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민족의식 고취한 고려 팔관회(八關會)
대륙을 지배한 한민족의 역사는 외적의 강압, 내부의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폭력으로 정권을 쟁취한 자들이 자기비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인해 위조되고 빼앗긴 일이 많았다. 우리 한민족은 고유의 사상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불교 정신 또한 일본이 신도적(神道的) 성격을 가진 것과는 달랐다. 우리나라 불교에는 국가의 전통사상을 계승해 국가 위기 때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수호 하는 계명(戒銘)이 있었다. 마치 기독교의 십계명과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팔관재(八關齋)는 (1)생명 있는 자는 죽이지 말 것 (2)도둑질 하지 말 것 (3)음란한 일을 하지 말 것 (4)망언을 하지 말 것 (5)술을 마시지 말 것 (6)높고 넓은 상에 앉지 말 것 (7)창기의 음악을 짓지 말고 듣고 보지 말며 향훈(香薰)한 옷을 입지 말 것 (8)정오 이후에 식사를 하지 말 것 등 8개의 선을 지키는 계명(戒銘)이다. 또한 팔관회(八關會)는 고려사지(高麗史志 第 二十三, 禮 十一, 仲冬八關會議)와 동문선(東文選, 八關會, 仙郞賀表)에 보면 사선(四仙)의 악부(樂部)가 출연하는데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했다. 파간집 하권(破間集 下卷)에는 왕건태조가 신라 화랑계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계승해 팔관회(八關會)를 창설했다고 하고 있다. 오늘은 팔관회(八關會)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천하에 적이 없는 몽골군과 싸우는 시기에 높고 넓은 큰 상에 앉지 말 것과 정오 이후에 밥을 먹지 말라는 등의 불교 팔관재(八關齋)가 요청될 것인가. 아니면 화랑도의 정신을 고취하고 하늘(天)에 제사하며 군신(軍神)에 제사하는 전투적 의식인 팔관회(八關會)가 요청될 것인가”
송사고려전(宋史)高麗傳)에는 고려가 11월에 하늘(天)에 제사하고 굴(穴)에 있는 군신(軍神)에 제사하는 제전(祭典)행사인 팔관회(八關會)를 한다고 했다. 팔관재(八關齋)와 팔관회(八關會)는 그 명칭과 의미가 다르다. 팔관재(八關齋)는 계명(戒銘)이요 팔관회(八關會)는 의식이다. 외적에 저항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민족의식이다. 고려는 몽골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고취 할 수 없는 외래사상의 불교계명보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적 의식인 팔관회(八關會)를 필요로 했다. 이처럼 고려사에는 팔관재(八關齋)라 쓰지 않고 팔관회(八關會)라고 기록한 것은 중요한 민족사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 몽골군에 저항한 것은 민족의식을 고취한 천하에 강대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화랑승(花郞僧)이다. 화랑도의 본질은 인간사상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三, 彌勒仙花)에 보면 ‘신라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신선사상을 발전시켜 화랑단(花郞團)을 창설했다’고 했다. 신선사상의 본질이 짐승을 죽이지 않는 것인데 화랑도가 짐승을 죽이지 않고 인간을 사랑했다.
고려는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으로 승리
▲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제패한 몽골제국도 고려와의 전투는 힘겨워 했다. 몽골의 한 장수는 “소시(少時)로부터 종군해 전투에 임해왔으나 천하에 이와 같은 용전(勇戰)은 처음 보았다”고 경탄했다. 사진은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궁궐을 강화도로 옮겨 새롭게 지은 왕궁 터를 알리면 안내판과 입구 전경. 고려 궁궐은 몽고와 화의 후 전부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조선시대 관아들이 들어섰다. ⓒ스카이데일리
삼국유사(三國遺事 卷四, 二惠同塵條)에 보면 화랑인 구참공(瞿旵公)이 짐승을 남살(濫殺)하니 화랑도(徒) 석혜숙(釋惠宿)이 화랑도(花郞徒)가 아니라고 나무랐다. 화랑도(花郞道)는 짐승을 죽이지 않는 것을 가르친 것이요, 짐승을 사랑하는 화랑도(花郞道)는 인간을 더욱 사랑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진흥왕(眞興王) 23년에 화랑단장(花郞團長) 사다함(斯多含)이 가라국(伽羅國)에서 잡아온 포로 300명을 석방해 양민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수를 양민으로 우대함은 인간을 사랑한 것이다. 이 같이 인간사상이 화랑도의 본질이다. 화랑단의 대표적 존재가 김유신(金庾信)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전(金庾信傳)에도 김유신이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화(和)’, ‘불화(不和)’에 달렸다는 인간사상을 제창했다고 한다. 이 보다 앞서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도 인간사상으로 중국대륙과 일본을 정복했다. 몽골에 저항한 화랑도의 본질이 인간사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가리킨 것이다. 또한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卷 第十六, 金允侯)에 보면 고려가 몽골에 저항 할 때 노예를 석방하고 군공(軍功)이 있는 자는 관노(官奴), 백정(白丁)도 관작(官爵)을 주었다고 한다. 또 고려사 열전(金就礪)에 몽골 장합진(將哈眞)이 김취려(金就礪)에 대해 ‘오중형지고 시휘하사졸 역여(吾重兄之故 視麾下士卒 亦如)’라고 했다. 이는 ‘내가 귀하를 존중하는 것은 귀하가 부하졸병을 한 가족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상으로 몽골에 저항한 것을 실증(實證)하고 있다.
화랑(花郞)의 인간사상은 의용(義勇)을 겸비했다. 이는 의용적(義勇的) 인간사상으로 앞서 기술했다. 이 같이 인간사상은 고려가 몽골에 저항할 때 의용정신이 크게 발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김윤후(金允侯)가 처인성(處仁城)에서 몽골장군 찰자역아대(札刺亦兒臺)를 사살하니 고려정부가 김윤후(金允侯)에게 상장군의 공훈(功勳)을 주었으나 김윤후(金允侯)가 공명을 탐 할 수 없다 하면서 그 공훈을 받지 않았다. 이는 민족대의(民族大義)를 존중하고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은 것이다. 박서(朴犀)가 구주(龜州)에서 불굴의 용전(勇戰)을 계속하니 나이 70세 가까운 몽골장수가 성 밑을 돌아보고 ‘내가 소시(少時)로부터 종군해 전투에 임해왔으나 천하에 이와 같은 용전(勇戰)은 처음 보았다’고 경탄했다. 몽골과의 투쟁에 있어서 김윤후(金允侯)와 박서(朴犀)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이 가장 유명하다. 이를 통해 의용정신(義勇精神)이 실증된다. 처절한 전투에서 몽골에 강력히 저항한 것은 고려 제23대 고종(高宗)시대다.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高宗14年 10月)에 보면 동진(東眞)이 침입하니 전승(戰勝)을 위해 천황당(天皇堂)에 초(醮=제사)했고 했다. 이는 천황(天皇)이 명하는 천병(天兵)임을 자처한 것이다. 또 고려사[高麗史, 高宗36年-43年 (條)]에 보면 고려가 몽골과 싸울 때에 해마다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발전한 천병(天兵)의 의식(儀式)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승리는 한(韓)민족의 사상무장(思想武裝)이 주효
▲ 고려사[高麗史, 高宗36年-43年 (條)]에는 고려가 몽골과 싸울 때에 해마다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발전한 천병(天兵)의 의식(儀式)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우리 선조들의 쌓아 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정신을 이어받아 ‘하늘의 군대’라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몽골과 강경하게 싸웠다. 천병(天兵)은 천의 병(兵)임으로 천하에 적이 없다고 신앙하는 군대였다. 사진은 강화도 고려 왕궁터에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 안내판과 동헌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천병(天兵)은 천의 병(兵)임으로 천하에 적이 없다고 신앙하는 군대다. 이런 신앙에서 용기와 인내력이 소생돼 초인간적 전투를 감행 한 것이다. 인류역사에 이 같은 사상으로 무장 한 강군(强軍)은 찾기 힘들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卷 第十六, 金慶孫)의 기록은 몽골군이 구주전(龜州戰)에서 백가지 방법으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날 때에 몽골 장수는 ‘소(小)가 대(大)를 대적함은 신(神)의 도움이요, 인력(人力)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이지만 천민사상(天民思想)으로 뭉친 고려군을 강군이라고 자랑하는 몽골군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몽골장수가 신의 도움이라고 한 말이 바로 천병(天兵)이라는 신앙에서 초인간적 전투를 전개한 것을 말한 것이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고려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이를 감내하며 천하무적인 몽골군을 몰아낸 것은 한민족(韓民族)의 천병(天兵)이라는 신앙때문이었다. 한민족의 천민사상(天民思想)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 사상을 평시에도 견지했다.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18년 9월 조(條)에 왕이 7일 동안 천병(天兵)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했다.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발전한 천병(天兵)이라는 신앙은 고려말기까지 계승됐다. 이 사상은 단군시대부터 고려 말기 까지 몇 천년동안 이어졌다. 일본에 유민으로 간 유민이 그대로 이 사상을 본받아 일본도 천민(天民)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의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모방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몽골은 대륙을 정복하고 고려와 동맹관계로 발전하자 고려와 연합해 일본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하계계절풍(夏季季節風)인 태풍(颱風)을 만나서 일본정벌은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몽골군 10만이 죽다가 고려의 병선(兵船)에 의해 구출됐다. 이로 인해 몽골의 칸인 홀필열(忽必烈)은 고려왕자 장(璋)을 대하며 ‘중국의 병선(兵船)은 크지만 다치기만 하면 부서진다. 이것이 일본에 실패한 원인이다. 만약 고려로 하여금 병선(兵船)을 만들어서 다시 정벌하면 일본을 취할 수 있을 것’라고 말했다. 고려의 병선(兵船)이 몽골이나 중국의 병선(兵船)보다 우수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가 몽골에 저항 할 때 강화도에 천도(遷都)하고 바다로서 몽골을 막아냈다. 이것은 우수한 고려병선이 바다를 잘 지킴으로서 몽골을 막아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몽골 병이 강화에 침입 못한 것은 고려병선이 몽골병선보다 우수한 까닭이다. 이것은 우수한 병선을 만든 중물사상(重物思想)이 몽골에 저항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고찰해보면 고려가 강력한 몽골군에 저항한 저력(底力)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 등 3대 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이 이 3대사상으로 외적의 침략에 저항하고 1만년역사를 창조한 사실은 몽골과의 투쟁에서 확인된다.
자주 자존의 민족의식 사상 복구 절실
한국사는 민족투쟁의 역사이다. 그런데 민족투쟁에 있어서 요청되는 요소가 3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가 ‘인화단결’, 둘째가 ‘자주자존’, 셋째가 ‘우수한 무기’다. 한국사가 민족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긍정하면 한국의 문화사상이 인화단결을 이룩하는 인간사상, 자주자존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천민(天民)사상, 우수한 무기를 발명하는 중물사상(重物思想) 등 3대사상으로 발전한 것을 긍정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몽골에 저항한 저력이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 등 3대 사상이라는 사실을 고찰하면 한국문화사상이 이 3대 사상으로 발전 한 것을 재확정 할 수 있다. 이 같이 볼 때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이 한민족의 생명이요 불멸의 역사를 창조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포악하고 간사한 일제는 ‘조선 사람들의 역사, 전통, 자신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 악행 을 들추어 내 그것을 과장(誇張)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해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의 청년들은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해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2년 조선총독 사이도 미노루(齋藤 實)가 떠벌린 말이다. 지금도 우리 사학계의 대다수 학노(學奴)들은 일제가 심어놓은 이 같은 식민사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역사 찾는 것은 우리의 사명, 책무, 지상과제
▲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卷 第十六, 金慶孫)에 보면 몽골군이 구주전(龜州戰)에서 백가지 방법으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날 때에 몽골 장수는 “소(小)가 대(大)를 대적함은 신(神)의 도움이요, 인력(人力)이 아니다”고 말했다. 고려가 그만큼 강경하게 싸우고 용맹했다는 것을 보여준 전사(戰史)다. 사진은 강화도 고려 왕궁터에 지은 조선시대의 강화유수부 6방중 하나인 이방청 전각 전경. ⓒ스카이데일리
‘역사란 생생한 기억을 미래로 운반하는 배’라고 영국의 시인 Stephen Spender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배에 가득 찬 우리역사의 보물을 이웃나라들에게 도난당했다. , 우리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강단파 실세의 학노(學奴)들은 올바르고 정확한 우리역사를 외면하고 일제식민사관의 주구(走狗)가 돼 있기까지 하다. 참으로 한심하고 개탄할 일이다. 그들은 우리민족이 인류사상 최초에 문화민족으로 등장하고 최초에 강대 족으로 등장한 찬란한 역사를 배경으로 발전하고 천명(天命)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우월감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노예근성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어 동정을 금할 수 없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푸틴도 ‘외국은 없는 역사도 조작하는데 왜 한국학자는 자신들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왜 외면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한탄해 했다. 그는 ‘어느 민족이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조국을 잃어버린 자는 자기를 잃어버린 자’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한국의 역사를 본연의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바로 세워야 한다. 그것을 통해 자랑스러운 우리선조들의 위대한 역사와 빛나고 찬란한 전통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하고 찬란한 한민족의 생생한 우리 역사를 바로 되찾고 정상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다.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찾고 한민족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민족이 살고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 이것은 우리선조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의 사명이고 책무이며, 우리의 지상과제임을 다시금 새겨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최인, 서희건 선생의 서책 일부를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