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지성(知性)은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본질적인 경향으로부터 보편(普遍)을 지향하면서 숨겨진 역사를 정확히 규명·고증(考證)하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침략자들이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맹신하거나 맹종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끝내 망치고 만다. 6·25 때 미군의 참전용사로 왔던 존 와이스 코넬대 역사학교수는 작년 48년 만에 한국에 다시 찾아와 “한국사 잘못 쓴 책을 보면 화가 난다”(조선일보 013.7.11 23면)고 했다. 그는 “동아시아 학계의 석학이라는 라이샤워와 페어뱅크가 쓴 ‘동양화사’ 초판은 한국이 중·일 두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고유문화가 부족한나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절대 그러지 않다. 이는 영어로 된 한국사 책이 없는 탓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목표가 뚜렷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엄격하게 노력하는 민족이다”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는 라이샤워와 페어뱅크와 같은 학자들이 한국역사를 깊이 연구도하지 않고 중국, 일본의 왜곡한 역사서를 갖고 이를 옳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지금 필자는 상·고대사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환국에 대해서는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대 환국의 황제를 환인(桓因), 배달국은 환웅(桓雄), 고조선은 단군(檀君) 등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따르면 환국은 53대 3301년간 지속됐고, 환웅시대(桓雄時代)는 18대 1565년, 단군시대는 47대 2096년간 각각 지속됐다. 그리고 환국의 최초의 발상지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천산(天山)으로 기록돼 있다. 천산은 중국 서부 위구르족자치구의 우루무치시 외곽 북쪽에 있는 고산이다. 산 정상에는 백두산천지와 같은 호수가 있으며 지금은 자치구 내의 주요 유명관광지가 되고 있는 곳이다. 부도지(符都誌)에 환국(桓國)에 대한 내용으로는 제1장에 나오는 마고성(麻姑城)이 제8장에 천산주의 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반도식민사관의 사이비학자들은 ‘환단고기’도 위서(僞書)로 몰고 사마천의 쓴 ‘사서’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인용하며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역사는 과학적 검증’이라는 허황된 이론을 따르고 있다.
역사는 위서(僞書)의 검증(檢證)이 아니라 고증(考證)을 통해 제대로 밝혀야 한다. ‘사기(史記)’나 ‘삼국사기’가 위서(僞書)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위서(僞書)를 인용하며 학자로 착각하는 자들을 보면 동정심마저 생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일본 학자들은 자기들 선조가 일본에 건너온 역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의 기록이 잘못 돼 있음을 자인하며 이를 깊이 연구하고 자기들 조상이 한국에서 유래했음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왜곡된 거짓역사를 진짜역사로 가르치며 민족혼을 말살하고 있다.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노부유키(安倍信行)가 말한 대로 ‘한국은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100년을 헤매게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 늪에서 빨리 벗어나야 산다. 이번 칼럼은 우리의 문물제도뿐 아니라 군사, 주역철학등도 중국이 한국에서 수입한 것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중국은 군사학, 주역철학, 물질문명을 한국에서 배웠다
중국은 군사학과 주역철학(周易哲學)은 물론 물질문명을 한국에서 배워 갔다. 따라서 중국을 본국, 우리를 가지국(枝國)으로 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중국 5000년사(中國5千年史, 第二冊 西周史, 第四章)에 보면 ‘중국병가(兵家)의 시조는 강태공(姜太公)이라 하면서 그 강태공의 군사철학이 후세에 전파됐다고 했다. 그런데 사기(史記)에는 강태공이 동이(東夷)의 사(士)라고 했다. 결국 중국의 군사학도 한국에서 수입했다는데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 당시 한국은 대륙에 있었다. 중국은 물질문명도 우리에게서 배웠다. 서전고명 편(書傳 顧命篇)에 대옥, 이옥, 천구, 하도(大玉, 夷玉, 天球, 河圖)가 동서(東序)에 있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상서 금고문주(尙書 今古文注)에 대옥(大玉), 이옥(夷玉)은 제고양씨(帝高陽氏)의 천구(天球)라는 일설이 있다. 또한 이옥(夷玉)은 동이의 미옥(美玉)이요, 옥속(玉屬)이라 한다. 대옥(大玉)은 화산(華山)의 구(球)요, 이옥(夷玉)은 동북방의 옥속(玉屬)이요, 천구(天球)는 옹주(雍州)에서 생산되는 옥이다. 이들 옥속(玉屬)이 하늘 빛 같은면 가공하지 않은 소재이므로 예기(禮器)로 사용치 못하는데 이를 하도(河圖)라고 칭한다. 하도(河圖)가 나타나니 배달국의 복희씨(伏羲氏)가 이를 보고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했다. 후에 논할 하우씨(夏禹氏)의 낙서(洛書)도 동쪽에 있다. 동이(東夷)의 옥을 일방 제고양씨(帝高陽氏)의 하도(河圖)라 칭하고, 또한 하도낙서(河圖洛書)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즉, 한국에서 생산되는 옥을 하도낙서(河圖洛書)라 가르쳤다. 주역(周易)철학은 하도(河圖)에서 나오고, 또 천도(天道)라 칭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 중국 하나라 우왕이 남겼다는 정치이념)는 낙서(洛書)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국문화를 말살하는 중국문헌에 이 같이 기록된 것은 주역철학과 천도(天道)의 홍범구주(洪範九疇)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는 셈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가 한국에서 창조된 실증은 중국문헌에도 있다.
예컨대, 은(殷)은 동이족이고 기자(箕子)는 은(殷)의 시조이면서 성탕(成湯)의 16대손으로 동이족에 속한다. 그런데 서전 홍범장(書傳, 洪範章)에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 무왕(周 武王)에게 전도(傳道)했다고 하는데, 그 주(注)에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 武王)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가하나 천도(天道)를 전하는 것은 가하다’고 했다.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동이에 의하여 창조된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물질문명도 한국에서 전래됐다. 인류사상 우리 한민족이 최초에 철활자를 발견한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또한 고대 중국인이 2천년 동안 한국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고 당 고종(唐高宗)이 신라의 궁술을 배우려고 애원한 것 사실 등을 고찰하면 중국의 문화사상뿐만 아니라 물질문명도 한국에서 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중국은 문화사상과 물질문명 전반에 걸쳐서 한국을 배웠다. 북사(北史, 卷九十四 末尾)에 보면 ‘동이(東夷)에서 수입한 것은 궁시(弓矢)뿐만 아니라 기타문화도 수입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주역(周易, 卷之二十四 說卦傳)에 보면 중국문화의 중핵인 황제제도(皇帝制度)가 동방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했다. 한국에 인색한 중국이 자기들 문헌에 이상과 같이 문화사상, 물질문명에 대해 중국은 한국을 배웠다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이를 숨길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祭祀), 전쟁(戰爭)등 나라의 중대한 일을 반드시 점(占)을 쳐서 경정했는데, 이는 하남성(河南省)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주대(周代)에는 서죽(筮竹)이라는 산가지(算木)을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한다.
주역(周易)은 천문, 지리, 천지자연법칙 아는 것
고대인들은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무한한 신비와 경이(驚異)와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모든 사물이나 사단(事端)에 대해 범생명관(凡生命觀)과 범자연관(凡自然觀)을 가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적 지식이 없는 미개한 인지(人智)로써 도저히 판단과 예측을 할 수 없을 때에 자신의 운명을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했다. 이를 통해 일상의 선악거취(善惡去就)를 결정해 안위(安慰)를 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요구들에 의해 점서(占筮)가 생겼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역(周易)은 앞날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알아보려는 욕구에서 만들어진 점술서(占術書)이다. 그러나 주역(周易)이 한낱 점치는 책에 불과 하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미신의 책이라고 소외되고 경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역(周易)은 본디 점서(占書)였던 것이 뒤에 의리(義理)로서 풀이함에 이르러 점서(占書) 외에 철학, 수양서(修養書)의 두 가지 측면을 지니게 됐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학자들이 예지(叡智)를 모아 연구를 거듭해 형이상학적이며 실천도덕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서 우주관과 인생관이 밝혀진 철학으로서 삶의 지침이 돼 온 것이다. 공자(孔子)도 만년(晩年)에 역(易)을 좋아해서 그것을 읽느라고 위편(韋編)이 삼절(三絶)했다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孔子世家)에 전하는 유명한 말이다. 여기서 위(韋)는 부드럽게 손질된 가죽이다. 옛날 종이가 없을 때 대나무를 깎은 죽간(竹簡)인데, 이 죽간(竹簡)을 부드럽게 가죽 꾼으로 엮어 책을 만들었는다. 공자는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책을 애독했다고 한다. 공자(孔子)도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역(易)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했다.
주역(周易)은 수양에 필요한 내용도 담고 있다
역(易)의 기본관념은 음양(陰陽)에 있다. 천지만물은 모두 음양이원(陰陽二元)의 작용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역(易)의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천지간의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이 음양을 통합하는 일원(一元)으로 태극(太極)을 두었으니 여기서 음양의 양의(兩儀)를 낳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춘하추동 사상(四象)이 되고, 다시 팔괘(八卦)가 되며, 그것은 육십사괘(六十四卦)로 부연된다. 주역(周易)은 천문과 지리를 살펴 천지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인간에 옮겨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십사괘(六十四卦) 삼백팔십사 효(三百八十四爻)에는 음양소장(陰陽消長)의 상태와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설명돼 있다.
천지자연과 인생의 도(道)가 포함돼 있으니 천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생활에 실천한다면 인간의 생성변화발전 길흉화복흥망성쇠 등이 천지자연에 합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역(周易)은 삼경(三經, 詩傳·書傳·周易)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오묘한 이치와 인간의 운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 이치를 멀리 보면 천지만물에 이르지만 가깝게 보면 실생활의 사소한 일에도 미치는 것이고 그 논리가 상식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항상 평이(平易)하고 쉬운 것이다. 그런데 주역(周易)이 현대에서 소외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점치는 책이라는 것이다. 기실 점술자체는 운명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진취성이 없으며, 자연적인 순환만을 믿기 때문에 역사의식이 발전 할 수 없다. 구차한 예언에 귀를 기울이 것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만이 그 해결과 창조에 통하는 생활의 윤리(倫理)요 정도(正道)일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주술행위(呪術行爲)는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역(易)의 심오한 원리만큼은 다분히 철학적이요 수양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주역(周易)은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주역(周易)은 주로 고대제왕의 치도(治道)를 다루고 있지만 당시 봉건적 윤리관에 구애될 필요 없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자유롭게 음미(吟味)하면 언제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역(易)의 대원칙은 변한다는 것이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겨울이가면 봄이 온다. 현재는 불행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머지않아 반드시 행복이 올 줄을 믿으며 또한 행운이 있는 여건아래 있을 때는 머지않아 닥칠 불운을 생각하면서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사는 태도에 근본적인 반성과 치세의 진지한 교훈이 되고 있다.
주역(周易)은 운명을 다루고 있지만 근본적인 논리는 운명에 얽매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변화소장(變化消長)하는 음양(陰陽)의 법칙을 자신의 신념으로 하고, 생활에 임하며 부단히 노력하면 능히 발전시킬 수도 호전시킬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을 담고 있는 주역(周易)은 시대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교양서다. 오늘날에는 중국의 주역이 정치가 되고, 일본은 경제가 되고, 한국은 점쟁이가 됐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반성할 점이 너무 많다. 우리는 선조들의 창조한 문물제도이며 자연법칙을 제대로 알고 자부심과 신념을 갖고 나가야 세계문화의 중심국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재기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결단과 실천으로 나아갈 때 가능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상고사’, 최인 ‘한국학강의’, 徐相潤 譯解 ‘周易’, 孔丘·孟軻 著·李家源 譯解 ‘論語 孟子’, 禹玄民 譯解 ‘四書五經’과 ‘論語’,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조선민족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梶村秀樹·渡部學 編者 ‘日本に訴える シリ-ズ’, 日本と朝鮮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西嶋定生·護雅夫·木村尙三郞·猿谷要‘世界歷史の基礎知識1·2’,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외 다수서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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