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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학] 한민족, 인류 첫 철기·금석문명(金石) 문명 창조

송화강 2019-05-05 (일) 17:10 6년전 8721  

한민족, 인류 첫 철기·금석문명(金石) 문명 창조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9-14 16:02:20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물사상(重物思想)은 한민족이 창안(創案)
 
실학(實學)을 추종하는 박제가(朴齊家)는 청(淸)나라의 중물사상(重物思想)을 배우라고 했었는데, 한민족(韓民族)은 청나라보다 먼저 중물사상(重物思想)을 발견했다. 우리 민족은 군인이 농인(農人)이요 농인(農人)이 군인(軍人)이라는 ‘농병제도(農兵制度)’를 창안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이 같은 우리의 농병제도(農兵制度)를 배워서 ‘맹안모극(猛安謀克)’이라는 병단(兵團)을 설치하고 그 병단(兵團)에 의해 명(明)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건국했다. 실학파(實學派)는 우리의 중물사상(重物思想)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한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박제가(朴齊家)는 중물사상(重物思想)에 관해서 그 시원(始原)을 모르고 있다. 원래 중물사상(重物思想)은 동양의 역사상 남방의 농업을 하는 민족은 물자가 풍부한 옥토(沃土)에서 생활함으로 북방민족보다 비교적 물자를 경시하고 정신문화를 중시한데서 나왔다. 종교철학이 남방에서 창조된 원인도 주로 이러한 경향에서다. 이에 반해 북방 유목민(遊牧民)은 물자가 부족한 산야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정신문화보다 물질을 더 존중했다. 그리고 철(鐵)의 문명을 먼저 발견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민족은 북방민족 중 최초에 역사적 민족으로 등장했고, 북방유목민 중 가장 먼저 한민족(韓民族)이 물질을 중시하는 중물정책(重物政策)을 취했다. 특히 물질문명에 대해 경이적인 발견을 했다.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360여 일(事)중 맨 처음 곡(穀)을 들었다. 이는 바로 정신문화보다 물질을 중시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魏志, 卷三十 東夷)에 부여는 말(馬), 소(牛), 구(狗), 개(犬)등 육축(六畜)의 명을 관직에 가하고 흉년이 들면 왕을 인책사직하게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는 축산을 존중하고 농산을 극히 중시한 것이다. 실로 다른 민족에게서 볼 수 없는 중물정책(重物政策)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예맥은 종마법(種麻法), 양잠법(養蠶法)을 발견하고 고대농작의 흉풍(凶豊)을 미리 아는 천문학(天文學)을 발견했다는 기록 또한 있다. 고대 천문학을 발견한 것은 농경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는 축산에 힘쓰고 특히 닭을 많이 양육해 중국에 수출하고 국가재정을 조달했다. 당나라 혜림(慧琳)이 저술한 혜림음의(慧琳音義)에 ‘고구려를 계귀(鷄貴)라 칭한다. 즉, 고구려는 닭의 신(神)을 공사(共事)하고 머리에 닭의 나래 깃을 꽂음으로 계귀(鷄貴)라 칭한다’고 했다. 또한 대당서역(大唐西域)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신라를 계귀(鷄貴)의 국(國)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신라는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때에 닭이 삼림(森林)속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고 칭했다.
 
선진 한민족의 문물, 철·명궁(名弓)·고시(楛矢)·석족(石鏃) 등 수출
 
닭을 국명(國名)에 붙인 것은 닭을 크게 양육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금도서집성 금충전 삼십사권, 계부(古今圖書集成, 禽蟲典三十四卷, 鷄部)에 ‘닭은 조선 평택(平澤)에서 생산 된다. 중국의 유명한 철인 도홍경(陶弘景)이 조선에 닭이 매우 많다. 하고 마지(馬志)는 약에 조선 닭을 넣으면 좋다고 말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중국이 조선 닭을 수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옛날 우리 선민(先民)들이 닭을 양육한 실증은 오늘도 산악에서 고찰 할 수 있다. ‘계룡산(鷄龍山)에서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한국을 구출한다’는 이야기도 닭을 존중한데서 나온 신화(神話)다. 우리 선민(先民)들은 이처럼 축산에 힘써 소, 말, 닭, 개, 돼지를 많이 양육했었다. 그 중에도 특히 닭을 중시한 것은 근면정신을 고취한 것이다. 즉,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취업하는 조기정신(早起精神)을 고취한 것이다. 이는 모두 한민족(韓民族)이 타민족보다 농축산제도와 문화를 중시한 것을 실증한다고 하겠다. 부여시대에 농병제도(農兵制度)를 창안해 고려시대까지 계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농병제도는 군인이 농사철에는 농민이 되어 군인으로서 스스로 군비를 조달하는 것이다. 농병제도에 의해 군인의 생활을 보장함으로 그 군인이 국가를 위하여 충의를 다했다. 이 제도는 물질적 보장이 있어야 국민이 국가에 충의를 다한다는 중물사상(重物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동양사상 최초에 발견한 농병제도인 것이다.
 
또한 사기열전(史記貨殖列傳 第六十九 烏氏(人+果)에 보면 예맥이 연(燕)에 물자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국내경제시대에 부여와 예맥이 국제무역을 행한 것은 타민족보다 경제개발을 중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서 동이전(唐書 東夷傳)에도 신라는 ‘여자가 시장을 독점하고 무역을 행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자가 시장에서 상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행하는 것은 고금을 물론하고 타민족에 볼 수 없는 중물사상(重物思想)이다. 이처럼 한민족은 타민족보다 상업경제(商業經濟)를 중시했다. 사기에 4300년전 구석기시대에 숙신씨(肅愼氏)가 돌과 철을 파괴하는 고시(楛矢=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와 석족(石鏃=청동기시대 화살촉)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기(史記)에 철은 요서(遼西)에 있는데 이자(金+夷)字는 고이자(古夷字)라고 했다. 이자(金+夷子)는 夷字와 金字를 합해 만든 것으로 동이(東夷)가 최초에 발견한 것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魏志 卷 三十, 東夷)에 보면 변진(弁辰)은 철(鐵)을 발견해 일본에 수출하고 철을 화폐와 같이 사용한다고 했다. 설문(說文)에 ‘한민족(韓民族)을 이(夷)라 칭하는데, 이자(夷字)는 대궁이자(大弓二字)를 합해 만든 것으로서 대국(大弓)을 발견한 것을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신라는 당나라가 부러워하는 천보궁(千步弓)을 발명했다. 천보궁(千步弓)은 천보 밖을 돌파하는 명궁(名弓)이요 타민족이 발명치 못한 것이다.
 
한민족, 금석문명(金石文明)·축성술(築城術)·사상과 제도 창출
 
한민족(韓民族)은 또 타민족이 발견치 못한 축성술(築城術)을 발견해 불가침의 성을 구축했다. 서기 1011년에 고려의 강조(康兆)가 철로서 검차(劍車)를 만들어 거란군을 괴롭힌 일이 있고, 일본의 내장석여(內藏石女)가 친히 본 사실을 기록한 소우기(小右記 寬仁3年 8월10일 조(條)에 고려의 전선은 선면(船面)에 철로서 각(角)을 만들어 도이(刀伊=(女眞)의 전선을 충돌해 격파했다 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13년2월 갑인조(甲寅條)에는 임진도(臨津渡)에서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웠다고 했다. 같은 책(동서,同書) 태종15년7월 신해조(辛亥條)에 ‘거북선의 법은 중적(衆敵)을 충돌하는데 적이 이를 해치지 못하니 실로 결승(決勝)의 양책(良策)이다. 다시 견교(堅巧)하게 조작해 전승(全勝)의 구(構)를 갖추라’고 한 기록이 있다. 그러면 거북선은 조선조 초기에 이미 제작한 것이요 고려시대에 적을 충돌하여 격파한 철각선(鐵角船)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무 공(이순신) 전서(全書)에 ‘거북선은 도추(刀錐)를 꽂고 적중에 횡행한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인 가와구치(川口長儒)의 정한위략(征韓偉略)에 ‘적선이 철로서 장식해 일본의 총탄이 그것을 상치 못한다’하고 ‘지마군기(志摩軍記)에 맹선삼척(盲船三隻)이 철로서 투갑을 했다’고 했다.
 
또한 1883년 영국해군기(英國海軍記)는 고려의 철선은 철판으로서 선(船)을 포(包)하고 구갑(龜甲)과 같아서 일본의 목선(木船)을 격파했으니 이것이 세계최고(世界最古)의 갑철함(甲鐵艦)이요, 조선인이 실로 갑철선(甲鐵船)의 창조자라고 했다. 이 내용은 시카고 일요신문에 게재됐다. 이 같이 한민족(韓民族)은 세계사상 최초의 갑철함(甲鐵艦)을 만들고 최초의 철활자(鐵活字)를 발명했다. 이는 오늘 세계의 사가(史家)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한민족(韓民族)은 인류사상 최초로 ‘철의 문명’을 발명했고, 또한 고려자기와 불화(佛畵) 등이 유명하다. 철의 문명과 함께 ‘석(石)의 문명’, 종교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이는 타민족에 없는 ‘금석문명(金石文明)’을 발견하고 인류사상 한민족(韓民族) 최초로 금석문명(金石文明)을 창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이 인류사상 가장 물질적 발명에 치력(致力)하는 중물사상(重物思想)을 발견한 것을 실증한다고 하겠다. 요컨대 한민족(韓民族)은 정신문화에 있어서 최초에 인간사상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제창한 창조자다. 물질문명에 있어서는 농축문화(農畜文化), 농병제도(農兵制度), 상업경제(商業經濟)를 가장 존중하고, 특히 철의 문명에 있어서 인류사상 최초에 경이적인 발명을 이룩한 개척자다. 이러한 빛나는 문물제도와 문명을 개발한 한민족(韓民族)의 빛나는 실학(實學)을 발견하지 못하고 도리어 ‘청나라를 배우라’고 주장한 실학파(實學派)는 우리와 비교 할 수 없는 저속한 수준에 불과 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한민족 역사의 토대 바로잡아야 한다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민족의 영혼을 팔아먹는 사대주의 사이비 학노(學奴)들에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도록 깨우쳐서 우리의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를 더욱 빛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조선(祖先)에 대한 은혜에 보답이며 사명이며 주어진 지상과제임을 자각하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라고 사료 된다. 또한 지금의 한국사 교재도 잘못됐기에 고대 한민족의 도둑맞은 대륙역사(大陸歷史)부터 되찾고, 잘못된 교재부터 바로 잡고 가야 할 때다. 당국은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지체하지 말고 바로 애국적인 결단을 촉구해 마지않는다. 어느 민족도 역사의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를 바라보기는 어렵다. 더 이상 이를 미를 수 없다. 고대 3조선(환국(桓國), 배달(倍達=神市時代),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실제 내력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선진문화 민족으로서 중국, 일본에 공헌한 바가 너무 컸기에 문화교류의 관계를 바로 밝히는 것은 우리 한민족 역사의 토대를 바로 잡는데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이를 밝히는데 지체하지 않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한민족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위 글은 최태영-[한국상고사] [단군을 찾아서], 최인-[한국학강의], 서희건 편저-[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미와 요시히로(三輪義凞)-[천황가 칠천년의 역사(天皇家七千年の歷史-[神皇紀], 장효-[한국의 민족과 그 걸어온 길[韓國の民族とその 步み], 아키야마 겐소(추산겸장)[日本の歷史] 박종원-[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등 많은 연구가의 저서를 참고 인용하였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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