간을 지칭한다. 중국 국내는 구래(舊來)의 진(秦), 초(楚), 연(燕)과 신흥의 전제(田齊), 한(韓), 위(魏), 조(趙)의 7개국이 서로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에 들어감과 동시에 약육강식(弱肉强食) 풍조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각 제후(諸侯)는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기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이란 많은 농경지를 늘려서 곡물의 생산을 높이고, 인구의 증대에 의한 병력증가와 우수한 지휘관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국영토의 확대가 필요하게 되자 상대국을 정벌해서 영토를 확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한족의 거주지는 일층 넓어지고 중앙의 문화는 동서남북으로 신장해 갔다. 특히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우리환족의 지배지를 확대해 갔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72面以下.貝塚茂樹,‘中國の歷史’上.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