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夫餘族의 向方과 夫餘 繼承意識夫餘族의 向方과 夫餘 繼承意識 徐 永 大(인하대) 머 리 말 한국사에서 부여1)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결코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째, 부여는 고조선 다음으로 일찍부터 한국사에 모습을 드러낸 정치체이기 때문이다. 부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史記》 권 129 <貨殖傳>의 “夫燕…北隣烏桓?夫餘”으로, 부여는 오환과 함께 연의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환이란 이름은 漢 武帝(B.C.140~87) 시기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다.2) 또 燕이란 행정구역은 한 무제 元朔 원년(B.C.128) 遼東郡과 遼西郡의 설치로 말미암아 없어진다.3)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전한 무제 때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부여의 존재는 기원전 2세기경까지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부여의 성립 시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그 성립 시기를 훨씬 올려 잡을 수 있다.4) 이렇듯 부여는 일찍부터 등장하여 494년(문자왕 3) 멸망 때까지, 적어도 700년 가까이 존속했던 국가였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둘째, 주변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부여는 고조선의 멸망과 삼국의 성장 사이란 과도기에 동이족 가운데 가장 선진사회였다. 그래서 한때 동북아시아의 중심 축으로, 또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들의 근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아가 부여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것이 국가나 사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부여사는 부여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고대 동북아시아사 차원에서도 연구가 요청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기서는 후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즉 부여족의 이동 내지 확산의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한국사에서 부여사의 자리매김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주제가 부여사 이해의 관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적 문제도 부여사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사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부여마저 이러한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미리 예방 조치를 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부여사 연구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관련 사료의 부족이다. 이로 말미암아 중심지 문제?북부여와 동부여 문제 등, 기초적인 사실부터 견해차가 심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이러한 난관은 여기서도 적용되는 바, 질정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1. 前燕 방면으로의 강제 이주 《삼국지》30,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부여는 서쪽으로 선비와 접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여와 鮮卑 사이의 갈등도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후한 桓帝 시기(146~167)에 선비족 檀石槐가 막북을 제패하면서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쳤다(東却夫餘)”고 하는 바,5) 2세기 중엽 부여와 선비의 충돌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접경지대에서의 충돌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며, 선비와 운명을 건 대결은 한동안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선비족의 일파 慕容部 세력이 등장하면서 바뀌게 된다. 즉 요동의 북방에 있던 慕容部 세력이 3세기 후반 大凌河 하류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동쪽에 있던 부여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286년 慕容?의 침입이 그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晉書》97, 東夷傳 夫餘조의 기술이 자세하다. 至太康六年(286) 爲慕容?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 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 護東夷校尉鮮于? 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 以何龕代之 明年(287) 夫餘後王依羅 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乃請援 龕列(別?)遣督郵賈沈 以兵送之 ?又要之於路 沈與戰大敗之 ?衆退 羅得復國 이에 의하면, 모용외의 침입을 받은 부여는 국왕 依慮가 자살하고 왕족들이 옥저로 달아났으며, 復國도 晉의 적극적 개입으로 겨우 가능할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晉書》108, 慕容?載記에서는 이때 慕容?는 만여명에 달하는 부여인을 잡아갔다고 전한다.6) 선비와의 충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용외의 아들 慕容煌의 시대에도 또 한차례 침입을 받았던 것이다. 모용황은 341년 燕王을 칭하면서 수도를 龍城(지금의 朝陽)으로 옮기고, 이듬해인 342년에는 고구려를, 344년에는 시라무렌 유역의 동족인 宇文部를 공격했으며, 이어서 346년에는 부여를 침공했다. 《資治通鑑》97, 晉紀는 346년 모용부의 부여 침공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穆帝 永和二年(346) 正月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而不設備 燕王(慕容)煌遣世子儁 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 萬七千騎 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煌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이에 의하면, 모용부, 즉 前燕의 침입은 부여가 중심지를 鹿山에서 전연이 있는 쪽인 서쪽으로 옮긴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부여의 입장에서 볼 때 西遷은 백제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부득이한 것이었지만,7) 중원 진출을 노리는 전연쪽에서는 배후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고, 이것이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는 모용부와의 간격이 더욱 좁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로부터 받은 타격이 워낙 컸음인지, 전연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이번에는 국왕이 포로가 되고, 5만여명이나 잡혀가는 수모를 당한다. 전연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부여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이후의 역사에서 부여라는 존재가 여전히 擧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후 2차례의 침공으로 6만여명의 부여인이 전연으로 끌려갔다. 《삼국지》 부여전이 전하는 부여의 戶數는 8만으로 인구수로는 대략 40만이 된다. 물론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6만여명이란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며, 엄청난 수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연으로 강제 이주된 부여인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핵심 왕족의 경우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우선 346년 전연으로 끌려간 부여왕 玄이 鎭軍將軍으로 봉해졌다는 것이 한 예이다. 또 왕자 餘蔚도 前燕에서 後燕에 걸쳐 지배층의 일각에서 활약했음이 확인된다.
?海西公 太和五年(370) 十一月 戊寅 燕散騎侍郞餘蔚8) 帥扶餘?高句麗?上黨質子五百餘人 夜開?北門納秦兵 燕主暐與上庸王評…等 奔龍城(注 餘蔚 扶餘王子 故陰率諸質子開門納秦兵)(《資治通鑑》102, 晉紀) ?孝武帝 太元九年(384) 正月 (慕容)垂以洛陽四面受敵 欲取?而居之 乃引兵而東 故扶餘王餘蔚爲滎陽太守 及昌黎鮮卑衛駒各帥其衆降垂 垂至滎陽 群下固請上尊號 垂乃依中宗故事 稱大將軍 大都督 燕王 承制行事 謂之統府 …餘蔚爲征東將軍 統府左司馬 扶餘王(《資治通鑑》105, 晉紀) ?孝武帝 太元二十一年(396) 五月 辛亥 扶餘王餘蔚爲太傅(注 餘蔚 扶餘王子也 燕王?破扶餘得之 燕亡入秦 秦亂 復歸燕 燕主遂封爲扶餘王)(《資治通鑑》105, 晉紀 )
이상은 여울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본 것인데, 이에 의하면 여울은 부여왕자로 346년의 침입 때 전연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전연에서는 散騎侍郞이란 관직에 있으면서, 前秦의 전연 침입 때 도성인 ?城門을 열어주어 전연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전진에서는 형양태수로 있다가 후연의 건국자 慕容垂에게 투항하여 부여왕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資治通鑑》105, 晉紀 孝武帝 太元 9年(384) 正月조에는 모용수의 아들 慕容農에 가담하여 후연의 건국을 도모하는 인물로 東夷餘和가 보이는데, 이 역시 원래 부여의 지배층이 아닌가 한다. 부여족의 존재 형태와 관련하여 업성의 성문을 열어줄 때, 여울이 부여나 고구려들인을 지휘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왜냐하면 전연으로 이주된 이후에도 여전히 부여나 고구려인으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은 전연의 치하에서도 이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울의 협조자로 부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음미해 볼 여지가 있다. 즉 이것은 강제 이주된 이후에도 부여인들은 옛 부여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부여인 집단들이 정체성을 지키면서 존속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울 이후, 강제 이주된 부여인의 존재는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 모용부의 침입으로 많은 부여인들이 강제 이주되었지만, 이들은 점차 부여인이란 정체성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소속된 국가나 사회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하겠다. 2. 粟末靺鞨의 투항 부여족의 西遷과 관련하여 또 하나 고려의 여지가 있는 것은 속말말갈의 문제이다. 속말말갈은 수?당대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말갈 7부의 하나로, 북류송화강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이다.9) 住域으로 본다면, 속말말갈의 위치는 부여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셈이다. 속말말갈은 남쪽으로 고구려와 접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가까운 지역(輝發河 유역과 吉林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북류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는 집단들은 고구려에 신속한 반면, 고구려와 먼 지역(伊通河 유역)에 거주하는 집단들은 서쪽의 突厥 세력을 등에 업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했다.10) 또 隋에 入朝함으로써 고구려와의 대립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583년(開皇 3) 돌궐이 수에 의해 격파되고 동서로 분열을 일으키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 隋는 돌궐 격파 이후, 중국 통일을 위해 남조 陳의 정복에 주력한다. 이것은 反高句麗的 속말말갈의 배후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이들 지역에 대한 경략을 추진했다.11) 그 결과 반고구려적 입장의 말갈의 일부가 수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속말말갈의 추장 突地稽(度地稽라고도 함)의 경우가 그것이다. 돌지계의 투항을 전하는 가장 자세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太平?宇記》 71, 河北道 燕州조의12) 기사이다.
隋北蕃風俗記云 初開皇中 粟末靺鞨與高麗戰不勝 有厥稽部渠長突地稽首(?)者 率忽賜來部?窟突始部?悅稽蒙部?越羽部?步護賴部?破奚部?步步括利部 凡八部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 擧部落 向關內附 處之柳城 柳城乃燕都之北 이것은 속말말갈 厥稽部의 渠長인 突地稽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開皇 연간(581~600)에 휘하 8부의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부여성 서북을 출발하여 수에 투항했음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돌지계의 출발지가 부여성 서북이란 점이다. 이것은 돌지계 집단의 원주지가 부여 지역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돌지계 집단의 투항은 사건의 중대성으로 말미암아 여러 자료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는 《冊府元龜》970, 外臣部 朝貢門조의 기록도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武德二年(619)四月 突(地)稽者靺鞨之渠長也 隋大業中 與其兄瞞?率其部 內屬於營州 瞞?死 代總其衆 拜遼西太守 封扶餘侯 이 기록은 앞서 인용한 《太平?宇記》와 약간의 출입이 있다. 예컨대 돌지계의 투항 시기를 大業 연간(605~616)이라 한 점, 형 瞞?과 함께 투항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기왕에 자세한 연구도 있거니와,13)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수에서 돌지계에게 내려준 봉작명에 扶餘란 말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돌지계 집단의 출발지가 부여성이란 의미, 그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舊唐書》에는 또 다른 속말말갈 집단이 당에 투항했음을 전하는 기사가 있다. ?愼州 武德初置 隸營州 領涑沫靺鞨烏素固部落 ?黎州 載初二年(690)析愼州置 處浮?靺鞨烏素固部落 隸營州都督(《舊唐書》39 地理志 河北道) 이것은 唐의 營州(朝陽)에 소속된 愼州와 黎州에 대한 설명인데, 이에 의하면 이들 주는 烏素固部를 관할했다. 오소고부가 당에 투항한 시기는 위의 기사를 보면 당나라 武德(618~626) 초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634~635년(貞觀 8~9)라고 한다.14)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신주조에서는 속말말갈의 일부라 한 데 대해, 여주조에서는 浮?靺鞨이라 한 점이다. 그렇다면 부투말갈은 속말말갈의 다른 이름이거나, 속말말갈의 일부의 이름일 수 있다. 그런데 부투는 부여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부여의 異表記로는 후술할 바와 같이, 鳧臾 등이 있음으로 미루어, 이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투말갈이 속말말갈의 다른 이름이거나, 속말말갈의 일부이거나 간에, 오소고부는 부여라는 명칭과 관련이 있는 말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속말말갈 집단을 부여와 연계시키는 사례가 2건이나 있다면, 이것은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게다가 속말말갈의 住地가 부여 경역과 중복되며, 돌지계 집단의 출발지가 부여성 부근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속말말갈은 부여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료들이 남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과 같은 논지는 말갈 연구의 권위인 日野開三郞의 업적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여족의 隋代의 호칭이 속말말갈”이라 하면서 속말말갈을 부여말갈로 부르고 있다.15) 그러나 말갈전 중 부여와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우며, 또 주로 속말말갈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되는 《수서》81 말갈전을 보면, 그들의 풍속에는 부여와 다른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여에 비해 상당히 후진적이다. 예컨대 말갈의 猪狗皮 의복?혈거생활?소변으로 세수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속말말갈과 부여를 等値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속말말갈이 곧 부여라기 보다는, 다종족사회인 부여에서 속말말갈은 부여를 구성하는 종족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즉 부여의 핵심 종족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부여족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돌지계 집단이나 오소고부의 경우로 미루어, 속말말갈의 일부가 수당시기의 중국으로 이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동북 경략의 거점인 營州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해 건국의 주체세력인 大祚榮과 乞四比羽가 각각 말갈계 고구려인?말갈 추장이며, 이들의 거주지가 영주였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16) 중국으로 이주한 부여계 말갈인들은 분산되지 않고, 나름대로 집단을 형성하여 생활했다.17)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추장들이 있고,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특권은 세습되기도 했다. 투항 후 돌지계가 遼西太守(수)?燕州總管(당) 등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李謹行은 營州都督이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어떤 의미에서 추장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유지는 중국 왕조에 의해 조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고구려 침공 등 중국의 대외전쟁에 투입되었던 바, 이들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유지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는 없었다. 돌지계가 당의 國姓인 이씨를 하사받고, 그 아들이 李謹行을 칭한 점으로 미루어, 지배층이 중국화 되어갔으며, 그러한 추세는 아래 계층에까지 점차 확산되었을 것이다. 즉 중국에 동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여인은 물론, 말갈인이란 자각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696년 대조영 집단의 영주 지역 탈출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거주지를 이탈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부여에 대한 자각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러한 집단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728년 발해 武王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18)이라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豆莫婁國 《삼국지》30 동이전 부여조에서 부여의 북쪽 끝은 弱水라 했다. 약수는 원래 신화적 지리관에 등장하는 강이었으나, 점차 현실의 강에 적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도처에 약수란 지명이 출현하게 되었다.19) 그런데 부여의 북경에 해당하는 약수는 嫩江 또는 東流松花江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北魏時代에 오면, 그 이북에 부여의 존재가 확인된다. 《魏書》에 처음 등장하는 豆莫婁國이 그것이다. 두막루의 위치는 기왕에 여러 견해가 제시된 바 있지만, 눈강 하류와 동류송화강 너머 호눈평원?松嫩平原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20) 《魏書》에서 두막루국은 독립된 傳을 가지고 있다.21) 이 두막루국전에 의하면, 두막루국은 “舊北扶餘”라고 한다. 그리고 두막루국전에서는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두막루국의 생활습속을 언급하고 있는데, 내용이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의 그것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두막루국의 상태를 전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두막루국=북부여란 전제 위에서 《삼국지》의 기사를 轉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따라서 두막루국을 부여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新唐書》에서도 북부여의 후예로 達末婁를 언급하고 있다.
開元十一年(723) 又有達末婁 達?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室韋種也 在那河陰 涑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去達末婁云(《新唐書》220, 流鬼傳) 723년 달말루의 수령이 당나라에 조공을 와서 말하기를, 자신들은 北扶餘의 후예로, 고구려가 나라를 멸망시키자 유민들이 那河(일명 他漏河)를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수령이 직접 와서 전한 말이란 점, 이동의 경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두막루와 달말루는 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북부여의 후예라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따라서 두막루와 달말루는 같다고 하겠으며, 늦어도 북위시대부터 동류송화강 내지 눈강 너머에는 북부여의 후예를 자칭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구려에 쫓겨 나하 건너에 두막루국을 세운 것이 언제인지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410년(永樂 20) 광개토왕의 동부여 정벌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이미 제시된 바 있다.22) 광개토왕에 의해 동부여에서 쫓겨난 세력이 나하(嫩河)를 건너 두막루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두막루국이 《위서》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로 미루어, 시대 배경을 광개토왕 때로 보는 것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유역이라 하는 통설의 입장에서 볼 때, 두만강 유역의 부여 집단이 눈강 너머까지 쫓겨가서 두막루국을 세웠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즉 두만강과 눈강의 거리는 이 설을 그대로 따르기 어렵게 한다.23) 따라서 이 문제는 後考를 요한다. 문제는 또 있다. 《위서》100 失韋傳에 의하면, 실위의 언어는 庫莫奚?契丹?두막루의 언어와 같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두막루어는 失韋?庫莫奚?契丹語와 같다. 그런데 失韋?庫莫奚?契丹語는 몽고어계에 속하는 언어들이다.24) 그렇다고 한다면 두막루는 부여와 다른 계통일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언어학의 문외한으로서 이 이상의 천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원부여 지역의 북방에 북부여의 후예임을 자칭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하고자 한다. 두막루 관련 기록으로 미루어, 두막루에서는 북부여인이란 자각이 강했을 것 같고,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의식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중국과의 교섭에서 북부여의 후예임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두막루(달말루)는 唐代를 끝으로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것은 두막루의 존재가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흡수 동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느 경우든, 그 결과로 말미암아 만주 북방지역에서 부여 계승의식을 가진 집단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4. 고구려 부여족의 향방을 논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향은 남쪽의 고구려 방면이다. 부여족의 고구려로의 이주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부터 확인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문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예컨대 시조가 天帝의 아들인가 손자인가의 차이, 시조의 출신지가 북부여인가 동부여인가의 차이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건국신화에서는 시조 주몽과 제 2대 琉璃王이 부여에서 이주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주몽은 烏伊?摩利?陜夫를 대동했으며, 유리는 屋智?仇鄒?都祖와 동반 남하했다고 전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러한 전승들은 부여 방면으로부터의 이주가 일찍부터 파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부여족의 이주는 건국기 이후의 사실을 전하는 자료들에서도 발견된다. ①-1 大武神王 五年(22) 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蝸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 爲曷思王(《三國史記》14, 高句麗本紀 2) -2 太祖大王 十六年(72)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三國史記》15, 高句麗本 紀 3) ② 大武神王 五年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 不肖 無以興福 乃與率衆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椽那部 以其拜有絡文 賜姓絡氏(《三國史記 》14, 高句麗本紀 2) ③ 廣開土王 永樂 二十年 庚戌(410)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窮率往討 軍到餘城 而餘□ 國駭 …王恩普覆 於是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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