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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축의 시대 (2) - 불안과 공포의 시대. 자아의 발견

송화강 2019-05-12 (일) 21:58 6년전 4586  

제 2 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BC900년 - BC800년경)

 

엘리야는 외투자락에 덮인 채 동굴 밖에 서서 야훼가 아합의 후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를 제외하면 모두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중심

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 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가치였다.

따라서 훗날 축의 시대 현자들 중 엘리야의 고압적인 전술을 해롭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암흑의 400년을 견뎌낸 아테네

BC1200년경 지중해 강자 미케네가 붕괴했다.(BC13세기 후반). 근동의 왕국들도 붕괴했다.

그리고선 그리스는 400년간 이어지는 암흑시대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미케네인들은 BC13세기에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파괴했을 것. 마지막 힘자랑?

 

미케네 사회는 그 전의 Creta문명(BC2,200- BC1,375)과는 달리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Creta인들은 다정하고

평화로웠던 것 같다. 서정적이고 화려한 색채의 Fresco화로 아름답게 장식된 그들의 궁은 요새가 아니었으며 전쟁은

먼 위협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케네의 Greece인들은 최신 군사기술을 과시하며 대중을 지배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으로부터 전차, 성채, 인상적인 무덤을 수입했다. 왕은 행정의 능률을 향상시켰다.

히타이트 자료에 의하면, 미케네인들은 BC13세기가 되면서 소아시아의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강한 문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미케네 중심부 도시들인 핌로스, 티린스, 미케네는 모두 파괴되

었다. 어쩌면 해양민족들이 저지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민 일부는 아르카디아와 키프러스로 이주했다.

펠로포네소스반도(미케네, 스파르타 포함한 반도) 북부 아카이아는 미케네인들의 고립된 집단 거주지가 되어 미케네

인들은 이때부터 아카이아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미케네인들은 Creta의 문자를 손보아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었지만 현존 text는 장비, 식량, 구매품 목록뿐이다.

그래서 그들 사회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Creta와 근동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축의 시대에 발전하는 Greece 문화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Greece인은 인도, 유럽어족 계열로 BC2,000년경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아리아인처럼 그들에게는 초원지대의 기억이 없었다. 자신들의 조상이 늘 Greece에 살았다고 생각했다.

Greece종교에서는 불이 중요했다. 그들은 뜨거울 정도로 경쟁적이어서 모든 것을 시합으로 만들려고 했다.

처음에 Greece부족들은 Creta 사회 주변에 정착했지만 BC1,600년에는 본토에서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내기 시작

했으며 Creta문명이 연이은 자연재해 뒤에 쇠퇴했을 때는 미케네 왕국을 통제하고 확립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Creta인들은 춤이나 행렬을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성스런 나무 숭배, 산꼭대기에서 신들에게 동물 희생제를 드리고 무아경에 빠져 환상을 보았다.

묘지는 성스런 장소였고 왕들은 신들의 동반자였다. 옥새는 왕이 여신과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여준다.

여신은 왕에게 창, 지팡이를 건네준다. 이런 제의 중 일부는 훗날 그리스 종교에 남는다.

 

미케네 text들은 훗날 그리스 만신전에서도 계속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신들 - 제우스. 아테나, 포세이돈, 디오니소스 -

등을 언급한다. 그러나 지중해 동부가 참담하게 무너지면서 그리스인들은 미케네와 Creta 문명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단절되고 만다.

그리스는 문맹과 상대적인 야만상태로 빠져들었다. 중앙의 권위는 없었고 지역 족장들이 각 지역을 통치했다.

공동체는 고립되었고 근동 여러 나라와의 접촉도 끊겼다.

근동도 위기에 빠졌다. 이제 더는 기념비적 건축도, 구상(具象)예술도 없었고 장인정신도 사라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옛 전설 중 일부를 간직했다. 그들은 아카이아인(미케네인)들 중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트로이 전쟁

때 전사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했고, 신들이 복수를 선언한 뒤에 죽어간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비극적 운명을 회고

했으며, 아버지인 줄 모르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인줄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기억을

간직했다. 음유시인들은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공동체들이 정체성과 언어를 공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미케네가 쇠퇴할 때 아테네는 위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아테네는 본래 미케네의 중요한

요새였다. 도시는 쇠퇴하고 인구도 줄었지만 완전히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BC11세기 중반에 아테네인 일부가 소아시아로 이주했다. 에게海 연안을 따라 정착지를 만들고 아테네의 이오니아

방언을 계속 사용했다.

BC10세기 말에는 아테네 주변의 시골에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BC9세기 그리스는 여전히 농촌사회였다.

이 시기에 관한 주된 자료는 Homeros(BC800- BC750)의 서사시들.

이 작품들은 BC8세기에 이르러야 기록이 되었지만 오래된 구전을 어느 정도 보전하고 있다.

 

BC800년경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에게해 지역에 무역이 부활했다. 그들의 첫 무역 파트너는 가나안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페니키아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고대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깔이 바래지 않는 자주색(포이닉스)염료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 포이닉스 → 페니키아)

처음엔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문화가 자신들(그리스인) 문화보다 세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C9세기가 되자 그들은 서로 창조적으로 결합했다. 페니키아인은 키프로스에 기지를 건설했으며 페니키아

장인들은 아테네, 로도스, Creta로 일을 하러갔다.

페니키아의 식민지 건설자들은 지중해 서부를 개척했고 BC814년에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Carthago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바다의 상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으며, 그리스인들은 시리아에서 새롭게 외국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BC9세기 말에 페니키아인, 키프로스인, 그리스인은 오론테스강(Orontes river.레바논 레반트 지방 북부를 흘러 지중

해로. 강 유역에 고대 그리스 도시 안티오크(안타키아)가 있다.)

어귀에 상업 중심지 알미나를 건설했다. 알미나는 쇠, 금속, 세공품, 직물을 수입하고 노예와 은을 수출했다.

 

Greece는 생기를 되찾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인 림보(limbo. 캐톨릭신학 용어. 몸은 죽었으나 영혼이 천국,

지옥, 연옥 어디에도 못가고 머무는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옛 Creta와 미케네 신앙의 요소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BC13세기의 위기는 낡은 신앙을 박살냈다.

Greece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보았으며 그 trauma가 그들을 바꿔 놓았다.

 

Creta 벽화들은 자신만만하고 명료했다. 묘사된 남자, 여자, 동물은 기대와 희망에 찬 모습이며 꽃이 만발한 초원에는

춤을 추며 기뻐하는 여신들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BC9세기에 이르면 Greece 종교는 염세적이고 음산했으며

신들은 위험하고 잔인하며 자의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Greece인은 눈부시게 찬란한 문명에 이르렀지만 결코 비극의 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이것이 축의

시대에 종교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점으로 꼽히게 된다. (영광과 허무 그리고 영광을 비극으로 승화시켰다.)

 

그들의 제의와 신화는 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금지되어 있는 것, 무대 뒤에서, 바로 눈 밖에서, 보통 밤에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암시한다. 그들은 삶이 불가해하게 뒤집혀버릴 때, 금기가 깨질 때, 사회와 개인을 제 정신으로 유지

하던 경계들이 갑자기 찢길 때, 그런 파국 속에서 신성함을 경험했다.

 

우리는 그리스 신들의 탄생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에서 이런 어두운 전망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세계에는 태초에 자비로운 창조적 신도 없었고 신성한 질서도 없었다. 오직 가차 없는 증오와 갈등뿐이었다.

처음에는 두 힘이 있었다고 한다. 카오스(혼돈)와 가이아(땅)였다.

이들은 너무 적대적이라서 함께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 후손을 생산했다.

가이아는 천신(天神) 우라노스(하늘)를 생산하고 이어 바다, 강, 언덕, 산을 낳았다.

이어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동침, 가이아는 아들 5명과 딸 6명을 낳았다.

이들이 신들의 첫 종족 티탄들이다.(티탄족의 씨족으로 올림포스 신들이 있다.)

 

또 하나의 힘 Caos는 그 나름으로 무시무시한 자식을 낳는다. 에레보스(땅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장소)와

밤(night)이다.

이들은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자를 때 땅에 떨어진 핏방울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올림푸스의 신들보다 나이가 많으며, 그들의 존재 자체에 가족의 폭력이 새겨져있다.

땅 깊은 곳에 사는 이 지하의 신들은 암흑시대 동안 그리스 종교를 지배했다.

BC9세기에 사람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올림푸스의 신들이 아니라, 이 지하의 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한 시인이 설명했듯이 이 암흑의 신들은 “사람과 신들의 죄를 추적하며 죄인에게 벌을 주기 전에는 절대 무시

무시한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자신의 씨족에게 저지르는 잔혹행위는 단 한번이라 해도 사회 질서 전체를 침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라노스, 크라노스, 제우스가 모두 끔찍한 가족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지하의 신들은 말하자면

올림푸스 신들의 그림자를 표현했다.

 

(나의생각) 그리스의 비극은 성찰과 감계의 교과서였다. 잘못된 이성과 감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이성과 감성의 세탁이

었다.

 

암흑시대가 지나고 나서도 그리스인들은 계속 자기 부모를 살해하고 자식을 학대한 사람들 이야기에 몰두했다.

이 자연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엔 설사 모르는 채 저지른 것이라 해도 나름의 독립적 생명력을 갖춘 독기(miasma.

미아스마)가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희생으로 죽어 그 행위를 정화하기 전에는 사회가 전염병과 재앙에 만성적으로 시달렸다.

예컨대, 아트레우스 집안 신화는 미케네 왕위를 싸고 두 형제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벌인 무시무시한 싸움을

보여준다.

한번은 아트레우스가 동생을 연회에 초대하여 맛있는 stew를 대접했는데, 그것은 동생 티에스테스의 아들 주검이었다.

이 미아스마는 아트레우스의 온 가족에 퍼진다.

아트레우스 아들로서 미케네 왕이 된 Agamemnon은 그리스 함대를 Troi에 데려다 줄 순풍을 확보하려고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는 딸을 죽인 남편을 죽여 복수를 하고, 그녀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였다. 뒤틀리고 얽힌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요소다.

그리스의 다른 많은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인간을 철저하게 무력한 존재로 제시한다.

 

Greece 문명이 절정기에 이른 BC5세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이 문명의 여신들에게, 심지어 올림푸스의 신들

에게 강요당해 어떤 행동을 하며 범죄가 발생하면 그것이 그 오염된 환경에 살고 있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를 미친다고 믿었다.

그리스인은 폭력과 재난의 이미지에 시달렸다. 올림푸스 신들은 인간에게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도 박해

하고 불구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인은 아마도 사라지는 ‘신’이라는 불안감을 주는 신화를 중동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이 신화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제의에 영감을 주었는데, 이런 제의들은 깊은 상실감을 경험하지 않고는

생명과 환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축의 시대에 4지역에서 창조된 종교 전통은 모두 공포와 고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 모두 이런 고난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그리스인은 삶에 내재한 비극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그리스 제의는 catharsis(정화)로 끝이 났다.

신은 달래고, 독기(miasma)는 흩어지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에리고네(Erigone.그리스 신화상의 이카리오스의 딸. 디오니소스의 포도주 제조법을 배운 아버지가 이웃

에게 포도주를 먹였는데 이미 취한 이웃은 독을 마셨다고 생각, 아버지를 죽였다. 이에 딸은 슬퍼서 목을 매 자살)의

비극적인 죽음의 기억도 삶을 시작하는 흥분된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광경과 결합되었다.

참가자들은 ekstasis, 즉 밖으로 나감을 경험했다. (카타르시스를 통한 승화, 즉 엑스타시스를 느끼는 것, 그것이

비극이다. 그들은 3일 동안(축제) 일상의 삶 밖으로 나가 묻어두었던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두려움을 통과, 갱신된

삶에 이르렀다. 그리스인에게 제의는 入門式, 즉 슬픔을 거치고 죽음과 독기(miasma)의 공포를 거쳐 갱신된 삶에

이르는 통과의례였다.



최초의 유일신 숭배자 엘리야


지중해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BC9세기 말에 이르자 북부 왕족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강국이 되었다.

BC926년 이집트왕 시샤크1세는 가나안을 침공했을 때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150개 도시를 유린

했을 뿐만 아니라 메기도(므기또), 레홉(르홉), 베드셰안(벳스안), 타아나크(다아낙) 등 가나안의 오래전 요새들도

파괴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神

엘은 天神

 

예언은 고대 중동에 이미 확립되어 있던 영성이었다. 가나안에서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에 이르기까지 무아경에

빠진 예언자들은 신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예언자(prophet)들은 대개 왕궁과 연결되었다.

성경 자료들은 그들이 종종 군주를 비판했으며,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는 데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초기 이스라엘의 예언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자 prophetes (그리스語)에서 왔다.

BC9세기 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에 관한 전설은 구전으로 전해져왔다.

엘리야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神이라는 뜻이다(엘리야 의미).

엘리야는 배타적인 야훼 숭배를 고집한 첫 예언자로 기록에 남아 있다.

고대 중동 신학에서 엘은 각 민족마다 신을 하나씩 임명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성한 자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유일신을 섬길 것을 제안, 전통 종교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은 옛 가나안 폐허지를 일궈 폐허지 도시민을 흡수하고 영토를 확장할 때인 오므리왕(BC885- BC874년

사이 재위)은 사마리아에 새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子 아합(BC874 - BC853 재위)은 웅장한 상아 궁전을 짓고 페니키아, 키프러스, 그리스와 교역을 했다.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사악함의 대명사였다. 그녀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놨기 때문이다.

 

바알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가뭄이 닥쳤다. 기회가 왔다고 보고 엘리야는 이세벨의 사제 450명에게

카르멜(가르멜)산에서 시합을 하자고 도전했다.

제단에 황소 두 마리를 놔두고 (하나는 야훼에게 바치고, 다른 하나는 바알에게 바치는 것) 각각의 신을 불러들여 어느

신이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엘리야가 이겼다.

엘리야는 근처 골짜기에서 바알의 예언자를 모두 죽이라 명령하고 카르멜 산으로 올라가 두 무릎 사이에 머리 묻고

가뭄을 끝내달라고 기도했다. 비가 억수로 왔다.

야훼가 바알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찬탈, 전쟁만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할 수 있음도 증명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복수를 두려워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시나인 산(북쪽 왕국 사람들은 호렙산이라 부름)에 있는

야훼 신전으로 피신했다. 그는 산의 바위틈에 숨어 계시를 기다렸다. 야훼는 자연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축의 시대의 초월적 돌파(transcendental breakthrough)를 이야기

한다.

Phaidon : Platon이 스승 Socrates의 죽음을 놓고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Socrates의 나날을 이야기하는 식

으로 영혼불사,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Idea의 원천 역할을 하게 됨)

 

유대교(Judaism) : 고대 이스라엘人의 종교. 보통 유대교라고 하면 바빌론 포로(BC 586∼BC 536) 이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발달한 유대인의 고유 종교를 말함.

BC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 왕으로부터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 왕조는 BC6세기 초 신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무너

졌다. 지배층·지식층·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잡혀 갔다.(바빌론유수)

유대교의 경전(구약성서)은 BC1세기에 결집이 거의 完了되었지만 기본구성은 유수에서 팔레스티나로 온 뒤

(반세기만의 귀환)부터였다.

 

인격신 야훼 : 헤브라이 민족이 Egypt의 來世지향적이고 현세부정적인 종교를 극복하고, 근동 여러 나라들의 자연

숭배 종교를 이겨낸 것은 인간의 歷史 속에 介入하는 인격신 야훼에 대한 신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인정했으나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당시 유대교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앞세움으로써 그리스도교가 탄생했다.

 

David(? - BC961) :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왕. 제사제도를 정했고 예루살렘을 中心으로 유대교를 확립했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 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Goliath : 구약성서의 《사무엘 상》 17장에 나오는 불레셋군(軍:펠리시테군)의 장군. 강국 불레셋은 힘센 장사이며

백전노장인 그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 때 사울 왕국의 이스라엘 측 양치기 소년인 다윗이 맨손으로

골리앗과의 1대 1의 단판싸움에 나섰다. 물맷돌을 던져 그의 이마에 적중시킴으로써 그를 쓰러뜨리고 승리한다.

 

고대 오리엔트문명

고대 오리엔트문명은 BC3,200년경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통일을 할 때까지 약 3,000년간 오리엔트

지방에 번영했던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오리엔트’라는 말은 로마인이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을 ‘오리엔스(Oriens)’

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집트와 서아시아 일대를 총칭한다.

이 지방의 중심지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로서, 두 지방 모두 BC

3,000년 전후에 국가가 성립되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감에 따라 고대 오리엔트문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오리엔트 각지에 남아 있는 유적들이 서양인들의 주목을 받아 그곳에서 발굴된 조각품이나 점토판

문서(粘土板文書) 등에 대한 연구가 일어났다. 1822년 프랑스인 J.F.샹폴리옹은 이집트의 성각서체(聖刻書體:신성

문자)를 해독하고, 1847년 영국인 H.C.롤린슨(1810∼95)은 설형문자(楔形文字)를 해독함으로써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문헌연구가 본격화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유적의 발굴조사는 수천 년간 토사(土砂)에 파묻혀 있던 고대도시와 신전(神殿) ·궁전 ·분묘 등을

발굴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문헌학 ·고고학의 양면에 걸친 연구에 따라 아시리아학(學) ·이집트학을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해명은

크게 진전되었다.

오늘날에는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제외하고 인류문화사를 논할 수 없게 되어 그 세계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Baal : 고대 시리아 셈족 고유의 男神. 셈어(語)로 ‘주(主)’ 또는 ‘소유자’의 뜻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토지 소유자로 간주되는 신들의 총칭. 곡물 ·과실 ·가축 등의 결실 및 성장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

되었다. 이 바알 신앙이 차츰 야훼 신앙을 혼란케 하였기 때문에 BC8세기의 예언자들로부터 우상숭배라는 낙인이

찍혀 배격되었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의 prophet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prophetes, 즉 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에서 왔다.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가치였다. 따라서 훗날 축의 시대 현자들 가운데는 엘리야의 고압적 전술을 해롭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은 영성을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본질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한 초월을 두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엘리야와 바알에 대한

예언자들의 싸움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경쟁하는 (엘리야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신’이라는 뜻이다. 엘리야는 배타적인 야훼숭배를 고집한 첫 예언자로 기록에 남아있다.)

신들과 벌이는 살벌한 경합이 예언자들이 지닌 영성의 특징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종교는 더 평화로워졌다. 신성한 전사라는 옛 이미지는 인기를 잃었다. 바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이제 격렬한 폭풍 속에서 야훼를 보는 대신, 신들의 모임에서 야훼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 신들의 모임조차 경쟁적이 되었다.

 

약자보호는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 전 지역의 공통된 정책이었다. 일찍이 BC2,000년대에 Mesopotamia왕들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위한 정의는 신성한 의무라고 강조했다.(사회정의).

이것이 도와달라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태양신 샤마시의 명령이라는 것이었다.

함무라비 법전(BC1,790?- BC1,750?)의 서문은 왕과 힘 있는 자들이 약한 백성을 억압하지 않으면 태양은 모든

사람을 위해 비춘다고 선포한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바알이 모트와 싸워 이룬 신성한 질서를 보전하는 방법이었다.

중동지역에 걸쳐 정의는 종교의 핵심적인 기둥이었다. 그것은 또 훌륭한 실용적 정책이기도 했다. 부당한 사회정책

때문에 국내에 적이 생긴다면 외부의 어마어마한 적들을 정복해도 소용이 없었다.

야훼 유일 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을 드리고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신성한 자원이 축소되고, 친숙하고 사랑하던 신성한 의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Israel은 이제 중동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합의와는 단절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길에 나설 참이었다.


하늘의 도(道)를 따르는 지상의 삶


중국인들에게는 그 같은 고통스런 결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축의 시대는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周나라 왕들이 시행했던 고대의 祭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발전

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C9세기에 周나라는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각지의 제후들이 이탈하고 周의 영토는 이민족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가끔 궁정의 음모에 대한 언급은 있다. 두 번 왕이 수도에서 도망을 갔다.

왕은 중원의 읍성들에 대한 통제력 행사를 하지 못했다.

결국 낡은 군주제는 해체되고 周나라에 이념적으로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결합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활동

하는 귀족들의 연방제가 등장했다. 그들을 한데 묶는 유일한 것은 믿음이었다.

 

제의는 왕의 봉신들에게 군주가 天子, 즉 하늘의 아들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하늘의 최고신인 천상제로부터 중국 백성을 통치하라는 천명을 위임받았다.

오직 천자만이 최고신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渭河 유역에 자리한 수도 宗周(鎬京)는 周의 읍성들로 이루

어진 전체 네트워크의 종교적 중심이었다. 周왕의 직계 후손이 통치하는 魯나라를 제외한 어떤 읍성도 周의

先王들을 기리는 존엄한 왕실의식 거행은 불가였다.(宋나라와 魯나라는 가장 중요한 제후국이었다.)

 

宋나라의 통치자는 商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며 상나라의 전통을 보전했고, 魯나라는 열심히 周의 祭儀를 유지했다.

BC8세기가 끝날 무렵 평원에는 이런 봉건적 제후국이 12개가 있었다.

周나라의 영향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는 종교가 생활을 지배했다. 종교의 중심은 天子인 왕이라는 인격체였다.

天命을 물려받은 천자는 마법적인 힘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이 힘을 제후국의 봉건영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국의 종교는 제의(禮)로 우주의 자연 질서를 보전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이렇게 하면 인간사회와 하늘의 도(天道)의 일치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王은 신적인 인물로 지상에서 최고신에 대응하는 존재였다. (중국인은 자연 질서를 초월하는 신에게는 결코 관심

을 두지 않았다. 하늘과 땅 사이 존재론적 분리는 없었다. 엘리야가 경험한 신, 즉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신 이야기

를 들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최고신 하늘은 인간 같은 특징을 지녔지만 결코 별도의 인격이나 性을 갖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통치했다.

 

모든 邑城에는 지단(地壇)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궁 남쪽 조상을 모시는 묘 근처에, 또 하나는 남쪽 교외의 추수

제단 옆에 있었다. 지단의 위치는 사람들이 땅의 경작과 농작물 수확을 통해 자신보다 앞서서 땅을 갈던 조상들과

직접 접촉하며, 이런 식으로 하늘의 도가 확립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추수 전이나 후에는 지단 주위에서 감사의 찬가를 불렀다. 하늘의 道는 과거나 현재를 이어 성스러운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유쾌한 것이었다.

 

세상이 여기 같은 것은 여기만이 아니고, 세상이 오늘 같은 것은 오늘만이 아니다. 우리 옛날 조상들도 이와 같았

겠구나........(원형적인 인간의 모습 추체험)

 

중국인은 땅, 우주 심지어 중국 제국에 관해 말할 때도 이 세속적인 범주에는 신성한 것이 포함된다.

그들은 저 바깥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찾는 일보다는 이 세계를 하늘의 원형과 일치시켜 더 신성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여기 땅에서 모든 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했다.

(道는 마땅히 가야할, 따라야할 길) 하늘이 더 숭고하기는 하지만 정치생활의 중심은 땅이었다.

모든 중요한 집회는 지단에서 열렸다.

 

왕은 더할 수 없이 높은 권력을 지녔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평생 매순간 천상의 모범과 일치해야 했다.

왕의 역할은 자신의 힘으로 대외 또는 국내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런 오래된 이상은 나중에 중국 축의 시대 영성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준다. 왕이 제의적인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면 그의 힘(도덕)이 만물을 차분하고 온순하게 만들었다. 이런 신성한 안정 상태를 큰 평화(太平)라 했다.

비가 오지 않고 지진, 홍수가 오면 왕은 공개적으로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나쁜 정부, 무능한 관리, 조정의 사치를

인정했다. 그리고 남쪽 교외 지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인간세계의 질서를 마법적으로 회복하면 우주에 평화가 찾아오고 하늘의 도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BC9세기에 이르면 제의는 더 공식적인 행사가 된다. 제의 전문가들(儒)이 행사를 관장, 의식을 정확하게 행했다.

전례가 공적행사가 되자 사람들은 道의 이행을 보고 또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왕은 하늘을 자기 삶의 모범으로

삼았고 백성은 왕의 인도를 따랐다. 왕은 살아있는 원형이었다. (왕실제의가 곧 modus vivendi가 되었다.)

 

왕실제의에 관한 정보는 고대 중국의 고전에 나온다. 대부분이 utopia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기에 표현

된 이상은 중국인의 상상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축의 시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BC9세기에 이르면 제의

에서 경험하는 변화의 힘이 신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한다. 다른 persona를 맡음으로써 우리는 순간적

으로 다른 존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는다. 제의는 참여자들에게 조화, 아름다움, 신성의 전망을 제시했으며,

이 전망은 그들이 일상생활의 혼란으로 돌아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의 동안 사람들은 신성한 공동체를 경험, 창조했으며 과거, 현재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됨을 느꼈다. 

 중국인들의 제의식에 관한 효과분석은 BC3세기에 중국 축의 시대에 가장 합리적인 철학자로 꼽히는 荀子에 의해

서였다.(제의의 영적 중요성 인식)

 

charter myth(헌장신화) : 전통적 관습이나 행위의 근원 추적을 위해 고차적, 초자연적 태초사건으로 추적해

올라감으로써 전통에 더 큰 가치와 특권을 부여하는 신화.

 

제의에 종과 북, 거문고와 비파 사용, 전쟁과 평화, 기쁨과 열락을 향유.

 

祭儀 확립은 주(周)나라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축의 시대 이후에 완성된 禮記는 商나라는 영혼을 앞에 두고 제의는

두 번째에 놓았으나, 周나라는 제의를 앞에 두고, 영혼을 두 번째에 놓았다고 했다. (商은 제의를 통해 신들을 통제

하고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周는 직관적으로 제의 자체가 신보다 큰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BC9세기가 끝날 무렵 周왕조는 극심한 곤경에 빠졌다. BC842년 여왕(厲王)은 왕의 실정에 분노한 백성들의 반란

으로 망명했다. BC828년 망명지에서 사망했고, 아들이 권좌에 올랐으나 道는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사실은 이 무렵 자연재해 발생(지진, 가뭄). 제의의 마법적 효능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점증하는 위기에 맞서 中國人은 제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쪽으로 대응한다(제의의 강화).

 

Atman - 내 안의 진정한 나

BC9세기에 이르면 印度의 제의 전문가들은 인도의 축의 시대를 여는 전례개혁에 나선다.

그들은 희생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내적 자아를 발견한다. 우리는 그들이 후기 veda시대에 새로 두각

을 나타낸 Brahman 사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들의 작업은 BC9세기- BC7세기 사이에 편찬된 제의 수행지침서인 『브라마나』에 보존되어 있다. 수행지침서는

(희생제의에서) 폭력을 없애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이런 욕망은 결국 인도 축의 시대의 불가결한 덕이 되는 아힘사(不殺生)의 이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개혁된 제의는 인간에 대한 공격은 암시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전차경주, 모의전투, 약탈 등의 경쟁도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제의에서 제외되고, 그 자리에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찬가나 상징적인 행동들이 들어

섰다.

충돌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제의를 의뢰한 후원자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면 제의에는 전사나 바이샤는

참석할 수 없도록 했다. 과거에는 시끄럽고 혼잡했던 희생제 구역이 희생제를 바치는 부부 외에는 텅 비게 되었다.

희생제의 불, 영광, 재미는 없어졌다. 이 같이 무해한 제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은 절차상의 실수였는데,

이것은 희생제를 치료하는 특별한 의식으로 쉽게 고칠 수 있었다.

 

죽음의 자아(atman)화로 말미암아 제의 전문가들은 관심을 외부 세계로부터 내적인 영역으로 이끌었다( 죽음의

내면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과거의 제의에서 후원자는 죽음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겼다.

t

opas : sanskrit. 열 또는 열정. 베다에서 축제의 욕망을 끊기 위해 행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행위.

육체의 금욕과 함께 이루어진다(서양의 금욕주의).

 

모든 희생제는 태초에 이루어진 최초의 봉헌과 똑같다. 베다시대 인도인은 고대의 모든 민족들처럼 제의가 자연

세계에서 끊임없이 고갈되는 energy를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의의 법칙은 유사성에 있고, 그 유사성이 희생제다. 모든 제의는 세상을 더 강하게 만든다. 개혁가들은 낡은

자멸적 제의를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축을 상징하는 행사로 바꾸었다. 신과 인간은 계속적인 혁신이라는 공동

기획에 함께 참여해야 했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神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자의식적인 반성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제의 개혁가들은 선구자

였다. 그들은 희생제의 방향을 원래 가리키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틀어 아트만, 즉 자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대 세계에서 제의는 종종 노예적인 순응을 장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브라민(고대인도 제의전문가)들은 그들의 학문을 이용, 외적인 제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냈다.

사제개혁가들은 제의의 내적인 역할을 명상함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아리아인 전사들이 인도의 미지의 밀림 속으로 파고들 듯이 앞장서서 열심히 내적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에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제의 전문가들은 모두가 제의를 깊이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깨달을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자의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희생제에서 폭력을 제거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개혁은 브라민(개혁사제)과 그들의 비사제 후원자들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인도에는 이 득의양양한 자기 민족이 괴물 같은 자기중심주의로 변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적 의무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제 3장 자아의 발견 (BC800년- BC700년 경)


요, 순은 聖人이 되었다. 『書經』의 가르침은 힘, 강압에 기초한 통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요, 순은 자신들이 본능적

으로 좋아하는 것보다, 백성의 유익을 앞세웠다. 그들은 禮가 개발하고자 하는 절제, 겸손, 자제, 경의의 원형적 모범

이었다. 중국의 정치가 점점 이기적, 무자비로 치달으며 요, 순의 전설은 계속 영감의 원천이 된다.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BC8세기는 Israel 왕국과 유다왕국의 종교적 과도기였다. 이 시대에 축의 시대 영성의 첫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약 200년 뒤 열매를 맺는다.

BC8세기 말경엔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중 일부가 처음으로 글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기록) 더 중요한 것은 축의 시대 모든 종교 전통의 핵심이 될 자기 버리기(kenosis. Greek- 비움이라는 의미〉

의 씨앗이 발견된다는 점다. 이 경우에도 변화의 촉매는 (이)지역에서 분출한 폭력이었다.

BC8세기까지 글은 신성한 것이나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신비한 기술로 여겨졌다.

공동체의 지식은 모두에게 속한 것이지 글을 아는 소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BC8세기가 되면서 문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근동에 더 넓게 확산되었으며, 새로운 정치상황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전승을 기록하여 text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비치했다.

 

모세 5경 - 구약의 첫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킨다.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유대 전통에서는 모세 5경을 Mose가 썼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중엽 독일의 Julius Wellhausen(1844- 1918)을

비롯한 성서학자들은 모세 5경을 복수의 저자들이 전승되어온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신학에 맞게 편집한 책자로 보았다.

 

J와 E의 이야기는 역사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했으며,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건의 의미를 발견하는데도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역사에 근거를 둔 서술과 함께 신화적인 자료도 포함한다.

초기 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삶은 세속적인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차원도 갖고

있었다. 이 초월적 차원이 사건들의 더 깊은 의미에 빛을 던져주었고, 사건들에 모범적 전형으로서의 의미를 심어

주었다. (J와 E의 발전과정은 책 『축의 시대』 pp. 165-167 참조)

 

성서학자들은 모세 5경을 대략 500-600년에 걸쳐 구전과 문헌이 전승되면서 차츰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모세 5경의 원래 자료를 누가 썼는지 확실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성서학자들은 문장 유형과

문체, 하느님의 이름 등을 고찰, 중요한 몇 가지 기초 문헌에 대한 가설을 만들었다.

1) J계 -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Yahweh, 독일어로 Jahweh)로 기록된 문헌. 남부 왕국 유대에서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2) E계 - 하느님의 이름이 엘로힘(Elohim) 또는 EL(엘)로 나오는 문헌. 북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형 성된 것으로 보임.

3) D계 - 신명기(deuteronomy)계 문헌. 신명기의 문학적, 신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집필, 편집된 문 헌. BC7세기 문헌

               으로 추정.

4) P계 - 사제(priest) 저자들이 편찬한 문헌. 최종 편찬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 할 때 이루 어졌다.

학자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BC722년 패망한 뒤에 J와 E가 먼저 결합되고(JE문서라 함) 유다의 왕 요시아(BC640 - BC609년경 재위)의 개혁기에 여기에 다시 D가 합쳐졌다고 본다. 그 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할 때 사제 저자들에 의해 앞선 문헌들이 합쳐져 오늘 날의 모세 5경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중심주의

그리스에서 BC8세기는 놀라운 시기였다. 아주 단기간에 그리스인들은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독특한 문화의 기초를

닦았다.

유다의 별은 내려가는 것 같았지만, Greece의 별은 올라갔다. 아시리아는 Egae 海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Greece는 군사적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신들의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타 지역 민족들로부터 배우려고

열심이었고 그들의 정치는 급진적, 혁신적이었으며 여러 형태의 정치체제를 실험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종교는 건드리지는 않았다. 헤브라이 예언자들이 일신숭배를 설교할 때 Greece인들은

다신교에 헌신했다. 낡은 형태의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전통을 더 체계화했다.

 

BC8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독립적인 도시국가 polis의 창조였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자치의 기술을 배웠다.

암흑시대가 끝난 뒤 낡은 정치제도는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백지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BC8세기에는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농업기술이 발달했다. 잉여농작물 생산이 가능했다.

그래서 자신의 땅과 작물을 경쟁자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사회조직을 원했다.

그리스인은 이제 남은 작물을 거래하고 도시기획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BC8세기 말 고대 그리스 전역에 polis들이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가족처럼 닮은 모습. 성벽, 신전, 집회소,

항구가 있어야 했다. 경제 기초인 시골과 사회적 정체성의 핵심인 도시 간에 차별은 없었다. 농민과 도시 거주자는

권리와 책임이 똑같았으며 똑같은 통치회의에 참석했다.

모든 시민이 공공건물과 agora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agora는 열린 공간으로 거래와 토론 장소였다.

polis마다의 수호신은 시민들을 한데 묶는 데 도움이 되는 독특한 희생제와 축제를 발전시켰다. 

 polis는 평등한 사회였다. 이른 시기부터 농부는 오래된 귀족에게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굴종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예와 여자를 제외한 모두가 시민이 될 수 있었다.

polis는 호전적, 남성적 국가였다. 여자들은 오히려 암흑시대에 더 나은 지위를 누렸다.

시민들은 대부분 자신의 땅을 소유했고, 남을 위해 일하거나 보수를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고대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왕들이 군주제 국가를 이루려고 신민의 독립성을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Greece 농민은 전통적인 자유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은 지역 통치자들이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는

큰 왕국보다는 자율적인 도시국가를 창조했다.

 

Homeros의 서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BC8세기 Greece 귀족들에게 대중연설은 군사적 위용만큼이나 중요했다.

미케네 시대에 왕은 그저 동등한 사람들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 즉 상대적 우위에 있는 사람에 불과

했으며, 귀족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polis에서는 공공정책을 두고 토론이 계속되었다. 농부들도 정부에 참여했기에 토론기술을 계발해야 했다.

모든 사람이 아무리 초보적인 방식이라 해도 정의와 윤리의 추상적 원칙을 염두에 두고 실제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

해야 했다. 농민들은 점점 귀족을 닮아 갔다. polis의 중요한 특징은 전 시민이 점차 옛 귀족의 Ethos를 흡수해 나갔

다는 것이다.

 

토론은 agon, 즉 다양한 연설자들이 벌이는 시합이었다. 가장 논쟁을 잘 하는 자가 승자였다.

베다(Veda)시대 인도인 일부는 고대 인도·유럽인이 지녔던 경쟁을 사랑하는 마음을 서서히 버리기 시작했지만,

Greece인은 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agon(경쟁)은 삶의 법칙이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귀족은 서로 경쟁하여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제 polis 전체가 귀족적인 전사 사회로 바뀌면서

농부들도 경쟁적인 정신을 갖추기 시작했다.

 

Homeros는 Greece 장군들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이기려는 충동에 내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가 서로 돋보이려고 싸우는 경쟁자들이었으며, 이것이 모든 활동의 특징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polis에는 자기 버리기(kenosis)대신 격렬한 자기중심주의가 넘쳐났다.

또 호전성도 내재해 있었다. polis의 창조는 종종 폭력적이었다. 이웃이나 경쟁자들과 싸우며 버틸 수 있는 공동체의

수립이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마을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뜻과 무관하게 억지로 polis에 결합되곤 했다.

통합(synoecism)은 뿌리 뽑기, 저항, 크나큰 불행을 의미했다. 이런 産痛은 많은 polis 건립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

 

도시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지만, 이 과정은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일이 많았다. 각각의 polis는 권력과 부를 놓고 다른

polis들과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또 자신들의 문화적인 통일성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범그리스적 축제와 제도로 이것을 기념했다.

 

olympia에서 열린 운동경기는 가장 유명한 행사로 꼽히는데, 이 행사는 BC776년에 처음 기록에 남겨졌고 그리스

전역의 귀족들이 참석했다. 시합에서 경쟁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였다.

그것은 polis를 지도에 올려놓는 일이었으며, 올림픽의 승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시합에는 초자연적이고 지하 세계적인 면이 있었다.

가장 초기의 운동시합은 위대한 전사의 장례식 기간에 개최되었다. 조객들이 탁월한 신체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 도전적으로 삶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며, 유족의 분노, 비통, 좌절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합은 종교적인 제의가 되어 지역 영웅을 기리는 성소에서 벌어졌다.

 

olympic 경기들은 poseidon이 사랑한 전설적인 인물 펠롭스(그 자신이 운동선수이기도 했다)를 기념하여 열렸다.

경기장의 서쪽 끝에는 펠롭스의 무덤이 있었다. 동쪽의 zeus 제단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곳에는 재와 흙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제에 쓰인 장작이 타고 남은 찌꺼기였다.

 

신과 영웅은 밤과 낮, 죽음과 삶이나 다름없었다. 경주 시작 전날 밤, 운동선수들은 펠롭스의 무덤에서 숫양을 희생

으로 바치고, 그 피를 지하 깊은 곳에 부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은 펠롭스의 무덤에서 zeus의 제단 정상까지 달려가

떠오르는 태양 속으로 뛰어들었다. 죽음과 피의 희생으로부터 정화하는 불로 달아났던 것이다.

 

올림피아의 우승자도 펠롭스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죽지만, agon에서 거둔 승리 결과 승자가 얻은 명예(kleos)는 미래

여러 세대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았다.

영웅숭배는 그리스 종교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웅은 불멸의 신에 대응하는 지하 세계적인 대응물이었다.

영웅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숭배를 받았다. olympos 산꼭대기에 사는 신들과 달리 언젠가는 죽고야마는 필멸의

영웅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영웅의 무덤에서 여는 제의는 그의 분노를 달래고 그의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BC8세기 말 Aege해 주변 여러 곳에 새로운 정착지들이 형성되었다. 그리스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흥분을 느끼고,

발견에 기뻐하며, 새로운 교역의 기회를 찾고, 시야를 넓히며, 외국에서 자극을 받았다.

교역이 늘면서 동양과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리스 상인들은 중동으로 진출했고, 아시리아 침입으로 생긴 난민

들이 그리스 polis로 이주, 신기술을 전파했다.

 

그리스인들은 phoenicia 문자를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고쳤으며, 동방의 종교적인 관념도 수입했다. 

 BC8세기 동안 그리스인들은 근동의 model을 본떠 커다란 신전을 짓고, 거기에 神像을 넣어두기 시작했다.

피티아(pythia : 아폴론의 女사제) 숭배도 무아경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들이 묘사하는 지하세계는 메소포타미아의 사자들의 세계를 닮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들

몇 명도 동쪽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모든 신 중 가장 전형적인 그리스 신 apolon도 원래는 소아시아 출신이었다.

또 키프로스 섬에서 중동의 여신 이슈타르를 만나본 뒤, 자신들의 만신전에 사랑과 다산의 여신 aprodite를 집어넣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연인인 비극적인 인물 아도니스는 식물의 신 타무즈가 거의 확실하다. 중

동 여자들은 그를 아돈(주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죽음을 몹시 애도했다.

 

그리스 종교 형성에 Homeros 만큼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Homeros는 Jerusalem에서 J와 E의 이야기들이 합쳐지던 시기인 BC8세기 말에 구전되던 서사시 전승을 기록으로

남겼다. 음유시인들은 수백 년 동안 시합이나 축제 때 암송되던 이 오래된 이야기들을 암송했다.

Homeros 시대에 그 이야기들 가운데 일부는 역사가 1,000년을 넘었을 것이다.

 

그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훨씬 더 큰 서사시 덩어리 중 작은 부분만 보존한 것이다.

트로이 전쟁에 관한 시, 테베 왕 오이디푸스와 그의 박살 난 가족 역사, 헤라클레스의 모험 이야기 등 많은 서사시가

구전되었다. 이 고대의 서사시들은 수백 년 동안 변하고 발전해 왔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일단 기록

되자 영구히 고정되었다.

모든 서사시가 그렇듯이, 이 두 편도 아주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Homeros 자신이 살던 시대의 환경

을 반영한다. Homeros는 과도기에 살았다.

 

암흑시대를 끝내고 Greece에서 등장한 새로운 문명은 이제 겨우 두 세대 밖에 지나지 않았다.

Troi 전쟁(BC1200년경)이 벌어졌던 미케네 시대 후기를 배경으로 한 Homeros의 긴 서사시는 새로운 문화를 낡은

문화와 결합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Greece 성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거기에 담긴 이상과 가치가

새로운 Greece 문화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Troi 전쟁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 하나를 묘사하고 있다. 미케네 王이자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Agamemnon과 휘하 부대 장군 아킬레우스와의 언쟁이었다.

『오디세이아』는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묘사한다. Homeros는 두 시에서 전쟁이 주는 흥분, 동지애의

기쁨, aristeia(戰士가 승리의 흥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상태)의

영광을 찬양한다. Homeros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불멸의

영광을 안길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영웅은 명예, 지위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시킨다.

kenosis(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ekstasis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Ares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aristeria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모든 전사는 탁월해야 하지만 최고(aristos)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전투에서 탁월하다는 의미였다.

다른 자질이나 재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양된 aristeria 상태에서 영웅은 죽음을 경멸하며 찬란하게 너울거리는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한다.

 

인도에서는 사제와 전사들이 모두 서서히 아힘사(不殺生)라는 이상을 향해 나갔다. (그리스에서는 살생이 영웅의

길이었는데.......) 이것은 다른 축의 시대 영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결코 영웅적인 ethos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축의 시대는 정치적이고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지만, 결코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일리아스』는 죽음에 관한 시다. 파트로클로스도 죽고, 헥토르도 죽고, 아킬레우스도 죽고, 아름다운 도시

트로이도 죽는다. 『오디세이아』에서도 죽음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암흑의 초월이었다.


축의 시대 영성은 자기 비우기( kenosis)였다.


Homeros가 그린 olympos 신들의 생생한 초상은 그들의 성격을 영원히 고정시켜 놓았다.

그들의 萬神殿은 처음으로 일관성을 확보했다. 축의 시대의 다른 민족들이 낡은 신들에게 불만을 느끼거나 신성의

관념을 바꾸고 있을 때, 그리스인은 과거의 종교 양식에 더욱더 헌신한다. 그들은 신성을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기 신들의 내재성(비초월성)을 다시 확인했다.

신과 만나는 것은 압도적인 충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과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느꼈다.

 

전사가 전투의 환희에 취하면 그는 Ares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고, erotic한 사랑의 압도적 힘으로 자신의 세계가

변형되면 이 사랑을 Aprodite라고 불렀다.

 

만신전은 신성의 복잡성을 상징했다. 가나안의 신들의 모임에서는 신의 아들들 중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신과의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olympos의 신들로 이루어진 가족 또한 신들의 통일체의 표현이었

으며, 이것은 그리스인이 주변 세계에서 경험한 신성한 힘들의 관련성과 상호의존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의 만신전에 특별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높은 수준의 응집성과 조직성이었다.

 

고전시대 그리스인은 결코 과거의 이교도 신앙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탁월한 분석능력을 이용했고 과거의 전망을 드높였으며 거기에 체계와 근거를 부여했다.

 

olympos의 가족은 유쾌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었다. 이들은 父母(zeus와 헤라), 숙부와 고모(포세이돈과 테메테르),

세 아들(아폴론, 아레스, 헤파이토스), 세 딸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부인들도 있

었다. 신들의 사자 헤르메스, 마법의 여신 헤카테, olympos의 질서에 도전하는 역할을 맡은 디오니소스가 그들이다.

 

그리스의 만신전은 언어에 비유되어 왔다. 언어에서는 모든 단어의 의미가 사전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과의 유사점

이나 차이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세계에서 일신숭배는 금기였다. 끔찍한 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위였다. 신들은 싸우고 논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현실의 진정한 측면을 대표했다. 그런 측면이 없으면 우주가 영구적으로 훼손될 터였다.

다양한 신들 전체를 숭배함으로써 모순들을 함께 끌어안는 통일성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모순의 통일 … 正反合? - Hegel 변증법은 이런 데서 왔을까?)

 

Ares와 Athena는 둘 다 전쟁의 신이지만, Ares는 전쟁의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측면을 대표하는 한편, Athena는

승리의 영광을 체현한다. Poseidon과 아테나는 종종 함께 숭배된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으로서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힘을 대표하며, 아테나는 문명의 여신으로서 자연의 힘을 길들이고 통제해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포세이돈은 파도를 일으켰고, 아테나는 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문명의 핵심에 있는 폭력과 모든 polis의 생존투쟁을 반영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형제 사이이며 서로 균형을 이룬다. 아폴론은 형식, 명료성, 규정, 순수를 대표하며,

디오니소스는 힘을 체현한다.

 

모든 신에게는 어둡고 위험한 측면이 있었다.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지만은 않았다. 누구도 도덕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운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인은 새로운 종교 형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과거의 믿음에 만족했다.

이 믿음은 축의시대가 끝난 뒤에도 700년 동안 살아남았다.(그리스인의 과거에 대한 고착)

 

춘추시대 -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중국서도 BC 8세기는 과도기였다.

BC771년에 50년 이상 周왕조를 괴롭히던 오랑캐 견융(犬戎)이 수도 종주에 침입, 유왕(幽王, BC782 - BC771)을

살해. 이후 周왕조는 작고 궁핍한 영토를 유지하며 제의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현실적인 정치권력은 아니었다.

이런 상태로 500년 이상 살아남았다. 왕은 상징적 권위유지, 제후들이 실질적 권력행사. 제후국들은 커졌다.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는 제의가 제후국들 간의 관계를 지배했다. 제후국들은 공식적으로는 동맹국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쟁국이었다.

오랜 관습이 왕의 권위를 대체, 전쟁, 복수, 조약을 통제하는 일종의 국제법적 역할을 했으며, 물자와 용역의 교환을

통제했다. 이것이 역사가들이 부르는 춘추시대의 출발이었다. 춘추시대(봄과 가을을 의미)는 BC722년부터 BC481

년까지(241년간) 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간결한 연대기의 이름이다.

당시인들 눈에는 이때가 갈등, 파편화의 혼란시기로 보였겠지만, 돌이켜보면 낡은 군주국에서 통일된 제국으로

나아가는 복잡한 이행기였음을 알 수가 있다. BC8세기 중국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는 새로운 감수성이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

 

商(殷)나라와 초기 周나라는 별 생각 없이 짐승을 수백 마리씩 죽여 희생제를 지냈다. 자신들의 자원이 무궁무진

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식량부족사태(산림벌채는 생물종의 자연 서식지를 파괴했다)가 벌어지자 사람들은 기존의

호사(자원의 황폐화)를 비난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희생제물의 대량살육은 더 일어나지 않았고, 죽이는 동물의 숫자도 예법에 따라 엄격히 통제했다.

새로운 절제 정신이 점차 도시 귀족의 생활을 바꾸어 나갔다. 사냥감과 가축의 숫자가 줄어들었기에 그들의 부는

사냥, 약탈보다 농업에 의존했다. 귀족의 마음은 여전히 전사(戰士)였으나, 그들의 전쟁은 더 제의화 되었으며

폭력도 줄었다. 전쟁, 사냥을 위한 원정도 줄었으므로 군자는 조정에서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의전, 예절,

제의의 세세한 면에 점점 더 몰두했다. 이제 제한, 통제, 절제가 표어가 되었다.

귀족의 모든 활동이 정교한 의식으로 바뀌었다. 춘추시대가 되면서 관습법(귀족계급들의 생활양식)이 기록되어

일관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제의 학문은 대평원의 여러 제후국에서 서기, 점쟁이, 천문학자, 문서보관인

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들이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급귀족인 사(士, 둘째 이하의 아들이나 후처의 자식)가 이들이었다. 그들이 書經, 詩經, 易經, 樂經(현존치 않음),

春秋를 엮었다. 그들이 귀족들의 관습적 관행을 성문화했다.

 

이들 제의 전문가들(儒)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귀족생활의 원리를 정리했다.

갑골문에서 儒는 목욕재계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제사장→전문가 집단 지도자→학자, 지식인으로 발전했다.

 

周나라 초기 왕실 제의는 자연 질서의 유지를 위해 고안된 것. 군주제 쇠퇴 후는 대평원 지대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儒는 제후와 대신들이 전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도록 도와주었다. 보통의 경우 禮의 특징은 자기이익(not kenosis

- 자기 버리기가 아니었음)이었고,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 명예를 선망했고, 예를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했다.

 

가장 유능하고 권위 있는 제의 학파는 魯나라에 근기를 두고 있었다. 제의 전문가와 서기들은(실제로 노나라는

자신이 신성한 전통의 관리인이라 생각했다.) 점차 예기(禮記)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 제의 규약(禮記)은 중국의

6번째 고전이 된다.

 

노나라 제의 전문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정리했다.

① 儀式의 효력은 그와 관련된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완벽히 수행하는데 달려 있다.

② 이런 완벽성은 참가자 모두가 典禮의 가치와 의미를 완전히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

 

BC6세기 말에 노나라 祭儀 전문가 한 사람(孔子)이 두 가지 원칙을 출발점으로 삼아 중국의 축의 시대를 열었으며,

이로써 이기적이고 잠재적으로 무의미할 수도 있는 규율에 숨어 있던 영적인 힘이 드러났다.(중국의 축의 시대 시작)

그러나 그 이전인 초기 단계에서도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 중 일부는 자기 버리기(kenosis)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성군 堯와 舜을 숭배했으며, 『서경』에 나오는 최초의 연대기 중 하나인 堯典과 舜典을 썼

을지도 모른다.

요, 순은 다른 문화적 영웅들과 달리 마법적인 업적을 쌓지 않았다. 황제처럼 괴수와 싸운 것도 아니고, 상 왕조의

건립자인 禹처럼 홍수를 통제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charisma로만 백성을 다스렸다.

이것은 군사적인 우월성으로 다스리는 전사들이 얻는 지배권과는 다르다.

요전에 따르면, 요 임금은 “공손하고 밝으며 의젓, 우아, 사려 깊었다. 대하는 사람들은 온화한 인품에 포근한 정을

느꼈다. 참으로 공손하고 겸양을 갖추었다.” 이런 자질에 내재한 힘은 세상 구석구석까지 빛을 말했고, 하늘 가장

높은 곳과 땅 속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이 힘은 중국의 모든 종족과 씨족에게 뻗어 나아가 큰 평화(太平)를 이룰

수 있었다. 왕의 힘, 즉 도덕은 백성에게 영적 이득을 주는 윤리적 힘이 되었다.

순 임금은 출신이 매우 미천했다. 어떤 이는 그가 東夷 부족이라 했고, 어떤 이는 그가 농민이나 도공, 어부라 했다.

순은 자신을 죽이려는 父와 배다른 동생을 피해서 간신히 달아났다.

그러나 그들에게 악의를 품지 않고 효도의 모범을 보였다. 그런 이유로 요 임금의 눈에 들어왔다.

요의 아들 丹朱(단주)는 사람을 속이고 다툼을 좋아했다. 그래서 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요가 죽자 순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 중국의 남쪽 지방으로 물려가 요의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들은 요의 아들이 아니라 순에게 자문을 구했고, 시인들은 순을 찬양하는 노래만 불렀다.

마침내 순은 천명을 받아들였다. 그도 물러날 때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治水담당 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禹는 商 왕조를 창건했다. 요와 순은 聖人이 되었다. 요와 순은 자신의 지위와 위엄에 집착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보다 백성의 유익을 앞세웠다. 그들은 예가 계발하고자 하는 절제, 겸손, 자제, 경의의

원형적 모범이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이런 위인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성인)에게는 새로운

호전적 경쟁자들이 있었다. BC8세기에 대평원 주변 세 나라는 오랑캐 땅으로 파고들어 영토를 확장했다.

북쪽 산악지대의 晋, 산동 북서부 자원이 풍부한 해안 지역의 齊, 양자강 중류의 큰 나라 楚가 있었다.

이중 초가 제일 먼저 周나라의 전통을 버렸다.(전국시대 돌입)

 

숲으로 간 현자 -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인도 북부 갠디스강 지역의 가정을 가진 남자가 가정과 사회의 대들보가 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중심의

삶을 거부하고 일부러 숲으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출가자(삼야신)들은 인도의 영적 탐구에서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한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였다. 이 시기는 아마도 BC8세기였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아리아인이 인도로 오기 전의 인도 원주민의 관행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베다 祭儀主義者의 자연스런 발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데올로기라고 주장

하기도 한다.

 

『리그베다』는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흙 같은 노란색 옷을 입은 방랑자들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신들이

전에 가본 곳을 가고 멀리서 사물을 본다.”고 말했다. 그들은 산과 밀림에 살면서 어린이와 가축을 잡아먹는 무시

무시한 神 루드라를 섬겼다. 루드라는 원주민들이 믿는 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출가자들은 브리티야 전사들과도 닮은꼴이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베다 사회의 가장 자리를 배회했다. 브라티야는

인도유럽어 방언을 썼으며, 베다 종교를 절대 수용치 않은 아리아 이민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먹을 것이 필요

하면 공동체에서 훔쳤다. 그들 옷은 검은색(루드라의 색)이었다. 그들은 어깨에 숫양 가죽을 걸쳤고 그들 자신의

제의를 행했으며 통제된 방법으로 숨을 마시고 뱉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3번의 숨을 연습했다.

 

나중에 자기 비움(kenosis)의 영성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이 초기 형태의 요가는 브라티야와 새로운 금욕주의자들

사이에 이데올로기적인 연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의전문가들은 典禮에서 폭력을 없애고 더 내적인 영성을 계발하기 시작했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고대 전사 무리

가 탁발승 비폭력 공동체의 model이 되었다.

출가자들은 가축 약탈자들의 기동성 있는 옛 생활방식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선조가 새로운 영토를 열었던 곳에서

내적 세계를 탐구하고 옛 전투를 깨달음을 위한 내적투쟁으로 바꾸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 동안 전쟁의 규율은 영적으로 해석된 평화로운 관행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것은 가족을 떠나 스승의 집에서 살며 베다를 공부하는 젊은 브라마카린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그의 삶은 브라마티야와도 비슷하다.

 

세계의 타 지역에서도 인도-유럽계 젊은이는 종종 일정기간 광야에서 지내야했는데, 이것은 전사의 에토스를

배우는 과정의 일부였다. 젊은이는 이 시련을 거치면서 사냥, 자급자족 등 생존 기술을 익혔다.

브라마카린도 어른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의 일부로 숲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사냥을 하거나

동물을 해치거나 전차를 모는 것은 분명히 금지되었다. 브라마카리야(신성한 생활)는 베다의 삶에 입문하는 것이

었다.

 

제자는 순결을 지켜야 했고 폭력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육식을 할 수 없고 불가에 앉아 땀 흘리고 호흡을 조절

하면서 타파스의 금욕생활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리그베다』를 외우고 제의의 정확한 절차를 익혔지만 그

가 얻은 지식(비드야) 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인도에서 교육은 절대 사실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트라를 외우거나 과제, 제의, 고행 등을 직접 해야

했다. 이는 text 공부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런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변화시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브라마카린은 신성한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의 중간지대에 살면서 신성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그에게 스승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BC세기에 이르면, 브라민 사제는 눈에 보이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브라민 스승은 항상 감각을 훈련하고 늘 진실을

말하며 비폭력을 실행에 옮기고 어떤 경우에나 초연한 평정심을 보여주는 신성한 삶의 구현자였다.

스승은 매일 제자의 새로운 자아(아트만)가 태어나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이 새로운 자아는 산도 움직일 수 있었다.

입문식을 마쳐 완전한 브라민이 된 제자는 세상으로 돌아가 아내를 얻고, 신성한 불을 밝히고, 자기 계급의 의무를

이행하고,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BC8세기 어느 시점에 견습을 이미 마친 성숙한 브라민들이 스승 없이 혼자서 브라마카리야를 수행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들은 숲에서 살며 사회를 거부했다. 출가자는 자신의 브라마카리야를 희생제의 더 높은 형태로 보았다.

그의 신성한 불은 내부에서 타올랐으며 그가 들이마시는, 생명을 주는 모든 숨에 나타났다.

그가 먹는 모든 음식은 보이지 않는 내적인 불에 바치는 제물이었다.

이제 물리적인 불에 땔감을 던져 넣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의 개혁가들은 인간의 아트만, 즉 내적인 자아가 바로

프라자파티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희생제였다. 출가자는 희생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적인 행동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이렇게 묻는 셈이었다. 진정으로 희생제란 무엇인가? 누가 진정한 브라만인가? 외적 제의를 행하는

사제인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신성한 불을 운반하는 출가자인가? (외적에서 내적으로)

 

..................................

tapas : 산스크리트어로 열 또는 열정을 의미. 베다에서 肉欲을 끊기 위해 행하는 고통스런 행위.

이는 금욕과 함께 이루어진다.

guru(구루) : 산스크리트어로 ‘존경할 만한’의 뜻. 힌두교에서 자력으로 영적 깨달음을 얻는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

고대 인도에서 베다의 지식은 guru가 제자에게 구술방식으로 전수. 전통적으로 제자는 구루 집에서 살며 복종과

헌신으로 구루 섬김.

.....................................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인 다.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로 꼽힌다. 제의 전문가들은 오래

전부터 희생제의가 신성하고 영원한 자아를 창조한다고 주장해 왔다. 희생제의가 바로 아트만이었다.

출가자는 아트만을 발판으로 우주를 통합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버림, 금욕, 신성한 삶의 규율을 발판 삼아

출가자는 자신의 아트만, 즉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브라만과 통일될 수 있었다.

숲 속 삶은 고통이었다. 끝없는 희생이었다. 그래서 점차 두 종류의 금욕주의자가 생겨났다. 은자는 마을(인간사회)

과 거리를 두고 숲에 살면서 뿌리, 과일 먹으며 타파스 실행. 다른 부류는 처자식과 함께 살면서 밀림 속에서 신성

한 가정을 이루었다.

출가자는 더 급진적이었다. 그의 출가는 신체적이기보다는 이념적이었다. 마을에서 음식을 구걸하는 것은 허용되

었지만 집은 가질 수 없었다. 숲의 암자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족, 불, 제의, 섹스,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말이나

감각을 통제해야 했다. 머리를 산발하고 헝클어뜨린 은자와는 달리 출가자는 삭발하고 아힘사(불상생)를 실행에

옮겼다.

브라모디아 시합에서 상대를 침묵시킨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출가자는 말없는 현자가 되어 언어 너머에 놓인 실재

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런 엄격한 금욕주의의 합리적 근거는 『아라냐카』, 즉 숲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금욕은 타파스의 불로 사람을 희생 제물처럼 태웠다. 출가자의 가장 깊은 자아가 바로 희생제였으며,

여기에 브라만 최고의 실재가 담겨 있었다.

 

새로운 영성은 과거의 영성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자라났다.

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생활방식은 출신계급에 따라 결정된다고 선포하던 시대에 출가자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축의 시대의 새로운 영웅은 자신의 무예와 용맹을 자랑하는 영웅적인 전사가 아니라, 자기 내면을 탐구해

스스로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하고 아힘사에 헌신하는 수도자였다.

출가자는 야타부타(yathabhuta.산스크리트에서 있는 그대로의 뜻.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말함), 즉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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