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길에서 태어난 일신교
출애굽, 바빌로니아 유수(幽囚)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의 영성적 믿음을 갖게 된다. 그 하나가 야훼였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페르샤 제국의 통치자 키루스(Cyrus, BC590?- BC529?)의 힘이 컸다.
그는 BC559년 지금의 이란 남부에서 페르샤의 왕좌를 이어받았다.
메디아 정복, 리디아, 소아시아, 이오니아 해안의 그리스 polis 정복, BC539년 바빌로니아 공격을 했다.
피정복 민족들로부터 해방의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키루스는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을 테지만, 자신의 믿음을 신민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집트에서는 그를 아문-레(Amun-Re. 창조신이자 파라오의 아버지. 전장의 지배자인 신들의 제왕)의 하인이라고
불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전쟁의 신 마루두크의 아들이었다.
유다의 한 예언자는 그를 메시아,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는 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예언자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BC6세기 후반에 바빌로니아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신탁이 이사야의 신탁과
같은 두루마리에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통 제2의 이사야라고 부른다.
그는 키루스의 전진을 보며 벅찬 흥분을 느꼈으며, 추방당한 공동체의 고난이 끝나 간다고 확신했다.
야훼는 이미 키루스를 자신의 하인이라 불렀고, 키루스 제국의 사업은 앞으로 세계사를 바꿀 터였다.
키루스는 추방당한 모든 사람들을 돌려보내주겠다며 약속을 했다.
따라서 예루살렘도 재건하고 국토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출애굽에 버금가는 새로운 민족이동이 이루어질 터였다.
추방당한 유대인은 다시 한 번 광야를 헤치고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될 터였다.
제2의 이사야는 에스겔(BC597에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예언자)이 괴롭고 쓰라린 환상 대신 영광스러운 미래를 볼
수 있으며, 이것을 마치 『시편』 같은 서정적인 시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 환희에 찬 예언은 ‘야훼의 종’이라고 부르는 슬퍼하는 남자에 관한 특별한 시 수편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종이 누구인지 모른다. 혹시 추방당한 왕일까? 아니면 추방당한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이 시들을 제2의 이사야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일부는 심지어 그 종이 예언자 자신이라고 주장
하기도 한다.
그의 선동적인 신탁이 바빌로니아 왕국의 비위를 거슬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종이 추방당한 영웅의 원형이라고 본다.
이 영웅이 축의 시대의 에토스를 심오하게 반영하는 종교적 이상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한 사람들 중 일부에게는 신성한 전사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종이 그들의 model이었다.
승리의 시간에 종은 이스라엘에게 상존하는 고통이었지만, kenosis(자기 버리기) 덕분에 고양과 엑스타시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자비심은 보편적이어서 그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뻗어 나와 먼 섬과 외딴 곳의 민족들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을
끌어안는다.
야훼는 계속해서 종에게 말했다.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인도와 중국에서는 종교가 꾸준히 내면화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에서도 에스겔이 보는 만다라, 즉 성도(聖都)에
대한 환상은 신성한 것을 향한 내적이고 영적인 상승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2의 이사야가 품은 희망의 축은 지상의 시온이었다.
야훼는 그곳에서 기적을 이루어 그 폐허를 지상낙원으로 바꿀 터였다.
만다라(曼茶羅. maņdala)
산스크리트어 만달라(maņdala)의 한자 음사(音寫). 만타라(曼陀羅)라고도 쓰이며 생략해서 만다.
본래 원판(圓板), 원륜(圓輪)이라는 뜻의 말(한역으로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밀교 수법(修法)의 본존으로서
그려진 도식적인 제존집회도(諸尊集會圖).
인도에서는 야외에 특정의 정지(淨地)를 결계(結界)하여 한 겹 내지 여러 겹으로 토단(土壇)을 쌓아 그 위에 본존
이하 제존의 상을 각각 수법마다 정해진 방식(이것을 의궤(儀軌)라고 한다)에 따라 안치 또는 채화(彩畵)해서 수법을
행하는 것을 예로 하였으며 이러한 수법용의 단(壇)을 만다라라 하였다.
단에는 원형단 외에 방형단이나 삼각단 등이 있으나 수법이 끝나면 허물어버리므로 인도에는 유례가 남아있지 않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 이성의 힘
유대인이 성전을 완공한 직후 아테네인들은 또 다른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참주를 쫓아내고 농민, 장인, 상인이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BC6세기)
물론 귀족들의 원로회가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그리스 세계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타 지역에서도 비슷한 실험에 들어갔고, 그 결과 그리스 전역에 새로운 energy가 용솟음쳤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체제를 isonomia(평등한 질서)라고 불렀다.
농부, 상인이 귀족과 좀 더 평등한 관계를 맺으면서 polis는 더욱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리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선택된 소수를 위한 신비한 계시가 아니었다.
이제 진리는 정치영역의 ‘중심에’(en mesoi)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여전히 정치생활을 신성시하고 polis를 인간사에 신성이 확장해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아테네는 점차 lagos의 도시가 되어 갔지만 여전히 독실하게 종교적인 도시였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회의석상에서 얻은 토론기술을 다른 지식 영역에도 적용하기 시작
했다. 정치적인 연설과 법은 이제 엄중한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중무장 보병의 원어민 lagos는 계속 공격적이었다.
토론의 특징은 갈등, 대립, 반대되는 관점을 배제하려는 욕망이었다.
이 시기의 철학은 정치생활의 아곤(경쟁)적 특질뿐 아니라, 평형과 조화에 대한 그리스인의 갈망도 반영했다.
이 점은 에페수스의 왕족인 Herakleitos(BC540 - BC480)의 작업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든 격언으로 표현했기에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상대주의자 헤라크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맥락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바닷물은 물고기에게는 좋지만, 인간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구타는 벌로 쓰일 때는 도움이 되지만, 살인자가
가하는 것이면 악하다. 그는 우주가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늘 변화하며 갈등하는 원소들의 전장이라고 생각.)
그는 자기 성찰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새로운 활동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정치개혁과정에서 전통적 제도를 버려도 신들이 진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오니아 해변 출신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BC560 - BC478)는 올림포스 신들이 가망 없을 정도로
인간을 닮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신, 신들과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으며, 이 신은 모든 인간적 특질을 초월한다고 믿었다.
이 신은 시간과 변화를 초월하여 정신(nous. 누스)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가 생각만 하면 바로 이루어진다.
시차를 두고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했다. 헤라클레이토스(BC540 - BC480, 60세)는 우주가 상대적이라 생각했다.
밀레토스학파는 우주는 진화하는 것, 파르메니데스(BC515 - ?)는 우주는 언제나 똑같다는 것.
변화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불멸적 존재.
밀레토스학파는 철학의 기초를 물, 공기 같은 자연현상의 관찰에 두었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의 증거를 믿지 않고
순수하게 이성에만 바탕 둔 주장에 의존. 이 같은 다양함 속에서 이성이 발전을 했다.
그 이성의 힘이 아레오파고스의 설득으로 나타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마라톤 전투(BC490)는 대군 페르시아에 대한 아테네 대승이었다. (육상전- 보병부대의 힘), 살라미스 전투(BC480)
도 아테네의 이성의 힘으로 대승.
그들은 ‘자아’를 버리고 영웅적 전통에 도전, 페르시아가 자신들의 도시와 성소를 파괴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살라미스는 축의 순간이기는 했지만(이성의 승리 - 정신적 혁신)
그리스에서 자주 그랬듯이, 군사적 승리였으며 그 뒤로 더 많은 전쟁을 낳았다.
BC478년 100개가 넘는 polis가 아테네의 지휘를 받아 군사동맹(Dellos동맹)을 맺었다. 미래의 Persia 공격에 대비.
그러나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야망 드러내 동맹 간의 분열, 갈등이 생긴다.
※ 마라톤 전투
BC490.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당시 아테네 문관 칼리마코스와 무관 밀티아데스의 지휘 하에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 중무장 보병의 아테네가 승리.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40km를 달려 승전을 알리고 사망.
올림픽 마라톤의 유래.
※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 BC480)
페르샤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지휘. 그리스 대부분 지역 쑥대 밭. 그리스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혜로 살라미스
좁은 해협에 가두고 육박전 - 승리.
분열과 갈등은 결국 비극을 부른다. BC476년 ‘대(大)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극작가 프리니코스(Phrynichos)는 Persia
전쟁에 관한 비극 3부작을 제출했다. 그중 『밀레토스의 함락』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가 Herodotos(BC485
-BC425?)는 이 비극이 관객들에게 준 영향력을 기억했다.
“관객 모두가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프리니코스는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국가적 재난을 떠올린 죄로 1천 드라크마의 벌금을 내야했고,
이 연극은 상연이 금지되었다. 극작가들은 비극적인 배경 속에서 사람들이 당면 문제를 사유케 했다.
축제는 공동체의 명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들의 문제와 곤경을 풀어나갔다.
디오니소스축제는 시민들의 자부심을 강하게 과시하는 행사였다.
델로스 동맹 회원 도시들은 대표와 공물을 보내왔다. 훌륭한 시민에겐 화환을, 아테네에 봉사하다 죽은 병사 자식들은
무장을 하고 행진을 했다. 그러나 광신주의로 가진 않았다.
시민들은 극장에 모여 울었다. 그리스인들은 늘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 신화들을 극화할 때
과거의 확실성을 심문했으며, 전통적인 절대적 가치들을 까다롭게 비판했다.
비극은 또한 축의 시대 영성의 특징인 제의의 내면화와 심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한때 은밀했던 제의가 공개적으로 상연되었다.
제의는 민주화되었으며, ‘중심에(en mesoi)’ 자리를 잡았다.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의 연극은 축의 시대의 자기 성찰을
반영했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마음이 자기 내부를 향하고, 대안을 명상하고, 고통스럽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비극작가들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본성, 그리스 문명의 가치, 삶의 의미 등 모든 것에 질문을 던졌다.
극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 등장하는 유례없는 복잡성을 탐사하기 위해 원래 이야기를 늘이고, 꾸미고, 바꾸었다.
비극은 아테네인들에게 자신을 타자에게 비춰보고, 자신과 전제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공감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
라고 가르쳤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은 두카(dukkha. 산스크리트어 苦)라는 것-고통, 불만, 왜곡임을 일깨웠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BC525-BC456?), Sophocles(BC496? BC405?), Euripides(BC484 - BC406?) 등
BC5세기 비극작가들은 polis보다 고통 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서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자기반성-성찰)
그리스인들은 슬픔과 눈물이 유대를 창조한다고 굳게 믿었다.
원수들도 『일리아드』의 끝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가 그랬던 것처럼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했다.
그들의 눈물이 카타르시스가 되어 독기 가득한 증오의 슬픔을 정화해준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로 울었다. 이것은 시민들 간의 유대강화제였고,
그들은 슬픔에서 혼자가 아님을 자각했다. 비극의 경험은 타자와 함께 느끼는 강력한 힘이었다.
Salamis 해전(BC480) 이후로 해군의 중추가 된 하층계급 테테스(thetes)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민회에서도 자신들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급진적인 정책이라도
지지하려 했다.
계급 간 새로운 마찰이 생기면서 아테네는 다시 분열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삶의 두카(dukkha. 고통)는 인간을
가르친다. 그래서 인간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곤경을 넘어설 수 있다. 오만(hybris)과 반성의 연속이었다.
축의 시대 사람들은 모든 인간 조건의 한계를 강렬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거나 삶의 고난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영적
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타고난 약한 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약한 자아 안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인도에서도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있었다.
야지나 발키아(經典名) 시대에는 논란이 되었던 karma(행동)의 교리가 BC5세기 말에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모두 인생은 죽음과 재생의 끝없는 순환 길이라고 믿었다.
욕망이 어쩔 수 없이 행동을 하게하고, 그 행동의 질이 다음 생에서 그들의 상태를 결정했다.
나쁜 karma는 그들이 노예, 동물, 식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뜻이었다.
좋은 karma는 왕, 신으로 다시 태어남을 보장했다.
이런 관념이 자리 잡으면서 인도 분위기는 변했다. 부와 물질적 쾌락도 임박한 노년과 죽음이라는 모진 현실에 빛이
바랬다. 출구를 찾으려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낡은 veda 제의에 환멸을 느꼈다. veda(종교적인 지식)의 절정인 우파니샤드 체계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에 의심을 품었다. (梵我一體에 대한 회의?)
요가는 moska(해방)를 제시했는데, 요가 수행자는 황홀경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것은 veda 전통과 양립할 수 있을까? 이 무렵에 기록된 우파니샤드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해방(moska)을 찾는 유일한 길은 숲으로 나아가 욕망의 노예가 아닌 은자나 탁발승이 되는 것이었다.
인도인들은 출가자를 허약한 낙오자로 보지 않고 용맹한 선구자로 존경했다.
인도인들은 영적인 정복자인 jina(산스크리트로 승리자)나 존재의 다른 영역으로 ‘깨어난’ 붓다(산스크리트로 깨달은
자)를 갈망한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영적불안은 악화일로였다. 인도 북부인들도 그리스인들처럼 극심한 정치,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veda 체계는 늘 이주하는, 기동성이 아주 높은 사회의 영성이었다.
그러나 BC6세기- BC5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은 영구적 공동체에 정착, 진지하게 농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쟁기 등 철기기술 도입. 더 많은 땅 개간, 관개시설, 밀림개발이 있었다.
정치적 발전도 있었다. BC6세기 말경 부족국가들은 더 큰 단위로 흡수되었다.
영토를 다스리던 왕들은 점진적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요했고 씨족, 친족보다는 영토에 초점을 맞추는 초기 형태의
애국심이 생겼다. 그 결과 국방, 행정을 책임진 크샤트리아 전사 계급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되었다.(인도 남동부)
조상들과 달리 더 이상 브라민(사제계급)을 존경치 않았다. 그러나 군주제가 유일한 통치체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왕국의 동쪽에는 다양하게 운영되는 많은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오랜 씨족들(ganas. 가나)의 원로집합체(sangha. 상가)가 통치했다.
토론에 의지하는 이런 통치는 그리스 polis와 비슷했다.
새로운 나라들은 갠디스 강 유역의 교역을 자극했다. 도로를 건설하고 교역로를 확보했다.
고고학은 도시화가 BC6세기에 들어서야 진행되었으며, 새로운 도시들은 갠디스 계곡 동쪽 끝에서 발달했다고 전한다.
서쪽의 옛 veda 문명 중심지는 전체적으로 농촌이었다. 과거의 화려한 희생제는 신들에게 감명을 주고 후원자의 위엄
을 높이려고 개획되었다. BC5세기에 이르자 동쪽 주민들은 교역과 농업의 개선이 veda 제의보다 훨씬 더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도시들은 전통에 순응하는 대신 개인적인 창의, 혁신을 권장했다.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개인주의가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성공
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보통 veda체제의 하층 계급이었다.
상인, 농부, 금융업자는 보통 바이샤였는데, 혈통은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
일부 바이샤는 토지를 축적, 농업혁명을 주도했다. 상업, 산업에 뛰어든 자들은 크샤트리아보다 부자가 되었다.
계급질서의 반전, 도시화와 교역발전은 사회변화를 추동했다.
도시와 교역은 개인 이동을 장려했고, 타 지역민들과의 접촉은 새로운 자극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작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새로운 계급분열도 나타났다.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는 바이샤와 수드라에
대항해서 뭉쳤다. 과거의 시골 elite는 새로 등장하는 도시계급으로부터 소외당했다.
새로운 계급은 바이샤와 수드라적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상인, 금융업자가 된 바이샤는 시골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바이샤와 점점 멀어졌다.
브라민-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하리잔
4계급적 질서는 와해되기 시작. 새로운 삶의 방식 대두. 부족 정체성 사라지고 신질서 태동 시작.
이런 사회적 긴장은 도시화가 더 진전된 동부에서 활발했고 바로 이 지역에서 인도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
었다.
이곳은 아리아인 정착자들이 소수였으며, 토착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새로운 해법을
탐구했다. 도시의 빠른 물질적 발전 때문에 도시 거주자들은 매년 같은 시기에 같은 일을 하는 농촌 사람들보다 변화
속도를 더 의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이 훨씬 더 덧없고 무상해 보였을 것이고, 이것이 이제는 깊이 뿌리내린 - 삶은 두카(苦)라는 믿음을 더해
주었을 것(혼란한 도시, 만연한 질병, 사회적 무질서).
한편 삶의 공격적인 면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공화국에서는 내분이 벌어졌다.
왕국들은 능률적이고 중앙집권화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신민을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는 전체로서 부족이 아니라 왕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선언했다.
탐욕은 경제성장의 원료였다. 이런 무자비한 사회가 어떻게 인도 북부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아힘사(불살생)
라는 이상에 부응할 수 있었겠는가? 가축 약탈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던 시기보다 삶은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무시무시
했다.
veda 신앙은 당대의 현실과 점점 괴리되었다.
상인들은 길에 나서야 했기에 성스런 불을 계속 피울 수가 없었고, 전통적인 가정 제의도 준수할 수 없었다.
가축을 기르는 것이 가장 큰 일일 때는 동물 희생도 합당했지만, 농업과 교역이 중요해지면서 가축은 드물어지고 희생
제는 낭비이자 잔인한 행위가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교적 해법이 필요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출가자들을 돌아보았다.
출가자들은 상인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또한 veda 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 스스로 헤쳐 나가고 있었다.
BC6세기에 이르자 학파들이 수도 없이 등장했다. 삶의 특별한 방식을 옹호하고 자신의 다르마(가르침)가 죽음과
재생으로부터 해방을 안겨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스승 주위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스승을 붓다(覺者)나 지나(勝者)로 불렀을 것.
인도는 여전히 口傳사회였고 구루(guru) 대부분은 기록된 경전을 남기지 않았다.
경쟁자들의 논박을 참조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경쟁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왜곡했을 것이다.
새로운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공통요소가 있었다.
삶은 두카(苦)다. 자유로워지려면 금욕과 명상으로 행동에 이르는 욕망을 제거하라.
정교한 텍스트나 주석은 없었다. 다르마들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었다. 구루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가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러 학파들의 가르침은 제각각. 한사학파는 거처가 아예 없었다.
소똥 위에서 살았다.
아둠바라 학파는 열매, 야생식물, 뿌리 위에서 살았다. 파라마한사 학파는 나무 밑, 묘지 등에서 잠을 잤다.
어떤 사람들은 상키아(samkhya, 상키아. 산스크리트. 분별을 의미. 요가와 비슷한 철학)의 가르침을 따랐고, 요기를
실천했으며 해방의 지식을 얻으려 했다.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산자야라고 불린 스승은 어떤 최종적인 답이 있을 가능성을 부인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우애와 마음의 평화를 가꾸는 것뿐이었다.
진리는 상대적이고, 토론은 불가피하게 신랄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지타라는 스승은 유물론자로서 재생의 교리를 부정했다. 모든 인간은 사후 원소로 돌아간다.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든 중요치 않다. 모두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와 행복을 육성하는 것이 나은 일이라 생각. 그 방법은 원하는 대로 하되 오직 그런 것들을 기르는 karma만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재생과 다시 죽음이라는 삼사라(samsara. 윤회)의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금욕으로 거기에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적대와 불화를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소포클레스와 달리 이 현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위엄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구를 찾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마칼리 고살라(BC385년경 사망)는 이런 스승 중 가장 중요한 사람. 과묵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자. 종교적 숙명론자.
그는 아지베카(삶의 길) 학파를 창립. 그는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모크샤(해방)를 얻기 전에는 정해진 횟수의 삶을
살 운명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으로는 운명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아지비카는 가혹한 제도를 택했다. 그들은 옷만 입고 음식구걸, 엄격한 식사 규칙을
준수. 그 바람에 아사자가 나오기까지. 그들은 또 자기 몸에 강한 고통을 가했다.
목까지 땅에 묻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극단적인 고행(tapas. 산스크리트. 열. 금욕주의적 훈련)을 통해 고통이나 쾌락을 넘어선 경지를 추구했다.
고살라는 바르다마나 지나트르푸트라(BC448? - BC376?)의 제자였다고 한다.
지나트르푸트라는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꼽혔다. 제자들은 그들을 마하비라(위대한 영웅)라 불렀다.
크샤트리아 출신인 마하비라의 가혹한 생활방식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모든 금욕주의자들처럼, 육체의 지속으로부터 참된 자아를 해방시켜 내적 통치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모크샤를 얻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계발하고 난 뒤였다.
새로운 방식은 철저한 아힘사를 특징으로 한다. 마하비라에게 해방(모크샤)은 곧 비폭력이었다.
마하비라는 케발라(kevala), 즉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유일무이한 지식을 육체적 고행을 통해 얻었다.
(금식, 물도 안마시고 땡볕에 알몸)
마하비라에게 신(deva)이란 모든 피조물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영혼을 인식하고 존중하여 케발라를 얻은 피조물에
불과했다. 마하비라는 누구든지 자신의 선생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지나(jina.
정복자,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자이나 교도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다르마는 정복자의 길이 되었다.
그는 크샤트리아였다. 그는 자신의 해방을 얻기 위해 두카의 강을 건넌 기나긴 대열의 맨 끝에 선 사람일 뿐이라고
믿었다. 그가 죽은 뒤 자이나교도는 정교한 전사(前史)를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이런 시대에 이런 ‘여울을 만든 사람’이 24명이 있었으며, 이들이 모크샤로 가는 다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자이나교에서는 완전히 깨달은 자를 티르탕카라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로 티르탕카라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 스스로 윤회의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강을 건널 곳을 만드는
구원자를 가리킨다.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24대 티르탕카라라고 부른다.)
자이나교의 다르마(종교적 진리, 교리, 실천)는 비폭력에 헌신하면서도 종종 군사적 이미지를 이용했다.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자)는 자신의 호전적인 본능과 싸우고,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특징인 공격성이 불러오는
나쁜 결과를 막아내는 전사였다.
금욕주의자라는 아힘사의 삶을 통해 전장의 병사와 마찬가지로 자신, 가족, 교단에 영광을 안겨준다.
자이나 공동체는 gana, 즉 부대라고 불렀다. 자이나 교도가 되려면 용기, 결의,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태도가 필요
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표시였다.
나중에 자이나교도는 내세론과 우주론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카르마는 질이 다른 다양한 행동에서 만들어지는 먼지처럼 고운 물질이라고 보는 형이상학을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 먼지 같은 물질이 영혼에 내려앉아 그 무게로 영혼을 짓눌러 우주의 꼭대기로 솟아오르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하비라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은 이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유일한 종교적 의무는 비폭력이었다.
아힘사는 자이나교도가 모든 피조물과 공감할 때에만 얻을 수 있었다.
“숨을 쉬고 존재하고 살아있고 감각능력이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죽이지 말아야 하고 폭력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학대
하지 말아야 하고 괴롭히지 말아야 하고 쫓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순수하고 변함없고 영원한 법이며 앎을 얻은 깨달은 자들이 선언한 법이다.”
자이나교도는 다르게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았으며,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레를 죽이거나 풀잎을 밟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나무 열매도 따지 않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아힘사)
요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이나 교도도 5가지 ‘금제(야마. yama)’ (5가지 맹세)를 지켜 폭력, 거짓, sex, 도둑질,
재산소유를 버리겠다고 맹세했다. 다른 피조물에게 해를 주는 것이라면 진실이라도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자이나교의 맹세는 경계하고 주의하는 태도를 기르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마하비라는 그 나름의 황금률에 이르렀다.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모두를 대접해야했다.
온 세상의 두카는 무지한 사람들의 행동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피조물의 영혼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내부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이나교도는 만물, 만인과 우정을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행을 엄격히 따르면 초월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다 희생제에서 신들은 인간이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보려고 모였다. 그러나 참파(도시 외곽에 있는 나무의 영을
모신 사당 - 자이나교에 있어서)에서는 신, 인간, 짐승이 아힘사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통일과 보편적 공감의 전망이 삶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자이나교도는 하루에 두 번 씩 스승 앞에 서서 씨, 녹색식물, 이슬, 딱정벌레, 곰팡이, 축축한 땅, 거미줄을 밟는 바람
에 자기도 모르게 주었을 (만물에 대한) 괴로움을 회개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저는 모든 생물에게 용서
를 구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저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제가 모든 피조물과 우정을 나누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게 해주소서.”
새로운 이상은 단지 폭력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친절과 자비를 키워 나가는 것이었다.
제7장. 사유의 혁명 (BC450 - BC398경)
에즈라의 닫힌 길과 요나의 열린 길
모세5경 = 구약의 첫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유대 전통에서는 모세가 썼다고 주장.
그러나 19세기 중엽 독일의 Julius Wellhausen(1844-1918)을 비롯한 성서학자들은 복수의 저자들이 전승되어온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신학에 맞게 편집한 책자로 보았다.
문서예언자(literary/writing prophet)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언자들은 크게 문서예언자와 비문서예언자(문서 전 예언자)로 나뉜다.
문서예언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성경책을 남긴 경우다.
예언자명과 책 제목이 동일한 경우인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바룩,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오냐,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이 있다.
그러나 예언자 자신이 반드시 예언서를 집필했다는 뜻은 아니다.
예언자 행적이나 그가 전한 말씀이 예언자명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비문서 예언자는 성경에 등장,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로 수 십 명에 이를 정도로 많고 구분하기 어렵다.
이 같은 구분에 따르면 모세도 비문서 예언자이다.
모세5경과 저자
성서학자들은 모세5경을 대략 500- 600년에 걸쳐 구전+문헌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중반이후 성서학자들은 문장 유형, 문체, 하느님의 이름 등을 고찰한 결과, 중요한 몇 가지 기초 문헌에
대한 가설을 만들었다.
1. J계
하느님의 이름이 Yaweh(야훼, 독일어로 Jaweh)로 기록된 문헌. 남부 유다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2. E계
하느님 이름이 Elohim 또는 엘(EL)로 나오는 문헌. 북부 이스라엘은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3. D계
『신명기』(Deuteronomy)계
문헌. 신명기의 문학적, 신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집필, 편집된 문헌. BC 7세기 문헌으로 추정.
4. P계
priest(사제) 저자들이 편찬한 문헌. 최종 편찬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할 때 이루어졌다.
학자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BC722년에 패망한 뒤 J와 E가 먼저 결합되고(JE문서라 함) 유다의 왕 요시아
(BC640- BC609년경 재위)의 개혁기에 여기에 다시 D계가 합쳐졌다고 봄.
그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할 때 사제 저자들에 의해 앞선 문헌들이 합쳐져 오늘날의
모세5경의 완성되었다고 봄.
신명기(申命記)
모세가 죽기 직전 트랜스요르단의 네보(느보)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두 번째 법’(greek으로 데우테로노미온)을
전달하는 과정을 묘사.
신명기계 저자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과 남부 유다 왕국의 역사와 두 나라가 멸망한 원인과 그 의미를 찾는 데
집중한다.
이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을 깨뜨린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며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
하려면 하느님이 주신 율법에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
대개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변화는 변화와 발전의 선두에 선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제국의 힘 때문에 큰 고난을 겪었지만, 이 제국들은 더 넓은 지평과 더 큰 세계를 보게 해주었다.
야훼의 뜻인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는 일들의 남상은 제2성전의 완공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국의 식민지로 살면서도 고난과 지배가 방어적인 배제를 낳았다.
자기들만이 차돌처럼 굳어져갔다. 이것은 타 지역에서 펼쳐지는 축의 시대정신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제국들(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샤 ‥)의 압제 하에서 영성적 힘을 발휘했던 첫 번째 축의
시대를 끝내고, 두 번째의 영적 개화기, 랍비(rabbi)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
통찰에 기초를 두고 황금률과 양보, 공감,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영성에 기초한 신앙을 창조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땅으로 내려온 철학, 삶을 정화하는 비극.
BC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아테네는 겉으로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Pericles(BC495?-BC429)는 아테네를 권력의 정점으로 이끌었다. 건물, 조각, 위대한 비극(작가). BC446년
아테네와 Sparta는 30년간 휴전키로 하고 그리스를 양분. 아테네는 Aege해 장악, Sparta는 펠로포네소스반도
장악.
그러나 아테네는 세계의 주요 세력이 아니라 과도하게 확장된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전사 40,000명으로는 그리스 전체 통치 불가능. 게다가 페르시아가 넘보고 있었고, Dellos 동맹도 견고하지 못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싸워 이긴 마라톤 전투 뒤 태어난 젊은이들은 승리밖에 몰랐다.
그들은 60이 다 된 Pericles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으며 BC430년대에 도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새로운
사상에 귀를 기울이려 했다.
이 시기에 지적인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철학자들의 말에 당황해 하고 좌절감을 느꼈다.
철학자들의 생각은 점점 난해해졌다.
Parmenides(BC515?- BC445?.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학파의 시조.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문제로 출발했다.
이성(理性)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해 다수(多數) ·생성·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은 모두가 오류의 근원이라
주장했다. 存在論 및 認識論에 영향을 주었다.)의 제자인 엘레아의 Zenon(BC490?-BC430?)은 짓궂은 일련의
역설을 만들어 자기 스승이 내놓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상의 타당성을 증명하려 했다.
Parmenides는 우리의 감각증거에도 불구하고 만물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을 통해 그 점을 설명하려 했다.
화살은 매순간 정확하게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점유하며, 따라서 어디에 있든 늘 정지해 있다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없는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어떤
코스를 완주하려면 우선 반을 달려야만 한다. 이 같은 추론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이렇게 움직임에 관해 설득력
있게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Parmenides의 충고대로 아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
였다.)
제논은 상식의 논리적 불합리성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며, 움직임이 사실은 움직이지 않음의 연속임을 발견했는데,
이 점에 훗날의 철학자들이 매료되었다. (중국의 논리학자들도 비슷한 수수께끼를 제시했다.)
그러나 제논 동시대의 다수인들은 이성이 자신을 파괴한다고 느꼈다.
어떤 진실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런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시칠리아 철학자 Empedocles(BC495-BC435)는 Parmenides의 통찰 몇 가지를 바탕으로 삼아 정상적인 세계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는 4가지 원소(물, 불, 공기, 흙)은 실제로 불변이지만, 움직이면서 결합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스미르나(현 터키의 이즈미르)의 Anaxagoras(BC508-BC428)는 맨눈으로 볼 순 없지만, 모든 물질에는 다른 모든
물질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 생각을 발전시키면 어떤 물질이든 존재하는 만물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얼마든지 다른 모든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밀레토스학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Anaxagoras는 만물의 발전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그는 이것을 누스(nous.정신)라 했다.
Demokritos(BC466-BC370)는 빈 공간을 질주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입자들을 상상했다.
그는 이것을 원자(atom)라 했다. 이 말은 atomos(자를 수 없다)에서 나왔다. 원자는 단단하고 나눌 수 없고 부술
수는 없지만, 서로 부딪치면 들러붙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물체들을 만든다.
원자가 흩어지면 사물은 무너져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자들은 계속 새로운 존재형태를 창조한다.
돌이켜보면 이들 철학자들의 직관은 오늘 날에서 보면 무척 의미 있는 것이었다.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Demokritos의 원자관념을 발전시켰다.
Empedocles는 사랑과 싸움이라는 두 힘의 우주적 투쟁을 상상했는데, 이는 전자기나 Big Bang이론과 크게 다
르지 않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통찰력이 뛰어났어도 결국 공상으로 끝날 수밖에.
철학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어져 갔다. 이들 공상적인 우주론은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으며 기본적
경험과 모순되었다. 확실한 증거를 댈 수도 없는데 왜 Parmenides나 Demokritos의 독특한 사상을 믿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이런 식으로) 공중을 계속 혼란케 했다.
Copernicus(1473-1543), Galileo Galilei(1564-1642), Charles Darwin(1809-1882)의 가설들은 모두 처음
제시되었을 때는 불안을 자극했다. 그리스의 자연과학자들(physikoi)도 그리스 사람들에게 점차 비슷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Anaxagoras는 BC460년경 아테네에 도착. 즉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매우 종교적이었던 polis 아테네가 새로운 사상과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
어떤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사람들은 곤혹스러워했다.
Anaxagoras는 BC467년에 트라케 운석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타는 커다란 바위 이야기에 사람들이 흥분.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은 돌이고, 달은 흙덩어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천체는 신이 아니라 붉게 달아오른 바위였다. 사람들은 천체를 섬기는 대신 피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오니아에서는 흔했을지 모르지만, 아테네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테네에서는 새로운 지식인 그룹이 등장,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철학을 세상과 더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만들
려고 했다. 그들은 아테네 사상가들에게는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과학자들만큼이나 괴로
움을 주는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이들을 sophist(지혜로운 사람)라 불렀다. Socrates(BC470- BC399, 71세) Platon(BC428- BC348, 80세?),
Aristoteles(BC384- BC322, 62세)는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
그래서 sophist라는 말은 오늘날 겉으로만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의 sophist들에게는 온당치 않다. sophist들은 철학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했다.
시칠리아 레온티노 출신의 소피스트인 Gorgias(BC483-BC376)는 밀레토스와 엘레아의 자연과학자들이 주장한
난해한 논리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parody 했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설사 존재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식과 언어의 유용성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믿을 수 없는 환상을 만드는 것보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철학을 발전시켜야 했다. 그래서 sophist들은 교육자를 자처했다.
그리스 소년들은 읽기, 쓰기, 운동을 배웠다. Homeros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지만 14살이 되면 교육은 끝이 났다.
소피스트들은 이 같은 틈을 파고들어 그들이 요구하는 돈만 내면 누구에게나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엘리스의 Hippias(BC460년경.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두 사람보다 나이는 어렸다)는 가장 주목할
만한 sophist로 꼽힌다. 기억술, 대수, 측량, 역사, 음악, 시, 수학을 가르쳤다. 절대적 진리는 절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주관적임을 깨달으면 적어도 미망에 빠질 일은 없었다.
소피스트들은 앎을 소수 elite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해방을 향한 욕망, 자율성, 개인주의,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 등 축의 시대의 여러 주제를 건드렸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자신(인간)의 가능성보다는 현재의 존재에 집중
했다.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주로 techne(테크네) 즉, 지금 이곳에서 더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기술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테크네는 원치 않았다.
다른 종류의 인간 창조 야망은 없고 그저 제자들의 세속적 기술수준을 높이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들은 돈을 버는 데 열심이었다.(소유욕망) 그들은 지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기회를 활용토록 돕는데 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소피스트들은 말(言)선수였다. Gorgias는 효과적인 웅변이 자유를 살아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아티케의 웅변가 Anitphon(BC480- BC411)은 민주주의에서 승리는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가장 걸출한 sophist는 아브데라의 Protagoras(BC485- BC410)였는데, 그는 수사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전문분야는 법과 정치였다.
그는 BC430년대에 아테네에 도착, Pericles와 친구가 되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
라고 가르쳤다. 전해들은 말이나 간접적인 정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진리를 자신의 판단과 경험에 비추
어 시험해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신화에 순진하게 의존하는 태도로 상식의 법칙에 어긋나면 용납될 수 없다.
소피스트들은 불안이 깊어지는 시대에 체계적인 의심을 가르쳤다. 그들은 널리 여행을 했다.
그들은 다른 문화의 다른 관습 또한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결과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Parmenides와 Demokritos는 주관적인 확신을 질타했지만, Protagoras는 그것을 끌어안았다.
한 사람의 진리는 이웃의 진리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오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은 그 사람에게는 타당하다.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를 보통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먼 실재로 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로”)
개인은 자신의 인간적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초월적인 권위는 없으며, 인류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할 수 있는
최고신은 없다.
일부 아테네인은 여기서 해방을 얻어 기본적 가정에 의문을 던지는 습관이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종교에 관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한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도 그런 사람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의 실재는 입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식이나 대화의 적당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BC432년 아테네는 그런 불경한 주장을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회의주의는 그대로 남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이 비극들은 늘 신에
관해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선한가? 그렇지 않다면 삶이 어떤 의미를 지낼 수 있는가?
에우리피데스의 개인적 경험은 신학과 모순되었다. 압제자들은 살인, 약탈을 일삼았으나 품위 있게 사는 사람들
보다 더 잘살았다. 에우리피데스는 신을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대의 이야기들에 무자비한 질문을
던져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우리 각자의 nous(마음)가 신이다.”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논리의 구사는 비극의 카타르시스(淨化)에서 핵심이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대로 추론하는 능력’이
연민이라는 정화의 감정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분석적인 엄격함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관점도 볼 수 없다. 그리스인에게 논리는 냉정하게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이 가득한 것이었다. 법정과 민회의 논쟁은 극장에서 나오는 말만큼이나 정열적, 극적이었다.
시민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 다른 관점을 향해 움직이는 엑스타시(kenosis)를 배웠다.
청중은 이성 덕분에 자신의 공감을 얻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느끼게 되었다.
(공감이 ecstasy - 초월)
원수와의 우정의 화해, 애도와 눈물 -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힌 편견, 선입관에서 밖으로 나가 연극을 보기 전
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자비의 행동이 나타난다.
아테네 민회에서의 오랜 시간에 걸친 논쟁은 매우 수상쩍은 정치적 공작 뒤에 결국 그리스 세계를 펠로포네소스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BC431년에 관객이 이 연극 ‘메데이아’를 구경하는 동안 펠레포네소스 전쟁이 진행되었다.
페리클레스의 계획은 아티케를 희생하여 제국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골민의 도시 소개령을 내렸다.
시골 거주자 10만 명이 아테네의 긴 성벽 안에서 득실거리게 되었다. 역병이 돌고 도시는 생지옥이 되었다.
아테네 전 인구의 25%(2만 명)가 죽었다.
공포와 비통에 잠긴 아테네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 페리클레스에 대한 신뢰도 잃어 그는 자리에서
밀려났다. 몇 달 후 복귀하지만 BC429년에 사망.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영토를 약탈했지만 정면 대결은 드물었다. 따라서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혜를 가르친 앎의 교사
장기간의 펠로폰네소스戰爭(BC431-BC404, 아테네vs.스파르타)에 따른 잔혹행위가 잇따르던 BC420년대에
아테네에서는 새로운 철학자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들은 멋쟁이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꾀죄죄한 편이었다. 돈 버는 데는 무관심했고, 학생들의 돈을 받는다는 데
경악했다.
튀어나온 입술, 납작한 들창코, 배불뚝이 Socrates는 석수(石手)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구입할 여유가 있어 중무장 보병부대에 입대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도 참전했다.
출신은 미천했지만 좋은 집안 출신 청년 몇 명이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철학적 영웅으로 숭배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하고나 이야기를 했다. 추상에도 능했다. 군사원정 때 지적인 문제에 몰두, 꼼짝 않고 서 있는
바람에 다른 병사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는 어디서건 혼자 떨어져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혼란스런 경험이었다. 어떤 주제건 계속 물고 늘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목적은 앎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입관을 해체하고 그들이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경험은 오디푸스가 견디었던 kenosis를 약화시킨 것이었다.
진짜 앎은 간접적으로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전 자아가 관련되는 괴로운 투쟁 끝에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몇 가지 사실이나 관념에 동의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생활을 살펴 내부의
진실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로 묘사했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 사람 내부에서 진리가 태어나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논의되는 주제에 관한 분명하고 고정된 관념을 갖고 대화를 시작했다. 예컨대, 아테네 장군이고
소크라테스 친구였던 라케스(Laches, BC475?- BC418)는 용기가 고귀한 자질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예들을 하나씩 들며 용기 있는 행동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저열하고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알고 있는 자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역시 친구인 Nikias(BC470?- BC413)는 대화를 시작하면서 용기에는 공포를 제대로 평가할 지성이 필요하며,
따라서 동물이나 아직 미숙해서 위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진실로 용감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러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미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미래의 악, 선에 대한 앎은 현재와 과거의 선, 악의 경험과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용기가 여러 덕 중 하나일 뿐
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용기의 핵심이 되는 절제, 정의, 지혜, 선이라는 자질을 획득해야 한다.
하나의 덕을 계발하려면 다른 덕도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기와 같은 단일한 덕은 그 기반에서는 나머지 덕과 똑같을 수밖에 없다.
대화가 끝날 무렵 3인의 중무장 보병들은 모두 전쟁터의 trauma를 견뎌 왔고 그 주제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용기를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은 용기가 무엇인지 발견
하지 못했으며 용기를 다른 덕과 구별해주는 것이 무언지 결정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무지했으며 아이들처럼 다시 학교로 가야했다.
소크라테스는 거짓 믿음을 폭로하고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한 엄격한 대화법인 변증법을 만들어 냈다.
그와 동료들은 질문을 하고 답에 함축된 의미를 분석, 모든 관점에 내재한 결함이나 모순을 찾아냈다.
소크라테스의 목표는 영리하고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노력은 대개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의 발견이 깔끔한 결론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철학적 탐구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절대적 진리를 정식화하려 하지만 늘 침묵으로 끝나고 마는 시합인 인도의 브라모디아
(경쟁자들이 브라만의 신비를 정의하기 위해 벌이는 논쟁)의 합리적이고 그리스적인 변형이었다.
인도의 현자들에게 통찰의 순간은 자신의 말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직관으로
느낄 때 찾아왔다. 그 마지막 침묵의 순간에 그들은 브라만(Brahman, 산스크리트. 모든 것, 베다 종교에서 최고의
실재)을 느꼈다. 다만 그것을 일관되게 규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도 대화 상대로부터 인간의 무지에 깃든 창조적 심오함을 제대로 인정하는 진리의 순간을 끌어내려
했다. (참 좋은 건데 … 뭐라 말할 수는 없고 …)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뭔가 진정하고 진짜 인 것,
그러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 바로 너머에 신비하게 놓여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대화가 보여주듯이, 진리는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그것을 삶에서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라케스, 니키아스와 토론을 하면서 개념이 아니라 덕으로서의 용기에 관심을 가졌다. 앎은 곧 도덕이었다.
(kant의 실천이성)
선(goodness)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올바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혼란에 빠져 있거나, 선에 대한 이해가 이기적, 피상적이면 행동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우주에 관한 심오하고 난해한 이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은 사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였다. 그가 정확히 어떤 말, 생각을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가 직접 쓴 글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못마땅해 생각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관념적인 진리개념을 부추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된 정보원은 그의 제자 Paton이 (스승 Socrates가 죽고 난 뒤에 적은) '대화'뿐이다. '대화'에 따르면,
Socretes의 주된 관심이 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선은 나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선 개념은 孔子의 仁과 다르지 않았다.
적절하게 개념화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덕이라는 초월적 개념을 향해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Platon은 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상의 이상으로 제시했다.
Socrates는 logos를 엄격하게 사용하여 인간 생활에 핵심적이라고 여기던 초월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추론을 해도 뭔가 늘 그들(추론)을 빠져나갔다.
소크라테스는 확고하게 유지되는 모든 의견, 교조적으로 떠받들어지는 모든 의견의 핵심에서 무지를 발견하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의 답을 결코 찾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sophist들이 이 무지로부터 실용적인
행동으로 피신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삶의 깊은 신비를 드러내는 ecstasy로 경험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의미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soul,
psyche 프시케)의 배반이었다. 프시케의 발견은 Socrates와 Platon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다.
Atman과 달리 프시케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프시케는 개인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하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다. 영혼 덕분에 인간은 추론할 수 있고 선을 찾을 수 있다. 영혼의 계발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소크라테스는 삶을 마감할 때 “우리는 복수를 헤서도 안 되고, 상대가 어떤 악을 저질렀건 누구에게도 악을 악
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똑같이 대응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복은 늘 불의다.
따라서 다른 뺨도 내미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복수를 신성한 명령으로 여기는 그리스 관습에서 극적으로 멀어지는 길이었다.
Platon은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대화’라는 문학적인 형식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Socrates에게 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내부에 있는 참된 앎, 늘 그곳에 있던 앎을 발견하게 했다. 마침내 그것이
빛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잊고 있던 통찰력을 기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깨달음을 주는,
거의 신비체험에 가까운 발견이 올바른 행동에 영감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페리클레스의 조카인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의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satyros(사티로스.
반은 인간, 반은 짐승 모습의 신화 속 창조물. 실레노스와 마르시아는 가장 유명한 두 명의 사티로스.
디오니소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실레노스는 못생겼으나 현명하고 지성과 덕 겸비. 마르시아는 음악으로 인간을
홀리는 내적 아름다움 지녔다. 소크라테스의 외면과 내면을 비유한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종교적인 열광에 빠져 있을 때보다도 심장박동이 더 빨라지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숙부 페리클레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알키비아데스 고백)
소크라테스의 logos는 청중들을 디오니소스 축제 때처럼 열광하게 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깨달음 직전에 선 사람처럼 당혹스러운(ekplexis) 느낌을 받았다.
아테네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패배에 직면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의 반종교적 태도에 신들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통적인 믿음을 유지했고 병역을 이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적 제의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희곡 ‘바코스 여신도들’에서 축의 시대 전망의 핵심에 다가간다.
그리스인들의 hybris(오만)를 지적한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위대하다. 내가 한 일, 그곳에서 내가 한 사냥은
위대하다.”(이 황량한 자기중심주의의 절정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잔혹한 폭력행위였다.)
아테네는 비극을 넘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축의 시대와 결별했다.
희곡은 polis 외부자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아테네는 polis들의 분리라는 불가침의 원칙을
존중하지 않았고 그들을 착취,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hybris(오만)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에우리피데스는 마지막 희곡에서 축의 시대의 전망의 핵심에 다가갔다. 평화, 환희, 통합이 그 핵심이었다.
소크라테스는 BC399년에 죽었다. 재판에서 그는 국가의 신들을 인정치 않고 새로운 신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부패
시킨 죄였다. 젊은 Platon도 재판을 보았다. 그러나 법적 관점에서 볼 때 스승에 대한 변호는 서툴렀다.
“내가 젊은 사람들을 부패시켰을 리 없소” “나는 누구한테 뭘 가르칠 만큼 알지 못하오.” 그는 아테네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나 polis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명을 버릴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루도 빠짐없이 선을 비롯하여 여러분이 나에게서 들을 다른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이
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관을 설득하지 못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진리의 옹호자였다. 그는 분노나 비난 없이 죽었다. “죽음에는 비극적인 것이 전혀 없네.” “아무도 죽음이 무엇
인지 몰라 어쩌면 위대한 선일 수도 있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몸을 씻고 (사후 남이 할 일 덜어주려고) 온화한 농담까지 했다.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슬픔 대신 조용하고 수용적인 평화가 있었다.
축의 시대 내내 현자들은 죽음에 몰두했다. Socrates는 고생과 고난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는 평온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묵가, 급진적인 공감의 사상
공자의 죽음 직후 중국은 혼란스럽고 무시무시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戰國時代라 불렀다.
BC453년 세 가문이 진(晋) 제후에 대항, 진 영토에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를 만들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쇠퇴일로였던 周 왕조는 완전히 끝이 났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모든 통치자들이 周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았다.
그러나 세 나라는 순수하게 군사적 힘으로 일어섰다.
周왕은 불가항력이었다. 이때부터 크고 강한 나라들이 중국의 독점적 지배를 위한 필사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주요 경쟁자들로서는 우선 남쪽의 초(楚)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반만 중국인이었다.
진(秦)은 서쪽 산서(山西)에 있는 거칠고 호전적인 나라였다.
제(齊)는 부유한 해양국. 새로 생긴 한, 위, 조는 3진(晋)이라고 불렸다. 연(燕)은 북부초원지대 근처에 있었다.
중원의 작은 제후국들은 처음엔 외교로 나라를 보전하려 했다.
그러나 300년이 흐르는 동안 이 나라들은 차례로 소멸하여 더 크고 강한 나라에 흡수되었다.
마침내 BC221년 진(秦)이 통일을 이루었을 때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지역생활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戰國초기 사람들 대부분은 중원의 삶이 갑자기 전보다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런 경험이 주는 공포 때문에 새로운 종교적 전망을 찾는 탐구도 강렬해졌다.
※ 전국시대(BC453 - BC221, 232년간)
※ Socrates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모두를 포괄하고 아무도 배제하지 말라(墨子)
세상은 전쟁 자체로 바뀌었다. 전차를 몰던 예의 바른 전사들이 관용과 예의에서 누가 더 나은지 경쟁하던 祭儀化
된 대결은 사라졌다. 빼앗고 죽이고 노예화하는 전쟁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은 군사전문가들이 했다.
옛날에는 여자, 아이, 부상자, 병자를 죽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BC6세기 말에 이미 여러 나라가 새로운 군사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초(楚)와 진(晋)은 최초로 호남(湖南)과 산동(山洞)에 방어벽을 세웠다.
진(秦)은 황하의 제방을 강화했다. 국경 따라 요새가 생기고 전문수비대가 생겼다.
더 많은 땅에 배수로가 생기고, 값비싼 원정자금을 댈 농업생산을 늘리려고 운하를 팠다.
수 십 만의 농민이 보병으로 징집되고,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최초 보병부대 사용은 진(晋).
BC4세기에는 기병대가 생겼다. 초원지대 유목민들에게서 배운 것.
기병대는 검과 쇠뇌를 이용, 효율적인 전쟁을 했다.
도전적으로 팽창해가는 대국들은 중용과 절제라는 이상을 내던졌다.
장례식은 다시 잔인하고 사치스런 과시적 행사가 되었다. 왕은 딸과 함께 많은 부장품을 안고 무덤에 묻혔다.
무희, 평민 집안 출신 소년, 소녀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제의화 된 궁정의 교섭에 관하여 제후나 봉신에게 조언을 하던 논객들은 교묘한 토론기술을 개발, 공적인 관계나
외교에 관해 충고를 했다.
궁핍한 떠돌이 사(士)들이 궁정에 몰려들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학자였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도 그랬다. 그러나 BC5세기 중엽에 협객 중 한명이 호전성에 등을 돌리고 비폭력 메시지를
설교했다.
묵자(BC480 - BC390? 90세?)였다. 묵자는 180명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규율을 갖춘 공동체를 이끌었다.
느슨하게 조직된 공자 무리와는 달리, 묵자 무리는 종파와 비슷했다.
규칙이 엄하고 매우 평등주의적 윤리를 추구했다. 농민이나 장인처럼 검은 옷을 입었다.
묵가 협객들은 용병으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막으려고 개입했으며, 작고 약한 나라의 도시들을 방어했다.
그러나 묵자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책을 근거로 본다면, 묵자는 원래 숙련공 또는 장인이었던 것 같다.
하늘의 세상 조직 방식을 목수가 쓰는 그림쇠나 곱자를 이용,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논어』의 우아한 문체와 달리, 『묵자』의 산문은 재미가 없고 답답하여 그가 독학을 한 사람으로서 어렵게
붓을 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묵자는 귀족의 위엄과 지위를 못마땅해 했다.
묵자는 주 왕조에 매우 비판적이고 공자의 영웅인 주공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에게 큰 영감을 준 周의 祭儀, 음악, 문학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묵자는 매우 종교적이었으며 하늘과 자연의 靈들에게 희생제를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조상의 사당에서 드리는 정교한 격식과 사치는 싫어했다. 묵자는 제의를 실용적인 눈으로 보았다.
묵자는 전쟁에 끌려 나가 싸우고, 重稅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했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가치에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보통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생활하지는 않았던 堯舜과 禹의 理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사람은 禹였다.(실용적인 사람. 공자는 주를 좋아했다.)
묵자의 메시지는 公利와 實用이었다. 공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철학의 실천적 방법은 인(仁)이었다.
묵자는 공자의 자비의 윤리인 인이 가족에 한정되는 바람에 왜곡이 생겼다고 보았다.
묵자는 친족 利己主義를 전체를 향한 利他主義로 대체하고 싶었다.
묵자의 兼愛사상은 서양의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이었다. (겸애의 실천)
“다른 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존중하라. 다른 가족을 네 가족처럼 존중하라. 나라의 주인들이 서로 관심을 가진
다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이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싸울 것이다.
통치자들이 겸애를 지니지 않으면 그들은 군대를 소집할 것이다.
세상의 재난, 강탈, 원한, 증오 원인은 모두 겸애가 없기 때문이다.”
묵자의 관점에서 보면, 공자의 가족은 단순히 특수 이익집단일 뿐이었다. 범죄자도 자기 가족을 사랑하면서, 자기
친족의 부를 늘리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도질을 한다.
사람들이 자기가족이나 나라를 넘어 관심을 펼치지 못하면 치명적인 利己主義라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이 세상의 악의 근원이라는 것.
겸애는 바로 비폭력으로 이어진다. 묵자는 비공(非功)이라는 제목의 章에서 전쟁의 혜택과 비용의 차이를 세심
하게 따졌다. 결국 몇 사람의 이익일 뿐 전체적으로 손해라는 것.
그는 모든 폭력에 반대했으며 전쟁의 폭력성을 깨우치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가족의 가치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많은 중국인들은 묵자의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묵자는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논증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묵자』에는 중국서는
처음으로 논거와 변증에 관한 글들이 포함되어있다.
BC3세기 전에 기록된 뒤쪽의 몇 장은 체계적인 변론, 定義, 정확한 문법의 원리들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묵가는 스스로 선하기보다는 선한 행동을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공자에게 인은 1차적으로 내적인 덕이었다. 묵가는 자기계발이라는 느린 과정에는 관심이 없고 실용적인 기술,
논리, 의지력으로 사회에 봉사하고자 했다. 묵자는 자신의 전망을 10개의 테제로 요약했다.
각각은 문제로서 제시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나? 공격성을 거부해야 하나?
호화로운 장례, 전례음악, 하늘의 뜻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사람들의 행동은 운명에 의해 결정될까?
묵가는 윗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각각의 문제를 3가지 기준으로 가늠해보았다.
선군들의 관행과 일치하는가? 상식으로 뒷받침 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중 어느 하나에라도 상충되면 거부해야 했다.
묵자의 윤리적 전망은 엄격하게 공리적이었다.
1. 사람들과 논쟁,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2. 통치자들에게 공격이 그들에게 최선의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님을 설득해야 한다.(백성만 고생케 한다.)
3. 승리와 증오는 질시를 수반한다.
4. 모든 사람이 공정하고 자기 이해를 초월해야만 바라던 부, 행복, 성공을 얻을 수 있다.
5. 통치자들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통치자들이 이기적, 폭력적이면 하늘의 진노를 누를 수 없다.
하늘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한 공자와는 달리, 묵자는 최고신인 하늘을 끌어 들여 자신의 거의 모든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늘은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 사랑하므로 겸애의 본보기가 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끌어안으며 이기적이지 않다.”(묵자)
귀족들은 오래 전부터 신적인 것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을 향하여 움직여왔으나, 묵자는 여전히 하늘을 인격화된 신
으로 보는 보통 사람들의 믿음을 표현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감정은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공자와는 달리, 하늘 앞에서 경외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묵자의 utopia.
"귀 밝은 장님과 눈 밝은 귀머거리가 협동하면 장님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으며, 팔 없는 사람과 다리
없는 사람이 서로 협동하면 모든 동작을 온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진 도를 널리 펴서 서로 가르쳐주면 모두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시대에 묵자는 전반적으로 공자보다 더 숭배를 받았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포와 폭력에 관해 직접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중국 전체가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이 곧 지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기심, 탐욕이 서로를 파괴할 것 같았다.
그들이 살아남은 유일한 길은 감정적인 동일시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이해에 기초한 가없는 공감을 계발
하는 것이었다.
고타마 싯달타- 無我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BC5세기 말엽, 히말라야 산맥 산기슭의 샤카 공화국에 살았던 한 크샤트리아가 출가.
29살. 이름은 싯달타, 성은 코타마. 사소한 의무들의 miasma(독기)가 그를 짓눌러서 출가 결심.
인생은 生, 老, 病, 死의 순환이라 보고 이 같은 고통 상태에는 긍정적인 對應物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
그 대응물이 니르바나(불어서 끄다. 소멸, 꺼짐. 팔리어로는 닙바나. 한자로는 열반涅槃).
그를 묶고 있는 열정, 욕망이 불처럼 꺼질 것이라 생각.
그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손상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출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그 길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른 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들은 스승을 buddha, 즉 깨달음을 얻은, 또는 깨달은 자라고 불렀다.
이 불교의 경전들은 인도 동북부의 Sanskrit 방언 가운데 하나인 팔리어(paali)로 기록되었으며 붓다의 삶에 관한
주요한 정보원 역할을 한다.
간디스 평원 동부에서 생겨난 대부분의 새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다르마(dharma. 원래는 사물의 타고난
조건,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적인 법칙을 의미. 그러다가 veda 사회 각 계급의 법과 의무를 뜻함.
마지막으로는 종교적 진리, 특정 종교의 교리나 실천을 지칭. 팔리어로는 담마. 한자로는 法)와 실천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 기초를 둔 것. 따라서 그의 가르침에 따르려면 붓다처럼 모든 선입견과 더불어 가정과 가족을 떠나야 했다.
..................................................................................................................................
※ dukkha(산스크리트. 뒤틀리고 결함이 있고 불만족스러움. 보통 고통으로 번역)
※ prusha(산스크리트. 인간 – 훗날 푸루샤는 창조신 프라자파티라는 존재와 합쳐져 인도의 축의 시대를 여는 제의
개혁에서 핵심이 됨. 상키아철학에서 푸루샤는 본성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모든 개인의 영원하고 신성한 자아를
가리킴)
※ moksha(산스크리트. 재생과 끊임없는 samsara – 죽음과 재생의 순환 – 의 순환으로부터의 해방)
쿠살라(유익한), 아쿠살라(해로운), 사티(깨어 있음), appamana(가없는 마음. 無量心)
......................................................................................................................................
고타마의 고행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고행의 방법은 요가였다.
그는 못 위에 눕고, 자신의 대소변을 먹고, 단식을 해서 죽은 줄 알고 길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통찰에만 의존하려 했다. 이것이 그의 영적 방법론의 중심교리 중 하나가 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 존엄한 사람의 가르침이라도 거부하라고 말했다.
고타마 자신의 말도 깨달음을 주지 못하면 버리라고 했다.
결국 고타마는 다른 많은 출가자들과 같이 삶은 고통(dukkha)이며 우리의 고난은 욕망 탓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세상의 본질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뭔가 다른 것이 되려고 한다. 세상은 변화에 의해
좌우된다. 세상은 변화의 과정에 사로잡혔을 때만 행복하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이런 사랑에는 두려움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두려움 자체가 두카이다.
고타마는 정신적 훈련인 요가의 방법으로 충분한 깊이까지 밀고 나아가면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의 불안하고
파괴적인 경향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두카의 극복)
그는 매일 요가를 연습하여 의식의 다른 상태로 들어갔으며, 각각의 연속적인 황홀경을 세계 전체를 향한 적극
적인 자비의 감정과 융합했다. 그는 이런 명상을 가없는 마음(appamana), 즉 무량심(無量心)이라 불렀다.
무량심의 경지로 가는 단계는 4개가 있었다.
① 만인과 만물에 대한 우애의 기질 양성
② 다른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고통 공감
③ 질투나 손해 감정 없이 타인의 행복에 공감하는 공감의 기쁨
④ 명상 대상에 몰입하여 고통이나 쾌락을 초월, 만물을 향한 완전한 평정상태에 도달, 매력도 반감도 느끼지
않는 무아지경.(자기중심주의초월.kenosis)
無量心(가 없는 마음)은 우리가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과 남들 사이에 세우는 벽을 허물기 위해 고안
되었다.
전통적인 요가는 요가 수행자에게 무감각한 자율의 상태를 구축했던 반면, 고타마는 자신의 전 존재를 타인들에
게 개방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그 결과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공감과 자비 속에서 자아를 넘어섰다.
강도 높은 요가로 이런 적극적이고 능숙한 상태를 계발하면, 이런 상태는 우리 마음의 무의식적 충동 속에 좀 더
쉽게 뿌리를 내려 습관이 될 수 있었다.
넓어지고, 무제한적이고, 높아지고, 증오, 편협한 악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해방 또는 열반(nirvana)를 얻을 수 있
었다.
고타마는 존재는 두카(고통)라는 것, 욕망이 이 괴로움(고통)의 원인이라는 것, 이런 곤경(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길이 8정도(正道)다.
그리스인의 kenosis, 붓다의 nirvna는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통찰의 핵심
은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이었다.
니르바냐를 얻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 중 하나는 아나타(anatta. 無我)라는 독특한 불교 교리에 관한 명상이었다.
붓다는 영원한 자아(atman, prusha)가 최고의 실재라고 믿지 않았다.
붓다는 깨어있음을 훈련함으로써 인간이 늘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몸과 느낌은 순간마다 변했다.
자기나 나 자신 같은 말은 단순한 관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그저 존재의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상태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post modernism 철학자와 문학평론가들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anatta(무아)는 불교도에게 매일, 매시간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자아라는 개념은 나, 나의 것에 관한 해로운 생각들을 낳는다.
뿐만 아니라 자아를 앞세우면 질투, 경쟁자에 대한 증오, 자만, 오만, 잔인함이 생기며, 자아가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면 폭력도 생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옹호하고 부풀리고 구슬리고 드높여야 하는 자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탐욕이 희미해지고 갈망이 사라지면 마음의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붓다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길(방법)은 없다.
그 방법을 평가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실행해보는 것이었다.
붓다는 설명을 최소로 줄이고 싶어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제자가 자기 내부에서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
랐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과
같은 황금률이었다.
붓다는 폭력적이고 슬픈 세상에 살던 자기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안식처 역할을 했다. 축의시대 많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놀랍게도 세상 안에 있는 장소, 불편부당하고, 철저
하게 공정하고, 차분한 장소, 어떤 역경에도 우리 삶에는 가치가 있다며 자신감을 채워주는 장소를 찾는 마음으로
하느님, 브라만, 니르바냐를 찾았다. 붓다는 그런 장소를 인격화하고 있었다.
붓다는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마찬가지로, Karl Jaspers가 말한 인격의 모범(paradigmatic personality)이 되었다.
이들 축의 시대 선각자들은 이후 인간 삶의 eidos(원형)가 되었다. 그 eidos는 자비, 공감, 공생이었다.