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수레바퀴는 누가 돌렸나.해방된지 7, 8년이 지난 50년대 중반, 6·25가 끝난 직후인 그 시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어른들을
흉내내어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 노래의 사투리 노래말을 그대로 옮겨 놓겠다.
‘간밤에 구루마 발통(수레 바퀴) 누가 돌맀노(돌렸나)?
집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돌맀다(돌렸다).’
일본 군가 ‘노영(露營)의 노래’에서 따온 가락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 노래말 ‘갓테쿠루조토이사마시쿠…’로 시작되는 군가였다.
그 시절에는 일본 문화의 잔재가 흔했다. 어른들은 우리말에다 일본어를 자주 섞어 썼고 아이들도 일본어 몇 마디는
너끈하게 알아듣던 시절이었다.
이 해괴한 노래는 그런 시절 누군가가 일본 군가에다 우리말 노래말을 실어놓은 것인 듯하다.
문제는 노래말이다.
간밤에 수레바퀴 누가 돌렸나, 집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돌렸다… 이 노래말은 별로 의미심장한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민요의 노래말이 대개 그렇듯이 이 노래의 노래말 역시 매우 평범한 사실만을 평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민요의 경우, 노래말의 평면적인 서술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느닷없이 ‘수레바퀴’가 등장하는 이 노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른들을 흉내내어 이 노래를 민요 부르는 심정으로 줄기차게 불렀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가까이 흘렀지만 8·15와 6·25가 되면 내 뇌리에는 자동적으로 이 노래가 떠오른다.
신화와 민요의 의미를 새겨 보려고 애쓰면서 이제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이 노래를 줄기차게 부른 것은, 그리고 우리가 흉내낸 것은, 어쩌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이 어렴풋이나마
이 노래말에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과 들을 바라보면서, 암흑 시대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잘못 돌린 책임의 소재를
따지기 시작하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다 일제로부터 그런 모욕을 당했는가? 어쩌다 이런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는가?
나는 그 노래의 노래말을 이렇게 새긴다.
‘저 암흑 시대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잘못 돌린 자는 과연 누구인가?
암흑의 시대가 끝나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바로 나로구나.’
신화와 민요의 깊은 뜻을 음미할 때마다 나는 이 노래말을 떠올린다.
시인 김영석 교수(배재대)와 함께 선도산(仙桃山·380m)을 올랐다.
김교수는 1994년에 보급판‘삼국유사’를 번역하되 쉽게 풀어낸 국문학자이기도 하다.
선도산은 높은 산도, 아름다운 산도 아니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10분이면 정상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5분 걸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현지인들의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높지는 않아도 380m는 ‘10, 20분’만에 오를 수 있는 높이는
아니다. 30,40분의 가파른 산행으로도 모자랐다.
선도산을 오르려면 선도리(仙桃里) 마을길을 지나야 한다. 정상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성모사(聖母祀)가 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와 시조왕비 알영을 낳았다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안에는 황원단(皇原壇)이 있다. 임금의 근원을 모신 제단이다.
제단 옆에는 선도산의 산신들을 모신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절 뒤에는 칠성각과 함께 산신각(山神閣)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경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산신각이
아닌 산령각이다.
정상 너머 서쪽 중턱에는 선원사(仙源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선도(仙道)의 근원이라는 뜻일 터이다.
이 절에는 기둥에 새긴 주련(柱聯) 대신 벽에 건 액자가 있다.
‘한번 참으면 오래 즐겁다(一忍長樂)’, ‘자신을 닦으면 남을 꾸짖지 않게 된다(修己不責人)’ 같은,
그다지 불교스럽지 않은 경구가 쓰인 액자들이다.
선도산, 성모사, 황원단, 산령각, 선원사… 우리가 선도성모 신화를 알지 못하고 듣는다면, 불교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도교적(道敎的)인 이런 이름은 한갓 명사에 지나지 못한다.
선도성모를 알지 못하고 만나면, 이런 이름을 지닌 절이나 사당은 아무 의미도 없는 초라한 구조물에 지나지 못한다.
선도성모(仙桃聖母)는 그 이름이 스스로 드러내고 있듯이 도교적(道敎的)이다.
‘선도’는 기독교의 천당, 불교의 극락에 해당하는 도교의 선경(仙境)에만 열리는 복숭아다.
시조왕과 시조왕비를 낳았다는, 이름이 다분히 도교적인 선도성모 신화가 불교 설화에 실려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평왕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무척 어진 행실을 많이 했다. 지혜는 안흥사에 살면서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고 했으나 재력이 모자랐다. 그런데 지혜의 꿈에, 머리를 예쁜 구슬로 꾸민 선녀가 나타나
지혜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도산의 신모(神母)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한다 하니 기특하다.
내가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 싶다.
그러니 내 자리 밑에서 금을 파내어 으뜸 가는 부처님 세 분을 꾸미고 벽에는 53불(佛)과 6류성중(六類聖衆)과
여러 천신들과 오악(五岳)의 신들을 그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곧 3월 및 9월 10일에는 선남선녀들을 모아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풀고 이를 규례로 삼으라. 지혜가 꿈을 깨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신사(神祠) 자리 밑에서 금 150냥을 파내어
불전을 수리하되 신모가 시키는대로 했다.’
고등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 땅에 종교가 있었다. 신라 학자 최치원에 따르면 그것은 ‘예부터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바로 풍류도(風流道)다’.
풍류도는 샤머니즘과 도교적 신선 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라인들의 세계관이었다고 한다.
풍류도를 좇는 화랑 및 그 우두머리 국선(國仙)은 인위를 좇지 않았다. 그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과 생명이 없는
것들을 나누지 않고 하나되어 살고자 했다.
그러나 풍류도는 뒤늦게(5세기) 들어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조직적인 고등 종교 불교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교에 매우 가까운 풍류도의 신모(神母) 선도성모가 비구니를 도와 불전을 수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불교가
도교 또는 풍류도를 습합(習合), 곧 절충하는 과정을 담은 ‘수레바퀴’ 이야기인 것이다.
‘수레바퀴’ 노래말에 ‘일제’나 ‘전쟁’ 같은 낱말은 등장하지 않듯이 선도성모 이야기에도 산신과 부처의 대결을 암시
하는 낱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선도산에 오르려면 무열왕릉, 김인문릉, 그리고 무수한 서악리 고분군(西岳里古墳群)을 지나야 한다.
기슭에는 진흥왕(24대), 진지왕(25대), 문성왕(46대), 헌안왕(47대) 등의 왕릉이 있다.
선도산의 다른 이름인 서악(西岳)은 해지는 곳에 있는 산이다.
선도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의 주존(主尊)인 아미타불은 극락정토를 주장하는 부처다.
“이상하네요? 시조왕 부부를 낳았다는 선도성모의 자궁 같은 성산(聖山) 기슭이 왕들의 공동묘지가 되어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나의 질문에 동행했던 김영석 시인이 나에게 되물었다.
“자궁이 영어로 뭔가? ‘움(womb)’이 아닌가? 무덤은 또 뭔가? ‘툼(tomb)’ 아닌가?
옛사람들은 이걸 둘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
1.경주 서악리 고분군에서 바라본 선도산. 무열왕릉, 김인문릉은 바로 이 고분군과 한 울타리 안에 있다.
2.신라의 시조왕 부부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모신 선도산의 성모사.
3.선도산 기슭의 무수한 왕릉 뒤에 남아 있는, 이제는 버려진 무덤들.
왕릉에 견주어 봉분이 낮은 무덤들 위로 무심하게도 소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 있다.”
13. 도래인들 산 넘고 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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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바다와 같다. 바다에서 건져올려 제몫으로 챙기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듯이, 신화에서 건져올려 제몫
으로 챙기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신화를 읽는 법, 신화를 해석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신화 독자들 중에는 신화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이도 있고, 모듬살이의 집단 무의식을 읽는 이도 있다.
신화에서 고대 종교의 모습을 건져올리는 이도 있고, 예술의 바탕되는 질료를 건져올리는 이도 있다.
서로 다른 경우에도 신화 독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을 필요가 있다. 상호 배타적인 무수한 의견들을 한가닥 신기
하고 이상한 이야기 속으로 녹여들인 것…, 대극하는 무수한 의견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초라한 언어를 통한
온갖 시비(是非)를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품어들인 것…, 나는 신화를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한 신화 독법 중에는 자주 상충하는 두 가지 독법이 있다.
모듬살이를 가로지르는 집단 무의식의 흔적으로 읽는 독법과 역사의 흔적으로 읽는 독법이 그것이다.
나는 앞의 독법을 좋아한다. 하지만 뒤의 독법을 버릴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는 거신족(巨神族) 티탄, 괴거인족(怪巨人族) 기간테스, 괴물 튀폰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던 것으로 신화는 기록하고 있다.
제우스가 최고신의 자리를 꿰어차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은, 밖에서 그리스로 흘러든 제우스 신앙이 기왕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고대 종교와 벌인 험난한 갈등의 흔적이라는 해석이 있다.
하나같이 신기하고 이상한 괴물과의 싸움 및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수성(獸性)에 대한 인성(人性)의 갈등
및 그 승리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취하는 경우에도 역사적 사실인 종교 갈등의 흔적이라는 해석을 버릴 필요는 없다.
제우스의 호색 취미만 해도 그렇다. 제우스의 복잡한 여성 관계는 전문가도 어지러워할 정도로 복잡하다.
제우스가 취한 것으로 전해지는 여성 중에는 고모(姑母)도 있고 누이도 있다.
인간 세상의 여성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제우스의 바람기는 제우스의 뜻이 아니었기가 쉽다.
제우스는 이로써 고대 그리스에서 살던 수십개 종족의 조상이 되었으니, 제우스의 여성 관계가 점잖지 못했던
책임은 제우스보다는 여러 종족이 보유하고 있던 역사가들이 져야 한다.
제우스의 바람기는 역사가들이 저희 논에다 제우스라는 물을 끌어들인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 신화 왜곡의 산물에
가까웠다.
환웅 천왕이 박달나무를 통해 이 땅에 내렸다는 신화, 그 아드님인 단군왕검이 천 수백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리다
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신화를 우리의 무속과 관련시켜 무조신화(巫祖神話)로 해석하는 것은 얼마
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을 이민족이 우리 강역(疆域)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그린 신화라고 해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후자에 속하는 해석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조선(朝鮮)의 ‘선’은 순록의 먹이감인 흰 이끼 ‘선(蘚)’이 자라는 ‘야트막한 산’을 뜻하는 ‘선(鮮)’을 뜻하는 만큼,
조선 겨레는 본래 이끼가 자라는 동산을 찾아 떠돌던 순록 유목민을 일컫는 말이고,
이들이 수렵민화하면서 남하해 고조선, 부여와 초기 삼국을 형성한 세력이 되었다는 주장도 여기에 속한다.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6부 촌장들도 원래 우리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든 조선 유민의 우두머리들이다.
이들은 마한(馬韓) 땅 왕의 허락을 얻어 지금의 경주지역에 거주하면서 원시적인 국가 ‘사로국’의 지배권을 행사
하던 무리이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는 이들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기술과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기술은 서로 엇갈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원래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6부 촌장들 중에서 하늘에서 표암봉(瓢品山峰)으로 하강했다는 알평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
롭다. ‘표암’이라면 ‘박바위’다.
알평은 박에서 나온 동자(童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허리에 박을 차고 온 도래인(渡來人)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에서 나온 동자’라는 기술과 ‘박을 차고 온 도래인’이라는 기술은 서로 엇갈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알평 이야기는, 박에서 태어나 마침내 ‘박’이라는 성(姓)을 얻게 되는 박혁거세 신화의
예고편이나 다름 없다.
알평이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의 이름 자에 들어 있는 ‘알’, 그가 살던 마을 이름에 들어 있는 ‘알’은 뒷날 박혁거세의 부인이 되는 ‘알영(閼英)’
신화의 예고편이나 다름 없다.
박혁거세와 알영 부부를 낳은 선도성모 또한 원래 우리 땅에 살던 사람이 아니다. 일연스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국사’를 맡은 관원이 이렇게 말하기를, “나 식(軾·곧‘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정화 연간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官)을 찾아갔더니 집이 한 채 있고 그 집 안에 여자 신선의 상을 모시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학사(學士) 왕보가 내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옛날 중국 황실의 따님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게 했고, 뒷날에는 그 땅
신선이 되어 선도산에 머물고 계시니, 저 신선상이 바로 그분의 상입니다.”
뿐만 아니다. 송나라 사신 왕양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께 제사 모시면서 올린 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진 인물을 낳아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시다.”
한밝산 박달나무로 내린 환웅천왕, 표암봉으로 내린 알평, 중국에서 선도산으로 온 선도성모….
이들만이 도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박혁거세가 알같은 박에서 나왔듯이, 가락국 시조 수로왕 또한 알에서 나왔다.
그러나 수로왕을 품은 알은 여느 알이 아니라 금궤에 든 알이었다.
이것은, 알평이 ‘박’에서 나왔거나 ‘박’을 차고 온 도래인이었듯이,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 또한 도래인이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김알지(金閼智) 또한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은 시림(始林)에 놓인 금궤 안에 들어 있었다.
탈해 역시 궤짝에서 나왔다.
탈해는,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다’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도래인임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이 무수한 ‘알’의 상징성은 생명 원리의 출발점으로서의 우주적인 알, 즉 ‘우주란(宇宙卵·cosmic
egg)’의 상징성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렇듯이 많은 도래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별 저항도 받지 않은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도래인들임에 분명해 보이는 데도 그들은 저항을 받기는커녕 왕으로 떠받들어지는 상황도 역사로부터 증거를
빌리지 않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무릇 덕이 있는 자는 (딱딱한) 이(齒)가 많은 법’이라는 탈해의 주장,
아무래도 대장장이 출신이었던 듯한 탈해의 정체가 그 실마리라고 할 수 없을까?
이 수수께끼 같은 신화들은 아무래도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의 점이지대 소식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탈해에 이르면 좀더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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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샤먼과 대장장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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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신라 제2대 남해왕 편, 제3대 노례왕 편, 제4대 탈해왕 편, 그리고 신라에 김씨성(金氏姓)을 처음 있게
한 김알지 편, 이런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네 분 이야기에는 샤만 및 대장장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삽화가 들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먼저 남해왕 편의 전반부를 읽어 본다.
“남해 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니,
오직 이 임금만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 어머니는 알영부인,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삼국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신라에서는 임금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辰)나라 말로 임금,
혹은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고 한다.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은 이렇게 쓰고 있다.‘차차웅은 우리말로 무당이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통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므로 이를 높여 부르다가 마침내 높은 어른을 자충 혹은
이사금이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잇금(齒理)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하니, 마립이라는 것은 방언으로 말뚝이라는 뜻이다.
말뚝은 지위에 맞추어 세우므로 임금의 말뚝이 으뜸자리에 서고 신하의 말뚝은 아래로 벌여 서게 되므로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다.”
혁거세가 처음으로 얻은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서간으로 불리기도 했다. 알에서 나온 그는 맨 처음 입을 열면서 ‘알지거서간’이라고 외치고는
단번에 일어섰다.
알지는 어린아이라는 뜻이니, 결국 ‘나는 아기 임금이다’ 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이 말은 곧 임금의 존칭이 된다.
언필칭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김대문의 기록에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임금과 동의어인 거서간, 차차웅, 자충이라는 말이 원래 무당(샤먼)
이라는 뜻이란 대목이다.
‘샤먼을 통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므로 높은 어른을 샤먼과 동의어인 자충 혹은 이사금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잇금, 즉 임금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초기 신라가, 임금이 스스로 샤먼이 되어 제사와 정치를 동시에 주관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
였음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마립간의 마립은 말뚝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하니 품계석(品階石)과 비슷한 것이었을 터이다.
철기시대가 열린다는 소식
남해왕, 노례왕, 탈해왕, 김알지는 거의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다.
앞의 세 분은 나란히 임금(샤먼) 노릇을 했고, 김알지는 뒷날 임금(샤먼)의 조상이 되었다.
이제 이 네 갈래의 이야기를 탈해를 중심으로 펼쳐 보기로 한다.
탈해 이야기는 세계 여러나라 신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문화 영웅, 곧 ‘샤먼과 대장장이’ 이야기다.
“(서기전 19년) 남해왕 때, 가락국 바다로 웬 배가 들어와서 정박했다.
그 나라 수로왕이 신하들 및 백성들과 함께 북을 울리면서 맞이해 머물게 하려 했다.
그러나 배는 미끄러지듯이 달아나 계림 동쪽의 하서지촌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그때 바닷가에 한 노파가 있었
는데 이름이 아진의선(阿珍義先)이었다.
노파는 혁거세 왕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노파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에는 바윗돌이 없었는데 저 바윗돌 같은 것은 무엇이며, 까치들이 몰려들어 우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노파는 바윗돌 같은 그 배를 숲으로 끌어다 놓았지만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늘을 향하여
축수한 뒤에야 그 배에 들어 있는 궤짝을 열어 보았다. 궤짝에는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 하나와 ‘일곱가지’
보배와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노파가 ‘이레’ 동안 바라지를 하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28용왕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의 태(胎)를 열고 태어나 다섯 살, 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백성을 가르침으로써 성명(性命)을 올바
르게 합니다. 백성들에게는 여덟 가지의 혈통이 있지만 모두 차별 받지 않고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함달파(含達婆) 왕은 적녀국(積女國) 공주님께 장가 드셨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자식 보기를 기도하셨더니 어머니께서 ‘7년’만에 커다란 알을 하나 낳으셨습니다.
아버지 함달파 왕께서는 신하들을 모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이 고금에 없으니 좋은 일은 아닌가 보다. 그러고 나서 곧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어 배에 실으시고,
이어서 갖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실으시고는 바다에 띄우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연 닿는 땅에 네 마음대로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 마침 붉은 용이 배를 호위해주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사내아이는 지팡이를 끌면서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고 ‘이레’ 동안 머물
렀다. 그런 다음에는 성 안에 살 만한 땅이 있는지 찾아 보았다.
마침 초승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보였다. 사내아이가 보기에 오래 살 만한 자리였다.
누구 땅인지 알아보니 호공(瓠公) 댁이었다. 그는 곧 꾀를 써서 남몰래 그 집 옆에다 숫돌과 숯을 묻고 이튿날 아침
그 집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서로 시비를 따졌으나 마침내 가리지 못해 관가에까지 가게 되었다. 관리가 사내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증거가 있어서 이곳을 너희 조상이 살던 집이라고 하느냐?’그러자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우리 조상은 본디 대장장이였는데, 다른 곳에 나가 사는 동안에 다른 이가 집을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집터를 파보니 숫돌과 숯이 나왔다. 아이는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이 사내아이, 곧 탈해는 용성국에서 태어났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도래인(渡來人)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일곱(7) 가지 보물을 가지고 와서, 아진의선으로부터 이레(7일) 동안 바라지를 받은 사내아이가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인가? 지팡이를 끌면서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고 이레(7일) 동안 머무는 일이다.
단군 신화에서 곰은 삼칠일, 즉 21일을 삼간 뒤에 사람의 몸을 얻고 사람의 역사에 합류한다.
‘7’은 금제(禁制)와 해제(解制)의 접경에 자리하는 신성한 숫자다. 도래인 탈해도 토함산 돌무덤에서 이레 동안
머물면서 이 금제를 풀어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돌무덤인가? 죽음을 미리 죽어두는 것, 자신의 형해(形骸)를 먼저 보아두는 것은 샤먼의
전형적인 입무의례(入巫儀禮)다.
그가 죽고난 뒤 신조(神詔), 즉 현몽을 통하여 자신의 뼈를 중장(重葬)할 것을 명하는 것도 그가 샤먼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그는 제 입으로 자신이 대장장이의 자손이라고 밝힌다.
그는 무엇인가? 이 땅에 철기문화를 일으킨 대장장이 샤먼, 즉 야장무(冶匠巫)다.
남해왕, 노례왕, 탈해왕, 김알지 신화에서 철기시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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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샤먼과 대장장이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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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신라편’에 따르면 탈해는 자칭 용성국(龍城國)의 국왕 함달파(含達婆)와 적녀국(積女國) 공주 사이
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궤짝에 들어 있다가, 혁거세왕에게 물고기를 잡아 바치던 아진의선에게 발견될 당시 그는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탈해는 소위 용성국에서 바로 신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는 가락국에 들러 이 나라 시조 수로왕과의 한 차례 겨루기에서 패배, 신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책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때 완하국(玩夏國)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가졌는데 낳고 보니 알이었다.
알을 벗고 나왔다고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문득 가락국에 왔다.
그의 키는 3척,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대뜸 대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함일 터이니 하늘의
뜻을 어기고 그대에게 왕위를 줄 수는 없다. 내 나라와 백성을 그대에게 함부로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탈해는 술법으로 승패를 결정하자고 했고 수로왕도 그러자고 했다.
탈해가 한 마리 매로 둔갑했다. 수로왕은 독수리로 둔갑했다. 탈해는 참새로 둔갑했다. 수로왕은 금방 새매가
되어 날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탈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니 수로왕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항복하면서 말했다.
“제가 매와 참새로 둔갑했을 때, 전하께서는 독수리와 새매로 둔갑하셨습니다.
그때 저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죽임’을 증오하는 성인의 어진 덕을 갖추
었기 때문일 터입니다. 전하와 임금 자리를 놓고 겨루는 것은 안 될 일일 듯합니다.”
탈해는 작별을 고하고 중국 배가 가는 물길을 따라가려고 했다. 수로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난리를 꾸밀 것이
염려스러워 배 5백척을 내어 뒤를 쫓게 했다.
하지만 탈해가 계림 땅으로 달아났으므로 배는 되돌아왔다. 그런데 역사적 기록들이 신라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가락국에 당도했을 당시 탈해의 ‘키가 3척,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이 ‘척’이 요즘의 ‘척’과는 다를 터여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문맥으로 보아 탈해의 체구가 엄장했음을 강조한
것 같다. 탈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해골 둘레가 3척2촌, 몸뚱이 뼈 길이가 9척7촌’이었다는 기록도 ‘신라편’에
보인다. 엄장한 체구를 강조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을 굳이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로왕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탈해는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도 익힌 것으로 되어 있다.
둔갑술 겨루기는 세계 어느 나라 신화에든 약방 감초 같이 등장하는 모티프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는 둔갑의 명수다.
바다의 신 중의 하나인 프로테우스는 둔갑의 도사다.
그에게는 ‘많은 모습을 가진 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다. 손오공 역시 둔갑의 명수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기문둔갑술을 현란하게 구사해도 부처님 손바닥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잇금’으로 겨루자
탈해가 꾀를 써서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은 직후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알고 맏공주를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바로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이로써 탈해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보(大輔) 호공의 집을 빼앗아 살면서 왕의 사위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의 대보는 호공이 아니라 탈해였다.
탈해는 호공의 집뿐만 아니라 대보라는 자리까지 빼앗은 셈이다.
남해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위는 당연히 장남 유리(뒷날의 노례왕)가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대보의 덕망을 들어 왕위를 탈해에게 넘기려고 했다. 탈해가 짐짓 사양하면서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이가 많은 법이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볼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탈해와 유리는 떡을 물어 시험해 보았다. 유리의 이가 더 많았다. 그래서 유리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많아 왕위에 올랐다고 해서 그 자리를 ‘잇금’이라고 했다. ‘잇금’이라는 칭호는 바로 이 임금, 노례왕에서 시작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神異), 즉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의 기록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호공이 대보 자리에 오른 것이 서기 58년이다.
유럽에서는 사도 바울이 한창 기독교를 선교하고 다니던 시절이다.
유수(劉秀)가 중국을 평정, 통일을 이루고 광무제(光武帝)가 되고나서도 2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시점이다.
우리나라 삼국의 체제가 잡히는 속도가 더디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터에다 몰래 숫돌과 숯덩이를 묻어놓고 자기 조상의 집이라고 주장하는 탈해에게 한
나라의 대보라는 호공이 집을 내어주고, 떡을 물어 이의 숫자로 임금 자리에 오를 사람을 결정할 정도로 우리가
순진했을까, 어수룩했을까? 그렇게 미개했을까? 호공이 누군데?
호공(박 어른)은 하늘에서 표암봉(박바위)으로 내렸다는 알평 어른이다.
그는 이미 서기전 20년에 사신으로 마한(馬韓)에 파견되었을 정도의 수완가였다. 마한 왕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
다고 나무라자, 혁거세왕을 중심으로 축적된 힘을 은근히 과시함으로써 마한 왕을 압박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초기 신라의 그런 원로가 떠돌이 탈해의 잔머리 굴리기에 넘어가 저택을 넘겨주었을까?
탈해 이야기에는 그가 대장장이였다는 암시가 여러 차례 보인다.
금 궤짝에 든 채로 배에 실려 있었다는 대목만 해도 그렇다.
이때의 ‘금’은 황금이 아니라 ‘쇠’였기가 쉽다. 호공의 집터에다 숫돌과 숯을 묻었다는 것도 그렇다.
숫돌은 쇠를 갈아내는 데, 숯은 쇠를 녹이는 데 쓰이는 대장장이의 필수품이다.
뿐만 아니다. ‘우리 조상은 본디 대장장이였다’는 본인의 진술에 이르면 그가 대장장이들, 혹은 철기 문화를 아는
세력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이 분명해진다.
호공을 중심으로 하던 세력은 야장무(冶匠巫), 즉 샤먼이자 대장장이 탈해를 중심으로 하던, 철기 문명을 아는
세력에게 밀렸다는 이야기는 혹 아닐까.
매부(妹夫)인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하던 노례왕의 시대는 ‘쟁기의 보습’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대다.
노례왕이 왕자 시절에 한 차례 탈해에게 임금 자리를 사양하려고 했던 것은 탈해가 지닌 철기 기술의 역량 때문이
아니었을까.
쇠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은 치아다. 치아의 경도(硬度)는 견갑골 경도의 수십배에 이른다. 김알지의 탄생과
탈해의 사후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잇금’이야기는 그저 ‘이’가 아닌, 아무래도 ‘쇠 다루는 기술 역량’
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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