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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축의 시대 (3) - 앎을 향한 여행. 고난의 시대. 공감의 발견

송화강 2019-05-12 (일) 22:24 6년전 4429  

제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BC7세기- BC6세기 경)

 


인간 내면의 정복 우파니샤드



베다 종교는 베단타즉 베다의 끝이라고 부르는 우파니샤드에서 성년에 이르렀다.

고대의 베다 종교는 끊임없는 이주와 새로운 영토의 정복에서 영감을 받았다폭력적인 갈등의 세계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한 무리의 신비주의자들은 내적 공간의 평화로운 정복에 나섰다.

이것은 종교사에서 주요한 진전을 뜻한다.

외적인 제의가 엄격한 자기 성찰로 대체되었음에도이것은 혁신이 아니라 고대 전통의 완성으로 여겨졌다.

BC7세기- BC2세기 사이에 나온 고전 우파니샤드』 13권은 리그베다와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우파니샤드』 또한 슈루티즉 계시된’ 이라 최고의 경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해석이 쉽지는 않지만그럼에도 베다 문헌 가운데 어느 것보다도 힌두의 영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최초의 두 우파니샤드는 브라마나의 세계에서 단절 없이 등장했다.

숲의 책’ 아라냐카와 마찬가지로 이 텍스트들 역시 여러 사제 학파가 내놓은 브라마나 주석에 덧붙은 秘儀的 부속

문헌이었다실제로 최초의 우파니샤드는 자칭 아라냐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파니샤드의 저자는 전통적인 방식의 반두’(관련)를 지적하면서(scape goat)의 여러 부위가 바로 자연

세계라고 밝힌다종마의 머리는 새벽눈은 해숨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제의를 정신적으로 거행하고 완수할 수 있었다.

물리적이고 외적인 희생제와는 연결이 끊어지고이제 온전히 현자(리시)의 정신 속에서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는 모든 찬가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신성한 음절 (om)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된다.

인도에서는 소리가 언제나 신성했다소리는 최초의 실재였다소리가 나오고 난 뒤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서 파생

되었기 때문이다한 음절이 전 우주를 대표한다고 보았다옴은 해별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었다.

가지가 모든 잎을 붙들고 있듯이옴은 모든 말을 붙들고 있다진실로 온 세상은 옴에 다름 아니다.

옴은 브라만()이기 때문에 불멸이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불멸의 두려움 없는 소리를 읊조리면서 반두를 명상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불멸을 이루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파니샤드에 담긴 전망의 핵심에 다가가게 된다.

이제 초점은 제의를 외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제의의 내적인 의미에 맞추어진다.

단순히 제의와 우주의 관련(반두)을 확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존재의 근거인 브라만에 이룰 수 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Deva(산스크리트빛나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내부로 눈길을

돌렸다실제로 이 각각의 신은 자신의 창조물이며그 자신이 이 모든 신이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의 초점은 아트만즉 자아였다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梵我一如)

현자가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면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재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현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입증하지 않는다.

text는 체계가 없고 논리는 괴상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합리적인 논증 대신 경험과 환상 이야기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경구와 수수께끼만 있을 뿐이다.

현자들은 브라모디아,(Brahmodya. 제의적 시합)즉 경쟁자들이 브라만의 신비를 정의하기 위해 논쟁을 감독한다.

그러나 이 논쟁은 늘 침묵으로 끝이 났다이것은 그 실재가 말이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음을 암시한다위대한 말씀은 정상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논리나 감각적 지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랜 훈련명상또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자기 성찰을 계발함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란 말은 가까이 다가앉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비주의 경향의 현자(rishi)가 발치에 앉은영적 재능이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던 신비한 지식이었다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현자들은 종교의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 있었다그들은 지도 없는 정신세계에 침투

하여 선구자가 되었는데오직 재능이 있는 소수만이 그들과 동행할 수 있었다그러나 삶은 변하고 있었다.

변화된 환경에 대응할 영성을 찾을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인 상태만을 의식할 때 자아는 아난다(ananda), 즉 브라만의 희열을 경험한다.

梵我一如일 때 희열을 느낀다는 것).

자아를 알게 된다는 것은 순수한 환희의 경험즉 엑스타시스다.

이 앎은 개념 너머에 있으며 논리적 영역에 의존하지 않았다이것은 마음 내부에 존재하는 내적인 빛의 자각이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직관으로서 일반적인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앎은 개인을 변화시킨다이 앎은 오직 오랫동안 자기 성찰 훈련을 한 뒤에만 얻을 수 있다.

이를 갈망하는 사람은 야지나 발키아의 문답법을 연습해야 한다.

즉 일반적인 사고 습관을 체계적으로 벗어버리고자신의 내적세계무의식적 상태를 의식하고늘 자신이 원하는

앎은 말을 넘어선 것이며 세속적 생각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것이라고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

 

※ 물 컵에 소금을 넣어보라녹는다그 물은 짠물이 된다그러나 소금은 안 보인다.

단식 끝에 몸이 탈진베다 텍스트를 암송할 수가 없었다정신이 순수한 지성이 아니었다.

음식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아트만은 신체적인 동시에 영적이었다.

 

※ ananda (성교 때 남녀 합일 같은 것)

※ 슈라마나 (분투하는 자)

※ shruti(산스크리트들은 것계시)

 



로고스그리스 영웅시대를 끝내다.



축의 시대 인도의 현자들이 영웅적인 규약을 버리고 아리아 전사의 원형인 인드라(신성한 전사질서의 )를 베다

(veda. 산스크리트어지식아리아 인도인의 엄청난 양의 신성한 문헌)를 공부하는 낮은 지위의 제자로 강등시킨 반면,

그리스인은 polis 전체를 군대로 만들고 있었다.

인도의 신들은 출가자의 정신적 과정 속에 통합되기 시작했지만(內面化),

그리스인은 자신의 신들에게 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外面化).

어떤 면에서 본다면고대 그리스 세계는 BC7세기에 번창했다.

특히 Sparta는 개인 이익을 polis에 복속시키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시민은 homoioi(평등한 또는 하나인 뜻)라 불리었다.

이런 면에서 이 같은 체제는 kenosis(자기 버리기)라는 축의 시대 이상의 패러디였다.

Sparta의 kenosis는 아힘사(불살생)이 아니라 군사적인 능률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Sparta시민의 평등은 타 도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하는데 의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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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산스크리트 indra, 팔리어 sakka)

인도 신화의 천신힌두교에서는 천국 또는 수미산에 거처하고 있는 신들의 왕.

불경에서는 제석천제석천존 등으로 불림베다교힌두교자이나교불교에 등장)

자이나교

BC6세기경에 vardhamana가 당시의 정통 veda(초기 힌두교의례에 반대해 창설한 인도의 종교이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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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를 처음 주장한 사람들은 veda시대의 동물희생제에서 만연했던 살생관행과 관념에 반기를 든 한 종파에 속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조신을 믿지 않는 자이나교는 ahimsa(불살생교리즉 어떤 생명도 살상하지 않는 것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고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로 고행과 수도생활을 통해 성취해야 할 종교적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2천년 동안 기독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문명의 몰락과 nihilism의 도래를 예견하고그와 같은 니힐니즘의

극복을 위해 초인영원회귀 등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니체의 작품 중 가장 대표작그는 이 책에서 신의 죽음을 말하며 지상의 의의를 설파했고, ‘영원회귀로 삶의 긍정에

대한 개념을 밝혔으며초인의 이상을 가르쳤다초인은 모든 고뇌와 죽음을 초극한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자라투스트라 조로아스터(zoroaster)로 더 많이 불림.

고대 이란(Persia) 출생의 예언자출생연대 미상그 이름을 따서 만든 조로아스터교(拜火敎)는 고대 이란의 아케메

네스(Achaemenes)조와 파르티아(parthia)조 그리고 사산(sassanian persia)조 시대에 걸쳐 융성하다가 이슬람교

가 생기면서 쇠퇴조로아스터교 창시 연대도 미상.


Zoroastrianism (拜火敎라고도 함) - (이슬람교 이전의 고대 이란 종교)

고립된 지역과 특히 인도에서 번성했다인도에는 '파르시또는 '파르세'로 불리는 이란 조로아스터교도 이주자들의

후손이 남아 있다. BC6세기에 이란의 예언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자라투스트라(영어명Zoroaster)가 창시했으며

다른 서양종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유일신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을 띤다.

 

자라투스트라의 개혁은 그가 태어나고 교육받은 전통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그 당시 사회는 족장과 사제계급전사계급 농부와 목축업자 계급 등 3계급으로 구분된 듯하다.

이 계급구조는 종교에도 반영되어 특정 신들즉 다이바(천상의 존재)들이 3계급과 각기 관련되었다.

예를 들면 미트라와 바루나를 위시한 아후라()들은 제1계급과 관련되었다.

 

자라투스트라는 한 아후라즉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최초로 아후라 마즈다를 선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신은 다리우스 1(BC 522-BC486 재위)의 위대한 신으로 등장하는데다리우스가 자라투스트라의 제자를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는지아니면 독자적으로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자라투스트라의 교리체계에서 악의 근원은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 아들이 영원한 경쟁관계에 들어선 태초의 창조

때 자유의지를 행사한 것으로 소급된다.

한 아들인 스펜타 마이뉴(자애로운 영)는 선을 선택하여 진리·정의·생명의 속성을 얻는다.

또 하나의 아들인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는 악을 선택하여 그에 수반되는 파괴·불의·죽음의 힘을 얻는다.

자라투스트라에 따르면세계는 얼마 뒤 대화제로 소멸되고선의 추종자들만이 새 창조에 동참하기 위해 부활한다.

새 창조가 일어날 때까지 죽은 자의 영혼은 보응의 다리를 건너는데 선한 자는 천국으로사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기

위해 기다린다.

 

후대의 조로아스터교 우주론은 세계의 역사를 각기 3,000년씩 4시기로 구분되는 광대한 드라마로 인식한다.

무한한 시간 안에서 빛에 거주하는 오르마즈드와 그의 아래 어둠에 거주하는 아흐리만은 무한한 시간 동안 서로 공존

한다.

첫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그들을 갈라놓았던 공허를 건너 오르마즈드를 공격했다.

오르마즈드는 투쟁기간을 줄이려는 아흐리만과 한시적으로 협정을 맺지 않으면 투쟁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르마즈드는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가장 경건한 기도인 아후나 바이

랴를 암송한다.

아흐리만은 혼비백산하여 심연으로 후퇴한 뒤다음 3,00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오르마즈드는 먼저 자애로운 불멸자를 비롯한 영적인 존재를 창조한 뒤그에 상응하는 물질인 하늘···

식물 및 최초의 황소와 최초의 인간(Gaymart)을 창조한다.

그 다음 오르마즈드가 인간의 선재 영혼(fravashis)을 향해 초기 상태에 영원히 머물든가아흐리만에 대한 승리를 보장

하기 위해 물질세계로 화육(化肉)하든가 선택하라고 지시했을 때그들은 탄생과 전투를 선택한다.

한편 아흐리만은 여섯 마귀와 물질적인 창조를 했다.

 

두 번째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최초의 여자인 창녀의 유혹을 받아 하늘을 찢고 오르마즈드의 창조물을 타락

시켰다아흐리만이 마가요마르트를 죽이자 그의 몸에서 인간과 광물이 나왔고황소를 죽이자 그 몸에서 동물과

식물이 나왔다.

세 번째 기간에 아흐리만은 물질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오르마즈드가 만든 함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운명에 처했다.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되자 지상에 종교가 도래했다그것은 자라투스트라의 탄생이었다.

1,000년 주기가 끝날 때에는 자라투스트라의 계승자요사후에 낳은 아들인 새로운 구원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 번째로 등장한 마지막 구원자인 사오시안스는 마지막 심판을 행하고불멸의 음료수를 분배하며새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무한한 시간에서 비롯된 유한한 시간은 12,000년이 지난 뒤 무한한 시간과 융합된다.

 

조로아스터교의 문서들은 2가지로 뚜렷이 구분된다.

본래의 경전인 Avesta는 아베스타어로 불리는 고대 이란어로 기록되었고그보다 훨씬 후대의 본문은 중기 페르시아

방언인 팔래비어 또는 페르시아어로 씌어졌다.

자라투스트라가 죽은 뒤 그의 종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남쪽으로 서서히 전파되었고서쪽으로는 메대와

페르시아 영토로 전파되었다.

이렇게 전파되는 동안 조로아스터교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남신·여신을 숭배하던 고대종교와 혼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시대(BC599-BC330)에 진행된 듯 한 이 혼합 과정은 아베스타후반부에 반영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BC330) 뒤 약 4세기가 지났을 때 이란은 다소 헬레니즘화 되었고 토착종교는 무시되었다.

그 결과 조로아스터교의 부흥은 아르사시드 제국즉 파르티아 제국(BC247~AD224) 말엽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되

었다.

 

AD224년 민족주체성을 확립한 새로운 페르시아 왕조인 사산왕조가 출현하여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 왕조의 지배계급은 상당한 권력을 소유했고다른 종교들(그리스도교·마니교·불교)을 박해했다.

아베스타가 편찬되었고일상어인 팔래비어로 번역·주석되었다.

아케메네스 통치기간에 가타의 유일신론 체계는 점차 마즈다교의 이원론적 교리로 대체되어 마침내 정통 교리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배 아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설득과 강요를 받았지만조로아스터교는 어느 정도 관용

의 대상이 되어 약 3세기 동안 그 핵심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8~10세기에 종교 박해가 일어나고 이슬람교 개종이 강요되자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이란을 떠나 인도로

가서 대부분 봄베이 지역에 정착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르세라고 불린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부·교육·자선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 파르세들은 이란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가바르)과 새로이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 2개 집단과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들만이 오늘날까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조로아스터교 예배는 신전의 불을 돌보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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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천문/기상학자(1473-1543).

폴란드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룸.


코페르니쿠스(코페루니쿠스)적 전환

칸트가 자신의 인식론상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말.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종래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칸트는 이 사고방식을 역전시켜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과학적 인식의 근거를 객관으로부터 주관 쪽으로 옮겼다는 점에서천문학상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地動說)에 비견할 만한 인식론상의 전환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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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세계는 새로운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놓였다처음에 식민화는 polis 내부 문제를 해소하는

해결책이었다문제아들은 다른 정착지를 세우라고 쫒아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BC7세기 중반에 이르자 동방의 더 발전한 사회들과 접촉하면서 국내 상황에 대한 불만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외국서 보았던 사치를 즐기고 싶었다수요가 자원을 넘었다.

어떤 가문은 부자가 되었고다른 가문은 빚을 졌다. BC650년이 되자 많은 도시국가의 씨족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

전투갈등이 발생했다.

원인은 아마도 일부 귀족이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고 공용 토지를 개인용도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소작인은 농산물의 6분의 1을 귀족에 바쳐야만 했고귀족이 법원을 지배했다.

그래서 귀족과 농민 사이에 위험한 틈이 생긴 것.

부채에 시달린 농민은 노예가 되었다사회는 불안해졌다.

BC8세기 말에서 BC7세기 초에 활동한 시인 Hesiodos는 어떤 polis에서는 자식이 부모 말 안 듣고세대 간에 반목

하며나이 든 자가 젊은 자를 이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농부였으며(보이오티아 지방동방의 많은 새로운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쓰고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단 첫 그리스 시인이었다.

어떤 면에서 헤시오도스는 Homeros적인 음유시인보다는 헤브라이의 예언자에 더 가까웠다.

 

Hesiodos는 개별적인 법적 결정(dikai,디카이)은 女神 디케(dike, 정의)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세대가 엄혹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보았다.

앞으로 그리스 사회의 특징은 정의(dike)가 될까아니면 영웅적 전사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무절제(hybris)가 될까?

고민했다. (정의=dike, 무절제/오만=hybris)

 

Hesiodos(BC7세기경에 활동한 그리스 시인흔히 그리스 교훈시의 아버지로 불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고 오래된

인도유럽 신화인 인간의 네 시대를 새로 썼다.

전승에 따르면, 4시대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뒤로 갈수록 타락했다각 시대는 금청동철 등 금속의 이름이

붙었다그는 청동기시대와 가장 타락한 철의 시대 사이에 영웅시대를 넣어 이야기를 바꾸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황금시대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었다인간은 행복한 삶을 누렸고 병노화도

몰랐다죽음은 잠처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찾아왔다인간은 살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다비옥한 땅이 청하지

않아도 열매를 내주었기 때문이다이 같은 인류는 사라졌다.

 

그러자 올림푸스의 신들은 시대의 인류를 만들었다인간은 성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마침내 성년에

이르러 히브리스의 지배를 받는 짧고 괴로운 삶을 살았다그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무모하고 부주의하게 서로

이용하고 상처를 주었으며 신을 경배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

 

제우스가 화가 나서 그들을 청동시대 인간으로 바꾸었다그러나 그들은 은 시대보다 더 심각했다.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지만 힘이 넘쳤으며전쟁의 신음과 폭력에 중독되었다그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심장은 부싯돌처럼 단단했고·다리는 육중하고 막강했다.

사회는 너무 제멋대로고 호전적이어서 청동시대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다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영웅종족을 만들었다이 사람들은 半神이었으며정의롭고 선했다그들은 조상의 hybris(무절제)

등을 돌렸지만그럼에도 무시무시한 트로이 전쟁을 벌였으며 마침내 이 전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영웅시대)

 

영웅의 시대 뒤에는 Hesiodos의 시대인 철의 시대가 이어졌다이 시대에는 세상이 뒤집혀 불가피한 파멸을 향해

곤두박질을 한다삶은 힘들고 희망이 없다낮이면 일을 하고 쉴 새 없이 비통해한다밤이면 쇠약해져 죽는다.

그럼에도 들은 인간에게 약간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철의 시대에는 선과 악고통과 쾌락을 나눌 수가 없었다사람들은 등이 휠 것처럼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었다모순된 감정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시대였다모든 것이 뒤섞여있었다그러나 철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정의의 요구에 따르거나아니면 히브리스라는 귀족적인 죄에 빠져들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디케를 무시하면 악이 승리할 것이다힘이 정의가 되고아버지가 자식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자식이 부모

를 경멸하고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오랜 우애가 사라질 것이다. “어느 것도 지난 시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명했다사회 정의를 실행한 인간들은 신들의 사랑과 존중을 맡았다청동시대의 폭력적인 전사

들은 죽임을 당했다영웅들은 행복하고 근심 없는 삶으로 옮겨갔다.

정의는 인간을 신에게 더 가까이 데려갔고사람들은 서로 품위 있게 행동하고, olympos의 신들에게 희생제로 경의를

표했다또 자신의 자리도 알았다이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따라서 낡고 자멸적인 전사의 에토스는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 Hesiodos의 암시다.

 

이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었다바로 이것이 축의 시대의 주요 주제다.

인도에서 현자들은 인간이 고통과 필멸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기술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에게는 그런 야심이 없었다.

사실 헤시오도스는 인간이 신의 세계로 올라가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했다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있으며,

pandora(첫 여자였던 판도라는 아름다운 악이었다.)가 풀어놓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철의 시대 인간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그들은 Prometheus처럼 반항하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히브리스는

자멸을 가져왔다프로메테우스의 반역은 그 자신의 고통과 인간의 쉼 없는 노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인들은 체념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농민은 경제적 구제몰수당한 재산의 반환법의 보호

요청과 그들의 대의를 옹호하는 귀족을 지지하자 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었다.

BC655년에 첫 티라노스(tyrannos. polis에서 비합법적으로 독재권을 확립한지배자인 참주를 의미.

영어 tyrant. 독재자의 어원그러나 본래 이 말은 폭군이 아니라 바실레우스– 왕과 같은 의미였으나 BC4세기 이후에

바실레우스는 세습적이고 합법적인 왕을티라노스는 초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독재적 지배를 가리키게 되었다.)

코린트를 장악했고 다른 polis가 그 뒤를 이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잔인하고 억압적인 독재자가 아니라초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지도자일 뿐이

었으며인간의 이익을 위해 관습법에서 벗어나 통치를 했다. (처음에는)참주는 정의의 옹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참주제는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었다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증오하는 마음으로 압제를 기억했다.

그러나 참주제라는 또 다른 실험은 사회가 제대로 조직만 되어 있으면 지배계급의 착취를 제어할 수도 있고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주제 시기에 이루어진 군사적 혁신이었다.

BC8세기 말 무기제조가 상당히 발전. polis는 이제 소규모 귀족 전차 부대에 의존하는 대신 대규모 병력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군사기술을 갖추었다.

BC700 – BC650년 사이에 도시국가는 중무장 보병(hoplites)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으며, 1:1 전투를

벌이던 Homeros식 구식 전사들은 점차 사라졌다.

동원 가능한 인력이 핵심이었다전쟁은 이제 귀족의 특권이 아니었다영주건 농부건 지위신분에 관계없이 필요한

무기(hopla)를 갖출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위엄 있는 부대에 입대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중무장 보병 무대와 함께 새로운 평등이 탄생했다.

중무장 보병의 전투는 사람이 빽빽하게 늘어선 밀집대형즉 palanx(팔랑크스)가 특징이었다.

어깨를 맞댄 병사들은 8줄로 늘어섰다중무장 보병도 이전 어느 때보다 남성 주민 다수에게 의존하는 인민의 군대였다.

뒤집어 말하면 인민즉 데모스(demos)가 이제 기본적으로 군대와 다름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전투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독점적 특권이었다다른 3계급에게는 금지된 일전쟁은 전문적 활동.

따라서 사람들은 전쟁을 제한하거나 억제아힘사라는 불상생의 이상이 자리 잡으면서 전쟁을 점점 불순하고비극적

이고악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달랐다인도와는 정반대로 갔다. BC7세기에 polis 전체가 군대가 되었다.

시민은 곧 군대였으며언제든 불시에 동원될 수 있었다여기에서 과거와 근본적인 단절이 이루어졌다.

Hesiodos는 전통적인 영웅적 이상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중무장 보병 군대는 이런 단절을 가져왔다사적 명예를 추구하는 개인 전사는 시대착오적인 물이었다.

새로운 이상은 집단적이었다중무장 보병은 기본적으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군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아킬레우스의 오만(hybris)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탁월성(arete)은 다시 정의되었다탁월성은 이제 애국심과 공동의 선에 대한 헌신이었다.

축의 시대 Kenosis라는 이상과 마찬가지로이기심을 버리는 윤리와 타인에 대한 헌신을 장려했다차이가 있다면,

이런 자기 버리기(kenosis)가 전장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인 살인기계가 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소승적인 자기 버리기라고 할 수 있는 ahimsa와 kenosis의 東西 차이)

 

중무장 보병 개혁은 그리스를 바꾸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밀집대형에서 귀족과 어깨를 함께 한 농부는 귀족을

절대로 전과 같이 보지 않게 되었다과거의 복종은 유지될 수 없었다.

하층민(계급)들은 자신들의 조직(민회)이 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은 상층계급을 제거하는 대신귀족의 ethos를 채택했고 이렇게 해서 도시 전체가 결과적으로는 전사계급이 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원래 귀족영웅의 특권이었다그러나 밀집대형의 팔랑크스 사회에서 군대는 다른 언어를 썼다.

logos(대화 언어)는 Homeros와 영웅시대의 암시적인 시와 매우 달랐다.

신화적인 담론(mytos)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 진실을 표현하려 했으며사람들도 그것이 외부 세계의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logos는 실용적효과적정확해야 했다생사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무장 보병 군대의 logos는 절대로 시인의 mytos를 대체하지는 못했다둘은 공존했다.

둘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었다.

중무장 보병이 되는 시민이 늘어날수록, logos는 자기 자리가 분명한 언어이자 통치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BC7세기에 Sparta는 중무장보병의 ethos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나라였다.

BC650년에는 모든 남자 시민이 중무장 보병군대에 속했으며 demos즉 인민이 주권자가 되었다.

중무장 보병의 나라 스파르타에서는 젊은 전사에게 싸우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이 제의를 이용했다.

제의는 모의전투가 아니라 진짜 전투가 되었으며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젊은이들을 광야에 보내 용기와 자립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어린 중무장 보병을 선발특별한 연대의식을 갖게

했다그들은 낮에는 눈에 띄지 않게 행동을 하다가 밤에는 시골로 파견되어 helot(스파르타의 국유노예)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인도에서는 축의 시대에 등장한 윤리가 고대 제의에서 폭력을 빼버렸지만그리스에서는 낡은 제의가 군대의 요구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폭력조장) - 폭력과 제의





혼란한 시대 삶의 model 君子



(그리스인과는 달리중국인은 實利를 제의의 아름다움에 종속시켜 전쟁을 제어하려고 했다.

BC7세기에 黃河지역은 소란스러웠다그러나 제후국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두는데 성공했다이는 대부분 나라 지식층이 이끈 제의의 개혁 덕분이었다.

 

BC7세기가 되자 제후국의 삶은 로써 세밀하게 규제되어 정치사회군대 생활이 나라 조정의 정교한 제의적

의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이런 의식 중 일부는 상당한 영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은 아직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축의 시대는 그로부터 200년 후에야 시작된다나라 전문가들이 미래를 위해 단단한 기초를 닦은 셈이었다.

BC7세기 노나라 전문가들의 1차 목적은 절제와 자제를 통한 우아한 삶이었다.(군자들의 사회전설)

주나라 왕은 왕의 영토로 물러나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그의 자리는 오래된 읍성을 다스리는 제후들이 차지했

으며이 읍성들은 중국(中國), 즉 중앙의 나라들로 알려져 있었다.

제후는 제의에서 왕의 상징적 역할 가운데 많은 부분을 떠맡았다.

 

예는 전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이런 의식에 관심을 쏟는 자의 신성함도 높여준다는 것이

었다일관되게 최고의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하면이 사람은 자신이 숭배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절대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서는 예는 관계를 신성하게 만들었으며 타인들에게 신성함을 부여했다.

 

군주 자신의 생활도 꼼꼼하게 규제를 받았다나중에 축의 시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줄 또 하나의 원리지만사실 그의

행동의 특징은 無爲(아무 것도 하지 않음)가 되어야 했다.

고대 중국의 군주는 (나라의 정책목표를 제시해야 하는현대의 국가수반과는 달랐다.

 

군주는 온전히 수동적이어야 했다그는 조정을 통치하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유일한 임무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힘에 집중하면서 자기 대신 행동하는 관리들에게 자신의

힘과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었다그가 실수를 하면 주의를 주는 것이 봉신의 의무였다.

史官이 그의 모든 언행을 기록했다군주는 신중하게 선별된 음악만 듣고전례 규약에 따라 준비된 규정 식사만 해야

했다봉신들은 그 앞에서는 군주는 힘차게 움직여 그로부터 발산되는 힘으로 활기를 얻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회의에서도 군주는 열변을 토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생각하면 말은 달리기 시작한다는 식으로 말을 안 해도

이미 생각 속에 말이 있었다.

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고대의 성군인 순()임금이 자기 내부의 힘에 완벽하게 집중하며 정확한 위치에 서 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그의 도덕이 워낙 커서 그것만으로 신민을 인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위로 다스렸다 … 무슨 행동을 하겠는가그저 남쪽을 바라보고 엄숙하고 공손하게 있을 뿐이었다.” (논어)

 

전례는 군자의 지위와 위엄을 고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제대로 실행되면 조정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몰아낼 수도

있었다여기에 역설이 있다.

 

BC7세기 동안 제후국들은 새로운 중용정신에 따라 엄격하게 규제되는 일종의 예의 바른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제의는 전투에서 허용되는 폭력을 엄격히 제안했으며전사들이 적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쟁은 예의와 억제가 지배하는 정교한 야외극이 되었다.

전사들은 신사처럼 싸워야 했고전쟁은 짧았다개인적 이익을 위한 전쟁은 할 수 없었다.

오직 오랑캐 침입을 물리치거나 반역을 다스려 천도(天道)를 회복하려고 할 때만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군주는 군대와 함께 움직였지만모든 결정은 전쟁을 책임진 대신이 내렸다그는 可用자원을 알기 위해 인구조사를

했다춘추의 주석서인 左傳의 저자 좌구명(左丘明)은 대규모 인구조사를 했을 때 채무자는 방면하고,

빈자와 과부에게는 구호물자를 주었으며죄 지은 자는 사면해주었다그런 뒤에 군대는 조상의 사당 주위에 모였고,

이때 무기를 나누어주었다무기는 보통 때에는 무기고에 넣어 잠가 두었다전사들은 무기를 손에 쥐기 전에 단식을

해야 했다마지막으로 사람들은 地壇(지단)주위에 모였고군주는 희생제를 거행했다.”고 적었다.

 

전쟁은 종교적인 전례였다영적인 묵상에서 시작조상에게 올리는 기도와 희생제로 이어졌다.

전투에서는 늘 예의가 능률보다 우선이었다전투는 경쟁하는 명예들의 충돌이었으며무기의 충돌은 부차적이었다.

BC638년 의 제후는 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초나라 군은 송의 군보다 훨씬 많았다.

초 군대가 강을 건너고 있다는 소식에 제후 가신들이 당장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군자의 이름값을 하는 사람은 불행에 처한 적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대오가 형성되기 전에 진군의 북을 치지 않는

법이다고 했다.

 

나라가 위하지역의 주변국 중 하나인 나라와의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이 사신을 보내 새벽에 싸울 준비가 되었

다고 말했다그러나 나라의 사령관은 사신이 매우 초조해하는 것을 눈치 챘다.

부관들은 기뻐하며 당장 진격하자고 했다그러나 사령관은 전쟁규칙 중 한 구절을 인용했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거두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다약속한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거나위험한 통로를 통과하는

적을 몰아붙이는 것은 겁쟁이 짓이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어쭙잖게 만족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승리한 제후는 승전기념비를 세우길 거부했다.

 

나 때문에 두 나라의 전사들이 뼈를 해에 드러내게 되었다그것은 잔인한 짓이다.” 제후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여기에 죄를 지은 자는 없다목적에 충실했던 봉신들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저한 승리보다 제한된 승리를 좋아했다일부는 최소한의 사상자를 낸 일시적 패배를 더 좋아하기

까지 했다승리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제후는 정복한 영토를 봉신에게 주어야 했고봉신이 이렇게 추가의 지원을

얻게 되면 훗날 그의 통치에 반역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봉건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유지되었다봉신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국가의 평형을 흔들 수도 있었다.

 

노나라의 禮儀 전문가들은 예는 우리가 감정을 자유롭게 제어하도록 가르친다감정이 멋대로 가는 길을 따르는 것

은 오랑캐의 도이다.

典禮는 와 한계를 정한다.” 예는 폭력과 교만을 제어키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전례는 제방이 홍수를 방지하듯이무질서를 방지한다.”

 

활쏘기 시합은 군자의 자질을 드러냈다이것은 단순히 기술과 군사적 능력의 시험이 아니라평화와 화합을 장려하기

위해 고안된 음악적인 행사였다군자는 이기는 것은 진정으로 원치 않았다지는 것이 더 명예로웠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야심은 천박한 것이고열등한 인간이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따라서 패한 경쟁자에게 잔을 주는 것은 존경

의 행동이었다.

 

경쟁자는 둘 다 음악에 맞추어 정확히 똑같은 순간에 활을 쏘아야 했다두 개의 화살은 과녁을 맞히는 대신 공중에서

만나야 했다폭력과 대결은 일치와 조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시합이 끝나면 두 사람 모두 울었다승자는 패배자를 동정하며패배자는 승자를 동정하여 울었다.

물론 승자가 진정한 패배자였기 때문이다두 전사는 무릎을 꿇고 앞으로는 父子로서 살아가기를 약속하곤 했다.

 

는 쉽게 복수를 유발할 수 있는 호전적인 排外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양보정신은 정치생활의 특징이 되어야 했다가족생활도 똑같은 정신이 지배했다.

父子관계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아니라제후와 봉신의 유대에 기초를 두었다.

아버지는 제후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대리자였다둘의 유대는 멀고도 엄격해야 했다친숙하고 친근한 것은 제후가

봉신과 장난을 치고 빈둥거리는 것만큼이나 온당치 않았다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효도였다.

 

중국의 제의는 늘 생물학적인 것을 다듬고 개선하려 했다제후를 통해 분신들이아니 백성들이 예를 익혔듯이,

아버지를 통해 아들이아니 가족이 서()라는 공감의 덕을 배웠다는 중국의 축의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는 깨닫는 것밝게 아는 것을 의미)

 

예기는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utopia적 현실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BC7세기에 이런 이상은 나라를 거칠고

방종에 빠진 사회에서 중용과 절제를 중시하는 사회로 바꾸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상이 중국의 축의 시대를 가동했으며독특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BC679년 나라 桓公(환공)은 중국의 패자로 자칭하며 방어동맹(同盟)을 주도했다.

이 시점에서 제 나라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으며환공은 주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계몽 통치자였다.

패자는 동맹국으로부터 공물을 받고 공동방어망을 감독했다.

그는 여전히 주나라의 군주(통치권)를 인정했지만실제로는 스스로가 왕의 위치에 있었다.

 

會盟은 오래가지 못했다. BC643년 환공이 죽자 그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했다.

초나라가 호전적 태도를 보이자 진()의 제후가 새로운 동맹체를 구성했다. BC597년 초나라가 이 동맹을 물리쳤다.

결국은 폭력이 절제에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조화와 양보라는 과거의 이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이스라엘에서 BC7세기는 종교로서 유대교가 시작되는 분수령이었다.

이 무렵에 종교가 口傳傳承에서 기록된 text(신명기)로 전환된다. text로 종교적 진실이 제시되자 완전히 다르게 들렸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미리 준비된 느낌이었다구전이 제공하는 모호한 지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도인들은 가르침을 글로 전달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았다예컨대 text를 정독하는 것만으로 우파니샤드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신명기』 저자들은 야훼신앙을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이후 서구에서 종교적 정통성의 기준은 기록된 경전이 된다.

 

신명기』 저자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원래 신앙으로 돌아가는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전에는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였던 신성한 기둥’(아세라)이나 주상’(柱像.맛세보스)

같은 상징들은 불법화했다.

그들은 법전에도 놀랄 만한 새로운 법을 집어넣었다이스라엘의 예배는 엄중하게 중앙집권적으로 바뀌었다.

희생제는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붙이신 곳오직 그 신전 한 곳에서만 드릴 수 있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BC7세기에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이 말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야훼를 섬기던 다른 성전과 신전은 파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세라는 원래 가나안에서 섬기던 3대 여신 중 하나바알의 아내이자 다산과 중요의 여신구약에서 아세라를 상징

하는 것은 신성한 나무 또는 기둥이다아세라 목상은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목재가 들어가 있었다.

 

맛세보스는 맛세바의 복수형. “맛세바는 가나안 지방에서 기념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세운 돌(standing stone)

가리키는 말우리말 성경에서는 석상 또는 주상(柱像)으로 번역.

 

신명기』 저자들은 동물의 세속적 도살을 묵인했다생명이 담긴 피를 먹지 않고 경건하게 땅에 쏟는다는 조건만

지키면 됐다신명기』 저자들은 자체의 규칙과 완결성을 갖추고 종교와 나란히 기능하는 세속적 영역을 창조했다.

끝으로 신명기』 저자들은 왕의 전통적인 권력을 빼앗았다왕은 이제 신성한 인물이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의무는 기록된 토라를 읽는 것뿐이었다왕은 이제 하느님의 아들도야훼의 특별한 종도신성한 신들의

구성원도 아니었다특권도 없었고그의 백성처럼 법을 지켜야 했다신명기』 저자들의 저작은 요시아(유대의 왕.

BC640- BC609년 경)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셈이었다.

 

申命記系 역사서 …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세 5(여호수아판관기사무엘 상·열왕기 상·신명기)

까지를 申命記系 역사서로 본다신명기계 저자들은 북부이스라엘왕국과 남부유다왕국의 역사와 두 나라가 멸망한

원인과 그 의미를 찾는데 집중한다이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을 깨뜨린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며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면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명기』 저자들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며그들의 성취는 주목을 받을 만 했다.

그들은 오래된 왕실문서법전전설전례 문서 같은 이전 자료를 이용완전히 새로운 판본을 만들어냈다.

고대의 전승이 요시아 치세 시기 이스라엘의 새로운 상황과 관련을 맺었다.

어떤 면에서 신명기는 현대의 문서 같다세속적 영역독립적인 사법제도입헌군주제중앙집권적국가 등의

전망은 우리 자신의 시대를 보는 듯하다또 신명기』 저자들은 고대의 신화를 많이 덜어내고 훨씬 더 합리적인

신학을 전개했다신명기』 저자들은 과거의 전승을 현재 상황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자원으로 보았다.

신명기 저자들은 유대교를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5고난의 시대 (BC600- BC530년경)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축의 시대 핵심적 원리 중 하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아무리 고통스럽고 겁이

난다 해도 모래에 머리를 박고 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야훼는 성전 예배에서 카도슈즉 따로 떨어진’ ‘다른’ 존재였다성전은 사라졌지만 (바빌로니아로 붙잡혀갔을 때인

BC6세기이스라엘은 세계 나머지 땅과 다른 삶을 살아 여전히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인도 사람들이라면 만다라즉 명상을 위한 이콘(icon)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신을 중심에 둔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의 이미지)을 지향하고 있었다.

인도의 제의 전문가들이 전통적인 제의에서 폭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듯이이스라엘의 p(사제)도 전통적인 우주

창조에서 폭력성을 꼼꼼히 뽑아냈다이것은 놀라운 영적 작업이었다.

 

※ meme()이란 심미적영적 同心圓.

 

 

아테네의 솔론정치를 발명하다



BC6세기 초 polis를 무너뜨린 사회적 위기가 아테네에도 왔다착취 때문에 귀족과 농민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중재

자가 필요했다아테네는 solon(BC630?- BC560.70)을 택해 BC594년에 그를 도시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제도

개혁을 위임.

그는 위기 때 여러 polis에 조언을 해주던 독립적인 지식인 집단에 속해있었다. solon은 그리스를 널리 여행했고,

다른 지식인들과 polis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토론했다솔론은 아테네인들에게 dysnomia(무질서)의 파국을 벗어나

원래 그리스 사회의 규범으로 돌아가 eunomia(올바른 질서)를 수립하길 바랐다.

농부들은 중무장 보병이자 부의 생산자로서 polis에 필수적이었다귀족이 그들을 억압해서 사회에 유해한 불균형이

생겼으며이 불균형은 자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dysnomia는 이기심의 결과로서 오직 일치된 정치적 노력으로만 평화와 안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으며상황을 개선할 신성한 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solon은 단숨에 정치를 세속화했다인과관계에 신경을 썼으며어느 polis 하나의 특수한 문제를 넘어선 지점으로

시선을 돌렸다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을 발견했다solon의 eunomia 원리는 그리스

정치사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초기 그리스 과학과 철학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eunomia는 균형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었다사회의 한 부문이 다른 부문들을 지배해서는 안 되었다.

도시는 모든 전사가 일치하여 행동하는 중무장 보병 군대의 밀집대형처럼 움직여야 했다.

농부는 귀족에 맞설 수 있어야 했다그래서 solon은 농부들의 부채를 탕감했다.

 

귀족의 원로회의는 모든 시민들의 민회(民會)와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solon은 400인 평의회를 만들어 polis의 모든

공식적 집회를 감독하게 했다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켜려고 출신이 아닌부에 따른 지위를 규정했다. solon은 사법

제도를 개혁모든 시민이 집정관을 기소할 권리를 부여했다. (400인 평의회는 일종의 심의기구로서 민회를 지도했다.)

solon의 개혁이 귀족농민들의 불만 대상이 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참주정치를 촉구했지만, solon은 불균형한 정치

라고 거부했다그러나 BC547년 아테네에서는 참주가 권력을 장악하고 말았다.

Peistratos (BC6세기 초 – BC527?)와 그 아들이 BC10까지 아테네를 통치했다.

 

Plutarchos (BC46-Ad130? 74?)

 


소수의 그리스인이 BC6세기에 일어난 2가지 주변적인 운동에서 세계 다른 지역에 등장한 축의 시대의 전망을 향해

나아갔다첫 번째는 polis의 호전적인 ethos를 거부하고 비폭력이라는 이상을 끌어안은 오르페우스 종파.

그들의 모범은 그리스의 거칠고 주변적이고 문명화되지 않은 지역인 트라케의 신화적 영웅 오르페우스였다.

두 번째 운동은 사모스 출신의 Pythagoras(BC582?- BC497?.85?)가 시작했다.

그는 BC530년에 이태리로 이주한 뒤 동방을 여행했고인도의 카르마 교리의 한 변형을 가르쳤다희생제에 불참,

고기 멀리함과학과 수학 공부로 깨달음을 추구피타고라스 학파는 순수한 추상에 집중함으로써 물리적 세계의

독기와 멀리 떨어져 신성한 질서의 전망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스인 대부분은 여전히 전통적이고 유서 깊은 방식으로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나 BC6세기에는 새로운 합리주의가 태동 중이었다소수의 철학자들이 이미 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pythagoras 학파와는 달리(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과학 자체를 위해 과학을 연구했다.

이들은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의 polis Miletos에 살았다.

처음에 명성을 얻는 자는 Thales(BC624 – BC546.78?)였다그는 BC593년에 일식을 예언하룻밤 사이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이는 사실 운 좋은 추측이었고그의 진정한 성취는 일식을 신성한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 사건으로 본

것이었다.

그는 종교에 반대하지 않았다그의 말 중 유일하게 전승되는 것은 모든 것은 물이며 세상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

것이다물은 형태를 바꾸어 얼음수증기가 될 수 있었기에 다른 것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Miletos 출신의 또 다른 철학자 Anaximenes(BC566 – BC496.70)는 비슷한 생각에서 공기가 근원이라고 믿었다.

공기도 생명체에 필수적이고 변화에 능했다바람구름물도 될 수 있었다.

경험적 증거가 없었기에 이런 추측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설사 통념을 뒤집더라도 logos의 부추김을 따라 끝까지 가볼 필요를 느낀 그리스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

에서 의미가 있었다두 사람보다 혁신적이었던 Anaximandros(BC610-BC546,64)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철학자가 제1의 실체를 찾아내려면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더 근본적이고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Anaximandros는 우주의 기본질료는 전혀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apeiron.무한정적인 것) apeiron은 신성했

지만 신들을 넘어섰다그것은 모든 생명의 무궁무진한 근원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개별 현상은 어떤 관점에 따라 apeiron에서 분리되어

나왔으며우주의 모든 원소들은 전쟁을 벌이며 늘 서로 잠식하고 잡아먹었다.

 

시간은 우주에 어떤 형태의 eunomia(올바른 질서)를 강제하면서 각 요소가 적절한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며우주

의 어떤 한 가지 구성요소도 다른 것들을 지배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그러나 결국 만물은 다시 apeiron에 흡수될 터였다.

apeiron 신학자들이 신들 너머의 신이라고 부른 것이 될 잠재력이 있었다.

창조신화는 우리가 지상의 생명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에 관한 근본적 통찰을 드러내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내려고 신이 괴물과 싸운다는 이야기를 생명의 핵심에 자리 잡은 근본적으로 아곤(경쟁)적인

투쟁을 드러냈다생명은 늘 다른 존재의 죽음이나 파멸에 의존했다.

최초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들은진정한 창조성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내줄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P(사제 저자)는 추방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들던 시기에 창조이야기에서 세상 만물이 선하다고 주장했다.

Miletos 학자의 우주론은 영적통찰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그들은 추론 자체를 위해 추론을 했다.

미래의 서구 합리주의의 씨앗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인도의 철학자들은 종교적인 축의 시대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키는 창조신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상키아 인류 최초의 무신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완전히 다르고 veda 경전에도 거의 눈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고 부른다그 말뜻은 사유나 토론이었을 것.

철학이나 영성의 거의 모든 학파심지어 상키아를 못마땅해 하던 학파조차 상키아의 관념 중 한 가지는 채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맹아적 운동의 기원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BC6세기에 카필라라는 현자가 상키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우리는 그에 관해서 전혀 모르며그가 실제로 존재

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상키아는 Miletos 학파처럼 우주를 낱낱의 구성 요소로 분석해 들어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우리의 세상

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을 묘사했다닮은 점은 거기서 끝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바깥 세계(객관적 세계)를 지향한 반면상키아는 안(주관세계)으로 파고들었다.

Miletos학파는 여전히 세상은 신들로 가득하다고 주장한 반면상키아는 무신론 철학이었다.

브라만도아페이론(apeiron.그리스어로 '무한'의 뜻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을 여러 가지 물건의 아르케라고

했다아페이론은 아낙시만드로스가 기원 전 6세기에 제창한 우주론의 중심적인 개념)도 모든 것이 합쳐지는

세계영혼도 없었다.

 

상키아는 세계에서 최고 실재는 푸루샤(인간 또는 자아)였다그러나 상키아의 푸르샤는 리그베다의 인간

푸루샤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으며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구했던 자아(아트만)하고도 사뭇 달랐다.

푸루샤는 단일하고 유일무이한 실재가 아니었다당혹스러운 정도로 수가 많았다.

모든 인간에게는 개별적이고 영원한 푸루샤가 있으며이것은 죽음과 재생의 쉼 없는 순환인 삼사라에 말려들지

않고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했다아트만과 같이 푸루샤 또한 규정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특질이 없기 때문이다.

 

푸루샤는 인간 본질이지만영혼은 아니다우리의 정신적심리적 상태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푸루샤는 프라크르티즉 자연과 엉키게 되었다프라크르티는 마음지성 또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

들이 자신의 가장 영적인 부분으로 여기는 정신 심리적 경험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푸루샤와 프라크르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여성으로 묘사되는 자연은 푸루샤를 사랑한다자연은 우리의 해방을 갈망한다.

인간 삶의 특징인 미망과 고난의 덫으로부터 푸루샤를 풀어주고 싶어 한다.

 

프라크르티 물질자연본성 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연으로 여겼지만필요에 따라 본성이라는 말

도 사용했다.

 

실제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자연 전체가 우리 각자의 영원한 자아(푸루샤)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최고의 지식을 얻을 때까지 브라만으로부터 풀잎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은 푸루샤를 위해 존재한다.”

 

상키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이 참된 자아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런

자연과 푸루샤의 관계 묘사를 명상해야 했다.

상키아의 관념들은 우파니샤드의 영성에 만족하지 않는 출가자 집단에서 나온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들은 비인격적 브라만에 빠져드는 대신 자신의 개체성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들은 명상하는 가운데 희미하게나마 어떤 내적인 빛을 보았다.

이 빛은 그들에게 또 다른더 절대적인 자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상키아란 말은 한때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자연의 영역에서 자아를 분리하는 것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출가자는 이미 사회에서 물러났다이제 그는 다음 한 걸음을 내디뎌 자기존재의 진정한 중심진정한 영혼진짜

자아불멸의 푸루샤를 찾아야 했다상키아는 실상 분석을 시도했는데그것은 단지 출가자가 해방을 이루는 것을

도우려고 고안된 것이었다출가자는 숲의 은거지에서 실상을 상상하면서 인간 본성의 다양한 구성 요소를 이해

할 수 있었다출가자는 인간이 처한 곤경의 복잡성을 알아야만 그 곤경을 넘어설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상키아 학파는 자연에 3가지 서로 다른 가닥(gunas. 구나)이 있다고 가르쳤다이것은 우주 전체에서나 한 개인

에게서나 똑같이 분별해낼 수 있었다. (상키아 구나)


사트바 지혜푸루샤에 가장 가깝다.

라자스 열정신체적정신적 에너지

타마스 타성가닥 중 가장 저급한 수준

 

태초에 개별적 창조물이 존재하기 전에 3가닥은 제1질료 속에 조화롭게 공존했다.

그러나 푸루샤가 등장평형을 깨면서 발산과정이 시작되었다최초의 구분되지 않은 통일체에서 등장한 새로운

범주 가운데 첫 번째는 위대한 존재라고 알려진 지성(붓디.buddhi)이었다이는 우리의 자연적 자아의 가장

높은 부분이며이것을 분리하여 발전시키면 우리를 깨달음의 가장자리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

 

붓디는 푸루샤와 매우 가까우며거울이 꽃을 비추듯이 자아를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인간에게는 세상의 천한 요소들 때문에 흐려져 있다.

 

신을 모방하지 말고 가장 참된 자아에 눈을 떠야 절대적인 것을 발견한다원형은 머나먼 신화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 존재한다.

따라서 외부의 모범적인 인물과 합치는 것이 아니라내면화된 푸루샤와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키아는 자의식에서 새로운 단계를 상징한다인도인들은 일생 생활의 혼란 때문에 흐릿해지고우리 몸 안에

감추어지고우리 본능에 속박되고그 자신을 희미하게만 인식하는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기심이라는 올가미에 갇힌 자신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상키아는 무시무시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에고에 사로잡힌 보통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는존재의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그런 상태는 신성한 것도초자연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 본성의 완성이었다이런 자유는 노력만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었다.

 

상키아는 인도의 영성에 두 가지 기여를 했다.


① 모든 삶이 두카(dukkha)라는 인식이었다두카는 괴로움()으로 번역되지만불만족스럽다뒤틀려있다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

② moksha(해방). 상키아는 요가를 통해 내면세계를 다잡았다요가는 에고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었다.

에어로빅이 아니었다요가의 원 뜻은 멍에로 매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신의 힘을 멍에로 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명상 훈련은 인간이 moksha(해방)와 니르바냐(열반)에 이르는 것을 막는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요가 수행자들은(5맹세)


1) 아힘사(불살생)

2) 도둑질 금지

3) 거짓말 금지

4) sex 금지

5) 취하게 하는 물질 삼가

 

준비 프로그램에서는 육체적정신적인 규율(니야마.niyama)을 습득해야구루(guru)의 가르침(다르마dharma)

공부해야 했다금지와 규율은 원형적 모범의 모방이라는 전통을 축의 시대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한 것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제의로 신을 모방한 반면요가 수행자들은 정상적인 삶을 벗어나 존재의 고양을 경험했다.

야마(yama.5가지 맹세)와 니야마(niyama.규율)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했다.

哀苦원리를 버리면 마지막 해방(moksha)을 맛본다는 것수행자가 yama와 niyama를 습득했다고 guru가 판단하면

수행자는 이제 처음으로 정식 요가 수련인 아사나(asana. 앉기등을 곧게 펴고 가부좌 튼 채 앉아있음), 즉 앉기를

배우게 된다아사나에서는 정신과 감각을 연결하는 고리를 끊는다.

예전에 아리아인들은 하루 종일 집에 앉아 있는 아사라를 경멸했다.

이제 새로운 요가의 인간은 생명의 표시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한 곳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다음 단계에서 요가 수행자는 호흡을 통제한다이는 본능적 삶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다.

 

프라나야마(pranayama. 요가의 호흡훈련무아경의 至福상태에 이르게 됨)에서 요가수행자는 점점 더 천천히 숨을

쉰다들숨과 날숨 간격을 넓힌다호흡이 정지된 것 같다심장박동도 느려지고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나야마에 능숙해지면 새로운 종류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이 호흡은 차분한 느낌조화평정을 가져다준다음악효과와 같다또 웅장함광활함고귀함을 느낀다.

뭔가가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다.

요가 수행자는 이런 신체적 수련을 끝내면 에카그라타(ekagrata요가 훈련의 하나하나의 점에 집중하는 것),

즉 한 지점에 집중하는 정신수련을 받을 수 있다수행자는 생각을 거부하고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의 대상이나 관념에 집중한다.

수행자는 프라티아하라(감각의 물러남)를 배워 지성으로만 대상을 숙고했다. 다라나(집중)에서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푸루샤(purusha. 인간신성한 자아)를 시각화하고 마치 연못에서 떠오르는 연꽃처럼푸루샤가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능숙한 요가 수행자는 신체와 정신의 기술을 결합자신의 내적 세계로 깊이 침잠하고 일상적세속적 의식으로

부터 멀어져 무아의 상태에 진입했다정신생활을 통제할 수 있었기에 외부환경에 무감각해졌다.

자신이 명상하는 대상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홍수처럼 밀려드는 기억과 그것이 일으키는 개인적 연상을

억제할 수 있었기에 이제 자신의 관심사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았다.

대상을 주관화하거나 독점하지 않았다자신의 요구와 욕망이라는 왜곡된 lens로 바라보는 대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그의 생각에서 나는 사라지기 시작했으며그 결과 아주 평범한 대상도 전혀 예기치 않는 특질을 드러

냈다.

 

요가 수행자는 신이 자신과 접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의 경험에 초자연적인 것은 없었다.

사실 상키아는 무신론적 신조였으며 데바(deva. 빛나는 존재. veda시대 아리아인의 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할 뿐이라고 확신했다그들은 인간성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다.

이런 초월은 저 밖에 있는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자기 존재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 축의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더 완전하게 지각하여 규범으로부터 걸어 나가 황홀경에 이르렀다

극소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요가 수행자만이 이룰 수 있는 더 극단적인 상태도 있었다.

이들은 이런 상태를 역설적으로밖에 묘사하지 못했다부재인 동시에 존재하는 것풍요로운 텅 빈 상태영원한

현재죽음 속의 삶에 대한 느낌 등이 그런 묘사였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런 경험을 무()라고 불렀다요가 수행자는 자신들의 명상적 발견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마침내 브라만과 하나가 되었다고 믿었다.

상키아 철학을 따르는 자는 푸루샤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했다.

양쪽 모두 두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영적기술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요가는 일상생활을 제쳐두고 거기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의 것이었다그래서 훗날 현자들은 속인들도 깨달

음을 맛볼 수 있는 요가를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낸다.(BC7세기- BC2세기까지 요가 발전)

 


흔들리는 예(), 무너지는 도()



BC597년에 나라가 동맹군을 물리치자 이 지역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폭력에 휩싸였다적을 완전히 없애서

라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려 했다이제 전쟁은 과거의 위엄 있는 전쟁(祭儀化된 전쟁)과는 달랐다.

위대한 周公의 후손은 제의의 의무를 제외한 모든 권력을 빼앗겼으며경제적으로 찬탈자들에게 의존했다.

낡은 정치사회구조는 해체되고 중국은 무정부상태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더 깊은 변화의 표시였다.

중국인은 이제까지 도전 받지 않았던 세습 제후들의 통치를 무너뜨릴 수 있는 더 평등한 정체를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고고학자들이 확인한대로 제의에 대한 경멸이 확산되었다.

친척 무덤에 정해진 祭器가 아니라 세속적인 물건을 부장(副葬)했고 절제기풍도 희미해졌다.

사치가 늘고 귀족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궁핍한 자(귀족)도 많이 생겼다.

땅이나 직함을 잃고 평민의 지위로 전락하는 자가 생겼다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정치적사회적 위기가 아니었다.

 

하늘과 땅은 상호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天道를 이렇게 경멸하다가는 우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고 걱정했다나라 祭儀전문가들은 새로운 탐욕폭력물질주의를 신성한 제의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공격이라고 보았다.

 

天道(천도)는 멀고 人道는 가까이 있으니 천도에는 미칠 수 없다우리에게 그것을 알릴 수단이 어디 있는가?”

 

하늘은 우리의 시야 너머에 있으니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

(나라 재상 자산의 말) (BC534년 경)

 

이 때 공구(孔丘. BC551 - BC479. 孔子)가 노나라 조정의 말단 관직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그 집안은 노나라로

새로 이주한 사람들그 조상은 나라 제후 집안공자 꿈에 주공이 자주 얼씬거렸다공자는 30에 예()공부를

마치고, 40에 학식 있는 사람이 되었다그는 제의의 깊은 의미를 이해했으며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중국 사람

들을 천도로 돌이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공구 제자들은 후에 그를 공부자(孔夫子), 즉 우리 스승 공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흔히 孔子라 부른다.

중국의 축의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6공감의 발견  (BC530 - BC450년경)

 


슬픔과 눈물의 공유는 귀중한 유대를 창조한다.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도눈물이 카타르시스가 되어 독이

담긴 증오슬픔을 정화해준다.

 

아테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부끄럼 없이 큰 소리로 울었다이는 시민 간의 유대를 강화해주었을 뿐 아니라,

개인들에게 그들의 슬픔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줬다카타르시스는 공감과 자비를 경험하는데서 얻을 수 있다.

타자와 함께 느끼는 능력이 비극적 경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公子의 나라를 찾아 떠나다.



BC6세기 말 나라는 무정부 상태였다합법적인 제후의 권력을 찬탈한 세 대부 집안(맹손숙손계손)이 서로

우위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이는 祭儀전문가들에게 고역이었다그간 노나라엔 중국 전역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례에 참석하고 周 왕조 초기에 나온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BC518년 경 노나라의 정당한 통치자즉 주공의 후손은 너무 가난해서 조상의

사당에서 제의를 행할 수가 없었다그 때 권력찬탈자 중 한 사람인 대부(귀족계시(季氏)가 자기 조상의 사당에서

천자만 누릴 수 있는 팔일무(八佾舞)를 거행했다이 소식을 듣고 공자가 격분. “도가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일무(佾舞.일은 춤출 일)

종묘나 문묘의 제향 때 가로 줄과 세로 줄에 같은 수의 舞人이 벌여 서서 추는 춤.

천자는 8일로 64제후는 6일로 36대부는 4일로 16사는 2일로 4명이 춤을 추었다.

 

공자는 덕이 높고 지식을 쌓은 사람들을 많이 길러내 그들이 통치자들에게 를 가르치도록 마음을 먹었다.

스스로는 적어도 제후 한 사람 정도는 자신의 뜻을 받아 주리라 보고 제자들을 이끌고 주유천하를 했다.

그러나 no good.

공자의 제자 중엔 귀족미천한 자도 있었다공자가 총애하던 제자는 아마도 가난했지만 신비롭게도 재능이 뛰어난

안회(顔回)였을 것이다차분하고 강인한 민자건(閔子騫), 활력 넘치는 子路늘 용감하고 정직한 자공(子貢)등 훌륭한

제자들이 따랐다.

공자는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알고 있으면서도 표현을 하지 못하면 열지를 아니했다”(不憤

不啓 不悱不發불분불계 불비불발)

공자는 요순처럼 신성한 영감을 받은 현자가 아니었다그에게는 계시나 전망이 없었다유일한 장점은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學而不厭 誨人不倦학이불염 회인불권)

 

논어는 공자 사후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다논어는 수백 편의 짧고 서로 관련 없는 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명

하게 규정된 전망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그 스타일은 중국의 풍경화 같다독자들은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을 찾

아야 하며행간을 보고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고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나 논어는 첫 인상과 달리 일관성이 있다사실 공자의 전망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그 다양한 주제

들을 풀어 분리해내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공자는 축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로부터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요순시절 나아가 초기 왕조 시절엔 천도(天道)가 완벽하게 실현되었고인간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았다고

믿었다()가 중용(中庸)과 관용의 정신을 권장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공자는 가장 좋은 해법은 과거에 잘

통용되었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제의가 폭력이나 복수의 위험을 억제했으며 전투의 잔혹함을 누그러뜨렸다다시 그렇게 되어야 했다.

공자는 제의 전문가로서 군주와 달리 궁술이나 전차를 모는 법보다는 예법과 고전을 연구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

을 보냈다.

공자는 군자의 역할을 재규정했다진정한 군자는 전사가 아니라 학자여야 했다군자는 권력을 얻으려고 싸우는

대신올바른 행동의 규칙을 공부해야 했다그 규칙들은 가족정치군사사회생활과 관련된 전통적인 제의에

규정되어 있었다.

공자는 스스로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내 것을 하나도 만들어 보태지 않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전달했다나는 옛것에 충실하고 옛것을 사랑했다.”(述而不作 信而好古그는 옛 것을 익혀 새 것에 관한

앎을 얻었다”(溫故而知新)

 

공자의 전통해석 방법은 그 강조점이 달랐다과거의 종교는 하늘에 초점을 맞추었다사람들은 그저 신영혼의

은혜를 얻으려고 희생제를 거행했다그러나 공자는 이 세상에 집중했다동시대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처럼 공

자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공자는 형이상학에 관심이 없었다.(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냐회의주의자도 아니었다공자는 인도의

현자들처럼 침묵의 가치를 이해했다제자들이 선생님이 말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다그러나 사계절이 하늘의 명령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수많은

생물이 태어나고 죽는다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말을 안 해도 궁극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공자는 중국의 종교를 땅으로 끌어내렸다궁극적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도였다공자에게 군자란 완전히 계발된

인간이었다과거엔 귀족만 군자였다그러나 공자는 도를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군자즉 성숙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는 군자가 자신의 인간성을 갈고 닦는 데 예를 이용하는 것에 관한 좋은 비유였다.

(시경에 나오는 말군자는 조각가가 거친 돌을 다듬어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 듯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하루라도 자기를 누르고 예에 돌아가면 하늘 아래 모두가 인()에 따르게 된다는 것.

 

공자는 인도의 현자들처럼 ‘ego원리를 인간의 편협함과 잔혹의 원천으로 보았다이기심 버리고 예의 이타적

요구에 복종하면 우리 삶이 덕의 아름다움에 의해 변할 것이다사람들은 군자즉 우월한 인간이라는 원형적

이상을 따를 것이다.

 

인도에서 요가 수행자들은 절대적인 것을 향한 외로운 탐구를 시작했다공자는 인도의 출가자들과는 달리 가족

생활이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보는 대신종교적 탐구의 극장이라고 보았다.

자기를 세우려면 남을 세우려고 해야 하고자기를 넓히려면 다른 사람을 넓혀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는 황금률(golden rule)을 처음 공포한 사람이었다공자에게 그것은 초월적 가치였다.

예를 완전히 습득하면 이라고 부른 것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이란 말은 원래 고귀하다’ ‘훌륭하다

뜻이었지만공자 시대에는 그냥 인간들 뜻했다.

그러나 공자에게 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그 시대에 존재한 어떤 익숙한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

이다인은 Socrates, Platon이 선(goodness)이라고 부르게 될 것을 닮아 있었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성숙된 인간이다주공 정도다.

 

공자는 인이 도의 힘(도덕)’이며 성군들은 이것 때문에 무력 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전쟁폭력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공자는 제의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밀어내 제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심오한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굴종적인 순응을 장려하지 않았다각 상황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독립적으로 판단을 했기에 

상상력과 지성을 요구했다.

은 어려운 일을 행하고 난 뒤에 왔다즉 가 제공하는 교육을 완전히 익힌 뒤에 왔다.

은 초인적인 힘보다는 인내를 요구했다아마도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일단 기술을 습득하고 나면 노력할 필요가 없다그러나 꾸준히 할 필요는 있다은 꾸준히 죽어야 끝나는 일이

었다.

 

은 주는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인은 엄격하지만 환희에 찬 생활방식이다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얻고

자 하는 초월이다동정적이고 공감하는 삶을 살면 우리 자신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내 위에 우뚝 서 있는 것 그것이 와 이다.

 

BC483년경 顔回가 죽었을 때 공자는 평소와 달리 비통하게 울었다공자는 늘 안회가 자신보다 도의 길에서 멀리

나아갔다고 말했다공자 아들도 같은 해 죽었다. 3년 뒤엔 가장 나이 많은 제자 자로가 죽었다.

공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그의 영웅 周公도 꿈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공자는 삼가는 태도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성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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