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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화] 선교(仙敎), 노자(老子)사상 아닌 한민족 신선사상

송화강 2019-05-05 (일) 16:55 6년전 8998  

선교(仙敎), 노자(老子)사상 아닌 한민족 신선사상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5-24 15:28:25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매국의 강의-동북아역사재단 학술대회
 
지난 1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제1회 상고사학술회의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날 학술회의 발표는 잘 이뤄졌으나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고대사 천년의 패러다임을 넘어’라는 제목 하에 D대학 K교수의 발표를 들으며 귀를 의심했다. ‘무지한 자가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의 발표는 사관이 없는 가운데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한 교토대학의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조작 것과 같았다.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내세우는 이론은 사마천(司馬遷)이 휘치필법(諱恥筆法)으로 조작한 사서(史書)와 김부식(金富軾)이 중국에 요공(要功)을 하느라 중국을 아국(我國)이고 고구려·백제 등은 적국으로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위서(僞書)인 삼국사기를 주로 인용하며 세계학자들이 일궈 놓은 오늘날 한국사연구 성과나 논평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는 무지 그 자체였다. 오히려 위서(僞書)를 인용하면서 과학적 ‘검증’을 운운했다.
 
중국은 고대부터 ①한족과 중원 나라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긴다(爲漢中國諱恥) ②한족과 중원의 나라는 높이고 외국은 깎아내린다(矜炒而陋夷狄) ③한족에 관한 국내사는 과대하게, 남의 역사는 작게 쓴다(祥內略外) 등의 원칙하에 ‘사서(史書)를 써 왔다. 이 같은 휘치필법(諱恥筆法)의 수법으로 날조한 중국책을 인용하면서 과학적 검증이라고 하니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은 우리 한민족이 두려워 고대부터 우리에게 조공을 바쳤었다. 그와는 상반되게 중국은 한(漢)나라가 대단히 강한 나라로 포장했으나 그 허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한(漢)나라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전쟁에서 우위에 선 적이 없는 나라다.
 
한(漢)나라는 우리와의 전쟁에서 패배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공자(孔子)가 그 사상을 펴려고 천하를 주유하다가 뜻을 이르지 못하자 역사를 바로 써서 치란(治亂)의 원리를 후세에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 만년(晩年)에 중국정사인 ‘춘추(春秋)’를 저술하는데 그 수법이 또한 휘치필법(諱恥筆法)이다. 즉, 중국이 타민족에게 패배한 사실을 삭제하고 도리어 승리로 위조했다. 후대 중국사는 공자의 수법을 본받아 위조를 기본으로 중국인 중심의 역사기술을 정립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기법은 위한중국휘치필법(爲漢中國諱恥筆法)이다.
 
위서(僞書) 인용하며 과학적 검증 운운하는 언어도단
 
이 수법에 의해 조작된 허구의 왜곡사서(史書)를 금과옥조로 인용하며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역사를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있는 역사는 배제하고 없는 역사는 위서(僞書)를 인용하면서 과학적 검증이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한 예를 들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범했다가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양만춘(楊萬春) 장군에게 패해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사서(史書)에 양만춘(楊萬春) 장군의 기록이 있는가. 그 기록은 없다. 또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사서(史書)에 기록 또한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신라와의 영토싸움에서 김유신(金庾信) 장군에게 패해 그 시체가 다리 밑에 깔렸기에 중국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수치스러운 것은 모두 숨기는 중국의 역사기술 방식 때문이다.
 
이런 위서(僞書)를 인용하며 검증 운운 하는 것은 속된말로 가소롭기까지 한 일이다. 일본의 역사기술 원칙도 ①승리는 과장(誇張)하고 ②패배는 고쳐서 개서(改書)하고 ③망명(亡命)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다 등이다. 이 원칙에서 제멋대로 쓰여 진 책이 일본 역사서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바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외래사상에 구걸하는 사이비학자일지라도 중국과 일본의 휘치필법(諱恥筆法)을 제대로 알고 인용해야 한다. 이번 칼럼은 노자가 창설했다는 선교(仙敎)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선교(仙敎) 창설자는 중국의 노자(老子)가 아닌 한국
 
중국 선교(仙敎)의 창설자는 노자(老子)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노자(老子)의 전기(傳記) 중 최고(最古)는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노자(老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설(異說)과 괴설(怪說)을 주장했다. 노자(老子)는 이이(李耳) 또는 노래자(老箂子)라고도 한다. 또 담(儋)이나 종(宗) 또는 군자(隱君子)로도 불린다. 노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많아 사가들은 아직도 정확히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또 노자(老子)는 그 어머니가 81세에 낳았다하고, 또는 81세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노자(老子)가 160수의 수(壽)를 누리었다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200년의 수(壽)를 누리었다는 등 괴설까지 있다.
 
현존한 노자의 저서 상하2편 5천자에 시류(詩類), 산문류(散文類),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 종횡가류(縱橫家類)의 권모설류(權謀說類)로 구성된 작품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이율곡(李栗谷) 선생은 신선책(神仙策)에서 선교(仙敎)는 불로장생, 승용상천(乘龍上天) 등 괴설로서 세인(世人)을 속이는 황제(黃帝)를 시조로 내세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노자는 이설(異說)과 괴설(怪說)로서 조작한 가상적 인물(假想的人物)이요, 실제적 인물이 아니라는 의문이 있는 배경이다. 선교(仙敎)의 창설자라는 노자(老子)가 실재적 인물이 아니면 선교(仙敎)가 어디서 나왔는가. 선교(仙敎)는 바로 한국에서 나왔다.
 
그 증거로 한국에는 노자(老子) 이전에 이미 신선사상(神仙思想)이 있었다. 이는 황제(黃帝)와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신화이다. 선교(仙敎)는 이 신화를 계승해 창설됐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황제(黃帝)와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신화는 한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수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선교는 우리의 사상을 기반으로 창조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황제(黃帝)와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신화는 다음과 같다. 포박자(抱朴子, 內篇卷之十八 地眞)에 ‘황제 동도창구 과풍산 견자부선생 수삼황내문 이핵소만신(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라고 했다. 즉, “황제가 청구(靑丘)에서 동도하여 풍산을 지나서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보고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인皇)의 궁중에 비장한 내문(內文)을 받아서 많은 귀신을 핵소(劾召)했다”고 한 것이다. 청구(靑丘)는 한국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에 청구도(靑丘道)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임명한 것을 보면, 청구(靑丘)는 한국이다. 핵소(劾召)는 핵문(劾問)이요, 핵문(劾問)은 엄형(嚴刑)을 가하면서 문초(問招)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귀신을 몰아내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卷三 十過, 第十)에 황제(黃帝)가 태산에서 많은 귀신을 접했다고 했다. 즉, 원시 다신시대에 황제(黃帝)가 많은 귀신을 접함으로 그 귀신을 몰아내기 위하여 자부선생(紫府先生)을 찾아가 궁중에 비장(秘藏)한 내문(內文)을 받아 간 것이었다.
 
선교(仙敎)는 한국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계승했다
 
역대 신선사(神仙史)에 보면 ‘東王公 諱倪 字君明 乃元始 天王所化 八帝之一 混沌初分 民物未生時, 自九天下降 王於碧海之上 蒼靈之墟 居東華方諸山 名曰紫府 有六門三宮 各分 眞仙主治 ....凡上天下地男子登仙得道者 悉所主焉’이라고 했다. 즉, “동왕공(東王公)이 원시(元始) 천지(天地)가 개벽한 초두(初頭)에 하늘에서 하강하여 푸른 바다 위 창령(蒼靈)의 허(墟)에 왕국을 건설하고 동화방제산중(東華方諸山中)에 거처하면서 자부(紫府)라 칭하고 신선사상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 동왕공(東王公)의 신화(神話)가 자부(紫府)선생의 신화(神話)와 동일하다. 동왕공(東王公)은 동방에 있다는 뜻으로 동도(東到)와 같고 창령(蒼靈)의 허(墟)는 푸른 토양(土壤)으로서 청구(靑丘)를 가리킨 것이요, 동화(東華)는 조선의 이명(異名)이다.(秉穗錄). 그리고 선인(仙人)의 거처를 가리킨 것이다.(雲笈七籤). 자부(紫府)는 자부(紫府)선생을 가가리킨 것이요, 원시천지(元始天地)가 개벽한 초두(初頭)는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등 삼성내문(三皇內文)과 같다. 그럼으로 동왕공(東王公)의 신화(神話)가 황제(黃帝)가 찾아간 자부(紫府) 선생의 신화(神話)를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지(天地)가 개벽한 초두(初頭)에 한민족(韓民族) 중에서 선인(仙人) 자부(紫府) 선생이 출생했다는 신화(神話)는 한민족이 인류사상 최초에 신선사상을 발견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주체적 사상이 신선사상(神仙思想)이다. 이 사실과 자부(紫府)선생의 신화(神話)를 연결해 보면 역사적 신화(神話)는 허공중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청구(靑丘)에서 죽였다고 했다. 치우(蚩尤)는 동두철신(銅頭鐵身)이요, 능히 대무(大霧)를 일으킨다고 했다. 이는 인간이 아니고 귀신의 거장(巨將)을 가리킨 것이다. 황제(黃帝)가 귀신의 거장(巨將)을 청구(靑丘)에서 죽였다는 것은 황제가 귀신을 핵소(劾召)하는 비방을 청구(靑丘)에서 배웠다는 신화(神話)를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즉, 황제와 자부선생의 신화(神話)가 한국에서 창조된 것을 입증하고 있다. 중국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시조로 칭하는 황제가 한국 신선(神仙)인 자부(紫府)선생의 내문(內文)을 받았다는 신화(神話)는 중국 신선사상(神仙思想)이 한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계승한 것에 대한 고증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민족이 인류사상 최초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발견했고 한민족의 주체적사상이 신선사상(神仙思想)이다. 이런 사실을 다시 고찰하면 중국 신선사상(神仙思想)은 더욱 한국사상을 수입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仙敎)가 한국사상을 계승한 증거들이 있다
 
이 같은 주장의 배경으로 유력한 증거들이 있다. 한방의약(韓方醫藥)중 가장 중요한 경전(經傳)이 침염대성(針炎大成)이다. 이 침염대성에 귀신을 핵소(劾召)하는 주문(呪文)이 있는데, 태상노군(太上老君)을 주체로 했다. 태상노군(太上老君)은 노자(老子)의 존칭이다. 귀신을 핵소(劾召)하는 주문(呪文)에 노자를 주체로 한 것은 노자의 선교(仙敎)가 귀신을 핵소(劾召)하던 비방(秘方)을 계승한 것이다. 환언하면, 선교(仙敎)는 황제가 자부선생에게서 삼성내문(三皇內文)을 받아서 귀신을 핵소(劾召)하던 비방을 계승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선교(仙敎)의 창설자가 실제적 인물이 아니라는 의문이 있고, 여기에 중국선교(仙敎)가 한국 신선(神仙)인 자부선생의 사상을 계승한 유력한 증거가 있는 것을 고찰하면 중국선교(仙敎)가 한국사상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황제가 찾아온 청구(靑丘)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邊裔典, 卷十一 針邪秘要)에 ‘長洲一名 靑丘在南海辰巳之地...又有仙草靈藥...又有風山...有紫府宮 天眞仙女 有於此地’라고 했다. 즉, “장주(長洲)의 일명(一名)이 청구(靑丘)이고 남해에 있다. 선초영약(仙草靈藥)이 있고 또한 풍산이 있고 자부궁(紫府宮)이 있는데 천진선녀가 이곳에서 놀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해 황제가 찾아온 청구(靑丘)는 남해의 청구가 아니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동도(東到)라는 문구(文句)와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문구(文句)는 동해의 청구(靑丘)를 가리킨 것이고 또한 남해청구의 자부궁은 선녀가 노는 곳이요, 자부(紫府)선생이 없다. 그럼으로 황제와 자부선생의 신화는 동해의 청구(靑丘) 즉, 한국에서 창조된 것이다.
 
예해주록(藝海珠鹿, 廣成子解)에 황제가 공간에 거처하는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서 장생불사 (長生不死)의 지도(至道)를 배웠다고 하고, 장자(莊子-在宥)에 황제가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 속에 숨어있는 선인(仙人)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서 지도(至道)를 배웠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볼 때 중국의 신선사상이 광성자(廣成子)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러나 광성자(廣成子)의 신화에는 증거가 없고, 자부(紫府)선생의 신화는 침염대성(針炎大成)의 기록이 입증한다. 그럼으로 중국 신선사상은 한국의 신선사상을 수입한 것이다. 또한 동양문화를 개척한자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다. 이상의 논리에 의하면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가 한국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동양문화의 개척자다. 그리고 정신문화는 서양보다 동양이 먼저 발전했고 한국은 선두주자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찰하면 한민족은 인류사상 최초에 등장한 문화민족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부정 할 수 없다. 우리는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혀가야 한다.
 
강단사학계의 휘치필법(諱恥筆法) 수용은 자해행위
 
민족말살을 기도한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와 식민사관을 배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사대주의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미래를 또한 기약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학노(學奴)들은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한 것을 과학적 검증이라며 더 날조하는 만행을 범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고증도 연구도 하지 않고 위서(僞書)들을 진짜 역사로 거론하는 무지가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강단사학은 휘치필법(諱恥筆法)으로 쓴 중국과 일본의 거짓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역사를 지워버리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해 왔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에게조차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제는 이처럼 매국하는 학노(學奴)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단죄해 우리의 영혼을 바로 찾고 위대한 선조의 얼을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에 큰 대(大)를 자연스럽게 붙이고 애국가에 ‘대한(大韓)사람’이 서려 있는 것은 우리의 민족적 영혼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인 ‘한국학강의’, 성헌식 ‘1000년 만에 밝혀진-안시성과 살수’, 김부식 ‘삼국사기’, 박영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徐相潤 譯解 ‘周易’,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호·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梶村秀樹·渡部學 編者 邱永漢 ‘東洋の思想家たち’ ‘日本に訴える シリ-ズ’ ‘日本と朝鮮’,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西嶋定生·護雅夫·木村尙三郞·猿谷要 ‘世界歷史の基礎知識1·2’.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최명관 ‘삶과 철학’, Jose' LIompart ‘自然法論の硏究’ 외 다수서책을 참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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